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해 그 겨울 그 집
지금도 나는 그 집에서 살지만 그때 그 집이, 그 눈 오는 집
이 이따금씩 또렷하게 떠오르곤 하는 것이다.
밤이 빨리도 찾아오는
산속 마을에
며칠간이고 눈이 내리면
밤마다 산노루가 산을 헤매이며 울다가
마을 뒤안까지 내려와 바스락거리고
부엉이는 부엉부엉 울었다 배가 고팠던 것일까
나는 잠을 빼앗겨버리고는
이따금씩 마루에 나가 가만히 서지곤 하는 것이었다
어쩔 때는 눈보라가 마루까지 들이치고
내 얼굴에, 내 맨발의 발등에 눈송이가 와닿아
나는 깜짝깜짝 놀라곤 하였다
처마끝에는 눈송이들이 몰려다니고
어둔 밤 강물은
큰 붓자국같이 검게 그어져 있는 것이었다
하얀 앞산
밤에도 보이는 저 눈 쌓인 하얀 앞산에서
순하디순한 숫노루는 울었는가
눈보라 속에서는 아직도 부엉이가 부엉부엉 울어대고
나는 마루에서 들어와
다 식은 새벽 방바닥에 몸을 누이고는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다 덮어도
어깨가 시렸고
콧김에 코끝이 시렸다.
숫노루같이, 나는 산도 없는데 저 숫노루같이
밤마다 왜 잠이 오지 않는가
얼마나 잠이 없이 마음이 훤한지
그 노루가 걸어다니는 발자국이
그 산에 난 길들이 다 떠오르는 것이었다
사륵사륵 사르륵 눈 위에 눈 내리는 소리가 다 들리는
것이었다
닭이 몇차례 울었는지
장독가에 감나무가 있는 큰집 큰아버님의 숨넘어갈 듯한
새벽 기침소리가 처마끝에 쌓인
눈을 허무는 것이었다
날이 밝을 무렵에야 내 두 눈은 나도 몰래 그냥 스르르
감기었다
내가 누워 자는 방에다 아버님이 소죽을 끓이시며
톡톡 분질러 아궁이에 넣은 삭정이에
토도독 투둑 불꽃이 일어 타는 소리와
홀홀홀 불꽃이 검은 아궁이 깊이 빨려들어가는 소리에
쌓인 눈도 밤새워 울던 숫노루의 울음소리도 다
눈 녹듯 사라지고
거칠지 않은 내 고른 숨결소리를 내가 가만가만 따라가다
나도 그냥 어딘가로 푹 꺼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세상을 다 잊어버리고 잠을 곤히 자다가는
두 눈이 나도 몰래 살며시 떠지면
창호지 문에 밝은 눈빛이 가득 비치고
뚫어진 문구멍으로 하얀 밖을 보며 나는 백설처럼 깨끗
한 맘으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지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하얀 눈이 소복소복 쌓인
아직 아무도 건너지 않은
징검다리를 나 혼자 가만가만 건너갔다가 건너와보는 것
이었다
눈이 하도 많이 온 날은
그냥 마루에 서서
산이고 강이고 작은 논밭이고간에 하얀 눈이 덮인 그런
산천을 오래오래 바라도 보며,
그런 세상이 하나하나 바라다봐지는 것이었다
김칫독이 묻힌 데까지
간장독이 있는 장독까지
변소 가는 길까지
소가, 우리 집 큰 황소가 흰 입김을 훅훅 뿜으며 소죽을
먹는
소막까지
환하게 눈을 쓴 길로
한번 가셨다가 한번 오신
아버님과 어머님의 발자국도 보곤 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다시
그 숫노루 생각이 나서
그 숫노루를 생각하고는
이불이 깔린 내 방에 들어와
깊은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다
생각에 빠지면 나는
산도 눈도 강도 나무도 집도 다 지워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잠을 자고
느닷없이 퍼붓는 눈도
문을 열고 내다보며
낮에는 삶은 고구마에다
이 시린 싱건지 국물을 마시고
가닥김치를 걸쳐도 먹으며
웃기도 하고
마당 끝에 서서 산을 둘러도 보며 눈이 시리면 이마에
잔뜩 주름도 만들고
눈이 녹는지
강 건너 소나무 가지가 뚝 부러지는 소리도 들으며
책도 읽고 시도 쓰며
그 해 그 겨울 그 집에서 나는
긴긴 겨울을 다 지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듬해 봄이 온 어느 날 강에 나가 발을 씻고
풀밭을 맨발로 걸으며
샛노랗고 새하얀 작은 풀꽃들에게 내 눈길이 가 머물 때
또 그 숫노루의 울음소리를 나는
거짓말같이 들었던 것이다
눈을 오래오래 바라보며 마루에 서 있던 나도
맨살에 날아와 흰 꽃잎같이 닿던 그 차디찬 눈송이도 잠
못들고 뒤척이던 내 모습도
불때는 아버님의 환한 가슴과 환한 얼굴도
잔잔한 물결에 다 밀려오는 것이었다
참, 그렇지 그랬었지 그 생각들이 봄 물결처럼 푸르게
일어나는 것이었다
그 여자네 집
김용택, 창비시선 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