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진공 / 그림: Lazaroos
Story
따르는 궁인조차 모두 무른 채, 에르제는 홀로 걸었다.
궁은 곳곳이 상처투성이다. 곧 무너진 성벽을 재건하고 허물어진 문을 다시 세울 것이나, 에르제는 새겨야 했다. 벌어진 비극을, 맞았던 참상을, 무수한 순간을 그저 지나고 말았던 자신의 어리석음을.
발은 길을 알고 매일 같은 풍경을 향한다. 달을 보고 뻗은 소나무 아래, 아직 그 어떤 뜻도 품지 못한 비석. 그 곁에 웅숭그려 울어만 봐도 좋으련만. 에르제는 차라리 밤에 묻힌 천화전을 향해 눈을 돌린다.
'짐은 어찌해야 하는가.'
멀리서 기억의 소리가 들려온다. 망연히 궁을 바라보고 선 어린아이의 소리. 떨리는 손을 소매에 감추었던 설은 황녀의 소리. 저기, 이제 막 궁을 향해 나아가는 뒷모습이 있다. 그 작은 등을 따라 에르제는 과거로, 더 과거에로 간다.
"황녀님. 쉬셔야 합니다. 아직 몸을 다 회복하신 것이 아닙니다."
"전쟁 중 집을 잃은 겐트의 백성들은 낡은 천막 아래서 밤잠을 설치고 있었네. 오랜 시간을 카르텔에 고통받았던 웨스피스의 백성들은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하여 제 몸 아픈 줄도 모르고 지내더군. 그러한 참상을 보고도 짐이 어찌 가만히 앉아 쉴 수 있겠는가."
"카르텔은 완전히 패하였습니다. 이제 노블스카이에 가셨던 섭정께서도 돌아오셨으니, 감히 겐트를 넘본 카르텔에게 그들이 진짜 있어야 할 곳이 어딘지 제대로 알려주실 겁니다. 허니 걱정하실 것이 없습니다."
카르텔에 납치되었던 황녀가 멀쩡히 살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노스피스로 피신했던 귀족들은 부랴부랴 환궁하여 제 밥그릇을 찾아 헤맸다. 전쟁의 끝머리를 반기는 번지르르한 얼굴들 위로 웨스피스에서 보았던 절망이 겹쳐졌다. 굶주린, 상처 입은, 희망을 버린 얼굴들.
'걱정할 것이 없다.' 그 말을 어찌 그리 쉽게 믿어왔던 것일까.
"유르겐 공은 어찌 혼자 돌아온 것인가."
"그것은…"
"직접 이야기를 들어야겠으니, 들라 하라."
어물대는 궁인을 뒤로하고 걷는 걸음이 자꾸만 무거워진다.
미열을 앓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끔찍한 일을 겪은 황녀. 드넓은 황궁에 의지할 곳 하나 없는 가여운 황녀. 에르제를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은 명확했다. 그리고 그것이 아팠다.
비운 사이 조금 더 멀어진 듯한 황좌를 올려다보며, 에르제는 황녀
라는 이름에 담았던 뜻을 생각했다. 천계를 사랑한다. 이 땅과 백성들을 사랑한다. 하지만 쉽게 품을 수 있는 마음에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넘칠 만큼의 동정을 받는 이를 지도자라 여기며 따를 이가 없는 것처럼.
그러니 알아야 했다. 누군가의 후계여서가 아니라, 누군가의 염원이어서가 아니라 에르제 자신이 가지고 갈 이유, 그녀가 진짜 '황제'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를 에르제는 반드시 찾아야 했다.
"애써 오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네빌로였다. 황좌를 앞에 두고 그와 눈을 맞춘 에르제는 조용히 밭은 숨을 내쉬었다.
"은혜도, 염치도 모르는 자들의 손에 험한 꼴을 당하셨으니, 얼마나 충격이 크십니까? 저 역시 처음 전장에 나갔다 돌아온 날, 손발이 떨려 오래 잠을 이루지 못했지요."
"짐은 괜찮네. 어려운 상황에 그대의 힘을 보태 주어 고맙네."
