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란(墨蘭)
난을 치는 법을 배우려고 선생을 찾아갔다
선생은 먼저 먹을 갈아보라고 하였다
잘 늙은 소나무에 도끼로 자국을 내고 진액이 흐르도록
반년을 기다려야 합니다 나무를 쪼개 태우면 미세한 그을음
이 생기는데 새의 깃털로 만든 빗자루로 조금씩 조금씩 쓸
어 담지요 그리고 아교로 반죽하고 향료를 섞은 다음 반죽
을 두드리고 굳게 하여 다시 연하게 두드리기를 수차례 반
복합니다 그걸 틀에 넣어 굳으면 먹이 만들어지지요
한달 가까이 먹을 가는 것을 지켜보더니
선생은 운필법(運筆法)에 대해 입을 떼기 시작했다
백지에 먹물을 묻히는 일은 제국을 통치하는 일과도 같습
니다 또한 그것은 아이의 입에 밥을 떠먹이는 것만큼이나
조심스러운 일이지요 맑은 물에 붓을 듬뿍 적셨다가 헝겊으
로 물기를 빼낸 다음에 다시 붓 끝에 살짝 먹을 묻혀 붓을 바
로 세운 뒤 눈밭 위에 첫 발자국을 찍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 붓은 진흙탕에 내놓은
아이의 발바닥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였다
붓을 들어 화선지에 대고 처음은 가늘게 하고 조금씩 붓
끝에 힘을 가해 넓게 잎이 휘어지게 하다가 잎의 중간쯤에
서 다시 붓끝을 돌리면서 가늘게 하면 잎이 좁아지고 뒤집
히면서 묵란이 완성되지요 화선지에 먹을 묻힌다고 다 난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흰 종이에 숨어 있던 난을 붓으로 끌어
당겨야 합니다
나는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먹을 갈았다
식음을 끊은 날도 많았다
꽃을 그려 넣지 않았는데
자고 일어나보니 이튿날 꽃대가 솟으면서 꽃이 달렸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창비시선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