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홍교 여사 약전
1939년 일본 구로사키에서 조선인 노무자 임돌암과 최도
홍 사이 4남 1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1942년(4세) 인형을 들고 한장의 사진을 찍었다. 그때 친
구들이 ‘고코짱 아소부야(홍교야 놀자)’라고 불렀다.
1945년(7세) 해방이 되어 귀국해 경북 예천군 호명면에서
살기 시작하였다.
1947년(9세) 남동생 임희상이 태어났다.
1950년(12세) 인포국민학교에 입학하였다. 교가를 기억
하고 있고 부를 줄 안다. 6ㆍ25전쟁이 터져 안동 풍천면 갈밭
으로 피란을 갔다. ‘김일성 장군의 노래’도 기억하고 있다.
1953년(15세) 쌍둥이 동생 임직상과 임택상이 태어났다.
어머니를 도와 둘을 업어 키웠다. 친정어머니는 쌍둥이 중
유독 직상이만 좋아하였고, 택상이는 항상 누나 차지였다.
이 무렵 이마가 동그랗게 튀어나와 ‘다마네기’라는 별명을
얻었다.
1958년(20세) 호명면 황지리 소망실에 사는 다섯살 위 청
년 안오성과 혼인하였다. 친정에서 맞선을 보면서 예천농
고 출신 신랑 얼굴은 보지도 못하였고, 키가 훤칠하게 크다
는 것만 알았다. 친정에서 혼인하는 날 기념사진을 찍으면
서 신랑과 신부의 키 차이가 많이 나자 사진사가 마루 밑에
서 썰매를 가져와 신부에게 올라서게 하였다. 그 이후 동네
에서는 “안실이는 시게또 타고 시집갔다”는 우스갯소리가
퍼졌다. 첫날밤은 만취된 신랑, 동네 사람들의 문구멍 엿보
기, 문구멍으로 연기 넣기 등으로 합방을 이루지 못하였다.
혼인 후 사흘 만에 신랑은 군대에 갔다.
1959년(21세) 친정에서 일년 묵고 가마를 타고 묵신행으
로 시댁에 갔다. 가마에는 큰 방짜 놋요강에 찹쌀과 계란을
넣고 갔다. 시댁에 도착할 즈음, 이웃 동네 아주머니는 “색
시는 온다마는 신랑이 어제저녁까지도 안 와서 어예노?” 하
며 걱정을 하였다. 신부를 맞기 위해 부산의 군부대에서 특
별휴가를 나온 신랑은 안동역에서 예천 본가까지 25킬로미
터에 이르는 길을 걸어서 새벽에 도착하였다. 시댁에 도착
한 가마의 문을 신랑이 열고 신부를 맞이하였다. 이틀을 묵
고 신랑은 다시 군대에 복귀하였다. 남편도 없는 시집살이
를 시작하였다.
1960년(22세) 세 동서가 모여 바랑골에 밭매러 다녔다. 큰
동서는 춤을 잘 추었고, 둘째 동서는 노래를 잘했다. 새색시
는 그냥 웃고 박수를 쳤다. 시댁에서는 주로 삼시 세때 밥하
고 조카들 돌보는 일을 맡았다. 신랑이 제대하고도 이년 가
까이 시댁에서 살았다.
1961년(23세) 큰아들 도현이 태어났다.
1962년(24세) 안동 풍산면으로 분가해 나왔다. 풍산 들에
물려받은 작은 논이 있었다. 풍산에서는 농협 바로 옆 사진
관집에 세를 들어 식료품을 파는 잡화상을 열었다. 가게 이
름은 ‘해정상회’였다. 남편은 ‘갈매기옥’ 등의 술집을 자주
드나들었다.
1963년(25세) 둘째 아들 제현이 태어났다.
1967년(29세) 셋째 아들 태현이 태어났다. 해마다 낙동강
이 넘쳐 홍수가 났고, 들과 신작로가 물에 잠기면 남편은 가
게 앞 도랑에서 물곡기를 잡았다. 남편이 잡은 민물장어는
가게 앞에 쌓아놓은 수박 사이로 기어들어갔다.
1971년(33세) 대통령선거에서 남편은 김대중, 본인은 박
정희에 투표하였다. 남편은 전파상에서 라디오를 빌려 와
밤새 개표 방송을 청취하였다.
1972년(34세) 넷째 아들 준현이 태어났다. 이미 혼인할 때
궁합을 본 시어머니는 손이 귀한 집에 오형제가 태어날 것
이라고 하였다. 이때 단산을 하지 않았으면 정말 오형제가
태어났을지도 모른다.
