“정말.. 정말로 이 예상 경로가 맞는 건가?”
“탄지아 최고의 석학들이 몇 번이고 계산한 결과입니다. 97%의 확률입니다.”
“맙소사...”
탄지아 시청.
비행선을 추락시킨 원흉이 확인된 이후, 서사대와 학술원에서 최고의 학자들과 해군 장교들이 동원되어 그 거대한 용으로 추정되는 무언가의 경로를 알아내기 위해 자료들을 모으고, 계산하고, 예측했다. 반나절이 지난 지금, 그 쥐어짜내다시피 나온 결과를 본 시장의 얼굴은 흙빛이 되었다.
“군항에 있는 원양 함대에 대 고룡 무장을 시켜 보내서 어떻게든 요격을 시도하게 할 순 없겠나?”
“가능은 합니다만, 쓰나미가 한 차례 지나간 후에야 가능합니다. 지금하면 개죽음일 뿐이에요!”
드물게나마 부악룡 야마츠카미가 탄지아 가까이에 나타나서 대양을 건너기도 하는 일이 있기에, 주민들의 안전을 위하여 개발되어 늘 상비되고 있는 대 고룡 무장들. 인구수의 문제로 삐끗해서 고룡이 직접 쳐들어오기라도 하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을 것임이 명확했기에, 탄지아 시는 해군과 협조하여 옥랑룡과 공폭룡의 용 속성 에너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그 결과 고밀도 용 에너지 응축 포탄 등 각종 대 고룡용 무기들을 단시간 안에 함선에 무장시켜 출격시킬 수 있을 정도로 고룡을 요격할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다.
하지만 그런 철저한 대비책도 이 정체불명의 대지의 거인이 몰고 온 것으로 추측되는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는 지금 시점에서는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했다.
“지금 당장 해안 지역 외에 내륙 전역에도 대피령을 내려야합니다, 안 그러면 돌이킬 수 없어요!”
“겨우 닷새 밖에 시간이 없다니, 이대로는 대비는커녕 항구의 반을 포기해야...”
‘댕, 댕, 댕, 댕, 댕, 댕!’
“대장님! 시장님! 당장 대피하셔야 합니다! 긴급 특보입니다!”
당장 내릴 수 없는 엄청난 인명이 걸린 문제에 고민하려는 찰나, 탄지아 항구 전역을 울리기 시작하는 급박한 6번의 종소리와 함께 뛰어 들어온 서사대원의 외침에 의해 시장과 비보를 전하려 왔던 탄지아 서사대의 서사대장은 정신이 퍼뜩 들었다.
“무슨 일인가?”
“쓰나미입니다! 제1 탐색선에서 제1파를 확인했습니다!”
“파고는? 파고는 어떤가!”
급박한 상황 속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정보. 서사대장과 시장은 간절히 파고가 평균선인 5m 내외이길 바랬지만, 서사대원의 입에서 나온 단위는 그 상상을 훨씬 뛰어넘다 못해 엄청난 공포와 절망을 안겨주는 숫자였다.
“확인된 최소 높이 약 30m입니다! 방파제가 못 버팁니다! 어서 고지대로 대피하십시오!”
“하얀 용이시여, 맙소사...”
30m.
그 엄청난 상상을 뛰어넘는 숫자는 귀로 들어온 말을 절로 거짓이었으면 좋겠다고 바랄 정도로 어마어마했다. 반 년 전 대해룡 나발데우스가 모가 마을의 지반을 들이박아 지진을 일으킨 게 확인 된 이후, 모가 마을처럼 간척지 끄트머리인 인공지반에 세워진 곳이 아니라도 그래도 만약을 대비해 고룡이라도 힘으로 뚫기 어려운 강력하고 견고한 방파제를 항구 초입에 세웠다
그리고 현재, 그 방파제의 완공이 정말 얼마 남지 않은 지금, 자연이 선사하는 재앙이 그 방파제를 종잇장처럼 찢어버릴 것이 분명해졌다.
“어서 서둘러 대피를...”
“알아서 제 몸 챙길 수 있는 노인네 둘 보다 다른 이들을 최대한 더 대피시키게, 한 명이라도 더 외곽 고지대로 대피시켜!”
“아, 예 알겠습니다!”
‘쿠르르릉...’
꾸짖는 것만 같은 말로 대피를 종용하는 서사대원을 내보낸 직후 멀리서 들려오는 짐승의 뱃속에서 나는 것만 같은 으르렁거리는 소리. 그 소리가 무엇을 의미하는 지 두 노인은 너무나 명명백백하게 알고 있었다.
“오고 있군...”
“방파제가 그래도 부분적으로나마 만들어져 있어서 충격을 약간이라도 흡수해줄지도 모르겠군.”
대지를 울리는 진동에 휘청거리는 몸을 간신히 다잡아서 창문을 열어 수평선 쪽을 바라보면서 말하는 시장이었지만, 그 말에 서사대장은 어둠이 깔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피해가 더 커질지도 모릅니다, 시장님. 아시겠지만 애당초 그 방파제는.. 이런 천문학적인 규모의 충격에는 버티지 못해요..”
“후우...”
“어서 가시죠, 이대로는 정말로 살아남지 못합니다.”
‘쿠구구궁... 쏴아아아아!’
ㅡ꺄아아아악!
ㅡ살려줘!
그 말에 어떻게든 외면하고 싶던 현실을 다시 직시하게 된 시장은 말을 잃고 표정이 어두워진 채 고개를 바닥에 떨궜다. 방파제가 못 견디고 파괴되었음을 명백히 느끼게 해주는 그 소리에 깊은 절망에 빠져있는 사이, 대지가 울리는 소리와 멀리서부터 점차 가까워져오고 있는 파도소리와 함께 비명소리들이 섞여 들려오기 시작하자 힘이 풀린 것 같은 노령의 시장을 이끌며 서사대장은 피신을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다들 죄송합니다...”
“시장님 탓이 아닙니다, 얼른 가셔서 살아남으셔야 그래도 한 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는 계획을 세울 수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파도소리와 비명소리에 어마어마한 죄책감에 짓눌린 채로 피신하고 있는 시장이 입에서는 그저 죄송하다는 말 밖에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 죄책감을 덜어주려는 듯 서사대장은 최선을 다해 지금 할 수 있는 말을 했지만, 어쩌면 모든 것이 한 순간에 사라질 수 없는 최악의 재난이 닥쳐왔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었다.
인간의 상식을 월등히 뛰어넘는, 모든 것을 뒤집어 엎어버리며 사라지게 만드는 그 공포와 절망 밖에 생기지 않게 만드는 대지의 황혼은 그렇게 끔찍한 파도와 함께 그 막의 시작을 알리기 시작했다.
-
모가 마을.
“자, 다들 차례를 지키시고 배를 타세요!”
“빨리 안 움직이시면 쓰나미에 꼼짝없이 갇힙니다! 서두르세요!”
탄지아 항구가 몰려오는 쓰나미에 꼼짝없이 당하기 직전, 고도의 유일한 마을에선 짐들을 대충 챙긴 주민들을 가득 태운 작은 배들 여러 척이 북서쪽으로 출발하고 있었다.
“정말로 아직은 안전한 건가?”
“네, 아직까지는 안전하죠. 시간을 더 지체하면 정말로 위험해지니 촌장님도 얼른 타세요.”
근심이 가득한, 한때 사냥꾼이었던 촌장에게 벨라는 그렇게 간단히 답한 후 혹시나 배에 타지 못했을 이들을 찾기 위해 다시금 마을을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쓰나미라니... 정말 예상을 할 수 없는 일이구먼...”
“대해룡의 머리 정도에 흔들리던 마을이니, 제대로 닥쳐오면 아마 마을을 다른 장소에서 재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후우...”
카를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하는 그 말에 촌장은 생각하기도 싫은 듯,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카를은 1시간 전 아이샤와 벨라가 비행선의 신호를 빠르게 분석했을 때를 다시금 떠올렸다.
-긴급 특보.
해안 지역 주민들 전원 대피.
쓰나미 특보 발령.
짧지만 핵심을 너무나 잘 요약한 비행선의 빛 신호였기에 그것을 아이샤와 벨라가 해석을 하여 촌장에게 건네준 지 몇 분 되지 않아서 순식간에 외딴 어촌에 종소리가 맹렬하게 울려퍼졌었다. 불과 몇 개월 전 대해룡이 격퇴된 이래 다시는 쓸 일이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소리에 몇 안 되는 주민들은 그 때의 긴장감을 다시금 상기해야 했지만, 그 경고를 울리게 한 비행선의 특보는 그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심각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며 대피 준비를 시작하던 주민들의 모습을 떠올리던 카를의 옆에서 그가 그 누구보다 아끼는 두 사람 중, 한 사람이 의문스럽다는 듯 입을 열었다.
