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시’라는 침실
내 손가락을 만지작거린다. 팔베개를 한 팔이 저려온
다. 감각이 사라진다. 네가 눈 감고 내 손가락을 만지작
거리는 걸 하릴없이 바라본다. 마치 전생처럼 썰물처럼
내 손가락의 감각이 사라진다. 그리고 깜박깜박 잠이 밀
려온다, 미래처럼 밀물처럼, 우리는 함께 잠긴다.
책장을 넘기듯 등이 찰나 꺼졌다 켜진다.
가수면 상태에서 너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려온다.
어느새 깼는지 아니면 잠들지 않았는지, 내게 하는 말인
지 혼잣말인지. 홑이불 같은 너의 목소리를 끌어 덮는다.
전 세계 해변의 면적은 어느 정도일까?
최소한 그 면적의 합은 서울보다 클 거야.
서울이 다 뭐야, 최소한 우리나라보다는 클 거야.
우리나라가 뭐야, 웬만큼 큰 나라보다는 클 거야.
적어도 우리가 만나고 있는 이 ‘시 세계’에서만큼은
그 모든 나라를 다 합한 것보다 클 거야.
드넓은 해변의 모래.
지난여름 내가 한쪽 발로 절뚝이며 모래 위에 쓴 너의
이름.
해변의 모래는 죽은 이들이 미처 못 한 말들이 해와 달
빛에 그을려 부스러진 잔해들이야.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라텍스 침
대 위를 눈을 감고 걷는다.
한껏 달아오른 해변의 모래에 네 발목까지 다리가 푹
푹 빠진다.
죽은 이들의 화장된 말들 속에 발이 푹푹 빠진다.
네 콧등에 금세 땀이 송글송글 맺힌다.
무슨 소리가 들려?
내가 걱정스레 묻는다.
한없이 밤이 이어지고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세상 약속의 절반 이상은 사라질 텐데.
지키지 않아도 아무도 뭐라고 하지 않을 텐데.
내일 또 보자,라는 말을
못 지킬 약속으로 남기는 일은 다시 없을 텐데.
밤에 벌어진 검은 입
밤이 창문들을 벌리고 도시가 떠나가라 울기 시작하
는 시간.
갓난아기처럼 밤이 울면서 기어 오고, 창문마다 둥근
달이 우유병처럼 꽂힌다.
되레 밤을 꿀꺽꿀꺽 삼키며 세상에 흘러넘치는 흰 구
름들.
책장을 덮듯 밤이 하얗게 잠든다.
밤에 링거액처럼 눈물들이 듣기 시작한다.
귓가에 속삭이던 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 창문을 연다.
커튼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썰물처럼 빠져나간다.
너는 내일 아침에 또 보자는 약속도 없이 창문을 통해
시 밖으로 빠져나간다.
너는
시 속으로 들어올 때와 나갈 때가 다른 사람 같다.
시 밖에서 우리는 생면부지다.
만약 우리의 시 속에 아침이 오지 않는다면
김중일, 문학과지성 시인선 5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