섭정을 맡은 네빌로가 끝까지 궁을 지킨 덕분에, 개인 소유의 배를 안톤을 상대하기 위한 군함으로 쓰도록 내어준 덕분에 천계가 몇 번의 위기를 넘길 수 있던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에르제는 마주 선 지금에도 그가 자신과 다른 곳을 보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헌데, 다른 이들은 어찌하고 그대 혼자 돌아온 것인가?"
"궁지에 몰린 안톤이 모험가님을 뵙길 청하더군요. 바다로 도망친 놈의 진짜 목적지는 죽은 자의 성이며, 그를 통해 본디 있던 곳으로 돌아가려 한다는 뜻을 밝혔다 합니다. 전쟁이 길어지며 입은 피해를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저희로서는 희소식이지요. 헌데…"
네빌로는 뜸을 들이며 황녀의 눈치를 살폈다. 침착하게 다음 말을 기다리는 듯했으나, 약점을 숨기는 데는 여전히 서투르다.
"에를록스 님께서는 얼마 남지 않은 병력을 이끌고 무리하게 진군하셨습니다. 섭정으로서 남은 병사들의 목숨만이라도 살릴 수 있기를 청하였으나, 돌아오는 것은 '전장에 나온 장군은 왕의 명령도 거부할 수 있다'라는 말뿐이었습니다. 현재로서는 노블 스카이에 오른 병사들 중 과연 몇이나 살아돌아올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잭터가 유명한 장군의 말을 인용했을 뿐이라는 것은 에르제도, 네빌로도 짐작할 수 있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에르제의 얼굴은 굳어졌고, 네빌로는 알듯 말듯 한 미소를 지었다.
"이번 일로 그분께서 카르텔과 협력하여 천계를 위험에 빠뜨렸다는 소문에 힘이 실릴지 모릅니다."
"당치 않은 이야기일세."
파르르 떨리는 에르제의 입술 사이로 섣부른 역정이 튀어나왔다.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천계를 위해 싸워오신 분일세. 카르텔이라니. 그분이 계시지 않았다면 겐트는 카르텔보다 안톤에 먼저 짓밟혔을 것임을 그대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저 역시 그리 믿고 싶습니다. 허니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들은 반드시…"
"나라를 구한 영웅에게 죄를 묻는 군주가 어디 있단 말인가."
혼자서는 황좌에도 올라가 앉지 못하는 군주라니. 네빌로는 비져 나오는 웃음을 감추기 위해 쥘부채를 펼쳤다.
"허면, 황녀님께서 직접 나서주시겠습니까?"
'때'라는 것은 쉽게 오지 않았다. 카르텔과의 전쟁이 남긴 흔적들을 지우고 그 잔당을 소탕하는 일로 궁의 소란은 잦아들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에도 사달에 대한 책임을 피하려는 귀족들은 잭터의 출신과 신분을 물고 늘어지며 착실히 문제를 키워가고 있었다.
회의실에 둘러앉은 귀족들의 고개는 언제나 빳빳했다. 답이 정해진 논의를 반복하며 그들이 원하는 것을 취해가는 동안, 에르제는 제 한숨에 부옇게 가려 지워져 갔다.
"카르텔로부터, 안톤으로부터 목숨 바쳐 천계를 지켜 온 것은 군인들일세. 그들의 무용함을 주장하며 군의 예산과 규모를 감축하는 것은…"
"그들의 공을 깎아내려는 것은 아니라, 작금의 상황을 염려하는 것입니다. 전쟁이 앗아간 것은 군인들의 목숨만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군인 몇 명에 포상을 내릴 돈으로 제를 올린다면 더 많은 백성들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을 것입니다. 공을 세운 군인들에 대한 처우는 천계의 안정을 되찾은 후에 고려해도 늦지 않겠지요."
"안타깝지만 어쩌겠습니까? 그날 대장군께서 무리하게 안톤을 쫓지만 않았어도…"
누가 뱉었는지도 모를 소리에, 에르제는 분노보다 설움같은 것을 터뜨렸다.
"그대들이 어찌 그런 말을 입에 올릴 수 있는가. 그대들은 카르텔이 황궁 문앞에 다다랐을 때…!"
"황녀님, 흥분을 가라앉히시지요."
섭정은 적절한 때에 맥을 끊고 들었다. 귀족들의 흠을 덮어줄 수 있는 것은 같은 흠을 남기지 않은 네빌로 뿐이었다.