“쓰나미라니,, 대체 어디서 화산이 분화한 걸까요? 고도?”
“아냐, 고도면 탄지아 비행선이 아니라 고도의 고룡 관측선이 신호를 보냈겠지.”
“그럼 어디일까요... 탄지아 항구와 인접한 곳에는 화산이 분화할 곳이 전혀 없는데...”
“으음...”
합당한 추측이었기에 더욱 미궁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아이샤의 말. 그 말에 카를은 좀처럼 답이 안 나오는 듯 깊이 신음했다.
“자자, 차차와 카얀바도 얼른 같이 대피해.”
“안 된다, 차! 몬스터라도 습격하면 어쩌려고 그러냐, 차!”
“그렇다, 얀바! 바보 남매는 우리가 없으면 정말 별 볼일 없잖나, 얀바!”
벨라가 두 사람이 말하는 것을 흘러 넘기며 꽤나 오랫동안 함께 해온 차차브 둘을 태우려하자 돌아오는 불같은 반응들. 마치 자신들이 짐이라도 되는 것 마냥 취급하는 벨라의 말에 순식간에 역정을 내는 차차와 카얀바였지만, 그 말에 그 여느 때보다 차분하게 그녀가 하는 말에 순간 두 수인은 경직될 수밖에 없었다.
“사냥꾼은 몬스터랑 치고 박을 순 있어도 자연은 못 이긴다고?”
“그.. 그래도...”
“그래도, 가 아니야. 쓰나미는 나발데우스나 지엔 모란 같은 고룡들보다 훨씬 무서운 재해라고?”
그 어느 때보다 차분하지만, 확실하게 그 뜻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말에 두 차차브는 순식간에 기세가 꺾어질 수밖에 없었다.
“아차, 이걸 이제야 떠올리다니.”
“그게 뭔가요?”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카를은 문득 뭐가 생각난 듯 허리 주머니에 넣어뒀던 작은 상자를 꺼냈다. 그 도통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의 이미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갈색 포장지에 싸인 그것에 아이샤는 의아했지만, 그것이 자신의 앞에 건네지자 더욱 아리송하여 알 수 없다는 표정을 띄웠다.
“오늘 날만 좋았으면 훨씬 시기가 좋았을 텐데, 상황이 이렇게 되어버렸네.”
“이건..?”
“열어봐, 내가 보는 눈이 없어서 나름 벨라에게 물어보고 해서 맞춘 거였는데 마음에 들지 모르겠다.”
갈색의 포장지를 벗겨내자 드러난 상자를 조심스레 열어보자 순간 아이샤의 얼굴이 순식간에 홍당무처럼 빨갛게 변했다.
“너만 좋다면, 사냥꾼 일을 좀 빨리 은퇴하고 같이 사는 것이 어떨까 싶거든.”
“하아... 정말 이건...”
작은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백금과 알 수 없는 상아와 비슷한 무언가로 조각되어 있는 그녀의 손에 딱 맞는 반지였다.
사실 탄지아에서 모가 마을로 배정된 이후, 여러 의뢰를 받고 해결해가면서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이제는 사실상 한 집에서 살다시피 하고 있고, 촌장을 포함한 마을의 모든 사람들이 카를과 아이샤의 관계를 알고 있을 정도였다.
꽤나 깊게 교제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여동생인 벨라도 아는 사실이었기에 은근슬쩍 두 사람의 마음을 떠볼 겸 약혼과 결혼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날 때마다 던져봤었다. 하지만 그 때마다 격하게 부정하던 카를이었기에 어떻게 보면 이 선물은 아이샤도 제대로 예상을 하지 못한 부류의 것이었다.
“마음에 안 들어?”
“아뇨, 으음.. 뭐라고 해야 하나..”
아이샤의 반응에 처음으로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카를의 얼굴. 그걸 보고 그녀는 풉하고 웃음을 살짝 터트리며 입을 열었다.
“참 카를 씨다운 지독하게 무드 없는 프러포즈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도 나름 머릿속으로 연습을 엄청 했는데 상황이 꼬여서 이렇게 되 버렸네.”
“연습하실 필요가 없었어요, 어떻게 하셨어도 제 대답은 항상 같으니까요.”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반지를 상자에서 꺼내어 왼손 약지에 낀 후 보였다.
“제 대답은 ‘네’에요, 사실 무드 없는 건 제가 더 심할 지도요?”
“후, 엄청 긴장했네.”
“긴장하실 필요 전혀 없잖아요? 상대가 전데 말이죠.”
“하긴 그건 그런가? 이제 준비를 빨리 해야겠네.”
그 짧은 대답에 잔뜩 긴장되어 있던 몸이 풀리는지 심호흡을 크게 내쉬는 카를. 그 모습을 보면서 다시 웃어 보이는 아이샤였지만, 그 표정에 슬쩍 입 꼬리를 올린 후 그는 빠르게 무언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어, 같이 대피 안하시는 거세요?”
“응, 아까 비행선에서 사냥꾼들 탄지아 긴급 소집도 같이 신호했었으니까.”
“그래도 지금은 너무 위험한데... 적어도 이 쓰나미라도 좀 가라앉은 다음에...”
“벨라가 고룡 관측선의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신호탄을 쏘기로 했어, 그거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해룡 라기아크루스의 소재로 만들어진 대검을 간단히 확인 후, 역시 그 소재로 만들어진 방어구를 껴입고 있는 등에 들쳐 매면서 아이샤의 걱정을 최대한 완화해주려는 것처럼 답하면서 짐 꾸러미를 챙겼다.
“전부 잘 될 거야.”
늘 무뚝뚝하지만, 그 어떤 고난이 닥쳐올 때마다 하는 그의 입버릇이라 다름없는 말. 그 모습과 말에 안타까운 듯 입술을 깨물던 아이샤는 이내 목에 걸려있던 작은 조각품으로 장식된 목걸이를 푼 후, 카를의 목에 둘러줬다.
“이건?”
“행운을 비는 부적이라고 생각해주세요, 혹시나 싶어서...”
자그마한 하얀 용이 새겨져있는 동물의 뼈로 만든 것 같은 조각. 그것을 아이샤가 꽤나 소중히 하고 있다는 것을 남매는 알고 있었기에 그것을 비록 급박한 상황이라지만, 자신에게 둘러준 것에 대해 놀라움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조심하셔야 해요, 길드가 긴급 소집을 내릴 정도면 사태가 엄청 안 좋다는 거니까요.”
“걱정 마, 꼭 돌아올 테니까.”
‘퍼엉.’
모가 마을의 위로 솟구쳐 올라가는 녹색의 신호탄. 그 빛이 비추는 어촌 마을에서 길드 아가씨와 사냥꾼은 살짝 입술을 겹쳤다.
“꼭, 반드시 돌아오셔야 해요?”
“내가 거짓말 한 적이 있어? 얼른 넌 마을 사람들하고 같이 대피해.”
“네, 기다리고 있을 게요.”
입술을 떼면서 오가는 당부와 부탁의 말.
“차차와 카얀바를 좀 부탁할게.”
“네, 돌아오실 때까지 잘 달래고 있을게요.”
“아, 맞다 그리고 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말인데...”
“네?”
동반자 아이루보다 더욱 친하게 지냈던 차차브들을 당부하자 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답하는 아이샤. 그 말들이 끝난 후에도 미련이 남는 듯, 더 지체하면 제때 대피하기 어려울 타이밍에 그는 잠깐 생각하다가 아이샤의 발걸음을 잠깐 멈추게 했다.
“그, 예전에 내가 말버릇이 영 별로였다고 한 거. 그거 다 거짓말이니까 그냥 본래대로 되돌려 봐.”
“아...”
‘촤르륵.’
어느 새 흔들리고 있는 모가 마을의 상공에까지 빠르게 당도한 고룡 관측선에서 내려오는 사다리. 이제 정말 헤어질 시간이라는 것이 피부로 느껴지는 상황에서 정말 뜻밖의 소리를 듣자 잠시 말을 잃었던 아이샤였지만, 이내 다시 상황 판단을 빠르게 하면서 어쩌면 영원한 작별인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마지막 인사를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려는 카를에게 그 두려움을 최대한 억누르면서 건넸다.
“그럼... 아디오스, 카를 씨! 꼭 사지 멀쩡히 돌아오세요!”
“응, 어서 너도 대피선으로 가. 이제 시간 없다.”