1973년(35세) 3월 국민학교 6학년 큰아들을 대구로 유학
을 보냈다. 사촌 홍기의 자취방에 얹혀살게 한 것이다. 생활
비로 한달에 이천원 정도 우체국 소액환을 보냈다. 가게는
장사가 변변치 않앗고, 남편은 땅을 얻어 수박 농사를 짓거
나 사과를 트럭에 싣고 원주나 묵호까지 가서 팔았다.
1974년(36세) 경기도 여주군 흥천면 대당리 방죽으로 이
사를 갔다. 처음에는 땅 한평도 없이 남의 땅을 도지 내어 수
박 농사와 배추 농사를 지었다. 농사짓느라 새까매진 얼굴
에 몸빼바지의 촌부로 젊음을 바쳤다. 특수작물 농사는 겨
울 비닐하우스 파종부터 일년 내내 쉴 틈이 없었다. 일은 그
나름대로 보람이 있어 땅도 조금 소유하게 되고, 남편의 수
박밭에 큰 종묘사의 사보 기자와 유명 탤런트가 찾아와 함
께 사진이 실리기도 하였다.
1981년(43세) 남편이 서울대병원에서 간암 말기 판정을
받았다. 시아주버니가 죽어도 고향에서 죽어야 한다며 예천
으로 데려갔고, 음력 7월 5일 삼복더위에 숨을 거두었다. 아
들 넷이 모두 대학생부터 국민학생까지 학생이었다. 남편이
심은 벼를 거두어 추석 제사를 지냈다.
1983년(45세) 남편 없이 아이들과 함께 안동으로 돌아왔
다. 태화동 집이 골목 끝에 있었으므로 지인들이 ‘골목집’이
라는 별호로 불렀다. 이때부터 십여년 동안 생활비와 자식
들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식당 주방보조, 파출부 등 잡일
을 닥치는 대로 하였다.
1984년(46세) 큰며느리 박성란을 보았다. 친정어머니에
게 며느리가 전라도 사람이 아니라 서울 사람이라고 거짓으
로 고하였다. 장손녀 유경이 태어났다.
1989년(51세) 큰아들이 전교조에 가입해 해직된 사실을
시아주버니를 비롯한 집안 어른들에게 몇년 동안 철저하게
숨겼다.
1990년(52세) 큰손자 민석이 태어났다. 민석은 이후 명절
때 안동에 왔다가 전주로 돌아갈 때면 할머니와 헤어지는
게 서운해 매번 서글프게 울었다. 같이 울었다.
1992년(54세) 둘째 며느리 박진희를 보았다.
1993년(55세) 손자 문수가 태어났다.
1997년(59세) 김대중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어 몹시 기
뻤다. “너 아부지가 알면 얼마나 좋아했을꼬” 하였다.
1999년(61세) 셋째 며느리 오선화를 보았다.
2000년(62세) 손자 진형이 태어났다. 큰아들과 금강산을
여행하였다.
2001년(63세) 손자 진욱이 태어났다. 큰며느리가 아이들
유학 뒷바라지를 위해 중국에 간 사이 큰아들 밥을 해주느
라 거의 이년을 전주에 머물렀다. 아파트 경로당에서 전라
도 친구들을 두루 사귀었다. 이때 꼴뚜기를 무와 양념으로
무쳐 먹는 법을 배웠다.
2002년(64세) 익산 사돈과 함께 태국을 여행하였다.
2003년(65세) 손녀가 북경대에 합격하였다는 말을 듣고
꼬불쳐둔 백만원을 쥐여주었다. 가족들과 북경과 백두산을
여행하였다.
2004년(66세) 온 가족이 제주도를 여행하였다.
2005년(67세) 넷째 며느리 양정숙을 보았다.
2007년(69세) 손자 민혁이 태어났다. 사돈과 함께 일본을
여행하였다. 초봄에 온 가족이 남해 일대를 여행하였다.
2008년(70세) 칠순을 맞았다. 서울, 대구, 전주 등지에서
온 축하객들에게 문어숙회와 숯불 고등어구이를 내놓았다.
자식들이「안씨연대기」라는 타블로이드판 가족신문을 만들
었다. 예천 보문면 오암리에 묫자리로 쓸 밭을 매입해서 좋
아하였다.
2012년(74세) 손녀 민서가 태어났다.
2014년(76세) 수원에서 무릎관절염 수술을 받았다.
2016년(78세) 온 가족이 상해를 여행하였다.
2018년(80세) 손녀 유경의 결혼을 앞두고 현금 천만원을
내밀어 온 가족을 울게 만들었다. 가족 이외에는 뭘 나눠주
는 데 매우 인색하였다. 안동에서 팔순 잔치를 열었다.
2019년(81세) 8월 용궁면에서 열리는 큰아들의 행사를 보
러 갔다가 쓰러져 뇌경색 판정을 받고 자리에 누웠다.
능소화가 피면서 악기를 창가에 걸어둘 수 있게 되었다
안도현, 창비시선 4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