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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고민도 없고 의미도 없다 : 천계전기가 보여주는 '메세지'가 도대체 뭔데?
천계 내전은 그 소재부터가 전쟁 후 어지러운 상황 속에서의 쿠데타라는, 굉장히 많은 의미를 함축할 수 있는 갈등을 소재로 삼았습니다. 각 세력이 지향하는 바는 판이하게 그리고 뚜렷하게 달랐고, 그 세력들이 대변하는 가치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가치가 충돌하는 속에서 유저들로 하여금 고민할 수 있는 소재를 던져줬습니다.
아니, 그랬어야죠.
천계 내전은 심각하게 공허합니다. 중2병 이야기가 아니라, 담은 의미가 '아이고 의미없다' 수준으로 없다는겁니다. 각 세력이 지향하는 바는 불분명한데다 때로는 휙휙 변하기도 하며, 세력들이 대변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를 플레이어들은 쉽사리 이해하기 힘듭니다. 가치가 충돌하는 과정에서 고민은 하나도 없이 순전히 주인공의 무쌍으로 모든 것이 해결되며, 갈등 해결 과정에서 그러한 가치들이 직접적으로 구호를 교환하고 충돌하는 모습도 없고, 따라서 세 세력의 내세우는 가치들이 열위가 가려지거나, 셋 다 존중받을만한 의미를 부여받거나 하는 것 역시 없습니다.
까놓고 말해 가치 싸움이 아니라 누가 권력 먹고 집권하느냐의 추한 싸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단겁니다.
물론 이렇게 말씀하실 수도 있습니다. '황녀측은 무법지대 인사를 중용하는 평등정책을 내세우지 않았느냐?' 이 평등의 가치가 과연 내적으로 적절했는지는 나중에 다룰 것이니 접어두고서라도, 그 평등과 존중과 공동번영의 가치를 발로 걷어찬 것은 '용을 타고 나타나 제정일치 절대신왕권'(오타아님)을 선언한 에르제 본인이고, 천계 내전의 결말을 짠 제작진입니다. 여기에 더불어 그 무법지대 출신이 얼마나 그 황녀의 가치에 찬동하고 지지를 표하는지도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고, 이전에도 언급한거지만 무법지대에 대한 차별을 충분히 그려내지도 않았으며, 그 차별을 지지하는 가치기반이 황녀에게 설득당하거나 감복하는 장면 역시 없습니다. 그냥 주인공이 힘으로 찍어눌렀죠.
좋습니다. 아무 의미 없이 서로 권력을 쥐기 위해 아귀다툼을 하는 상황 역시 다른 맥락으로 메시지를 제공할 수 있으니 괜찮은 선택입니다. 문제는 아귀다툼도 제대로 안한다는겁니다. 세상에, 어떤 정치극에서 '실권과 무력을 다 쥐고 있는 현지 권력자가' '명목상 우위에 있으며 실제론 아무 권한도 힘도 없는 상급자에게' '자네를 믿어서 보낸 것이니 그리 알라'라는 말 한마디에 정치적 이득을 얻어낼 기회를 포기합니까. 삼국지연의에서도 이러진 않습니다. 뭐, 에르제는 반드시 승리해야 하는 선인 '명민하고 사려깊은' 황녀니 나머지 주변 인물 지능을 낮춰서 그렇게 때웠다는건 이해가 갑니다.
문제는 이러면 아무것도 전달을 못한다는 겁니다. 서로의 가치싸움을 내건것도 아니고, 이권다툼과 아귀다툼을 정말 질리도록 해서 허무함을 나타내는 것도 아니고, 아귀다툼 끝에 승리하고 내부 결속을 이뤄낸 국가가 더 부강해졌다거나 복수를 불태운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나마 '의미있는 가치'를 내세운건 네빌로 유르겐이지만, 그 가치마저도 천계전기 결말부에서 갑자기 안제 웨인에게 실권을 양도하는 뜬금없음으로 흐려진데다가, 본인 측근세력이 전무하다는 개연성적 오류로 인해 효과적으로 전달되지 못하고 흐려진 뒤, 결말에서 깔쌈하게 쓰레기통으로 처박힙니다.
유저는 이 과정에서 아무런 고민도 하지 않습니다. 아니, 고민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황녀측을 배신할 기회나 귀족원 뉴페이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볼 기회가 주어지는것도 아니며, 번민하는 황녀 옆에서 직접 교류를 할 기회가 있는 것도 아닙니다. 심지어는 어떤 가치가 충돌하는지도 뚜렷하게 전달되지 못해 불분명한 상황에서 불만만 쌓입니다. 이 불만은 누적되고 누적되어, 결국 결말에 충분한 메시지를 전달하지 못하자, 다음과 같은 말로 폭발하게 됩니다.
