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와 이발사
이럴 때 나도 신중해져서 가위 든 손이 주춤거린다
혼자 머리칼 자를 때마다 까만 손가락이 목덜미에
닿아 간지럽다
선불 받고 사라진 이발사
그 시커먼 늙은이는 길거리에서 내 머리를 자르다
경찰이 보이자 달아나버렸다
반만 잘라놓고 어쩌라고
기우뚱 앉아 한나절 기다렸으나
그 이발사, 아니 빼빼 마른 사기꾼, 아니 넝마주이,
숙맥
돌아오지 않는 호숫가 그날
고요해져서 내가 영 나 같지 않을 때
잘라버린 머리칼이 문턱 너머 풀풀 흩어질 때
두피가 비누처럼 부풀고
머리칼이 음모처럼 가지런해질 때
새장 든 소녀가 지나가고 탱크가 지나가고 한국인
부부가 밥을 파는
그 망해가는 가게가 있는 길거리
페와 호수로 난 날아간다
그와 다시 마주치면 이 언밸런스 스타일이 뭐냐고
이번엔 제대로 잘라달라 조를 텐데
어수선한 잠의 호수 위로 그는 자꾸 떠오르고
좌우 전후를 따지는 내 머리가 흰 바위들 곁으로
가라앉았다
김이듬
말할 수 없는 애인, 문학과지성 시인선 3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