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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흉폭하다'라는 말이 원래 우리나라에 없다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다음 날, 미카는 패리스에게 업혀 아간조, 델마와 함께 천장으로 나가는 입구에 서 있었다.
“꽤 오랫동안 못 보겠구나.”
알베르트가 말했다. 그의 옆에는 슈시아가 서 있었다. 미카가 고개를 저었다.
“두고 봐. 수단 방법 안 가리고 최대한 빨리 마계로 갈 거니까.”
알베르트가 씩 웃었다.
“꼭 그렇게 되길 빌어.”
“목적을 이루고 나면, 꼭 시궁창에 다시 들러요.”
슈시아가 말했다.
“응. 꼭 그럴게.”
미카가 고개를 끄덕였다. 패리스가 못마땅한 눈으로 알베르트를 쳐다보았다.
“너…… 제국 놈들하고 이상한 문제 일으키지 마라. 아냐, 그냥 한 번 깽판을 쳐. 그리고 잡혀가면 되겠다.”
“……아무 것도 안 하고 가만히 있을게.”
“그들이 왜 이곳에 왔는지는…… 끝까지 말 안 해 줄 생각이오?”
아간조가 슈시아에게 물었다.
미카는 의아해하는 눈으로 아간조를 쳐다보았다. 슈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해요. 워낙 중요하고 위험한 일이라…… 캡틴이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다면 뭔가 이유가 있는 거겠죠. 당신이 제국의 감시를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 거예요, 아마도.”
아간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면 정말 시간이 절묘하군. 그들이 오자마자 제국군이 들이닥칠 줄이야…… 어쩌면 검은 악몽과 석화 바이러스 둘 다 핑계일 뿐일지도.”
그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루터에게 배신자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전해주시오.”
슈시아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간조가 그들을 빤히 쳐다보는 패리스와 미카를 발견하곤 그의 머리에 손을 얹었다.
“못 들은 척 해주게.”
패리스가 어깨를 흔들어 미카를 재촉했다.
“미카.”
미카는 패리스가 원하는 대로 했다.
“무슨 일이야? 캡틴이 누구야?”
슈시아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슈시아가 그렇게 말하니 어쩔 수 없었다. 패리스는 쯧 하고 혀를 차더니 뒤돌아서 천장을 향해 올라갔다.
천장을 거의 다 올라갔을 때, 알베르트가 소리쳤다.
“미카!”
미카는 뒤를 돌아보았다.
“꼭 찾아!”
알베르트가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미카는 고개를 끄덕이고 마주 손을 흔들었다.
덥지만 따뜻했던 시궁창. 그곳이 바닥의 구멍 속으로 멀어져 갔다. 금이 간 천장 대신에 푸르고 가없는 하늘이 머리 위로 펼쳐졌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람이 미카의 은발을 흩뜨렸다.
시궁창의 입구 앞에는 말과 짐이 실린 수레가 준비되어 있었다. 아간조가 마부대에 가서 앉았다. 패리스와 델마가 미카를 데리고 수레에 앉았다.
수레가 덜그럭거리며 앞으로 가기 시작했다.
미카는 수레에 실린 짐들 중에서 유난히 푹신한 것을 골라 몸을 기댔다.
잠시 동안이었지만, 아무런 걱정도 기대도 하지 않을 수 있어서 마음이 편했다.
“제국하고 공국이 뭐야?”
델마의 팔베개를 벤 미카가 그녀를 보며 물었다.
미카가 괜찮다고 해도 델마는 억지로 팔에 그를 눕혔다. 미카의 옆에는 패리스가 은근한 시샘에 찬 눈으로 그들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밤이 깊자 그들은 모닥불을 피우고 잠자리를 마련했다. 몬스터들이 대전이 이후로 유난히 흉폭해져서 한 명은 불침번을 서야 했다. 첫 번째 불침번은 패리스였다.
델마가 대답했다.
“제국은 아라드 대륙 정중앙에 위치한 나라야. 이름은 데 로스. 엄청 옛날에 아라드를 지배하던 펠 로스라는 제국이 한번 망했다가 레온 하인리히 1세에 의해 재건된 게 데 로스야.”
“왜 망했어?”
“펠 로스의 황제가 오즈마라는 황실 대마법사의 연인을 빼앗고 친구를 배신하게 만든 후 두 눈을 뽑고 감옥에 가두었는데, 그 대마법사가 워낙 강력했나 봐. 감옥을 탈출하고 사람들에게 닥치는 대로 피의 저주를 걸었어.”
‘연인을…….’
미카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델마의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그 피의 저주에 걸린 자들을 위장자라고 불러. 겉으로 보기엔 위장자는 보통 사람들과 다를 게 없었대. 그러나 그들은 피의 저주 때문에 끊임없이 피를 갈구하게 되었고, 그들에게 공격당한 인간은 그들처럼 피의 저주를 받아 위장자가 되었어.”
패리스가 장작을 던져넣는 소리가 났다.
“오즈마는 그저 인간들 사이에 위장자를 퍼트리는 게 목적이었대. 불신과 증오를 퍼트리기 위해서. 자신이 황제에게 배신당해 연인과 친구를 잃어서 다른 사람들도 똑같이 당해 보라고 그랬나 봐.”
