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몰상식한 놈이군!”
일본회의 총집행위원회 이사장인
다케우키 센은
손에 든 서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목에서부터 얼굴까지 붉게 물들자
고혈압이 걱정될 정도다.
“ 누구라고?”
“ 쿠도 신이치입니다.”
“ 어디서 들어본 이름인데?”
“ 그 일본 경찰의 구세주니 뭐니 하는
고등학생 탐정 말입니다.”
“ 아!”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그는
곧바로 이를 갈면서
“ 보스를 감옥에 보내고
우리 일본회의에 엄청난 손해를 입힌
그 녀석이군.”
“ 네.
그 녀석입니다.”
“ 건방진 놈...
그래서?
외국에서도 함부로 건들지 못하는 인물이라고?”
“ 들려오는 소문은 그런데
확실히 확인된 정보는 없습니다.”
“ 우리 쪽에선
그 소년이 검은 조직과 접촉이 있었을 시에 (명탐정 코난 1화 롤러코스터 살인사건)
신경을 아예 끊어버린 건가?”
“ 그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죠.
그게 패착이 돼버렸지만...”
쓴웃음을 짓는 상대를
다케우키 센은 냉정하게 쳐다봤다.
“ 지금이라도 제거한다면?”
“ 글쎄요.
만만찮을 겁니다.
그 소년은
고이즈미 부자와는 다른 유형의 인간이니까요.”
“ 허!
천하의 데라지마가 상대를 꺼린다?
내가 잘못 들은 건 아니겠지?”
데라지마 테즈오는
여전히 쓴웃음을 흘렸다.
“ 창밖만 봐도 아실 텐데요?”
“ 쯧!”
도쿄 시내 전체가
재벌개혁을 외치며 쏟아진 촛불로 가득했다.
재벌들은
이 상황을 달갑지 않게 여겼고
일본회의 내부에서도
고이즈미 부자와
스즈키 재벌, 모미지 콘체른을 자극해 사달을 일으킨
총집행위원회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이들이
한둘이 아니다.
협상도 시작하기 전에
같이 죽자고 덤비는 그들의 강경한 대응에
모두 당황했다.
‘ 한 발도 양보하지 않겠다는 거냐?
고이즈미.’
인정한다.
고이즈미 가문은
일본 정계에서도 목에 힘 주는 가문인 것을.
그러나
고이즈미 준이치로는
홀로 고고한 나머지
다른 무리와 어울리지 않았다.
까마귀 노는 곳에 백로야 가지마라도 아니고
고이즈미 준이치로와 신지로는
당대 권력자와 실력자를 벌레 취급하길 서슴지 않았다.
‘ 세상은 혼자 사는 곳이 아니야.
당신은 그걸 깨달아야 해.’
고이즈미 부자 라고
부정을 저지른 적이 한 번도 없을까?
다케우키 센은 믿지 않았다.
세상은 끼리끼리 노는 곳이니만큼
고이즈미 부자는
백로처럼 고결하지도 않고 우아하지도 않다.
결국
그들도 까마귀였다.
“ 이대로 버티면 나중에 수그러들지 않을까?”
“ 그것도 방법이지만...
그래서.......
우리한테 이 문서들을 보낸 겁니다.”
데라지마 테츠오는
다케우키 센이
땅바닥에 내팽개친 서류를 주워들었다.
특별히 중요한 국가기밀이나
기업비밀 같은 건 없었다.
하지만,
이 내용이 밖으로 유출될 경우
일본회의 쪽의 많은 사람이
얼굴을 들지 못할 것이다.
그것도
단순한 비리 수준을 넘어서
과거
노팬티 샤브샤브 스캔들을 능가하는
엄청난
스캔들급 사건들 자료들이 수두룩하니..........
사실
그 사건 때문에
일본 대장성은 완전히 갈기갈기 찢겨지고
지금도
일본 재무성으로 이름이 바뀌기는 했지만
그 말 자체가
재무성 내에서는 금기어로 취급될 정도로
최악의 스캔들 사건이었고
그 사건 때문에
그 당시
스펙터가
일본 대장성을 장악하려고 했던 시도는
보기좋게 실패했으니..........
진짜.......
신이치가 보낸 요약본 자료들 원본이
대중들에게 퍼지는 날에는
일본회의에 가입된
일본 중의원, 참의원 전원은
전부 다
의원배지를 떼고도 남을 정도급라고나 할까........
아니
일본 검찰청 최고의 수사기관인
도쿄지검 특수부 최고의 개가라고 할 수 있는
다나키 가쿠에이 구속 수사를 능가하는
초대형급 수사를 하고도 남을 최고의 비리들이 득시글하니......
사실
한국도 그렇지만
일본은
특히
의원배지를 뺏긴 정치가는 일반인 이하로 취급받는
그런 국가이니..........
차라리
법정에서 시시비비를 가릴 수 있다면
신경도 안 쓰겠지만
윤리적 타락은
대중의 공감대를 형성할 테고
촛불시국을
더욱 더 자극할게 뻔했다.
“ 한마디로
시간 끌지 말라는 경곱니다.”
“ 언론을 이용해 거짓으로 몰아가는 건?”
데라지마 테츠오는
고개를 흔들었다.
“ 아마...
이것만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만약 우리가 부정하면
더 확실한 증거를 들이밀겠죠.”
그때는
우리에게만 증거를 보내진 않을 거란 말은
목구멍으로 삼켰다.
“ 쯧!
에도가와 코난이라는 소년의 모습으로
검은 조직을 조사하던
그 때
완전히 짓밟았어야 했어.”
아무리 후회해도
죽은 자식 불알 만지기다.
밖으로 나온 데라지마 테츠오는
휴대폰을 들었다.
“ 접니다.
모미지 콘체른 때리기는
그만두고
스즈키 그룹 쪽에 심어둔 애들도 활동 중지시키세요.”
“ 알겠습니다.”
용건만 간단히 전하고
통화를 마친 그는
품에 넣으려던 휴대폰이 진동하자
귓가로 가져갔다.
“ 어. 말해.”
“ 문제가 생겼습니다.”
“ 문제?”
그것이 무엇인지 듣고 있던
그의 얼굴이
점점 창백해지더니
곧바로
말 그대로
방금 나간 문을
거의 때려부수듯이 열고는
다급하게
다케우키에게 달려가서
귓속말을 하고
그 귓속말을 듣고 있던
다케우키의 얼굴은
거의 시체 저리가라급으로 창백해지더니
다급하게
“ 야!
당장 그...쿠도 신이치라는 소년과 약속 잡아!”
“ 지금 말씀입니까?”
“ 그래! 당장!”
진짜로
쿠도 신이치가
일본회의가 수작을 부린
남미 인질극 사건에 대한 비밀을 알고 있고
그 내용을
미국 정부에 까발리면
스즈키 그룹, 모미지 콘체른과 재벌개혁 따위는 문제도 아니다.
거기에
쿠도 신이치가 중국에서 받은 그 USB 안에는
일본회의의 전 회원들에 대한
모든 것들이 다 들어있었다.
그것도 모자라서
쿠도 신이치가 수호 라는 가명으로
한국에서 일할 당시
일본회의에서 꾸민 일들 (영화 강철비1, 2) 모두를
쿠도 신이치가 해결하면서
그들이 관련되었다는 증거와
미국과 유럽에서
스펙터가 저지른 일들 (영화 에어포스 원, 백악관 최후의 날, 런던 헤즈 폴른) 에
그들이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고
그것을 확증하는 증거까지 있다는 것을
친절하게 (?) 알려주기까지 했으니.......
만약
그 내용들까지
언론에 다 까발려지는 날에는
일본회의는
미국과
영국
그리고
유럽 모든 국가의 분노로
핵공격 급의 역공격을 당하기도 전에
막말로
내부분열로 자폭할 가능성이 더 높았다.
“ 무슨 조건이든 다 수용한다고 해!”
