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의 : 이 글에서는 니지애니 2기의 스포일러가 등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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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아이 씨, 오늘도 연습 힘내]
[응~ 고마워! 리나리! 덕분에 아이 씨 오늘도 팍팍 힘내리!나리!]
오늘도 자연스럽게 등장한 말장난을 보고 리나는 OK! 라는 말풍선을 단 고양이 스탬프를 하나 보냈다. 그러고는 핸드폰 화면을 끄고 책상 위에 툭 하고 올려두었다. 리나의 얼굴은 평소와 같은 무표정이었지만, 지금은 어쩐지 평소와는 다른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아아, 이 답답함은 뭘까. 리나는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바닥만 빤히 바라보았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이 답답한 기분 때문에 도저히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 의미 하나 없는 한숨을 세게 내쉬어봐도 가슴의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고서 단단하게 굳어 버린 이 답답함이 무엇인지는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최근 아이는 얼마 뒤에 있을 온라인 라이브 준비로 인해, 늦은 시간까지 카린과 함께 학교에 남아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카린 씨가 그렇게 아이 씨와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는 게 질투 나서 이런 걸까? 아니야, 그건. 절대 아니지.
그렇다면 대체 뭘까. 쥐 죽은 듯이 조용해서 싸늘하게까지 느껴지는 방 안에서 리나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가만히 있었다.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린 건 그녀가 뭔가를 마침내 떠올린 순간이었다.
「응? 왜 그래, 리나리? 무슨 할 말 있어?」
늘 그래왔듯이 다른 날과 똑같이 웃고 있는 아이였지만, 리나는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지금 자신의 눈앞에 있는 '미야시타 아이' 는 괜찮은 척을 하기 위해 웃음으로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걸.
아이 씨, 요즘 따라 어쩐지 표정이 어두워 보이네. 무슨 고민이라도 있어? 곧바로 이렇게 물어봤어야 됐다. 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한 번 망설이자, 그다음에는 자신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것으로 이 상황을 마무리 지으려는 아이의 손길 때문에 입술이 붙어버리고 말았다. 리나는 하고 싶은 말을 꾹 삼킨 채로 먼저 자리를 뜨는 아이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 씨"
작게 소리 내어 부른 이름이 너무나도 멀게 느껴져서 리나는 조금 울고 싶어졌다.
정말로 울지는 않았지만.
한 걸음을 내딛었을 때
온라인 라이브의 준비는 순조롭게 되어갔다. 리나 역시 자신이 맡은 일을 완벽하게 해내고 있었다.
그렇지만 리나의 마음 안에는 변함 없이 답답함이 가득 차 있었다. 아이의 얼굴에서 여전히 그늘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본인은 필사적으로 숨기려고 하지만, 이미 알게 된 사람은 모른 척 눈을 돌릴 수 없는 그런 짙은 그늘이 말이다. 리나의 손가락은 기계와도 같이 빠르게 움직이면서 정확하게 타자를 치고 있었지만, 리나의 머릿속은 다른 것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할 일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온 리나는 하교하기 전에 도서관에서 빌려온 어린 왕자 책을 가방에서 꺼내 들었다. 팔랑팔랑 페이지를 넘기던 그녀는 곧 자기가 찾던 부분을 발견하고는 손을 멈추었다. 어린 왕자와 여우가 대화하는 장면이었다.
슬픔을 느끼고 있던 어린 왕자는 저 멀리 몸을 숨긴 여우에게 같이 놀자며 말을 걸었지만, 여우는 그러기 위해서는 네가 날 길들여야 된다고 대답했다. 어린 왕자는 그때부터 여우와 가까워지기 위해 매일 꾸준히, 그리고 아주 조금씩 여우에게 다가가며 그를 길들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여우와 어린 왕자는 드디어 서로의 옆에 함께 있을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하지만 어린 왕자는 결국 다른 곳으로 떠나게 되고, 여우는 작별의 순간 울먹거렸다. 그러나 여우가 그의 손을 붙잡으며 제발 떠나지 말라고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는 대신, 여우는 그에게 해답을 주었다.