“네, 그럼 나중에 뵈요!”
‘쿠구구구...’
다시금 대지가 흔들리는 거대한 울림에 순간 그녀의 몸이 휘청거리는 것이 보이자 그는 생각 같아서는 내려가서 안전하게 배로 옮겨주고 싶었지만, 그럴 시간도, 여유도 없다는 것을 멀리서 다가오는 파도가 예리한 그의 눈을 통해 알려주었다. 카를은 투구를 꾹 눌러쓰고 사다리 위로 오르기 시작했다.
“벨라! 어서 올라와! 더 늦으면 쓰나미에 우리도 휩쓸린다!”
“알았어, 가고 있다고! 아이샤, 그럼 나중에 봐!”
“네! 벨라도 조심히 다녀오세요, 호이호이!”
대피선에 주민들을 다 태우느라 시간을 쓴 벨라는 투덜거리는 소리를 내면서 빠르게 등에 쇄룡의 소재를 덧입힌 궁을 짊어진 채로 내달려왔다. 그렇게 급한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아이샤를 대피선이 있는 방향으로 힘껏 밀어주면서 마을을 떠나려하는 관측선의 사다리에 크게 인사말을 외치며 매달렸다. 그 인사에 정말 오랜만에 특유의 유쾌한 말버릇을 덧붙이며 대피선에 오르는 아이샤를 본 후, 카를을 뒤따라 관측선으로 힘껏 팔다리에 힘을 넣어 올라갔다.
“읏차... 오빠, 결국 그거 건네주고 온 거야?”
“응? 어, 날이 좀 개판이라서 시기가 안 좋았긴 하지만.”
“그거 소설에서 딱 얼마 안가 죽을 사람들이 하는 행동인거 알지?”
다락방보다 작은, 겨우 몸을 구겨 넣어야 정확히 4명이 들어갈 그 공간에서 카를은 투구를 벗어서 옆에 놔두며 여동생의 말을 묵묵히 들었다.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응?”
뜬금없이 조용히 있던 친오빠가 하는 말에 벨라는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처음에는 이해를 하지 못 한 듯 얼빠진 소리를 내었다.
“재난이 일어나는 와중에도 길드가 헌터들을 소집한 건 역사적으로도 손에 꼽을 일이니까.”
“하긴, 돈도르마에 라오산룽이나 쉔가오렌이 나타나도 군이 먼저 격퇴를 시도하고 그 후에 정 안 되면 헌터들을 불렀... 어?”
순간 카를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아챈 벨라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 천재지변이 고룡하고 연관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이미 우리는 단순히 완력만으로도 지진을 일으키는 놈을 봤잖아.”
“뭐 그건 그렇긴 한데...”
대해룡 나발데우스가 그 비대해진 뿔로 모가 마을로 이어지는 지반을 들이받던 모습은 두 사람에게 있어서는 결코 잊을 수 없는 모습이었다. 단지 드문드문 그 뿔을 들이받을 뿐임에도 불구하고 온 마을이 진동하며 그 지진이 거리가 조금 있는 탄지아의 서사대에 까지 감지될 정도였기에 결코 가벼이 넘길만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특히나 그 고룡의 비대한 뿔을 잘라내어 격퇴시킨 카를에게 있어서는 정체불명의 자연재해는 고룡이 일으킨 것이 아닌가, 하는 넘겨짚기에 가까운 의심을 충분히 할 수 있을 상황이었다.
“으음, 뭐 그건 오빠의 넘겨짚기일 뿐이니까...”
“그런가...”
스스로가 지나치게 논리적 비약을 해버리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것을 대놓고 날카롭게 찌르는 벨라의 말. 하지만 그녀의 말에도 이 천재지변이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닌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깃들어 있음을 쉽게 눈치 챌 수 있을 정도로 동요가 느껴졌다. 그걸 대번에 눈치 챈 카를이었지만, 스스로의 불안도 지우지 못했기에 동생의 그 불안감도 어찌 할 수 없으리라 생각하여 작게 나있는 창문으로 눈길을 돌렸다.
“자세한 건 탄지아 길드에 도착하면 브리핑으로 들을 수 있겠지.”
“하긴, 그건 그러네.”
“아무리 고룡이라도 이만한 규모의 재해는 일으키는 건 불가능하니까, 음 용이 했다고 생각해보려면..”
“생각해보면?”
“으음...”
스스로가 생각해놓고도 엉뚱한지 인상을 찡그리는 벨라였지만, 그 뜬구름 잡는 것만 같은 생각을 결국 말로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전설에 나오는 그 숙명의 싸움 정도가 아니면 불가능하지 않을까.”
“이번엔 동화냐...”
“역시 너무 과했지?”
“후우...”
‘덜컹, 덜컹’
동화 속에서나 듣던 존재의 이야기가 여동생의 입에서 나오자 그는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래 흔든 후 이내 등을 덜컹거리는 벽에 기대고 눈을 붙였다. 잠깐의 잠에 빠져들기 직전, 그의 입에서 작지만 여동생이 듣기에는 충분한 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잘 될 거야.”
아이샤에게서 받은 하얀 용의 조각 목걸이를 만지면서 사냥에 나서기 직전, 습관처럼 잠깐의 잠에 빠져드는 카를과 역시 아침에 막 도착한 후 쉬지 않고 이어진 사건 때문에 피로가 쌓여서 눈이 스르르 감겨오는 벨라를 태운 고룡 관측선은 배로는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속도로 탄지아 항구에 서서히 들어서고 있었다.
-
탄지아 항구에서 약 600해리 밖 열도 수역.
‘쿠르르릉...’
대양을 가로질러 뭍으로 향하고 있는 대지의 화신이 느긋하게, 하지만 인간들이나 다른 생물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결코 느리다고 할 수 없는 속도로 몸을 수표면 아래 담그고 헤엄쳤다. 그 용암으로 덮여있는 것만 같은 꼬리를 노처럼 크게 저을 때마다 바다 위에는 화마(火魔)가 번지고 해저의 바닥은 금이 가며 낮은 소리를 내며 신음하는 것만 같은 진동을 일으켰다.
‘후두두둑...’
하지만, 지금 나고 있는 무언가 떨어지고 있는 소리는 해저에서 나는 소리가 아닌 대지의 거인이 지나치고 있는 섬에서 나고 있었다.
ㅡ쿠오오오...
‘쿠르릉, 쿠드득.’
섬이 가까이에 있는 것을 안 듯, 바닷물 속에 잠겨있던 바위의 뱀과 같은 거대한 머리를 치켜세우며 낮은 음으로 천지를 울리는 포효를 하는 대지의 용. 그 포효소리에 맞춰서 여기저기 금이 가서 언제 표류를 시작해도 이상하지 않을 해저의 바닥에서 마치 무언가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은 거대한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끼이이익...’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약 20여 가구의 인구가 살고 있던 작은 섬은 이미 본래 모습을 잃고 격렬하게 용솟음치는 용암에 뒤덮여 마구 진동하고 있었는데, 이제 남은 부분마저 삐걱이는 소리를 내며 비스듬히 기울기 시작했다.
ㅡ쿠오오오...!
‘쿠콰콰쾅...!’
황혼의 빛으로 물든 하늘에 울려 퍼지는 대지의 용의 포효는 섬이 기울어 가는 걸 재촉하는 듯 했다. 그와 함께 기울기 시작하던 작은 섬은 이내 뒤틀려버리듯 서서히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엄청난 소리를 내며 쉴 새 없이 바다 속으로 떨어지는 바위들과 함께 쏟아져 내리는 무수히 많은 양의 용암들을 확인한 후, 대지의 거인은 다시 머리를 수면 아래로 낮추며 그 거대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더욱 강렬하게 내리쬐는 오로라의 장막 아래에서, 무너져 내리기 시작한 작은 섬을 시작으로 열도들이 서서히 바다 아래로 빨려 들어가듯 크게 그 아래를 드러내며 기울어 가고 있었다.
-
-가까운 연안의 열도가 무너지기 시작
첫 번째 섬이 무너져 내려 가라앉음.
말도 안 되는 보고가 탄지아에 날아들었다. 방파제에 막혀 파고가 조금이나마 낮아졌지만, 해일이 제2항만과 4항만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도심 싶은 곳까지 밀려들어왔다. 그런 재앙의 악몽이 채 사라지기도 전인 이튿날 아침, 이 황당하리만치 무시무시한 보고가 날아든 것이다.
