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시
오늘밤 장미는 세계의 반(反)기획이다
죽은 자들이 죽지 않는 발이 해저를 걷고 있다 그것이 내
몸이다
천둥이 천상에서 지상으로 아픈 발을 뿌리내릴 때
소리는 빗물이 꾸는 가시 꿈, 사방에서 악의 술어들이 취
하고
우리는 우리의 주검에 핀 살의 현상이고 음시다
수천의 혀를 날름거리며 피 흘리는 사전, 그것이 내 몽
이다
에포케(epoche)씨가 살로 세계를 쓸 때, 끝없이 제 살을
찢어 흰 숨결에 섞는 파도
그것 또한 내 몸이니, 연기 내며 비는 귀부터 타오르고
오늘밤 장미는 견고한 유머고 종이 요새다
벼락 속에서 지상의 모든 이름을 버린 어휘들이 태어나
웃을 때
섬광으로 피는 꽃들은 혼들의 무수한 편재다
백(白)과 골(骨) 사이, 밤은 늘 검은 수의를 입고 창가를
서성이므로
거대한 홀이 뚫린 이 세계의 중앙국 음부에서
(이 괄호 안의 세계가 open임을 증명할 수 없다)는 제2의
주어
당신은 언어 속에서 살해되는 ING 생체다
(이 비극의 괄호 밖 세계도 open임을 확증할 수 없다)는
제3의 주어
나도 이미 언어 속에서 화형중인 ING 사체이니
장미는 장미의 유턴이고 돌에 고인 번개다
장미는 시가를 물고 흑풍 속에서 백발을 흩날리는 양초
인간
이 비극을 빗줄기는 흰 척추를 드러낸 채 밤새 대지에 음
사하는데
이 참극을 새들은 살을 흩뿌려 잠든 잠을 깨우는데
망각되지 않는 어휘들, 오랜 연인처럼 내 살 속 해저를 걷
고 있다
죽은 자들의 목이 해파리처럼 수면으로 떠오르고
절벽 위엔 팔만사천 개의 손들이 공중을 한 장 한 장 찢
어 날리고
흰 사리 문 목어들이 북천에서 헤엄쳐오니
오늘밤 장미는 불의 유마경, 얼음의 유머경이다
산 자들의 죽은 발이 꽃밭을 걷고 있다 그곳 또한 내 몸
의 적도이니
에포케씨는 펜을 던져, 천둥이 살던 지하의 관시를 파묘
하라
악의 술이 번지고 번져 닿는 저 세계의 실뿌리들
음시
함기석, 문학동네시인선 1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