만약에 여우가 가지 말라고 붙잡았더라면 어린 왕자는 떠나지 않았을까?
여우가 어린 왕자의 슬픔과 고뇌에 대한 해답을 조금 더 빨리 줬더라면 어린 왕자는 곁에 계속 있어줬을까?
시선은 여전히 활자에 두고 있었지만, 그걸 보고 있는 건 아니었다. 눈앞에 지금 어른거리고 있는 건 그 사람의 얼굴이었다.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평소처럼 진심으로 웃고 있는 게 아니던 미야시타 아이의 얼굴이 자꾸만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눈앞에 흐릿하게 보였다. 순간 정신이 아찔해져서 리나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아이가 저렇게 괴로워하고 있는데, 자신이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이 가져다주는 무력감이 첫 번째.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자신의 곁을 떠나버리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에 의한 불안감이 두 번째.
걱정시키기 싫다는 그 마음은 알겠지만 자기한테 의지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아이의 반응에 대한 서운함과, 자신이 아이가 의지할 만한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부끄러움과 분함이 마지막.
쉴 새 없이 밀려드는 강렬한 감정의 파도에 온몸을 흠뻑 적시고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가는 끝없는 우울감에 빠져들게 뻔했다. 리나는 핸드폰만 하나 챙겨들고는 쫓기는 사람처럼 허겁지겁 집 밖으로 빠져나왔다.
"나는... 어떻게 해야 되는 걸까"
밖으로 나와서 아무도 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리다가 문득 하늘을 올려보자 주홍빛 석양이 깔려있었다.
-
아무 생각 없이 계속 앞으로만 걸어갔다. 주홍빛으로 물들던 하늘은 서서히 어두워지더니 이윽고 완전히 밤하늘로 바뀌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그저 쭉 걷기만 했다.
태엽이 고장 나서 멈추지 못하는 태엽 인형처럼 움직이던 리나의 발걸음이 멈춘 것은 공원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누군가를 목격했을 때였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 같은 작디작은 소녀가 멍하니 앉아서 앞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그것보다 더 눈에 띄는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누군가를 떠오르게 하는 소녀의 금발과 금색 눈동자였다.
아이 씨한테 저만한 동생이 있었던가? 멈춰 서서 잠시 생각을 해봤지만, 아이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은 없었다. 그렇지만 저 아이는 확실히 미야시타 아이와 너무나도 닮았다. 가족이 아니고서는 말이 안 될 정도로 말이다. 잠시 망설이던 리나는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소녀에게 다가가 말을 살며시 붙여보았다.
"저기..."
"아앗, 누, 누구세요?"
아이가 낯선 사람이 말을 걸어서 깜짝 놀랐는지 몸을 움츠렸다. 이상한 오해를 받기 전에 리나는 얼른 말을 이어갔다.
"여기서 혼자 뭐하고 있어? 깜깜해졌는데"
"...우으..."
"무슨 걱정이라도 있어?"
자기보다 어린아이를 대하는 거라서 그런지 어느 때보다도 말이 술술 나오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말을 거는 리나가 누군지는 몰라도, 어쨌든 나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아이는 쭈뼛쭈뼛하더니 이내 눈을 맞춰왔다.
"있잖아요, 저한테 언니가... 정말 좋아하는 언니가 있는데요"
"응"
"그 언니가 아파서 병원에서 계속 살거든요"
좀 더 귀 기울이기 위해 리나가 아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언니는 항상 제 앞에서 밝게 웃어주는데, 언니가 진짜로 웃는 게 아닌 것처럼 느껴져서 괴로워요"
"아"
"언니는 저를 항상 도와주고 즐겁게 해줬는데, 저는... 나는 언니가 괴로워하는데도 아무것도 도와줄 수가 없어서... 내가 물어보면 언니는 그냥 매번 괜찮다고만 해서... 언니한테 도움이 못 되는 내가 너무 짜증 나서..."
입술을 삐쭉 내민 아이의 눈에서 끝내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할 말을 잊고서 잠시 동안 그 우는 모습을 쳐다보던 리나는 한 손을 움직여 아이의 머리 위로 가져갔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소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도 너랑 똑같아"
"...언니도?"