일본회의
日本?議 (にっぽんかいぎ)
1. 개요
2. 상세
3. 설립 및 기원
3.1.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3.2. 일본을 지키는 모임
3.2.1. 신사본청
3.2.2. 생장의 집(세이쵸노이에)
3.3. 두 조직의 결합
4. 주장과 활동
5. 소속 인물
6. 사건 사고
7. 위기?
8. 관련 도서
9. 관련 기사
1. 개요[편집]
약 38000명(2016년 초 기준)의 회원과 243개 지부, 약 1700명의 지방의회 의원이 활동하고 있는 일본회의는 일본 최대 우익단체 또는 아베정권을 조종하는 거대 세력으로 불리기도 한다.
- 일본회의의 역사인식과 교육관: 무라야마 담화 정신에 대한 도전, 조진구,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아베 총리의 정책적 성향에 큰 영향을 미친 일본회의는 현재 일본 최대의 보수계 단체이다. 일본회의는 정계, 재계, 사법, 교육, 종교 등의 보수계 단체 및 개인과 연계된 우익 및 보수단체의 결합체이자, 우익의 내셔널 센터로 기능하고 있으며, 보수계 단체 및 우익 성향 단체 간의 연락기관의 역할도 하고 있다.
- 일본회의와 아베 정권의 정책 성향과의 상관관계 연구, 김숙현, 국가안보전략연구원.
일본 최대 규모의 우파 정치 결사 조직.
정치·경제·문화·종교·예술 분야 등 각계 각층의 인사들이 결집해 만들어진 조직이다. 평화헌법으로 대표되는 현행 전후체제를 부정하고, 전쟁 전 및 전시의 일본 체제와 사상을 복원하는 것을 그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 헌법 개정·수정주의 역사 교육·제국 시기의 법제 보존 및 부활 등을 추진하고 있고, 이 중 상당부분을 이미 실현시킨 단체이다. 일본의 모든 우경 활동과 논란들을 추적해보면 정점에 항상 이 조직이 있을 정도. 일본 종교계 우익의 구심점이 신사본청이라면, 정치-사회계에서는 바로 이 일본회의가 있다.
일본내의 주요 우익집단들 중에서도 가장 자금력과 정치적 영향력이 강한 조직들이 협력해서 만들어진만큼 일본사회에 있어서 강력한 영향력을 보유하고 있으며, 하부에 수 많은 프런트 조직을 두고 있어 그 규모가 매우 방대하다. 일본 아베 정권 및 자민당과의 긴밀한 연계가 의심되고 있다. 외신에서는 이 단체를 극보수[1], 국수주의[2] 로비단체라고 평가하는 경우가 많다.[3]
2. 상세[편집]
1997년 5월 30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라는 두 단체가 통합해 발족한 민간조직이다. 2017년 8월 기준 회장은 다쿠보 다타에.[4] 회원수는 2017년 기준 약 4만 명이고, 일본 도도부현 47개 전체에 본부가 있으며 시정촌 241곳에 지부를 두었다. 브라질에도 해외 지부가 있다.
일본 국회의원 중 약 270여 명 정도가 일본회의 회원이라고 한다. 이는 일본 중의원의 40%에 달하는 숫자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의원연맹 하의 일본회의국회의원간담회라는 것도 결성해 현재 원외, 원내 포함해 입헌민주당[5], 국민민주당, 일본 유신회도 있으며, 95% 이상이 자민당이다. 그 외에도 지방의원, 경제인 동지회까지 결성했고, 일본 정책 연구 센터라는 싱크탱크도 있다.
일본회의 창립 멤버인 전 총리 아베 신조를 포함해, 4차 아베 내각 당시 기준으로 각료 총 20명 중 15명이 일본회의 회원이었다. # # 극우적인 말을 자주 하는 아소 다로가 일본회의 멤버이며, 자민당 정조회장 기시다 후미오와 도쿄도지사 고이케 유리코도 회원. 일본의 대표적 우익사관론자이자 상술한 가세 도시카즈의 아들인 가세 히데아키 역시 이 단체의 대표회원을 역임하였다. 심지어 한국에서는 자민당 내 상대적 온건파로 알려진 이시바 시게루도 일본회의 소속이다 물론 이시바 말고도 의외로 자민당 온건파 소속인 일본회의 회원들이 꽤 있는 편이다.
공식 회원만 해도 4만 명에 달하는 대규모 조직인 만큼 엄청난 자금을 휘두른다.[6] 단순 연간회비 수입만으로도 1년에 약 4억 엔을 벌어들이고,[7] 협력단체가 보내는 기부금과 협찬금도 상당하다고 한다. 일본회의가 본격적으로 발족하기 이전인 1970년대 중반 메이지 신궁은 원호법제화운동을 성공시키고자 억 단위의 돈을 아무런 조건도 없이 마구 뿌려댈 정도로 자금력이 막강했다.
이러한 자금은 일본 전국의 지방조직을 만들어 영향력을 확대하는 데에 사용된다. 상술했듯 일본회의는 일본 전국에 지부 243곳을 두어 이들 지부를 통해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의원들을 당선시키고 성장시키는 데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다. 실제로 일본회의 사무총국의 홍보담당자는 최종적으로는 일본 전체 소선거구 수와 비슷하게 3백여 개 지부를 각 선거구에 설립하여, 모든 선거구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이 미치는 후보를 양성하는 것이 목표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궁극적으로 천황제 국가의 복원을 꿈꾸는 신흥종교 생장의 집(生長の家) 원리주의자 무리가 그 배후라는 설이 있다. 그런데 곧 후술하겠지만 '천황제 국가의 복원'을 노린다면서 한편으로는 황태자였던 나루히토와 노골적으로 갈등을 빚었던 모순적인 집단이기도 하다. 결국 천황의 권위는 일본제국 수준으로 높이되 실권은 현재 수준으로 묶어버려 자신들이 호가호위를 하겠다는 것.
그동안 한국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조직이었지만, 2019년 일본의 대한국 수출 통제와 이로 인한 일본 불매운동이 벌어지는 등 2019년 들어 한일 양국의 관계가 최악으로 치닫자 한국 내에서도 일본회의가 주목받았다. 아베 정권 들어 극심해지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해 이해하려면 일본회의를 반드시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김어준의 다스 뵈이다 70회에서 호사카 유지 교수가 일본회의에 대해 소개[8]했으며, 이규연의 스포트라이트 208회[9], MBC 스페셜 816회[10]에서 일본회의에 대해 심층 분석했다. 조국 당시 청와대 민정수석이 수석·보좌관 회의에 일본회의의 정체를 파헤친 책 《일본회의의 정체》를 들고 참석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일본군 위안부를 다룬 영화 《주전장》에도 일본회의가 등장한다. 위안부 문제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 영화지만 우익사상의 기원과 일본회의 조사 또한 겸한 작품이다.
매달 '일본의 숨결(日本の息吹)'이란 기관지도 발행한다. 표지 그림[11]부터가 일본의 이상적인 가족의 모습이나 명절을 쇠는 모습 등 전통적인 가치관을 반영하며, 2017년 4월호의 표지를 보면 쇼와 덴노와 고준 황후로 보이는 사진이 노골적으로 걸려 있다. 그러니까 일본회의가 바라는 세상은 쇼와 시대의 재림, 레이와 시대에 와서까지 사자에상같은 사회라고 볼 수 있겠다. 어른제국의 역습?
3. 설립 및 기원[편집]
일본회의는 공식적으로는 1997년 5월 30일, 유력한 우파단체였던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와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통합하면서 결성되었다. 그러나 양 조직의 실질적인 사무를 이끌어나가던 핵심 인사들이 설립 이전부터 동일했던 점이나, '일본을 지키는 모임'이 두각을 드러낸 1979년 경의 원호법제화 운동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맡은 '일본청년협의회'의 인사와 조직이 이후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에서도 핵심을 차지한 것을 보면 사실상 이 두 단체는 1970년대 후반부터 그 행동과 목표를 같이 해왔다고 볼 수 있다.
즉, 일본회의의 실질적인 시작은 1970년대부터이다.