이야기의 내용과는 딴판으로, 델마는 웃으며 미카의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손으로 빗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위장자를 구별할 수 있는 한 소년이 나타났어. 그 소년이 바로 레미디오스에게 처음으로 계시를 받은 첫 번째 프리스트, 미카엘라야.”
“레미디오스는 누구야?”
“신이야. 프리스트들이 믿는 주신. 미카엘라는 다른 프리스트들과 함께 위장자들을 처리해 나갔어. 그러자 오즈마는 더 이상 인간들 사이에 숨어서 지낼 수 없게 된 위장자들을 모아서 최후의 전쟁을 일으켰어. 그 전쟁을 검은 성전이라고 해.”
델마가 미카의 은빛 앞머리를 빗어 넘겼다. 때마침 불어온 시원한 바람이 그의 이마를 스치고 지나갔다.
미카는 멍한 눈으로 밤하늘을 쳐다보며 이어지는 델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전쟁은 오즈마의 패배로 끝이 났어. 미카엘라와 프리스트들이 검은 대지를 통째로 이차원에 봉인시켜버렸던 거야. 그 후 미카엘라는 아라드에 남아있는 위장자들과 오즈마의 봉인을 감시하기 위해 지금의 헨돈 마이어 지역에 레미디아 바실리카를 세우고 프리스트들을 육성하게 돼.”
패리스가 또다시 장작을 불에 던져 넣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은 무너졌어. 이젠 언더풋의 레미디아 카테드라라는 곳으로 옮겨갔어.”
“위장자들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았지만, 제국은 크게 약해졌어. 분열하려는 나라를 하나로 모으기 위해 붉은 숲 너머의 나라 수쥬와 전쟁을 벌였지만 대패하고 결국 제국은 멸망해. 그리고 몇 백 년 후, 레온 하인리히 1세가 데 로스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그게 지금의 제국이야.”
“공국은?”
“공국은 벨 마이어라고 불러. 오래 전에는 헨돈 마이어 부근이 황량한 사막이었대. 그랬던 그곳을 대현자 마이어라는 사람이 마법진을 펼쳐서 비옥한 농토로 만들고 사람들을 정착시킨 후 홀연히 사라졌대. 그렇게 정착한 사람들이 세운 나라가 벨 마이어야.”
“그게 끝이야?”
“응. 벨 마이어는 전쟁의 역사나 이렇다 할 큰 사고가 없었어.”
“수쥬는 어디야?”
델마가 난색을 표했다.
“그건 나도 잘…….”
“붉은 숲 너머 무인들의 나라야.”
패리스가 대신 대답했다.
“현안왕 쇼난 케이라는 자가 통치하고 있어. 그리고 그 왕에겐…… 건방진 딸이 있지.”
패리스는 뭔가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린 것처럼 허공을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망할 년……. 왕족인데다 조신해 보여서 방심했더니 다짜고짜 눈부터 공격할 줄이야…….”
미카는 알베르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한 번 비겼다는 그 사람이야?”
패리스가 성큼성큼 다가와서 미카의 볼을 잡아당겼다.
“아야야!”
“맞아. 그 년이야.”
“근데 왜 볼은 잡아당겨!”
패리스가 미카의 볼을 놔주자 델마가 그를 껴안았다. 패리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아마 거의 다 왔을 거야. 언더풋이 원래 땅 아래 있던 곳이라 정확한 위치는 모르겠지만……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발하면 저녁 먹기 전에는 도착할 거야. 그러니까 일찍 좀 자라.”
“응.”
미카는 하품을 하며 델마 쪽으로 돌아누웠다.
“근데 미카, 너 오늘 연고 발랐어?”
패리스가 물었다. 미카는 천연덕스럽게 거짓말을 했다.
“응.”
“연고가 하나도 안 줄어들었는데?”
움찔한 미카는 델마의 품으로 파고들며 자는 척을 했다. 패리스가 그의 어깨를 흔들었다.
“야, 미카!”
“늦었잖아. 자게 둬.”
델마가 그의 허리에 팔을 올리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효과도 없는 것 같아. 새살이 날 기미가 안 보여……. 언더풋에 가면 자세히 좀 알아봐야겠어.”
“후…….”
패리스가 한숨을 쉬었다.
미카는 가슴에 난 구멍에 손을 얹었다. 델마의 말대로 구멍은 조금도 작아지지 않았다.
‘무린이 이 구멍을 보면 많이 놀랄까……. 보기 흉하긴 하다.’
안 없어지면 어쩌지……, 미카는 그런 걱정을 하다가 저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아무런 예고도 없이 격통이 그를 관통했다.
“허억.”
숨이 턱 막혔다. 눈을 떠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땅을 짚은 팔의 감각도, 그를 소리쳐 부르는 누님들의 목소리도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머리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미카는 다리가 박살나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이미 잘려서 없어진 다리에서.
“아악…….”
온몸을 뒤틀며 없는 다리를 버둥거려도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아으…… 흐악…….”
가슴이 꿰뚫렸을 때처럼,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눈물이 철철 흘렀다.
정신을 잃으며 마지막으로 느낀 것은 뒷목에 느껴지는 짧은 통증과 아간조의 기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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