그나마 피해가 조금이나마 덜한 제1항만에 자리하고 있는 탄지아 사냥꾼 길드 건물과 그와 가까운 곳에 자리하고 있는 탄지아 서사대는 밀려들어온 물과 파편을 처리하는 것도 잠시, 날아든 그 말도 안 되는 소식에 순식간에 혼이 빠져버릴 수밖에 없었다.
“섬이 가라앉아 사라지다니, 세상에...”
지금까지 기록된, 고룡들이 환경을 침식하고 뒤바꾼 그 어떤 사례들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무지막지한 사태였다. 상식을 완벽하게 무시하는 그 초유의 일에 탄지아 사냥꾼 길드에 모여들어 있는 인원들의 얼굴은 순식간에 패닉에 빠진 듯 새하얗게 질려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장장이 길드를 포함한 다른 직업 길드들의 길드마스터들과 그 건물을 대피소 삼아 머물고 있는 탄지아 시 정부의 요인들은 다시금 열린 긴급 소집령이 단순한 쓰나미 2파라도 몰려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었지만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그 소식은 현실감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공허함만을 머릿속에 맴돌게 하고 있었다.
“나발데우스조차 인공 섬을 뒤흔드는 것에 그쳤는데 무너져 사라지게 하는 건... 맙소사...”
“아무래도... 저희의 상식을 완전히 무너트리는 존재가 나타난 것 같습니다.”
대규모의 쓰나미는 대해룡이 비교적 근래에 지진을 발생시킨 적이 있었기에 억지로나마 납득을 할 수 있었지만, 섬 그것도 열도들을 침몰시킨 것과 같이 지도를 바꿔버린 용은 역사를 통틀어서도 전무했다. 아니, 정확히는 단 하나의 매우 오래 전의 사례가 존재했다고 여겨졌다.
“먼 고대 사키국의 왕뱀이 지도를 바꾼 이후 일어난.. 용에 의한 첫 지형 변화군요..”
“차마 있을 수 없고, 상상하기도 두려운 일이 일어난 겁니다.”
학술원장과 대장장이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그 너무 충격적이라 공포를 넘어 공허함만을 느끼고 있는 말을 하는 것을 서사대장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입을 열었다.
“이 용, 아니 용이라 칭하기도 두려운 존재에 한해서는.. 길드마스터의 판단이 옳았던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이 존재는 전설 속의 그 용의 이름을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저 역시 동의합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단호하게 거절과 반박의 의사를 보이던 탄지아 서사대장과 학술원장은 이제 도리어 전날 자신들이 반대했던 것에 엄청난 긍정을 표 하고 있었다.
“전설 속의 용이라면... 설마 슈레이드의 그것을 말하는 겁니까?”
“예, 내려앉는 전설인 숙명의 싸움 말입니다.”
숙명의 싸움.
슈레이드 대륙과 록락 대륙 양쪽에 걸쳐 뼛속 깊이 공포를 새겨준 존재. 이제는 전설과 신화, 어린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서나 나오는 그 존재. 사냥꾼 길드는 그 허상일지도 모르는 존재를 슈레이드 대륙과 록락 대륙 양측의 깃발에 장식할 정도로 경계하며, 오래토록 서사대와 학술원과 협력하여 그 고대의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파헤쳐오고 있었다.
하지만 실존 여부는커녕 그 증거의 진위 여부조차 입증하지 못해서, 그 전설 속의 존재가 용인지, 아니면 전혀 다른 무엇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게 현실이었다. 그렇다고 온갖 괴이한 사건이 발생하는 옛 슈레이드 왕국의 터에 조사단을 계속 보내어 지속적인 자료의 수집도 할 수 없었다. 그 용의 이름을 부여한 다는 것은 고룡에 있어서는 어쩌면 최고의 경외를 표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숙명의 싸움에 대한 전설에는 이토록 두려운 대재앙이 언급되지 않잖소.”
“네, 그러니 그 내려앉는 전설에 준하는 다른... ‘대지의 숙명’이라는 이름을 붙여야겠죠.”
“대지의 숙명...”
상업길드의 길드마스터가 한 말에 미리 예측이라도 한 마냥 덤덤히 답하는 학술원장. 그 답으로 한 말에 순간 모두가 숨을 삼켰다.
“제사장, 혹시 부여할만한 좋을 명칭이 있으십니까?”
“대지의 숙명... 그걸 그대로 옛 미나가르데 어로 푸는 것이 어떨까, 싶군요.”
“옛 미나가르데 어라... ‘그란 밀라오스’... 가 되겠군요.”
“예, 가장 적합한 이름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란 밀라오스.
옛 슈레이드 전설에 나오는 숙명의 싸움이라 불리는 악마를 연상케 하는 이름. 그 이름이 갓 만들어졌음에도 긴급회의를 위해 모인 이들에게 가지는 의미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 어마어마한 뜻을 지닌 이름을 듣고 곰곰이 되새기던 서사대장은 조용히, 하지만 확실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이명은 제가 제안하겠습니다, ‘연흑룡(煉黒龍)’ 어떻습니까.”
“달구어진 검은 용이라... 확실히 비행선에서 보냈던 그 그림기록을 보면 어울리는 군요.”
“사실 근래에 검은 용이란 이명이 남용되어 버린 사례가 있기에 고민을 했었습니다만...”
이명의 남용이란 말에 이들의 기억 속에 다시금 떠오른 것은 서사대장과 학술원장이 하루 전 까지만 하더라도 눈에 불을 켜고 반대했던 이유로 내세웠던 황흑룡 알바트리온이었다. 그 당시 탄지아와 록락의 사냥꾼 길드는 그것이 처음 관측되었던 서식지에 '신이 사는 영역'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붙여주고, 그것에게 전설 속의 존재에서 딴 이명을 붙여주었다. 그리고는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근거로 길드 나이트들을 동원하여 정보를 통제하고, 유능한 사냥꾼들을 소집하여 비밀리에 토벌했다.
하지만 정작 토벌을 마치고 회수한 사체를 왕립 고생물학 서사대가 부검하고, 자료를 얻어내고, 추가적인 조사를 하자, 그 '잠재되어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성은 별 것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신이 사는 영역이 단순히 한 개체만을 위한 아늑한 터전이 아닌 여러 마리의 황흑룡이 살아가는 집단서식지라는 것까지 밝혀지며 사태는 더욱 사냥꾼 길드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짧지만 확실한 조사 끝에 황'흑룡' 사태는 록락 대륙 사냥꾼 길드의 호들갑에 지나지 않았다는 게 적나라하게 증명되었다. 그날 이후 록락 대륙 사냥꾼 길드의 체면이 휴지 조각처럼 구겨진 건 당연했고, 함부로 숙명의 싸움을 부르는 그 이명을 붙여선 안 된다는 불문율이 슈레이드 대륙의 길드, 서사대, 왕립 학술원에 퍼져 나갔다.
그것을 잘 알고 있는 입장이었기에, 스스로 말하고도 치졸하기 짝이 없는 핑계 같음을 느끼는지 잠시 고민이 담긴 뜸을 들이던 서사대장은 이내 한숨과 함께 말을 이었다.
“저 상식을 벗어난 존재에는 저거 외에는 다른 이명이 안 떠오르더군요, 죄송합니다.”
“아니오, 서사대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번의 저희 헌터 길드의 오판으로 인해 꽤나 고생하신 것을 아니까요. 뭐라 덧붙일 거 없이 완벽한 이명인 것 같습니다.”
“동의합니다, 불타는 검은 용이라는 그 별명은 대지의 숙명에 걸맞은 명칭인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급한 불을 눈앞에 두고도 근래에 일어났던 남용에 가깝게 사용되지 않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음을 시인하는 기색이 역력한 말이었다. 하지만 그 이명이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하다고 여겨졌는지 사과를 담은 말을 하는 서사대장에게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도리어 부끄러운 과거의 일을 사과하는 듯한 말을 하며 그 이명에 찬성의 표를 던졌다. 그리고 그 말에 역시 찬성하는지 대제사장이 풀어 말한 말에, 다른 이들은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연흑룡 그란 밀라오스... 검은 용이라는 이명이 들어가는 이상, 돈도르마에서는 분명 정보 통제를 요구하게 되겠군요.”
“그런 일은 있어서는 결코 안 되지만... 불을 보듯 뻔하군요..”
황흑룡 때문에 만들어진 불문율이 1년도 지나지 않아 와르르 무너졌다. 숙명의 싸움에서 등장한 악마, 검은 용의 이름이 붙었다는 건, 황흑룡 사태에서 충분히 알 수 있듯이, 슈레이드 사냥꾼 길드에서 정보 통제를 할 거라는 걸 뜻했다. 그렇기에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바로 못을 박았지만 상황이 어찌 돌아갈 지는 정말로 그 누구도 예측을 할 수 없기에 더욱 시름이 깊어져갔다.