3.1.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편집]
일본회의의 근간이 되는 조직 중 하나인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는 1981년 10월, 당시 성공리에 목표를 달성한 원호(연호)법제화 운동을 추진한 조직들과 인원을 기반으로 탄생하였다. 헤이세이나 쇼와 등 일본 특유의 연호 관련 법령은 황실전범에 규정되었는데, 패전 이후 GHQ가 관련 규정을 황실전범에서 삭제하였으므로 더 이상 법률적 근거를 상실해버렸다. 물론 관용적으로 계속 쇼와 연호를 사용하긴 했지만 언제 사용을 중지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따라서 우익계 인사들은 연호제를 지지할 법률을 다시 제정하여 법적 근거를 갖추고자 하였다. 이것이 '원호(연호) 법제화 운동'이다. 이 운동은 당시 여러 갈래로 나뉘어 있던 일본 우파계 조직이 한데 모여서 활동하는 계기가 되었고, 이후 일본 우파가 전개하는 '국민운동'의 큰 기반이 되었다.
쇼와 천황 재위 50년째인 1975년부터 운동을 시작했는데 1979년 일본 국회에서 원호법이 제정됨으로써 겨우 4년 만에 목표를 달성했다. 함께 운동에 참여했던 우파조직들이 이대로 해산하기에는 아깝다는 공감대를 이루어 재계, 정계, 학계, 종교계에 흩어진 우파인사 대표들이 한 데 모여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를 결성했다.
발족 당시 의장으로는 2차대전 연간에 일제의 충실한 외교관중 한명이었으며 전후에도[12] 멀쩡히 공무 근속에 일본국 유엔 대사 등을 지닌 가세 도시카즈가 참여하였고, 사무총장으로는 메이지 신궁의 부대표 소에지마 히로유키가 그 역할을 맡는 등 당시 일본의 많은 고위층들이 이 국민회의라는 조직에 참여하고있었다. 특히 이 국민회의는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인 신편 일본사를 편찬하여, 오늘날 일본 교과서왜곡의 핵심이되는 복고조의 역사관을 주창하는데에 큰 영향을 미쳤다.[13]
이 조직에 가입한 인원 중 상당수가 전후 탄생한 우파단체의 소속원이었고, 일부는 현재까지도 극우 및 신우익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한다. '국민회의' 계통의 현대 일본의 역사적 우파 조직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일본 일수회 (잇스이카이) - 스즈키 구니오가 대표라고 유명하다.
일본학생동맹
방패회 (다테노카이) - 미시마 유키오 문서도 함께 볼 것.
미시마 유키오 연구회
3.2. 일본을 지키는 모임[편집]
다른 한 중심축인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국민회의'보다 좀 더 앞선 74년에 결성되었다. 우파계 종교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결성하였으며, 그 시작에는 임제종 승려 아사히나 소겐(朝比奈宗源)이 있었다. 가마쿠라 엔카쿠지(円?寺) 주지를 맡기도 했던 아사히나는 이전까지는 평화운동에 주로 참여하던 종교인이었지만, 70년대 초반 이세신궁을 참배하던 도중 갑자기 하늘의 계시를 받았다고 주장하며, 이전까지 알고지내던 메이지 신궁과 도미오카하치만궁 등의 주요 종교단체들에게 '일본을 지키는 모임'을 창설하자고 호소하면서 이들을 모아 조직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전쟁 당시 '천황 신앙'을 신자들에게 호소하며 전쟁 선동과 선전에 앞장섰으며, 전후에도 헌법을 부정하는 등의 저작을 내며 영향력을 확장하던 신흥종교단체 생장의 집(生長の家)의 창교주 타니구치 마사하루(谷口雅春)가 가담하여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타니구치 마사하루는 조직의 설립 이전부터 아사히나 소겐과 회동을 가져왔으며 이후 '일본을 지키는 모임', 더 나아가 '일본회의' 전체의 조직의 인적 구성 측면에 다대한 영향을 끼쳤다.
이외에도 일본의 유명 역사소설가 야마오카 소하치가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일본 신토의 중심이자 신사본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메이지 신궁의 (국가)신토계 주요인물들과, 신흥종교단체들 중에서도 규모가 큰 생장의 집이 만나자 '일본을 지키는 모임'은 일본 내 우파조직들 중에서도 종교계인사들이 모인 막강한 곳으로 성장했다. 이후 쇼와 천황 즉위 50주년 봉축운동이나 원호(연호)법제화 운동을 추진하며 크게 두각을 나타내었다.
3.2.1. 신사본청[편집]
이세 신궁을 본종으로 하는 신사본청은 일본 신사계의 중심이자 정점에 군림하는 조직이며, 일본 전국에 퍼진 8만여 개 이상의 신사 중 9할 이상을 그 산하에 두고 있다. 여기에 더해 일본에서 신관이 되기 위해서 취득해야 하는 신관 자격을 수여하는 곳 역시 신사본청이며, 이름만 들어도 안다는 메이지 신궁이나 이세 신궁 등 부유한 종교법인들이 다수 소속되어 그 자금력과 인원동원능력이 어마어마하다.
신사본청은 전후 GHQ가 '신도지령'을 발표해 국가신토를 완전히 철폐하면서 탄생한 조직이라 표면적으로는 국가신토와 관계를 부정하지만, 실제로는 '메이지의 정치체제와 이념을 부활시킬 발판이 되는 시책을 강하게 지원'[14]하면서 국가신토의 부활을 꿈꿔왔다. 신사본청이 발급하는 신관 자격을 취득하기 위해서 수료해야 할 교육과정에서 그 면면이 드러나는데, 신관 자격을 취득하는 학과를 운영하는 두 사립대학은 모두 국가신토를 뿌리로 하고 있으며, 그 중 하나인 고갓칸 대학은 지금도 '황국의 도의를 가르치고 황국 문학을 배워 운용하는 것'을 건학의 이념으로 받들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황국'이란 '천황이 통치하는 나라, 천황을 최고 정신적 통합자로 섬기는 나라'라는 의미다.
이러한 신사본청의 극우 성향, 전쟁 전으로 회귀하고자 하는 본심은 후술할 생장의 집 정치연맹의 조직에 자극을 받아 신사본청이 창설한 '신토정치연맹'의 정책목표에서 뚜렷하게 드러난다.
세계적으로 자랑스러운 황실과 일본의 문화전통을 소중히 하는 사회건설을 지향한다.
일본의 역사와 특성을 고려한 자랑스러운 신헌법의 제정을 지향한다.
일본을 위해 고귀한 생명을 바친, 야스쿠니의 영령에 대한 국가의례 확립을 지향한다.
일본의 미래에 희망을 품을 수 있는, 마음이 건강한 아이들을 키우는 교육 실현을 지향한다.
세계로부터 존경받는 도의 국가, 세계에 공헌할 수 있는 국가확립을 지향한다.
심지어 이들은 이러한 이념에 찬동하며 이를 정책으로 실현시키기 위해 활동하는 하부조직인 '신토정치연맹 국회의원간담회'를 조직하였으며, 여기에 가담한 국회의원의 수는 중참 양원을 합해 304명에 이르며 당적을 초월한 결사를 이루고 있다. 일개 종교가 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투영하기 위해 국회의원의 4할 이상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신사본청의 힘은 정계 장악에만 그치지 않는다. 일본회의 성립의 뿌리가 되는 운동인 천황 즉위 50주년 봉축 행사부터 현재 이슈가 되고 있는 일본회의 주도의 신헌법 제정을 위한 국민 천만 명 서명운동에 이르기까지, 신사본청은 소속되어있는 신사들을 최대한 활용하여 자금·인력·홍보를 지원해왔다. 일본에서 부유함으로는 손꼽히는 메이지 신궁이 봉축 행사 당시에 몇 억엔에 달하는 자금을 내주었으며, 지금도 일본회의의 집회 활동에 들어가는 비용 중 30~40%를 항시 지원한다. 집회에 동원되는 인원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으며, 신사본청 산하의 신사들 다수가 아베 정권이 주장하는 헌법 개정을 위한 국민서명을 받는 홍보 부스를 운영한다.