"응. 정말 좋아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내 앞에서는 항상 웃으면서 괜찮은척하거든. 그런데 실은 안 괜찮다는 걸 알아서-"
속마음을 한마디씩 털어놓자 가슴이 쿡쿡 쑤셨지만,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용기가 없었어. 정말 괜찮은 거냐고 물어볼 용기가 하나도 없었어"
"..."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아무것도 하지 못했어.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만 했을 뿐. 나를 구해주고 내 손을 꽉 잡아준 그 사람한테 나는 그 어떤 도움조차 줄 수 없었어"
애써 덤덤한 말투를 이어가보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마음속 감정들이 슬쩍슬쩍 섞였다. 어느새 울음을 그친 아이는 리나의 옆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래도 너는 물어볼 용기가 있었잖아.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거야"
"언니..."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순식간이었다. 아이가 갑자기 몸을 크게 움직여 리나를 꽉 껴안아준 것은. 당황한 리나가 눈을 크게 뜨고 아이를 바라보자 아이가 고개를 들어 올려 리나와 눈을 맞추었다.
"언니, 지금 정말 슬프구나"
"...응?"
"언니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아서. 그래서 꽉 안아줬어. 이러면 슬픔이 사라진다고 할머니가 가르쳐주셨거든!"
슬픔아, 슬픔아! 날아가라! 자기를 꽉 껴안고서 슬픔이 날아가는 주문까지 외워주는 아이에게 어떤 말을 해야 될지 몰라서 리나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몸을 꼭 붙인 아이의 온기가 얼어붙었던 마음을 녹여주는 것 같았다. 리나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걸 멈추고는 갈 곳을 잃어 허공을 헤매던 손을 아래로 내렸다. 팔을 크게 벌리고, 몸을 숙여 아이를 꽉 안아보았다. 온기가 더욱더 강하게 느껴졌다.
사실은, 정말로 슬펐던 거다. 다른 어느 감정들보다도 슬픔이 제일 강했던 거다. 금방이라도 펑펑 울 수 있을 정도로 슬픈데, 그런 자신을 외면했던 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도 괜찮은 척하고, 걱정할까 봐 아무런 티도 내지 않고, 속마음을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바로 그런 모습은-
"...똑같았구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지만, 눈물도 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를 때마다 가슴 안의 덩어리가 줄어드는 느낌이었다. 물기 젖은 웃음소리를 짧게 한 번 내뱉고 리나는 품 안의 아이를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고마워"
갑자기 들린 노랫소리에 놀라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얼떨떨한 상태로 뭔가 싶어 두리번두리번 살펴보니 낮에 맞춰 놓은 알람이 울리고 있었다. 알람을 끈 리나는 꺼진 액정을 가만히 바라만 보다가 핸드폰을 안 쥔 손으로 제 뺨을 만져보았다.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리나는 무언가를 결심했는지 두어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곧바로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
라이브 시작까지 이젠 정말 얼마 안 남았다. 오늘의 주역인 두 사람과, 동호회 멤버들 모두 다 자신이 해야 될 일을 하며 막바지 준비를 하고 있었다.
제자리에 서서 아이가 불안한 마음을 떨쳐내기 위해 심호흡을 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등 뒤에서 누군가가 달려들어 자기를 꽉 껴안는 것이 느껴졌다.
"어? 리나리"
"괜찮아. 아이 씨라면 괜찮아"
수많은 응원의 말보다 이 한마디가 더 감동으로 다가왔다. 아이는 벅차오르는 마음을 숨기지 못하면서 리나의 머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고마워"
수많은 감정을 담은 눈과 눈이 마주쳤다. 리나의 표정은 평소와 다름없이 감정이 드러나지 않았지만, 아이에게 있어서는 마음이 모두 다 확실히 전해지는 표정이었다. 마음이 따뜻함으로 채워지는 걸 느끼면서 아이가 다시 한번 활짝 웃었다. 그 얼굴은 그늘 따위는 없이 너무나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다녀올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