“일단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닙니다, 함대는 출정했습니까?”
“예, 동원 가능한 대 고룡 무장을 장비할 수 있는 모든 배는 다 출발했습니다.”
피로와 시름이 깊어서 불과 이틀 사이에 핼쑥해진 표정의 탄지아 시장 옆에서 보좌하듯 있던 탄지아 해군의 제독은 학술원장의 말에 깎듯이 답했다.
“고룡을 요격하기 위해 출정하는 것은 몇 년 만이지만, 그래도 매년 훈련은 끊이지 않았으니 잘 해낼 겁니다.”
“이 ‘연흑룡’이 일반적인 고룡이라면 아마 금세 물러나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하하하, 농담도 과하십니다! 몇 년 전에 선보인 적이 있잖습니까. 멸룡재를 잔뜩 장전한 대포에는 그 어떤 고룡도 3방을 못 버티고 꼬리를 말고 도망칠 겁니다.”
상인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걱정스레 한 말에 호탕하게 웃으며 말하는 제독이었지만, 그 역시 스스로의 말이 들어맞기를 바라는지 극심한 동요가 눈에 비치고 있었다.
‘쿠구구궁....’
-똑, 똑.
“들어오게.”
대지의 울림과 함께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근 며칠간 회의 도중 노크를 하고 들어온 이들에게서 단 한 번도 좋은 소식을 들은 적이 없었기에, 노크 소리가 들리자마자 머리를 맞대고 있던 이들의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모두 다 필사적으로 이번만큼은 실낱같은 희망을 전해 듣길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온통 헝클어진 차림으로 급히 달려들어온 서사대의 휘장을 단 청년의 입에서는 그 예상을 완전히 깔아뭉개며 모두를 패닉에 몰아넣는 충격적인 특보가 전해져왔다.
“헉, 헉... 회의 도중에 실례합니다만, 긴급 대피령입니다! 파고 60m의... 낙석 충격으로 인한 해일이 확인 되었습니다! 제 1항만에서 벗어나셔야합니다!”
“세상에, 60m라고...? 첫 파보다 2배는 더 거대하다니 맙소사...”
충격적일 정도로 더욱 거대해진 파고의 높이에 학술원장의 얼굴은 핏기가 빠지다 못해 마치 시체가 연상될 정도로 사색이 되어갔다.
“시민들도 최대한 빨리 시외로 대피시켜야합니다, 얼른 준비하십시오!”
“알겠네, 자네도 빨리 대피를 서두르게.”
“예, 알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인 후 냅다 달려 나가는 청년을 본 헌터 길드의 길드마스터는 꽤나 피로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여러분도 내륙으로 대피할 준비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더 지체하면...”
“...여러분들은 먼저 록락으로 가십시오.”
“예..?”
길드마스터의 말을 중간에 끊으며 입을 연 시장의 말에 순간 몇 초간 그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며 멍청한 소리가 사람들의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있는 노령의 시장이 말을 이어나갔다.
“도저히 저는 혼자서 저 살자고 피난길에 오르지 못하겠습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항구에서 떠나보낸 후에 출발하도록 하겠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탄지아 방위군을 지도하면서 최대한 많은 인원을 대피시키겠습니다.”
“끄응...”
하루 전, 탄지아의 반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다시 순식간에 바다로 빠져나간 쓰나미 때 아무런 손을 쓸 수 없었던 것 때문일까 탄지아 제독 역시 함대에 대한 호언장담을 할 때의 호쾌한 모습은 어디가고 심각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고령의 시장 옆에서 딱딱한 표정으로 서있었다. 그 모습에 서사대장과 학술원장 역시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저희는 솔직히 말해, 늙었습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노인네들이지요.”
“하지만 저기 무고한 시민들은 아닙니다, 그들에게는 미래를 줘야지 죽음을 줘서는 안 돼요.”
“맞습니다, 해일에 떠밀려서 죽는다 해도 한 사람이라도 무고한 이들을 구해내야 합니다.”
“동의합니다.”
“으음...”
풍채 좋은 대장장이 길드의 길드마스터마저 동의하고 나서자 잠시 신음하던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는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러면 대피하실 분은 먼저 록락으로 대피하십시오, 저도 남을 테니 이후 록락에서 뵙는 걸로 하겠습니다.”
“예? 하지만...”
“어제 오전, 근방의 모든 사냥꾼들에 대한 소집령을 내렸습니다. 그들이 와서 대피작업과 구조작업을 하게끔 하고 마지막까지 남아서... 최악의 상황을 대비케 해야 합니다.”
“예, 알겠습니다.”
사냥꾼 길드의 길드마스터 스스로가 남겠다는 말에 젊은 용인족 대제사장과 해민족인 상인 길드의 길드마스터가 흠칫 놀랐지만 이어 한 말에 이내 고개를 숙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쿠구구구...’
“모두에게 하얀 용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제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한 말. 재난 앞에서 무기력한 이들에게 간절히 필요한 말이 제사장의 입에서 나옴과 동시에 다시금 대지는 격렬하게 요동쳤다. 대피에 필요한 시간은 매우 빠르게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
“세상에, 대체 얼마나 큰 해일이었기에 탄지아가 이 꼴로...”
“어지간한 파고로는 이만큼 밀려들어오기 힘들 텐데...”
그것이 탄지아 항구에 하루 만에, 아니 정확히는 반나절도 안 되어 탄지아 상공에 도착했지만 착륙지점을 찾지 못하여 원치 않았지만 온통 정신없이 하늘을 밝히고 있는 오로라에 둘러싸인 관측선 안에 반나절 간 더 갇혀 있다가 겨우 내려온 벨라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였다.
길드가 있는 제1항만에서 조금 떨어진 제3항만에 내리자, 무시무시한 파괴의 흔적이 보였다. 제대로 서있는 건물이 절반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말이 제대로 입에서 나오지 않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댕, 댕, 댕, 댕, 댕, 댕...’
“후, 제 1항만은 그나마 멀쩡하다는 거 같네.”
“제 1항만 앞에 방파제가 4개나 겹겹이 있으니 피해가 아직은 적을 만하긴 하지...”
회색의 재가 눈처럼 흩날리는 탄지아에 선명히 울리는 재난 특보를 알리는 6회의 종소리를 듣는 둥 마는 둥하면서 다시 생지옥이나 다름없어진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애써 무시하려는 듯 고개를 절래 흔든 벨라는 입을 열었다.
“얼른 안 가면 해일이 다시 밀려오는 순간 우린 꼼짝없이 고기밥이 되는 거라고?”
“하긴 그건 그러네, 발이 진흙탕하고 파편 사이에 안 빠지게 조심해.”
“알고 있어, 내가 무슨 만년 어린 애도 아니고...”
카를이 무뚝뚝하게 나무라듯 말을 하자, 벨라는 익숙한 듯이 툴툴거리며 짐 꾸러미를 어깨에 단단히 둘러매고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후두둑...’
-응?
그 모습을 보며 한숨을 들리지 않게 내쉰 후 뒤따라 발을 옮기려던 그의 눈에 순간 무너져내려가고 있는 건물들 사이로 무언가 기묘한 것이 들어왔다.
“오빠, 뭐하고 있어 안 오고?”
“어, 잠시만. 먼저 가고 있어 봐.”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있는 카를을 어느새 돌아봐서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하는 벨라는, 평소와 달리 먼저 앞서가고 있으라고 하는 그 모습에 기이한 이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카를은 라기아크루스의 소재를 두르고 있는 대검을 등에 더욱 단단히 고정한 채로 조심스레 폐허들 사이로 발을 디뎠다.
“거기, 누구 있습니까?”
인기척에 가까운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일까, 너부러진 폐허 사이를 조심스럽게 건너며 허공에 묻는 카를. 혹시나 싶어서 던진 그 질문에 대해 답이 들어오지 않았지만, 무엇이 그 이질감을 느끼게 했는지 알게 하는 데에는 채 오래 걸리지 않았다.
‘쿠르르릉....’
“어라.. 아직 대피 안 한 꼬마인가. 거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데 얼른 내려오는 게 좋을 거다.”
푸른빛의 장막이 내리쬐고 있는 폐허 위에는 멍하니 먼 산을 붉디붉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새하얀 머리칼에 새하얀 옷을 입은 15살 내외 해민족 소년이 앉아있었다. 대지를 다지는 듯한 진동으로 카를의 몸은 흔들렸지만, 그 모습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그 소년에게 평상시에 다른 이에게 그러듯 무뚝뚝한 투로 말을 던졌지만 보인 것은 예상외의 반응이었다.