일본회의 성립 이전부터 성립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신사본청과 신사본청이 대표하는 일본 신사계는 자금력과 인원, 그리고 '천황 중심 국가'라는 사상적 지향점을 제공해오는 뿌리이자 한 축이라 할 수 있다. 신사본청의 본종은 이세 신궁이나, 자금력이나 권력 측면에서는 메이지 신궁이 핵심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는 이후 일본회의의 설립 과정에서 메이지 신궁의 신관인 도야마 가쓰시가 핵심 역할을 한 것에서 잘 드러난다.
3.2.2. 생장의 집(세이쵸노이에)[편집]
생장의 집은 1930년 타니구치 마사하루가 창설한 종교로,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원래 또다른 신흥종교 오모토(大本)에서 편지 포교라는 일을 담당하던 인물이었다. 이후 오모토를 탈퇴해서 개인잡지 <생장의 집>을 발간했는데, 여기서부터 종교단체 '생장의 집'이 시작했다. 타니구치 마사하루가 생명의 실상을 깨달았기 때문에, 마사하루가 쓴 책을 열심히 읽기만 하면 모든 병이 치유되고 인생고가 해결된다는 흔한 사이비 종교적인 교리를 주장하였다. 성공한 사이비 종교가 늘 그렇듯, 실제로 병이 나았다는 신자가 쇄도하면서 교세가 급속도로 확장되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사이비 종교와 별 다를바가 없으나, 타니구치 마사하루는 신흥종교를 세우기 이전부터 '일본은 세계의 지도국이요, 일본인은 세계의 지배자로서 신에게 선택받은 거룩한 백성'이라고 주장하는 등 자민족 중심주의에 심취한 인물이었다. 생장의 집이 교세를 확장하던 시기는 한창 태평양 전쟁이 임박한 시기였다.[15] 이 시기 다니구치 마사하루는 '예수 그리스도도 천황에게서 비롯되었다.'는 둥 '천황 신앙'을 설파했다.출처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는 '대일본제국은 신국이고 천황은 절대적인 신'이라는 식의 극단적인 교리로 발전했다.
이러한 '천황 신앙' 중심의 교리와 전쟁 당시의 광기를 발판으로 생장의 집의 교세는 어마어마하게 불어나, 그 교세가 육군과 해군에 전투기를 헌납할 정도에 이르렀다. 결국 종전 후 GHQ는 타니구치 마사하루에게 집필활동을 금지했지만, GHQ 체제가 종결된 후 생장의 집은 다시 활동을 시작, 전후 헌법을 '점령헌법'으로 규정해 부정하고, 모든 주권을 천황에 봉헌해야 한다는 등의 극우적 발언을 담은 저작을 연이어 출간하여 우파 사이에서 두각을 드러내었다.
이렇듯 전후 체제에서 두각을 드러낸 생장의 집은 1964년에자신들의 교리를 정치에 반영하기 위해 정치결사 '생장의 집 정치연합'(이하 생정련)을 조직하고, 당시 전공투가 맹위를 떨치던 안보투쟁 국면의 학생사회에 영향을 끼치기 위해 생장의 집 학생회전국총연합(이하 생학련), 생장의 집 고교생연맹(생고련)을 결성하였다. 생정련과 생학련에 소속 인사들은 종교계 출신 인사가 대부분 그렇듯이 대다수가 다니구치 마사하루의 '천황 신앙'과 극우적 논조가 가득한 교리를 절대적인 진리로 체화하고 있었으며 이러한 '진리'를 실현하기 위해 정력적으로 활동하면서 일본 우파 내에서 촉망받는 인사들로 성장하였다.
생정련은 적극적인 로비 및 지원을 통해 정계 인사들 사이에 영향력을 뿌리내리고, 자신들이 지지하는 국회의원 후보 17명 중 13을 당선시키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으며, 이 중 대표적인 사례가 전 참의원이며 노동성 대신이었던 무라카미 마사쿠니다. 이렇게 생정련의 지원을 받아 당선된 의원들은 교조인 다니구치 마사하루로부터 직접 지령을 받아 활동하며 생정련의 핵심 정책목표 중 하나인 우생보호법 개정에 힘썼다.
생학련은 각 대학에서 전공투에 맞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몇몇 대학에서 우파계 학생조직이 학생회 선거에 승리하는 결과를 이끌었고,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우파계 학생회 전국조직인 전국학생자치회연락협의회(전국학협) 결성을 이루어냈다. 이렇게 성장한 우파 학생회 조직은 안보투쟁의 국면을 뒤집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이후 일본 내 좌파 운동권 세력의 소멸이라는 전환을 이루어내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성장한 생장의 집 계열 우파 활동가들은 이후 '일본청년협의회'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일본을 지키는 모임'과 '일본을 지키는 국민회의' 양쪽 모두에서 핵심 사무를 맡으며 우파 조직 실무진의 인적 구성의 핵심을 차지하였다.
그러나 2009년 창교주 타니구치 마사하루의 손자 타니구치 마사노부(谷口雅宣)가 생장의 집 3대 교주로 취임한 후 교단의 색깔을 바꾸었다. 3대 교주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생정련과 생학련 등 정치결사 일체를 해산하고 정치활동의 중지와 특정후보의 선거운동 지원 중지를 발표하며 정계와 스스로 단절하였다. 여기서 더 나아가, 2010년대 들어서는 창교주의 극우적 사상을 비판하고 이런 교리에 따라 행동하는 극우 인사들의 행적, 즉 일본회의의 활동과 아베 총리의 행동을 비판하는 성명을 내면서 교단의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다.
따라서 현재 생장의 집은 일본회의 및 일본 내 우익과는 연관이 없다. 그러나 1-2대 교주 시절 생장의 집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당시의 교리를 믿으며 그에 따라 행동하고, 그러한 행동들이 일본회의의 운영과 행적에 큰 영향을 끼친다. 아베 신조의 씽크탱크이자, 일본회의와의 연관성이 강하게 의심되는 일본정책연구센터의 장이자 아베 신조의 브레인으로 꼽히는 이토 데쓰오(伊藤哲夫), 2019년까지 총리보좌관이었던 에토 세이이치(衛藤晟一)가 생학련 출신이다. 또한 일본회의의 성립에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으며, 1970년 원호법제화 운동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일본회의의 모든 '국민운동'을 설계하고 실무를 책임져온, 현 일본회의 사무총장 가바시마 유조(?島有三) 역시 생학련 출신이다.
3.3. 두 조직의 결합[편집]
이 두 조직이 결합한 데에는 당시 두 조직의 사무국이 하나였다는 점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두 단체는 당시만 해도 공식적인 간판을 달고 활동하는 단체가 아닌 어디까지나 우익계열 유명인사들의 사모임에 가까웠고, 이 때문에 양 단체 모두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사무국장 역할을 형식적으로 맡았다. 당시 양 단체의 사무국장을 겸임하던 인물은 메이지신궁의 전 신관 도야마 가쓰시와, 생장의 집 학생조직 출신이었던 가바시마 유조였는데, 원호법제화 운동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이후 이들은 서로 협력하여 양 조직의 임원회에 조직의 통합을 설득하였고, 이를 각 단체의 대표가 받아들이면서 1997년 일본회의가 탄생했다.
일본회의의 설립대회는 1997년 5월 30일 도쿄 기오이초에있는 호텔 뉴오타니에서 열었다. 당시 일본회의의 기록에 따르면 설립대회에는 우익인사 약 1천여 명이 집결하였는데, 신사본청 총장에서부터 당시 메이지대학의 총장, 유력기업가와 예술계 인사들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막론하고 상당히 다양한 인사들이 참여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은 설립대회가 열리기 바로 전날인 29일 뉴오타니에서는 일본회의 국회의원간담회의 설립총회가 열렸다는 점이다. 이전까지는 개별 의원들이 우익계단체와 연동하여 활동하거나 소규모 단위의 파벌에서 함께하는 경우는 많았지만, 100여 명이 넘는 국회의원들이 이 총회에 참여했다는 기록을 통해 이 시점부터 본격적으로 우익계열 의원들의 대규모결집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일본회의 측 자료에 따르면 대리출석을 포함하여 설립총회에서는 115명이 참가하였고, 총회 이후 보름이 지나자 입회자 수가 2배가량 증가하여 중의원 133명, 참의원 71명이 이 모임에 이름을 올렸다.