'하이고 의미없다'
'아니 그래서 이게 뭔 의미가 있는데요'
이것이 천계전기의 두 번째 실수, 의미의 부재입니다.
(3) 상황을 바꿀 수 있단 기대가 안든다 : 변화의 여지가 완전히 닫혀버린 천계전기의 결말 이후 상황
여기에 결정타를 꽂는 것이 결말 이후의 상황입니다. 결말 이후의 상황을 다시 돌아보시겠습니까? 모든 황녀파 측 인사는 대동단결하여 황녀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표명했으며, 백성들은 용에 대한 증오는 모두 잊고 황녀의 힘에 위압되거나 경외되었으며, 황녀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이던 귀족들마저도 상황을 바꾸려는 모든 시도를 (용 하나에) 포기하고 노스피스 등지에서의 농성도 모두 접은 채 재판에 끌려갔으며, 황녀 에르제는 이제 절대적인 왕권과 신권을 지닌 신왕이자 황제로서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저항하고 있다던 카르텔 사칭 내지는 잔당 세력들도 곧 정리될 것이라는 분위기도 풍기죠.
한 줄로 정리하자면, 천계에서의 세력간 갈등은 이로서 정리되었다는 것이며, 어떤 변화나 위기의 조짐 역시 없다는 것입니다. 즉, 허무함과 불만족을 가져다 준 결말이 해피엔딩의 그것처럼 앞으로 게임 내에 영속적으로 자리잡게 될 것이란거죠. 앞으로 계속 에르제는 천계의 황제일것이고, 퇴역군인들과 부상자 문제도 황제님의 통큰 씀슴이로 한번에 해결되며, 무법지대의 끊임없이 일어나던 카르텔의 후예들과 같은 저항세력, 이튼의 지위를 상승시키려고 최악의 경우 반란까지 도모하던 현지 군벌, 권력과 생사를 놓고 대립각을 세우던 노스피스의 귀족들 모두가 복종할 것이며 이 상황은 장기간(혹은 게임 서비스 종료까지 반영구적으로)이어질 것이란 겁니다.
결말이 불만족스럽다 하더라도, 앞으로 스스로 변화할 여지나 외부 혹은 내부에서 불거지는 위기의 조짐을 보여준다면 플레이어들은 거기서 빚어지는 변화와 거기에 개입할 수 있다는 희망에 동기부여를 하고 목표의식을 지니며, 현재의 이야기 흐름을 하나의 이겨나가야 할 고난으로 인식하고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대체로 지속성을 지닌 매체의 이야기 전개는 아무리 행복하게 끝나도 변화의 조짐이나 불안요소, 혹은 바뀌어가는 사회나 환경상을 보여주게 되죠.
천계전기의 결말엔 그것이 없습니다.
불만세력도 없고, 앞으로 천계가 어떻게 번영해 나갈지에 대한 구체적인 미래상을 플레이어에게 보여주지도 못하며, 거기서 혜택을 받을 사람들의 기쁨 역시도 안 보여줍니다. 그냥 '황제님이 새로 오셨다 와!'가 전부죠.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에 대한 기대와 바람을 모두 뿌리 뽑아버린겁니다.
결말이 좀 잘 나왔거나, 전체적인 이야기 견고함이 튼튼했으면 이건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것도 아닙니다. 그러니 '하이고 의미도 없는데 앞으로 뭐 바뀔 것도 안보이네 이걸 왜했지?'라는 불만으로 발전하게 되고 짜증이 나는거죠. 설상가상으로 플레이어는 이제 황제가 된 에르제에게 딱히 어떤 교류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사실 천계전기 내내 특별히 교류도 못하지만), 황제가 된 에르제는 자기 비전 연설조차도 제대로 안하고 그냥 고맙다 좋다라는 말만 합니다. 천계전기에서 도대체 플레이어는 이동식 화력 플랫폼 역할 말고 한게 뭘까요? 전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동식 화력 플랫폼은 그 자체만으론 변화를 창출 할 수 없죠.
앞으로 어떤 기대도 안들게 만들고, 변화의 여지를 모두 닫아놓은 자기폐쇄형 결말, 이것이 바로 천계전기의 세 번째 실수입니다.
(4) 이야기의 확장과 정리도 엉망 : 새로운 이야기는 틀어막고, 급조한 설정들은 흩뿌리고
다 좋습니다. 게임 속 이야기가 만족을 못 줄 수도 있습니다. 의미가 없어도 좋습니다. 동기부여에 실패를 해도 좋습니다.
그렇다면 적어도 게임 속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펼쳐나갈 가능성을 열기를 하거나, 기존 이야기를 훼손할 급조 설정은 내밀지 말았어야죠.