“거기, 사냥꾼 형 나한테 말한 거야?”
“그럼 이 폐허 더미에 너 말고 누가 있냐, 꼬마야.”
“헤, 내가 보이는 구나.”
신기한 듯이 말하는 붉은 눈의 해민족 소년의 말에 순간 카를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마치 스스로가 존재하지 않는 것 마냥 하는 그 말에서 묘한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잠시 소년은 다시 그 눈을 먼 바다로 돌렸다.
“계속 그렇게 시간 끌면 진짜로 밀려오는 두 번째 해일에 휩쓸린다?”
“어차피 가든 안 가든, 대지에는 결국 황혼이 드리울 거야. 시간의 문제지.”
마치 모든 걸 내려놓은 것처럼 공허함이 느껴지는 말. 그 말에 카를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걸 아는지 모르는 지 흰 머리의 소년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개간을 위해 작은 세계를 보지 않고 전진한다는 점에서는 인간이나 그 애나 다를 게 없네.”
“도통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만, 인간은 무턱대고 개간하진 않는다고?”
여전히 아슬아슬하게 폐허 위에 걸터앉은 채로 말하는 소년에게 싫증을 느끼는 걸까, 아니면 소년이 했던 말에 무언가 기분 나쁨을 느끼는 걸까 도통 알 수 없는 찡그린 표정으로 카를은 딱딱하게 답했다.
“인간은 적어도 뭐가 살고 있으면 여러 번 확인을 하고 뒤엎지 저 재난하곤 다르다고.”
“형은 만에 하나 재난에 인간처럼 의지가 있다면 어떻게 할 거야? 아래에 살고 있는 것들을 모르고 계속 전진하고 있는 거라면?”
그 말에 기운을 차린 것인지 눈에 띠게 밝아진 소년의 맑은 종소리와도 같은 목소리. 하지만 뒤이어 그가 던진 말에는 다시금 공허함이 느껴졌다.
“그러면 살아있는, 생명이 있는 자들이 두들겨서라도 신경을 쓰게 만들어야겠지. 우리가 살고 있다, 라고.”
“그렇구나...”
어이가 없는 듯 답한 말이지만, 그 말에는 카를의 신념이 굳게 베여있었다. 생명이 있는 것들이 아래에, 아니면 위에 있는 것을 모르면 두들겨서라도 그 존재를 알린다. 대해룡이 모가를 가라앉힐 기세로 고통스레 뿔을 비비고 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잠수를 했을 때에도 했던 그 신념. 그 신념어린 말을 듣자 소년의 표정에서 어둠이 점차 걷혀져 나갔다.
“그래도 항구는 이만큼이나 파괴되었는데 신경을 쓰게 만든다 해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글쎄, 높으신 분들은 어찌 생각할지 모르지만, 내 생각에는 말이지.”
잠시 느껴지던 이질감조차 안 느껴질 정도의 부드럽게 흘러가는 대화에서 처음으로 소년의 얼굴에 무미건조함 대신 옅은 웃음이 피어오르게 하는, 무뚝뚝한 투의 말이 카를의 입에서 나왔다.
“고난은 결국 지나 갈 거고, 남은 이들은 또 그 남은 것들을 일으키겠지.”
“어떻게?”
언 듯 보면 꼬투리를 잡는 것만 같은 소년의 말. 만약 평상 시였다면 카를은 한참 전에 짜증을 내고도 남았을 상황이었지만 어째서인지 그런 감정도 좀처럼 느껴지지 않게 하는 청량한 소년의 말에 그는 그저 무뚝뚝하지만 덤덤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뭐, 어떻게든 다 잘 되지 않을까. 난 그런 복잡한 생각은 잘 못해서 말이다.”
“다 잘 될 것이다, 라... 그럼 나도 다 잘 되도록 노력을 좀 해야겠구나.”
“그래, 그래. 그러니 얼른 그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곳에서 내려와라 꼬마야, 엇..?”
‘쿠구구구구...’
다시금 바닥을 울리는 진동과 함께 잠시 휘청거리는 사이, 기척이 갑자기 느껴져서 고개를 들자 순간 불과 몇 초전까지만 해도 거리가 약간 있던 폐허의 위에 걸터앉아 있던 하얀 소년이 바로 코앞에서 그의 목에 걸려있는 조각을 잠시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평상시였다면 바로 의문을 가져도 이상하지 않을 기묘한 상황이었지만, 그 조각을 눈에 익혀 기억하려는 듯 뚫어져라 쳐다보던 소년은 이내 쓴 웃음을 지은 후 살짝 그의 몸을 밀면서 입을 열었다.
“그 목걸이, 꼭 기억할 테니까 때가 된다면... 다시 보자 사냥꾼 형.”
“어어?”
‘쉬이이익... 쿠콰콰쾅...!’
몸이 밀려서 뒤로 비틀거리며 밀린 순간, 하늘에서 마치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소리를 내며 항구를 가로질러 떨어지는 거대한 불꽃의 덩어리. 그 궤적은 흰 옷의 소년의 바로 위에 정확히 낙하하여 엄청난 충격과 함께 먼지의 구름을 치솟게 했다.
“이 멍청한 오빠! 왜 이렇게 안 오나 했는데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해일 말고 운석우 경보도 떨어졌다고!”
“...어라?”
벨라가 질린 듯이 먼지구름을 헤치고 오며 외친 그 말에 순간 그는 얼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방금 내가 혼자 있었다고 했어?”
“당연하지, 저 멀리서부터 그 멍청한 목소리로 하는 혼잣말 밖에 안 들렸다고! 얼른 뛰기나 해!”
‘쿠구구구....’
-쉬이이익...!
다시 한 번 더 요동치는 대지와 함께 하늘을 찢어버리려는 듯 들려오는 휘파람 소리. 그 누구보다 청각이 예민할 지도 모르는 벨라가 한 말에 카를은 떨떠름하게 길드로 발을 급히 옮기기 시작하면서 그와 짧게나마 대화를 나눴던 소년이 있던, 이제는 완전히 산산이 조각난 반쯤 무너져있던 건물을 돌아봤다.
ㅡ내가 뭔가에 홀렸던 건가?
불이 붙어 무너지기 시작하는 폐허를 흘겨보듯 잠시 노려본 후 이내 머리를 절래 흔들며 그는 늘 하는 입버릇을 하며 발걸음을 다시 옮기기 시작했다.
“전부 잘 될 거야.”
점점 강렬한 빛의 장막과 잿빛이 서로를 집어 삼키려 드는 하늘을 가로질러 떨어지는 궤적의 수는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
“뜬금없는 운석우 주의보라... 정말 세계의 끝이 다가왔나 보군.”
“솔직히 저희가 방어선을 설치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지 의문이지 말입니다.”
“어쩔 수 없지, 우리는 최소한의 시간을 벌 뿐이니.”
불과 일주일 전보다 더욱 강렬한 오로라의 장막과 짙은 회색의 재가 흩날리고 있는, 탄지아 항구 제 1항만에서 약 350해리 밖 해상.
쓰나미에 그나마 피해를 덜 입은 함선들을 최대한 긁어보아, 어떻게든 다가오는 용의 발을 묶기 위해 보내진 탄지아 함대에는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무력감이 팽배했다. 최대 규격의 대포를 장비한 함선들 중 쓸 수 있는 것들을 모아 구성된 함대였지만, 역사상 유래가 없는 상식을 완전히 벗어난 그 재난의 연속에 좀처럼 냉정히 상황을 판단하기 어려울 정도로 우울함에 빠질 수밖에 없던 것이다.
‘쿠구구구구....’
“또 지진이로군, 선두 관측선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나?”
“아마 관측선도 바쁠 겁니다, 함장님.”
“왜? 아, 분화의 규모를 최종 계산하고 있다 했었나?”
바다에 떠다니는 배를 아래위로 흔들고, 해저를 울리는 격한 지진. 그 진동으로 인해 몸이 휘청거리는 가운데에서도 보랏빛 번개가 번쩍이는 황혼의 색으로 물든 하늘에 떠있는 고룡 관측선을 힐끗 보면서 일등 항해사와 함장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예, 최종 분화 위력을 알아내야 대피령을 어디까지 확장해야할지 판단이 가능하다고...”
“고룡 관측선 5대를 전부 띄울 정도면 보통 심각한 게 아닌 거 같은데 불안하군.”