4. 주장과 활동[편집]
우리 나라는 자연과 공생하면서 전통을 존중하고, 해외 문명을 받아들여 우리 것으로 승화하면서 국가건설에 최선을 다해 힘써왔다. 메이지 유신으로 시작된 최초의 근대국가 건설은 이러한 국풍의 눈부신 정수였다. 또한 유사 이래 전대미문의 패전을 경험하면서도 천황을 국민통치의 중심으로 생각하는 국가의 특색은 전혀 변함없이 이어져 왔으며, 황폐해진 국토와 정신적인 허탈감 속에서도 국민의 충실한 노력을 토대로 나라를 경제대국으로까지 발전시켰다. 그러나 이런 놀랄 만한 경제적 번영의 그늘에서 일찍이 우리 선조가 키우고 계승한 전통문화는 경시되었고, 빛나는 역사는 잊히고 오욕되었으며, 국가를 지키고 사회공공에 힘쓰던 기개는 사라졌다. 그 결과 오직 개인의 보신과 쾌락만을 추구하는 풍조가 사회 곳곳에 만연하여 바야흐로 국가를 무너뜨리고 있다.
아울러 냉전구조가 붕괴하면서 마르크스주의 오류는 철저히 폭로되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는 각국이 노골적으로 자국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새로운 혼돈의 시대로 들어서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일본에는 이 격동의 국제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확고한 이념과 국가목표가 없다. 이대로 무위도식한다면 망국의 위기가 소리 없이 닥쳐오는 것을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살아가는 일본인으로서 혹독한 자각에 근거하여, 국가발전과 세계공영에 공헌할 수 있는 활기찬 국가건설과 인재육성을 추진하고자 본회를 설립한다.
다나카 야스히로, 메이지 신궁 신관, 초대 일본회의 이사장. 일본회의 설립대회 연설 중 일부.[16]
1. 아름다운 전통의 국민성을 내일의 일본에
- 국민통합의 중심인 황실을 존경하고, 동포애를 함양한다.
2.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헌법
- 우리 나라 본래 특색에 바탕을 둔 '신헌법' 제정을 추진한다.
3. 국가의 명예와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정치를
- 독립국의 주권과 명예를 지키고, 국민의 안녕을 도모하는 정치실현에 이바지한다.
4. 일본의 감성을 키우는 교육의 창조를
- 교육에 일본의 전통적 감성을 되찾아 조국에 대한 자부심과 애정을 지닌 청소년을 육성한다.
5. 국가의 안전을 높이고 세계 평화에 기여를
6. 공생공영의 마음으로 이은 세계화의 우호를
일본회의 홈페이지 내 '설립목적' 페이지[17]
얼핏 보기에는 건전한 목표이나, 상세설명을 보면 전통의 국민성을 수호하기 위해 부부별성제도나 새로운 가족관 등의 도입을 반대한다거나, 국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야스쿠니신사 참배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거나, 세계 평화에 기여하기 위해 자위대의 역할 확대를 추진해야 한다거나, 자학사관과 반일 사관으로 얼룩진 교육을 혁파해야 한다는 전형적인 우익 논조를 담아내고 있다.
이렇게 공식적으로 표방한 목표 외에도, 이들이 설립 이전 내지는 이후에 꾸준히 추진해온 이른바 '국민운동'에서 내건 '아름다운 일본의 재건과 자부심 있는 나라 만들기'라는 슬로건과 하위 조직 및 연관 단체 등의 구성을 미루어보면, 일본회의는 대체로 다음과 같은 목적을 이룩하기 위해 활동을 이어나간다.
천황
남계(男系)에 의한 황위의 안정적인 상속을 목적으로 한 황실 전범 개정[18][19][20]
헌법
역사와 전통을 기반으로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헌법의 제정
일본 헌법 제9 조 통칭 '평화헌법' 폐기 및 자위대의 존재를 헌법에 명기함[21]으로서 확실하게 전쟁이 가능한 국가로 전환할 법적 근본 확보.
사회
반일 발언하는 외국인 추방[22]
외국계 이민자(귀화인)의 사후 활동 감시
외국인 지방 참정권 반대
우생보호법 개정[23]
인권 기관 설치법 반대[24]
자치 기본 조례 제정 반대
교육
학교 교과서에 있어서 '반국가적' 서술의 시정
일본의 역사를 모욕적으로 단죄하려는 자학사관 교육[25]의 시정
학교에서 국기 게양 · 국가 제창 추진[26]
애국심, 공공예절 교육 등을 담은 '신교육 기본법'의 제정
국기국가법의 제정
역사
대동아전쟁은 미국과 영국 등에 의한 경제 봉쇄에 저항한 자위적 전쟁임을 명시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실현
야스쿠니 신사를 대체할 '국립추도시설' 건설 반대[27]
일본식 성풍속 복고
천황 중심의 전통적 남성 중심 사회 건설[28]
부부별성 법안에 반대
페미니즘 운동 저지
소수자 혐오 성향[29]
젠더 프리 교육의 시정[30]
5. 소속 인물[편집]
상세 내용 아이콘 자세한 내용은 분류:일본회의/회원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6. 사건 사고[편집]
아베 신조 내각의 지지율 하락을 불렀던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도 일본회의와 깊숙한 연관이 있다. 해당 사건 모리모토 학교 법인의 이사장은 일본회의 임원, 학교의 명예교장은 일본회의 회원 아베 신조의 부인 아베 아키에다.
모리토모 학교 법인에서 운영하는 쓰카모토(塚本) 유치원은 2016년 12월 혐한, 혐중 통신문을 학부모들에게 보내 한국 언론에 보도된 바 있다. 해당 유치원은 원생들에게 중대 사태가 발생하면 덴노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등 내용을 담고 있는 교육에 관한 칙어를 낭독시킨다. 당연히 타 유치원과 다르게 원생들을 굉장히 군대식으로 혹독하게 교육시키며, 이로 인한 아동학대 문제도 뉴스로 폭로된 바 있다.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의 범행 동기가 일본회의와 연관된 종교집단과 관련이 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범인의 어머니가 해당 종교집단에 빠져 가산을 탕진했고, 이에 범인이 분노하여 일본회의의 수장인 아베 신조를 암살했다는 것인데, 자세한 내용은 사건의 내막이 밝혀지기를 기다려야 할듯.
7. 위기?[편집]
현재 일본회의는 여러모로 복잡한 상황에 처해 있다. 먼저 첫번째는 상술했듯이 아키히토 상황의 생전 퇴위 및 왕위 계승으로 인해 딸 1명 뿐인 나루히토 황태자가 덴노가 되어버리면서, 일본 국민들의 80% 이상이 나루히토의 다음 덴노는 나루히토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가 되어야 한다고 여긴다. 그만큼 여성 덴노를 긍정적으로 생각한다는 증거.