"이곳에 모인 관료들 중에도 제 혈육을 군에 보낸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이라고 해서 어찌 마음이 편하기만 했겠습니까? 허나, 이들마저 전장에 나가 목숨을 잃었다면 지금의 황궁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을 것입니다. 이들 또한 맞닥뜨린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해 군비를 지원하거나 사병을 보내는 등, 나름의 방식으로 싸워왔음을 살펴주십시오."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회의의 주도권은 금세 네빌로에게 넘어갔다.
"군인들이 천계를 지키는 자들이라면 여기 모인 관료들은 천계를 이끌어 가는 자들입니다. 이번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것으로 군인들은 그들의 몫을 다 하였으니, 이제 이 나라 천계의 안정을 되찾는 일은 관료들의 몫으로 남겨주시지요."
에르제는 눈앞이 컴컴해지는 것을 느꼈다. 납치되어 좁은 철창 안에 갇혔을 때에도 좌절하지 않던 마음에 그늘이 드리우는 것만 같았다.
그때였다.
"항상 찾기 힘든 곳에 모여들 계시는군요."
천계의 총사령관, 잭터 이글아이. 그의 등장만으로 회의실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 들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준비해야 할 자료가 어디 한 둘이어야 말이죠."
잭터는 군인의 팔에 어울리지 않는 서류 더미를 흔들며 너스레를 떨었다. 제 앞에 차례로 놓인 서류를 훑어보는 관료들의 표정은 영 탐탁지 않았다. 카르텔과 안톤, 죽은 자의 성에 자리하고 있다는 정체불명의 사도와 제국군까지. 그들이 가진 무기와 힘, 그로 인해 천계가 입은 피해와 예상되는 위협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는 자료는 분명 천계군의 필요성을 말하고 있었다.
그 요지를 누구보다 빠르게 파악한 네빌로가 언짢은 기분을 감추고 입을 열었다.
"제국이 천계의 동맹국이라는 것을 잊으셨나 보군요. 죽은 자의 성 역시 제국과 힘을 합쳐 조사할 예정입니다."
"그러다 그곳에 있는 사도의 심기가 뒤틀려 천계를 공격한다면, 그때가 돼서야 부랴부랴 군을 꾸리고 전투에 나서겠다는 것이오? 그런 안일한 태도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사도 안톤을 통해 충분히 겪은 것 같소만."
"무력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무법지대 카르텔의 무지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도 충분히 보았지요.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은 총과 함포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저희는 그중 가장 천계를 위하는 길을 택할 겁니다."
"글쎄. 이 중 단 한 명이라도 제 목숨만큼만 천계를 위하는 이가 있었다면 황녀님께서 카르텔에 납치되는 일은 없었을 것이오."
매의 눈은 불처럼 타올랐고, 범의 눈은 밤처럼 적막했다. 좌중을 압도하는 팽팽한 긴장 속에도 둘만은 흐트러짐 없이 웃어 보였다.
"여전히 기품있는 회화에는 익숙하지 않으신가 보군요."
"그 기품이란 것이 천계를 지키는 데엔 영 무용하더군."
마주 보고 선 잭터와 네빌로는 어느 한쪽도 물러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동량(棟梁)' 에르제는 문득 그 말을 떠올렸다. 어린 시절, 최고 사제 벨드런의 목소리로 들었던 두 사람의 이름. 나라의 기둥과 들보로 삼을만한 뛰어난 인재들. 회의실에 앉은 모두의 이목이 그들에게 집중된 이 순간, 에르제는 그제야 깨닫는 것이 있었다.
진짜 미완(未完)인 것은 천계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만."
힘없는 에르제의 목소리가 천정에서 샌 물처럼 회의실 한 가운데에 뚝 하고 떨어졌다.
"내 몸이 좋지 않군. 오늘은 이쯤 해 두세."
그날, 침전에 든 뒤로 며칠을 앓았던가. 천천히 현실을 되찾은 에르제는 발치에 놓인 비석을 다시 바라보았다.
`괜찮으니 얼른 기운을 차리셔서 은퇴나 하게 도와주십시오.`
선명히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 속, 호탕하게 웃던 소리가 귀에 맴돈다. 속절없이 눈가에 물기가 어렸다.
여전히 홀로 밤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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