여태껏 그 어떤 강대한 고룡이 관측되어도 기껏해야 두 대 정도만 띄우는 것에서 그쳤기에, 탄지아 왕립 고생물학 서사대가 보유 중인 5대의 모든 고룡 관측선을 띄운 것은 그야말로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사실 그거보다... 제독님이 직접 기함에 오르신 게 더 신기하지 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제독님이 먼저 내빼셨다면 자네들도 배에 안 올랐을 거 아닌가.”
“그건 그렇긴 하지만 말이죠...”
대장장이 길드와 상인 길드에서 거금을 투자하여 개발된 증기로 돌아가는 기관을 최초로 장착한, 탄지아 함대가 나름 자랑하는 신예 군함을 흘낏 바라보며 하는 그 말에는 항해사의 불안감이 느껴졌다. 그것은 함장 역시 별반 다를 바 없었기에 무어라 말할 생각조차 안 들고 있었다.
-뿌우우우우...!
“선두에서 보내는 경적이군, 종을 울리게.”
“예, 알겠습니다!”
‘댕, 댕, 댕!’
먼저 5해리 가까이 선두로 나서고 있는 탐색선에서 울리는 긴 경적을 신호로, 탄지아 함대에는 무장을 준비하라는 뜻의 3번의 짧은 종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분주하게 갑판 위에서 준비하기 시작하는 이들에는 짙은 암울함만이 내리깔려 있었지만,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회색의 재를 흩뿌리는 하늘의 색은 점점 황혼의 색으로 물들어 변해갔다. 그렇게 탄지아 함대의 최후의 날은 막을 오르고 있었다.
-
타오르는 망망대해.
그 시시각각 화마가 더욱 번지고 있는 수면 위로 마치 뜨겁게 달궈진 암초와도 같은 무언가가 그 거대한 덩치에 비해서는 느린 속도로 차츰차츰 뭍으로 그 몸을 향하고 있었다.
‘쿠구구구...’
그 달궈진 바위와 같은 돌기를 지닌, 대지에 황혼을 불러오는 용이 속도를 더욱 올리기 위하여 꼬리를 한번 저을 때마다 깊은 해저는 크게 진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처음 무너져 내리게 한 열도를 포함하여 그 경로에 있던 크고 작은 암초들과 무인도들은 그 대지의 화신이 지나간 것만으로도 마치 모래성처럼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며 엄청난 충격파를 사방에 흩뿌렸다.
하지만, 이제는 인간에게서 연흑룡 그란 밀라오스라 불리게 된 대지의 황혼의 불러오는 거인은 마치 그 모든 것이 예정된 일인 것 마냥 눈길조차 주지 않으며 그 두텁고 긴 달궈진 꼬리를 저어서 전진했다.
-쉬이이잇...
휘파람 소리와도 같은, 바닷물이 끓어올라 증발하는 기이한 소리가 해수 아래, 붉은 바위로 만들어진 것 같은 불타는 검은 용의 몸 주변에서 들려왔다. 계속 바닷물과 닿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마어마한 연기와 재를 하늘로 내뿜는 그 모습은 그야 말로 살아 움직이는 화산 그 자체나 다름없는 상식을 초월한 모습이었고, 더욱 이질적인 것은 그 주변에 그 어떤 물고기나 새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쾅...!’
-펑...!
해야 할 일만 하는 듯, 묵묵히 전진하고 있는 대지의 숙명 위로 폭음과 함께 검붉은 포탄이 날아들었다.
‘쾅..! 쾅..! 쾅..!’
본능과 압도적인 절망에 저항하듯이, 수많은 검붉은 빛 포탄들이 처음 착탄한 포탄을 신호로 그란 밀라오스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과거 탄지아로 향하던 부악룡 야마츠카미를 효과적으로 막아낸, 록락과 탄지아의 자랑, 대 고룡 방비용 멸룡탄들이 최후의 희망을 담고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노령의 부악룡 정도는 쇼크로 죽일 수 있을 정도의, 수없이 많은 양의 검붉은 대포알들은 쉴 새 없이 바닷물을 가르고 움직이는 거대한 달궈진 암초를 향해 쏟아졌다. 수증기와 화산재가 끊임없이 뿜어져 나와서 쏘기 전부터 좀처럼 그 아래를 보기 어렵던 해상은 검붉은 기운이 만들어낸 짙은 안개에 뒤덮여 시야에서 완전히 가려졌다.
-쉬이이이...
마치 무언가가 식으면서 나는 것만 같은 소리가 파도가 넘실거리는 바다의 위에 울리자 그것을 신호로 쉬지 않고 함대에서 발포한 탄은 순식간에 그 수가 잦아들며 발사로 인한 매캐한 화약 연기가 하늘을 뒤덮었다.
ㅡ그오오오...
‘쿠구구구....!’
그렇게 예정대로 일이 풀렸다고 생각될 정도로 고요함이 계속되던 중, 순간 바다 속에서 마치 영혼마저 절망으로 몰아넣는 것 같은 낮은 포효소리와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리가 가라앉기 시작한 순간 격렬하게 수면이 흔들릴 정도의 지진과 함께 하늘에서 거대한 붉은 궤적들이 바다 위로 차츰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쏴아아아아...!’
연기가 서서히 가라앉으며 다시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대지의 거인은 이미 함대를 지나친 것이다. 그 거인이 지나간 곳은 불의 바다가 되어 홍수 같은 화염으로 뒤덮었다.
“사.. 살려줘!”
“바다가 온통 불에...!”
“끄아아아아...!”
상식을 벗어난 불타오르는 바다에 갇혀 버린 채로 그 모든 것을 지우기 위해 번져나가는 화마에 휩싸이기 시작한 탄지아 함대는 그 록락 대륙 최대의 규모가 무색할 정도로 무력하게 점차 불타는 바다에 잡아먹혀갔다. 마치 탐욕스러운 벌레 떼처럼 함대를 파먹은 불타는 바다 위로는 구명정을 띄울 수 없었다. 결국 온 몸에 불이 붙은 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뛰어내렸다.
-부글부글부글부글....
“바, 바다가 끓고 있... 끄아아아악!”
“으아아아악!”
하지만 살 수 있을 거라는 최후의 기대도 져버리듯, 불을 걷고 물속에 뛰어들자마자 그들을 맞이한 것은 격렬하게 거품을 일으키며 끓어오르고 있는 바닷물이었다. 그 무시무시한 업화의 고통에, 불타는 대양을 가득 메울 정도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함대의 자랑인 철갑선조차 불에 휩싸인 채, 뜨겁게 달궈진 사탕처럼 녹아내리며 수면 아래로, 비명과 함께 빠져들었다.
끔찍한 고통과 화마가 함대를 집어 삼켜가며 녹아내리게 하고 있었지만, 대지의 거인은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을 지나친 것처럼 함대를 뒤로하며 점차 탄지아 항구를 향해 그 거체의 속도를 가속시켜나갔다. 대지의 숙명이 앞으로 탄지아 항구에 상륙하기 까지 나흘이 남아 있었다.
-
-탄지아 함대, 궤멸.
그 소식이 탄지아 시에서 시민들의 대피를 진행 중이던 이들의 귀에 들어오기 까지는 반나절이 걸렸다. 1분, 1초가 귀중한 그 순간에 날아든 비보는 이내 탄지아 사냥꾼 길드에서 소집령을 내려 사냥꾼들을 소집한 길드마스터의 귀에도 들어와서 그를 깊게 신음하게 만들고 있었다.
“군조차 발을 묶는 것에 실패한 것인가...”
깊이 한탄 섞인 말을 중얼거리며 노령의 길드마스터는 이마를 짚었다. 처음으로 대 고룡 방어무장이 배치되었던 때, 탄지아 항구와 가까운 거리까지 접근해왔던 부악룡을 단 3발만으로 격퇴시켰던 용 에너지를 응축한 포탄. 그 포탄들을 비처럼 연흑룡의 위로 쏟아 냈을 것이 자명했지만, 용의 격퇴는커녕 함대가 궤멸되고, 탄지아 함대의 제독 역시 그 운명을 같이했다는 소식은 단 한 가지 사실을 명백하게 말해주고 있었다. 인간이 쓸 수 있는 수단은 이제 없다고. 그렇기에 일말의 희망을 가지고 있던 길드마스터는 더욱 시름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내게 무슨 권리가 있다고 저들의 등을 떠밀어 죽음으로 내몰아야 하나...”
사냥꾼 중앙 길드에서 철칙으로 지키라고 내린 강령으로, 강력한 고룡이 모습을 드러내면 4인의 사냥꾼 구성을 무시하고 대규모로 동원 가능한 인근의 사냥꾼들을 최대한 동원하여 발을 묶는 동원령을 내릴 수 있었다. 그렇게 동원된 인원은 군대가 고룡을 패퇴시키는 것에 실패할 경우 다음 수단으로써 내보내져야 했고, 그것이 지금 길드마스터의 죄책감을 가증시키는 납덩이가 되어가고 있었다.