게다가 일본회의와 자주 연대하던 전통적 보수층이 아이코 공주가 덴노가 된다고 해도 별다른 반발도 없을뿐더러, 구 황족과 결혼한 아이코 공주라는 조건을 건다면 덴노가 되는 것에 반발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이 때문에 남성덴노를 강력하게 지지하는 일본회의는 다소 난감해졌다. 실제로 이러한 입장은 집권여당인 자민당 내부에서도 점점 많아지고 있어서 남계 덴노제를 통해 과거 남성 우위에 있던 시절로 돌아간다는 일본회의의 계획은 무산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또한 일본회의가 지지하는 아키시노노미야 가문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로 인해 일본 국민들의 강한 패싱을 받고 있는 상황인데 만일 마코 공주가 그동안 보여준 대로 국민들의 강력한 반대를 무시하고 온갖 결점들이 가득한 코무로 케이와 결혼하는 순간 후미히토/히사히토로의 덴노 승계는 사실상 덴노제 폐지로 이어질 소지가 높아진 상황이다. 결국 마코 공주가 코무로 케이와 결혼하여 코무로 마코로 성을 바꾸었고, 이 때문에 후미히토 일가에 대해 우호적인 넷 우익들마저 대놓고 마코 공주를 비난한다.[31]
설상가상으로 일본회의가 강력하게 지지를 표명하는 아베 신조 당시 총리는 자신과 측근들의 온갖 재난 대응 무능, 경제 정책 실패, 그리고 온갖 망언과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벚꽃놀이 스캔들과 같은 각종 정치적 악재들로 인해 지지율이 하락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32] 더군다나 일부 혐한 성향의 인물들조차 2019년 무역 제재 실패 및 2020년 코로나19 방역 실패로 오히려 한국을 옹호하며 아베를 비난했다.[33][34] 즉, 아베 정권의 붕괴가 위험한 수준에 도달한 셈이다.[35] 한 술 더 떠서, 아베 총리가 2020년 8월을 마지막으로 사임할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아베 총리를 통해 헌법 개정을 도모하던 일본회의의 입장에서는 매우 난처할 수밖에 없다.[36]
다만 일본회의는 막대한 자금으로 전국의 선거구에 지부를 설립해서 입김이 닿는 정치인들을 양성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야를 가리지 않고 이들의 영향력 안에 있는 정치인들이 넘쳐나기 때문에 지금 당장은 목표를 달성하기 어려워 아베 일당을 토사구팽하더라도, 이후 제2, 제3의 아베정권을 배출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37]
실제로 아베 총리가 삽질을 반복하면서 가장 강력한 후임으로 주목받은 이시바 시게루 의원의 경우, 일본회의와 달리 호헌입장이지만 이시바 의원 또한 일본회의의 산하조직인 일본회의 국회의원 간담회에 이름을 올리고 있을 정도로 일본회의의 마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38] 사실상 아베 파벌과 경쟁 중인 자민당 내 다른 파벌들 뿐만 아니라, 제1야당인 입헌민주당 내의 의원들도 상당한 수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일본회의의 영향권에 있다보니 일본회의 자체가 붕괴하지 않는 이상 파시즘 부활 세력의 목표를 대변하는 정권은 계속 등장할 수밖에 없다.
일단 아베가 물러나고도 후임이자 사실상 아베의 바지사장인 스가도 각종실책을 보이면서 지지도가 떨어지고 있는 중이다. 한국 등 주변 국가들로부터도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2020년 도쿄 올림픽 개최에 대해서도 일본 국민들의 반응조차 상당히 부정적이다. 이 때문에 일본회의의 손아귀인 자민당의 내부분열이 크게 진행 중이다.
다만 일본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 성향 때문인지는 몰라도[39] 여전히 선거에서는 자민당이 우위이다.스가의 후임이자 사실상 아베의 바지사장으로 기시다가 떠올라 앞으로의 판도에선 일본회의는 유명무실해질 듯하였고, 제4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의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2021년 일본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사실상 자민당이 패배하는 결과가 나오면서 다가오는 총선 결과가 자민당에게 좋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는 여측이 나왔다.[40] 그러나 정작 49회 중원선에서 자민당이 이겨 일본회의 입장에서 일단은 한 숨 돌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2022년 7월 8일에 아베 신조 피살 사건이 발생하면서 일본회의에게 한번 더 위기가 찾아왔다. 세종대학교의 교수인 호사카 유지 교수의 소견에 따르면 현재 일본 극우진영에서 아베 신조만큼 카리스마 있는 인물은 없는거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아베의 동생인 기시 노부오는 건강이 아베보다도 양호하지 못한 편이라 한계가 있고, 다카이치 사나에를 필두로 한 강경 극우파도 아베가 없으면 이빨 빠진 호랑이인 셈이며, 따라서 아베가 없는 일본 정치권에서는 극우 세력이 예전만큼 힘을 못 쓰게 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8. 관련 도서[편집]
스가노 다모쓰(菅野完) 著 《일본 우익 설계자들》
아오키 오사무(?木理) 著 《일본회의의 정체》
동북아역사재단 편찬, 《'일본회의'와 아베 정권의 우경화》
9. 관련 기사[편집]
아베 뒤에 일본회의, 그 뒤엔 종교집단
한국 극우의 거울, 일본 극우의 설계자들
'한국때리기' 아베 배후에 일본회의와 신정련…日극우의 민낯
영화 <주전장>에 광분하는 일본회의 홈페이지 살펴보니
"한국에 대한 경제보복ㆍ망언 배후에 '일본회의' 있다"
아베 움직이는 비선실세, 그들의 목표는 '제국주의 회귀'
일본회의
일본회의
[1] "Tokyo's new governor defies more than glass ceiling". Deutsche Welle. 8 July 2020. Retrieved 2 August 2016. In 2008, she made an unsuccessful run at the LDP's chairmanship. Following her defeat, she worked to build an internal party network and became involved in a revisionist group of lawmakers that serves as the mouthpiece of the ultraconservative Nippon Kaigi ("Japan Conference") movement.
[2] "Nippon Kaigi: The ultra-nationalistic group trying to restore the might of the Japanese Empire". ABC News. 8 July 2020. Retrieved 3 December 2015. Nippon Kaigi, or Japan Conference, is an ultra-right-wing lobby group reshaping Japanese politics.
[3] 영어 위키백과에서도 극우, 극단주의, 일본 정체성 정치 단체로 분류하고 있으며 # 심지어 일본어 위키백과에서조차도 정치적 극우로 분류하고 있다.#
[4] 1933년 2월 4일 생이며, 표면적으로는 교린대학 명예 교수로서 활동하고 있다.
[5] 현역 회원으로는 류 히로후미, 마쓰바라 진, 와타나베 슈 의원이 있다
[6] 또한 우익 가맹단체까지 합하면 실질적인 회원수는 약 800만 명에 육박한다.
[7] 2021년 기준 한화로 무려 약 42억정도 된다.
[8] 1시간 54분부터
[9] <긴급 추적! '일본 회의'>, 2019년 8월 1일 방영
[10] <아베와 일본회의>, 2019년 8월 12일 방영
[11] 다케나카 도시히로(竹中俊裕)라는 삽화가의 그림이다.
[12] 미주리 항복 조인식때 시게미츠 마모루와 함께한 일본측 외교사절단의 일원이기도 하였다.
[13] 본격적으로 교과서 역사왜곡이 표면화된 것은 90년대 후반~2000년대 초반부터지만, 일본 우파단체들은 80년대 중후반부터 이미 교과서 역사왜곡 물밑 작업 중이었다. 이런 행각을 일본 내 주요좌파조직인 일본교원노조가 어떻게든 막았지만, 90년대 이후 교원노조의 힘이 약화되자 역사교과서왜곡이 가속화되었다.
[14] 국민의 천황 : 전후 일본의 민주주의와 천황제, 케네스 루오프 저.
[15] 본래 오모토도 상당히 우익적이고 일본중심적인 종교단체임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극렬한 우익사상과는 선을 그은 데다가, 한편으로는 좌파적인 세계보편사상을 주장했다. 또한 일본 제국 시절에는 오모토가 불손한 종교단체라 하여 정부 차원에서 탄압할 정도였다. 이러한 오모토의 양면성은 마사하루 같은 우익인사들이 오모토에 입교하는 계기이자 탈퇴하는 이유가 되는 등 양날의 칼처럼 작용했다.
[16] 아오키 오사무 저, 일본회의의 정체 30p.
[17] 이는 설립 당시 선언한 '기본운동방침'이기도 하다.