드래곤 라이더의 전설을 천계 내전 공개 전에 보신 분이 있습니까? 제가 천계 열리기 한참 전 부터 이 게임을 하다 대전이때 접었는데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전쟁 안하고 도망간 귀족들이 어떤 행동을 취하고 있는지 자세한 언급이 나왔습니까? 그냥 도망갔다 언급만 나오고 말던걸로 기억하는데요. 웨스피스 군 사령부는 또 뭐랍니까. 안개도시 헤이즈 뚫을때만 해도 민간 저항군의 손을 빌리던 천계에 웨스피스 군 사령부도 있었군요. 이튼 공업지대가 정치적 경제적 이권 문제로 고민하고 있다는 사실 역시 천계전기에서 처음 알았죠.
이런건 지엽적이니 그렇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적어도 최고 사제와 황녀, 제례 주관과 그에 얽힌 부패 문제는 미리 풀었어야 하는게 아닌가요. 무법지대 차별 이야기는 위에서 계속 했으니까 넘어가지요.
천계 내에 아직도 상존하고 있는 정치적 갈등 요소(재밌게 다룰 수 있는 요소들)은 모두 황제 집권으로 한방에 뭉개서 틀어막아버리고, 뜬금없이 황녀 에르제의 집권 정당성을 위해 이상한 전설을 새로 만들어서 뿌렸으며, 그 외에 지엽적인 요소에서도 천계전기의 이야기 전개 하나를 위해 이전 게임 이야기의 상당부분을 훼손했습니다. 선계와의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이렇게 처리한걸 수도 있겠는데, 당장 용타고 집권한 걸 바칼 관련이나 사도 관련 다룰때 어떻게 처리할 건지도 잘 모르겠으며, 이 이야기를 완성도 있게 마무리 해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앞으로 천계에서 바칼 이야기 나올 때마다 두고두고 회자될텐데, 참 어찌될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결국 천계전기의 의미는 주인공에게 비행정 쥐어주는 용도인데, 비공정 쥐어주는 전개는 이런 이야기 안벌려도 할 수 있었지 않습니까. 비공정 쥐어주는게 새로운 스토리의 가능성을 여는 건가요? 아니겠죠. 그리고 그건 천계전기가 아무런 이야기 창출에도 기여하지 못한 주제에 무리수는 잔뜩 두었다는 소리구요.
이것이 천계전기의 네 번째 실수, 확장도 못하고 정리도 안했다는 것입니다. 아, 정리는 했을수도 있겠네요. 용 발굽으로 뭉개서 말이죠.
여기서 끊고 다음 글에서 2. 내적으로 보는 천계전기 이야기로 마무리하겠습니다.
https://bbs.ruliweb.com/game/2230/read/9947364 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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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게임에서 보기 힘든 정치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룬 스토리라 사람들이 정치극이다 해서 좋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에 맞지도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런 스토리는 아니라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네요. 다음 글도 기대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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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봤습니다. 게임에서 보기 힘든 정치 관련 내용이 주를 이룬 스토리라 사람들이 정치극이다 해서 좋다고 말했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게임에 맞지도 사람들이 생각했던 그런 스토리는 아니라는 말씀이라고 생각되네요. 다음 글도 기대되네요.
(IP보기클릭)58.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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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피스의 호응은 운의 사령부 장악 과정중에 황녀파 가담한 병사들로 어느정도 묘사하려했던거로 보이는데 이 부분은 말씀하신것처럼 부족했다고봅니다. 웨스피스 사령부의 부정부패는 묘사했지만 애초에 웨스피스도 기본적으로 황녀가 추진한 지원혜택을 귀족들의 농간으로 받지 못한 상황에서 황녀가 자신들 편인지 알수없었기에 묘사될수가 없던 부분이었죠. 너무 급하게 스토리 전개하느라 이 부분이 생략되버린게 에르제의 당위성에 큰 타격을 준거로 봅니다. | 20.01.19 02:0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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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들이 뭐하고 지냈느냐는 외전퀘에서 이튼이 기술 빼돌려줬다는거로 스토리가 나오지만 외전퀘라 접근성이 떨어졌죠. 용에 대한 부분이 역시 많이 문제되는데 스토리 내에서 전설이 있었다로 땡쳐버리는거랑 결말부에 에르제 만세로 가는건 진짜 이걸로 괜찮은건가? 싶은 전개였네요. 다만 왜 천계 국민이 용을 두려워하는데도 에르제를 환영했는가는 우습게도 귀족들이 에르제의 정통성을 건들지 못해서 에르제가 쫓겨난게 아닌 유람을 간거로 포장한 바람에 정당한 군주가 사악한 용을 복속해서 데려왔다는 프레임을 황녀측이 짤수있었다가 원인으로 봅니다만 이건 전설로 퉁쳐버렸으니 뭐라 할 말이 없네요. 진작에 귀족들이 쿠데타한거 다 공개했으면 에르제 매국노 프레임 잘 써먹을수있었을텐데말이죠. | 20.01.19 02:1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