“앞날이 밝아야 할 이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늙은이가 돼 버리다니...”
길드 건물 안을 발 디딜 틈이 적을 정도로 모인 사냥꾼들을 보며 그는 다시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저기, 길드마스터? 소집령에 따라서 인원이 충분히 모인 거 같습니다.”
“그런가... 캐시 양, 총 몇 명이 모였나?”
“그게... 다음 번 사냥철을 기다리던 백여 명 외에, 반경 400리 내의 사냥꾼들을 최대한 소집했으니 총합 3000여 명 가까이 됩니다.”
탄지아 길드의 접수 아가씨, 캐시에게서 명단을 받다가 들은 숫자에 길드마스터는 순간 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3000명.
록락 대륙의 사냥을 업으로 살아가는 이들 중 7할 가까이 되는 엄청난 수. 비록 대부분이 시기에 따라 수렵을 했다, 안 했다 반복하는 비전속 사냥꾼들에, 몇 할은 갓 수렵 자격을 얻은 풋내기 까지 포함된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그 숫자는 실로 엄청나기 짝이 없었다.
“이들을 사선으로 몰아넣어야 한단 말인가...”
‘쿠구구구....’
그 끔찍하기 짝이 없는 현실을 외면하고 싶을 정도였지만 그것도 잠시, 탄지아 사냥꾼 길드의 건물을 뒤흔드는 지진은 결국 그것마저 막아버리고 말았다.
“후... G급 사냥꾼들을 추려내서 내 집무실로 불러주게, 아무래도 그들에게 먼저 전말을 알려야 할 것 같으니.”
“넵, 알겠습니다!”
깊은 시름에 잠긴 투로 캐시에게 말하여 내보낸 후, 길드마스터는 초췌해진 표정으로 천장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ㅡ이렇게 죄를 지으며 저항한다 한들, 과연 시민들에게 시간을 벌어줄 수 있을 것인가..?
이미 답이 나와 있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며 노령의 용인족은 자리에서 일어나 돌돌 만 채로 보관하고 있던 큰 지도를 펼쳤다. 죄책감만으로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펼친 지도에는 선명히 탄지아 시와 근해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다.
-
‘쿠르르릉....’
“대장님, 이제 한계에요! 문조는 전부 질식해 죽었어요! 더 있다간 저희도 죽습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텨라! 어떻게든 계산은 끝마쳐야 해!”
탄지아 제 1항만에서 900해리 밖.
엄청난 반경의 화산재 기둥은 며칠 전보다 더욱 격렬하게 하늘로 치솟으며 번쩍이는 보랏빛 섬광들로 빛의 장막이 너울처럼 펼쳐진 하늘을 더욱 섬뜩하게 수놓고 있었다. 사방이 차가운 회색 재와 유독가스로 가득하고, 맹렬하고 간헐적인 폭발이 가득한, 인간이 손 쓸 수 없는 그 재난의 소용돌이에서 서사대원들은 필사적으로 덜컹이는 비행선 안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몸을 지탱하며 방독면을 쓴 채로 계산을 진행하고 있었다.
“이렇게 분화의 한 가운데에서 최종 분화 위력을 계산하는 건 미친 짓이에요!”
“시간이 없어! 대충이라도 계산해야 하네! 그래야 한 사람이라도 더 살릴 수 있어!”
몇 주, 길게는 몇 년간 화산의 조사를 진행하며 분화 시 위력을 측정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지금의 상황은 그런 평화롭고 여유로운 조사와는 너무나 거리가 먼 1분 1초를 다투는 급박함만이 감돌고 있었다.
“큭, 끝났다! 얼른 이걸 전서구에게 달아주게나!”
“예, 알겠습니다!”
‘쿠르르릉...’
대장은 오차를 수정하지도 못한 채 최종적인 분화 수치를 휘갈겨 양피지 쪽지에 쓴 다음, 대원에게 건네줬다. 병소의 그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지만, 상황이 너무 다급했다. 그 것을 받아들고 급히 보관하고 있는 유독가스의 영향을 어떻게든 안 받게 하려고 설치한 장치들이 달린 전서구들의 새장으로 신입 대원이 발을 옮겼지만, 그 타이밍에 맞춰서 탄지아 서사대 제 2 고룡 관측선의 선체는 번쩍이는 보라색 번개에 맞으며 한껏 그 선체를 뒤틀었다.
-끼이이익...
“세상에, 방금 번개에 맞은 건가?”
“방금 벼락으로 선체에 가해지는 압력이 한계에 달했습니다!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합니다!”
한 벽면을 가득 메우고 있는 각종 계측기를 보면서 방독면을 쓰고 있는 대원이 비명을 지르듯 내지른 말에, 용인족 대장은 생각할 틈도 없이 그에 답했다.
“계산은 끝났으니 최대한 유독 지대에서 벗어나게!”
“넵! 신입, 방향을 틀어라!”
“알겠습니다!”
강철이 뒤틀리는 소리가 울리며 덜컹거리는 비행선 안에서 대충이나마 측정된 결과물들 토대로 주판을 빠르게 튕기며 계산을 반복하고 있던 관측선의 선장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무언가를 써내려가며 외친 말. 그 말에 대원들은 빠르게 비행선의 경로를 거꾸로 돌리기 위해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ㅡ퍼엉!
‘쿠르르릉...!’
“큭... 엔진이 나갔나?”
“예, 1번 엔진이 나갔습니다, 2번하고 예비 엔진으로 벗어나야 합니다.”
순간 큰 폭발음과 함께 기체가 격하게 뒤흔들리며 물건들이 덜컹거리며 사방팔방으로 튀자 대원들은 급히 그 폭음의 근원을 찾기 위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그걸 예상한 듯 생각보다 담담한 표정으로 탄지아 제 2관측선의 용인족 대장이 말했다.
꽤나 높은 고열과 다량의 화산재를 들이킨 것이 문제였던 것일까, 반대편 창문을 통해 눈에 들어오는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있는 비행선의 엔진을 보고 그는 입술을 곱씹다가 이내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이대로는 남은 엔진들도 작동을 정지할거다! 그 전에 얼른 유독가스가 좀 적은 지대로 이동하라!”
“예? 하지만...”
“다른 관측선들은 계산을 못 끝내고 추락했을지도 몰라! 15분 전부터 하나 둘 빛신호를 보내지 않고 있잖나!”
탄지아 함대의 궤멸을 보고한 후, 전속력으로 재를 흩뿌리는 구름을 가르고 분화 지점으로 향하여 반나절 넘게 쉬지 않고 계산을 하고 있는 관측선은 총 4척이었다. 하지만 그 4척 중 제 2 관측선에만 부하가 심하게 간 건 아닌 모양이었다. 정기적으로 주고받는 빛 신호가 끊어졌기 때문이었다.
가장 확실한 그 원인은 화산재를 견디지 못하고 불타는 바다 위로 추락해버린 것이었기에,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 탄지아에 계산 결과를 보낼 수 있는 관측선은 그들 스스로가 타고 있는 제 2관측선만이 남아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대원들에게 크나 큰 부담을 안겨주고 있었다.
“하지만 엔진이 전부 나가면 저희도...”
“비둘기를 날릴 수 있을 정도까지만 나가면 된다! 무리 하는 한이 있더라도 서두르게!”
“넵, 알겠습니다!”
결국 사실상 스스로의 목숨을 포기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명령이 떨어졌지만, 그것을 어느 정도 예상한 듯 대원들은 결국 결의를 담은 큰 목소리로 답한 후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쿠르르릉....’
“어떻게든 경계까지는 가야한다! 번개에 당하지 않도록 피뢰침은 제대로 확인하게!”
“네, 아직까진 좀 더 버틸 수 있습니다!”
“경계에 들어선 게 확인되면 바로 비둘기를 날리게!”
“알겠습니다!”
시커먼 연기를 내뿜고 있는 탄지아 고룡 관측소 제 2관측선은, 돈도르마의 요새거리가 모조리 들어가고도 남을 지름의 화산재 기둥에서 점차 거리를 벌리며 멀어져 갔다. 하지만 그 종말이 머지않은 것을 증명하듯, 선체의 고도는 점점 낮아졌고, 계속된 진동으로 뒤흔들어졌으며, 속도마저 점점 줄어들었다.
인류의, 아니 대지에 드리우는 황혼은 점차 탄지아로 가까워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