[18] 정치개입이 막혀있는 덴노의 계승에 관한 것인데 무슨 상관인가 싶지만,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외동딸인 아이코 공주만 있어서 문제가 된다. 남계만이 상속할 수 있게 되면 차기 황위는 아키히토 전 천황의 둘째 아들인 후미히토 친왕의 아들인 히사히토가 잇게 된다. 후미히토는 평소 행실도 문제고 정치적으로 극우로 의심받을 만한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에 일본회의에서 황실을 컨트롤 하기 쉬워진다. 그래서 주간지 등을 동원해 나루히토+아이코 공주를 엄청나게 공격하고, 히사히토가 황위를 계승하려는 압박해 왔다. 그런데 그걸 이전부터 걱정했던 아키히토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생전 덴노 양위라는 기습적인 결정으로 극우세력의 뒤통수를 갈기면서 스텝이 심하게 꼬여 버렸다.
[19] 그리고 이 때부터 수면 위로 드러난 마코 공주의 결혼 스캔들과 후미히토 본인의 추문이 줄줄이 이슈가 되면서 일본 대중에게 후미히토 친왕의 여론이 크게 악화되었다. 마사코는 1993년 나루히토와 결혼하고 수십 년간 와병생활을 하느라 나루히토를 공격하는 이들에게 까임거리가 되었지만, 2019년 황후가 되자마자 그 까다로운 트럼프 대통령 입에서 칭찬이 나올 정도로 훌륭하게 대처했다. 그래서 극우세력의 조종을 받아온 궁내청과 언론, 그리고 후미히토 일가를 바라보는 반감은 더욱 커졌다. 또한 나루히토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도 뛰어난 성적과 그 어느 누구도 흠잡을 수 없을 정도로 상당히 훌륭한 성품 등이 다시금 알려지자, 2019년 5월 이후 일본 내 진보이든 보수든 그 어떤 매체에서 조사해도 나루히토 다음 천황은 후미히토나 히사히토가 아니라 아이코 공주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80%를 돌파할 정도이다. 아베를 위시한 우익 세력들이 최대한 막으려고 하지만, 나루히토 덴노에게는 이들의 반발을 꺾고 아이코 공주를 천황으로 만들 수 있는 몇 가지 카드가 있기에 이들이 원하는 대로 황실이 움직이진 않으리라 보는 의견이 많다. 현 황실 전범대로라면 히사히토가 도중에 급사하거나 히사히토에게 자녀가 없는 경우 혹은 여성 황족들만 태어난 경우 일본 황실이 작살나기에, 일본 국민들 입장에서 그나마 합리적인 방안이 바로 아이코 공주가 천황이 되는 것이므로 여성 천황 찬성여론이 80%가 넘어간다. 게다가 일본 역사에서 여천황은 한두 명이 아니었기 때문에 딱히 문제될 것도 없다. 단, 여계 천황은 문제가 된다. 참고로 2019년 5월 기준으로 구 황족 전면 복귀 찬성은 거의 극소수 여론이고 여성 미야케 제도 신설은 찬반이 절반 정도로 갈린다.
[20] 신적강하된 황족 중에는 다케다 츠네야스 같은 사람들도 있지만, 정작 당사자인 다케다 츠네야스는 신적강하 이후에 출생한 삼남의 장남이기에 과거 사례 등을 감안하면 구 황족이라기 보다는 구 화족에 가까운 인물이다 보니 어찌저찌 구 황족 가문들 중에서 복수의 남성이 있는 다케다 가문이 복권이 가능하다 한들, 당주의 직계후손들이 엄연히 살아있기에 복권 대상도 아니며 계승권도 없기 때문에 다케다 츠네야스 같은 망나니가 황족이 될 확률은 없다. 뿐만 아니라 다케다 일가는 가문 전체가 신적강하 이후의 행적들이 하나같이 가관이다. 일부 후손들이 유흥업소에 들락날락거리다가 적발되어 여론의 질타를 받은 적도 있을 뿐만 아니라, 2015년에는 후손 중 다케다 츠네아키가 대마초 소지 혐의로 체포되었다. 3대 당주의 막내 동생 다케다 츠네카즈는 2020 도쿄 올림픽 유치 과정에서 뇌물 혐의로 2019년에 IOC 위원 및 JOC 회장직을 사임한 데다가, 츠네카즈의 장남 다케다 츠네야스는 극우 활동뿐만 아니라 올림픽에 관한 망언을 하고 연예인들과 각종 스캔들을 저지른 탓에 구 황족 전체를 바라보는 여론을 악화시킨 장본인이다. 특히 츠네야스는 자기 집안 혈통팔이가 너무 심하다는 비판과 '넷 우익의 아이돌'이라는 멸칭을 우익들 사이로부터 받는 이이다. 한 가지 웃긴 것은 츠네야스가 '메이지 덴노의 현손(4대손)'이라는 타이틀을 악용하여 혈통팔이를 한다는 점이다. 정확히 따지면 여계 혈통 쪽으로 메이지의 현손이 되는데, 그는 남계 기준으로 천황가를 정립하라고 주장한다. 만약 정말로 남계로 츠네야스와 천황가의 관계를 따지면, 무려 남북조시대인 1300년대에 태어난 천황의 후손 정도에 불과하다.
[21] 실제로 2019년 중의원 선거 당시 아베 총리가 평화헌법 관련해서 주기적으로 이야기하던 게 바로 이 내용으로, 이는 연립 여당인 공명당에서도 부정적으로 봤으며 선거 결과 집권 여당들은 과반수를 차지하는데 실패했기 때문에 일단 무산되었지만 아베를 포함한 우익 세력은 여전히 이를 실행하기 위하여 노력 중이다.
[22] 참고로 이들 입장에서 반일 발언하는 외국인은 극우들 사이에서 특정 아시아라고 불리는 한국, 중국, 북한 출신자들을 의미한다. 결국 일본 거주 한국인, 북한인, 중국인들을 모조리 추방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인 셈이다.
[23] 다만 여전히 이딴 생각을 할 가능성이 있다.참고
[24] 일본의 인권은 이러한 감시기관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잘 보장되기 때문에 필요 없다는 논리에서이다.
[25] 말이 자학사관이지 실제로는 근현대 일본 제국주의가 저지른 온갖 반인권 범죄들을 은폐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은 단어이다. 이 자학사관을 일본에 퍼트린 원흉이 누구인지를 두고 일본 우익들은 크게 2가지 견해로 나뉜다. 하나는 GHQ, 다른 하나는 특아라고 주장하는 한국, 중국 등의 스파이라는 것.
[26] 이 때문에 과거 아베 정권에서 한 학교의 일교조 교원이 이를 하지 않았다고 처벌해야 한다며 난리를 피운 적이 있다.
[27] 타쿠보 타타에 일본회의 회장은 야스쿠니 신사 참배에 대해 중국 · 한국 등 외국의 주장대로 "A 급 전범을 제외하면, 다음은 B, C, 마지막으로는 야스쿠니 신사 자체를 없애 버리라고 할 것은 눈에 선하다.", "외교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을 뿐"이라고 발언한 바 있다.
[28] 일부는 여성 참정권 박탈을 내세우기도 한다. # 다만 공식입장은 아닌 듯 하다. 하지만 이들이 유독 여성 미야케, 남계 여성황족이자 나루히토 덴노의 유일한 자녀인 아이코 공주의 덴노 등극을 의미하는 여성 천황, 여계 천황을 강하게 반대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쪽 영향이 큰 편이다.
[29]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재일 등 실로 다양하다.
[30] 여기서 말하는 젠더 프리 교육이란 젠더 이분법에서 자유로운 교육과 성소수자 권리를 지지하는 서양식 교육을 반대한다는 의미이다.
[31] 그런데 정작 일본회의가 뒤를 봐주고 있는 후미히토가 보여준 극우적인 면모가 그냥 단순한 립서비스라는 견해가 있다.
[32] 열렬한 아베 신조 지지자였던 오오츠카 아키오가 2019년 11월을 마지막으로 정치 관련 트윗을 일절 올리지 않고 있는데, 이는 암묵적으로나마 이제 더 이상 아베를 지지하지 않겠다는 의도의 표출인 셈이다.
[33] 특히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발표한 무역 제재 3개월분의 결과에 따르면,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은 쪽은 일본이며, 그 피해는 한국에 알려진 것보다 더 심각한 수준이라고 한다. 오죽했으면 셀프 경제 제재라는 단어가 유행할 지경이다.
[34] 또한 아베의 형편없는 코로나 대응 탓에 열렬한 지지자인 오가타 메구미마저 아베를 지지했음을 후회한다며 지지를 철회하였다.
[35] 극우 혐한 언론사인 산케이신문마저 내각의 붕괴를 우려했고, 자민당의 연립 정당인 공명당조차 총리를 비호해 줄 수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위험하다.
[36] 또한 2020년 1월 17일. 지지통신이 시행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아베 총리가 주도하는 헌법 개정에 대해 31.2%가 긍정, 45.9%가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37] 그리고 이러한 우려대로 아베 총리의 사임 후 아베 내각을 계승하겠다던 스가 요시히데 내각이 출범하였다.
[38] 또한 이시바에게는 치명적인 걸림돌이 있는데, 민중으로부터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지 몰라도 당 의원들로부터의 인기는 없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원내1당의 당 대표가 되어야 하는데, 이 당 대표를 가리는 방법이 당 의원투표이다 보니 당 의원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결국 이러한 우려대로 이시바 시게루는 2020년 자민당 총재 선거에서 3위로 낙선하게 되었고, 이시바는 총재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본인의 계파인 수월회의 회장 직에서 사퇴하였다. 사실상 나가리가 되어버린 셈이다. 또한 이시바 사퇴 이후 수월회는 집단관리 체제로 전환하였다.
[39] 참고로 일본선거는 무투표율이 자민당 지지율보다 더 높은 경우도 꽤 있을 정도로 정치적 무관심이 만연하다.
[40] 야마구치현은 방어에 성공했으나, 시즈오카현을 호헌파 야권 연합에게 빼앗겼다고 한다.
노팬티 샤브샤브
ノ?パンしゃぶしゃぶ
1. 개요
2. 상세
3. 창작물에서 언급되는 모습들
1. 개요[편집]
일본에 실존했던 유흥업소. 여성 점원이 노팬티 상태에 치마를 입고 일을 하는 샤브샤브 식당이다. 단속의 사각지대에 놓여 한때 크게 흥했으나 법 개정으로 현재는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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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병이 천장에 걸려 있어 술을 추가로 주문하면 점원이 테이블 위에 올라가서 술을 따르고, 앉아 있는 손님들은 점원의 치마 속을 올려다보는 방식의 유사성행위 업소. 경우에 따라선 아예 바닥이 거울로 되어 있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
2. 상세[편집]
지금와서 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방식의 가게고 요금도 비쌌지만 손님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이유는 여기 사장이 이 가게를 창업할 때 유흥업소가 아닌 식당으로 허가를 얻었기 때문에 기업이나 공무원들이 접대를 할 때 이 가게에서 하면 당당하게 회사 공금으로 결제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가게가 일본 언론에서 대대적으로 화제가 된 계기는 1998년 하시모토 내각 시기에 터진 대장성 접대 스캔들(大?省接待汚職事件)이다. 처음에는 경시청에서 공연음란죄로만 수사를 하려 했으나, 수사 도중 이용객 명단에서 대장성과 일본도로공단, 일본은행 등에 속한 고위직 공무원들과 다이이치칸교은행[1] 등 대형은행 관련 인사들의 이름이 대거 나타나면서 큰 파문으로 번졌다. 당연히 해당 사건에 연루된 인사들 대다수가 체포되거나 권고사직을 당했고, 일부는 자살을 하기도 했다. 소비세 5% 인상 논란과 함께 하시모토 내각을 끝장낸 사건임과 동시에 모리토모 학교 비리 사건 이전까지 일본의 경제관련 부처가 저지른 가장 유명한 부정부패 스캔들로 회자된다.#
노팬티 접대보다 더 수위높은 서비스가 암암리에 성행했는데, 일정 시각(매시 정각 등)이 되면 종업원들이 종이로 된 비키니를 입고 손님들에게 물총을 하나씩 파는 것. 물총을 종업원들에게 쏴 대며 종이 비키니가 녹아내리고 찢어져 종업원들의 가슴과 성기가 노출되는 것을 구경하고 즐기는 방식이다. 일본 서브컬쳐에 나오는 종이 수영복, 종이 비키니 등이 전부 이 물총 쏘는 서비스에서 유래된 것.
한창 유행할 때 기타노 다케시가 방송에서 진지하게 이런 가게가 있다고 얘기를 했지만 일본이 아무리 성진국이라도 이건 너무 심해서 말이 안 된다고 믿었던 MC가 "그런 가게가 일본에 어딨어요? 구라치지 마세요"라면서 전혀 믿지를 않았다. 그런데 뉴스 보도를 통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 밝혀지며 이후로도 계속 개그 소재로 쓰이고 있다. 참고로 이 때 전신 격인 노팬티 다방(ノ?パン喫茶) 관련 카더라도 사실로 밝혀졌었다. 점원이 노팬티로 커피를 나르는 다방이다.
요즘도 일부 퇴폐업소에서 종이 수영복 서비스와 함께 이걸 출장 서비스로 해 주는 곳이 있다고는 하는데, 카더라에 가깝고 결정적인 뒷받침 자료가 나오진 않는 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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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마 가장 수위가 낮은 바리에이션인 코스프레 샤브샤브의 경우는 21세기에도 영업을 계속 했던 것으로 보이나, 노팬티 샤브샤브 쪽이 워낙 충격적이었기에 이런 식의 변칙적 음식점 겸 유흥업소는 사실상 명맥이 끊긴 것으로 보인다.
3. 창작물에서 언급되는 모습들[편집]
시마 과장의 프리퀄이라 할 수 있는 시마 사원에 에피소드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사실상 1970년대에도 암암리에 존재했던 것 같다. 시마랑 밤을 보낸 대학생 유흥업소 여성이 증언하길, 여성 종업원이 나체로 밧줄에 묶여 다리를 벌리고 있으면 남성 손님이 깃털이나 붓으로 성기를 훑어서 애액을 보는 가게도 존재한다고 에피소드에 나온다. 그 손님은 다름아닌 그 여자의 교수!!
GTO에서 등장했다.(86화) 교장을 비롯 이사진들이 오니즈카 에이키치를 쫓아낼 음모를 꾸미는데... 종업원들이 왔다갔다 할 때마다 샤브샤브 먹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치마 쪽으로 시선을 보내는 아저씨들의 야릇한 표정이 압권.
은혼에서 시무라 타에는 1화에서 이런 가게에 팔려가서 일할 뻔 했다. 은혼이 1화부터 막장 만화란 것을 알 수 있다. 애니판에서는 심의 탓인지 하이레그 샤브샤브로 변경되었다.
도박마-거짓말 사냥꾼 바쿠 17권 183화에서도 팬샤브라는 이름으로 언급됐다. 실제 등장하지는 않았다.
마법선생 네기마에서도 나바 치즈루의 대사로 등장했는데, 정확하게는 원류가 되는 프로토타입인 노팬티 카페를 언급한다.
야쿠자 만화인 엠블럼 TAKE2에서는 주인공 아쿠츠 조지가 노팬티 카페를 발명한 걸로 나온다. 타임슬립물이라는 작품 특성상 다른 누군가가 개발할 아이템인데 자신이 주도적으로 먼저 선수친 것.
용과 같이 제로에서는 길거리를 지나가다 보면 노팬티 샤브샤브와 노팬티 카페 등 관련 문구들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물론 직접 들어가볼 수 있는 곳은 없지만, 캬바쿠라 영업이나 부동산 영업 도중 자금을 투자하여 제휴를 맺을 수도 있다.
세기말전대 고레인저라는 일본 코미디 코너에서 주인공 레인저의 변신 모습으로 언급된 적이 있다. 물론 레인저는 남자다.
[1] 1997년 주주총회 비리로 궁지에 몰린 상황이었다.
다나카 가쿠에이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도쿄지검에 구속수사된 현직 총리)
일본국 제64·65대 내각총리대신
다나카 가쿠에이
田中角? | Tanaka Kakuei
田中角?
출생
1918년 5월 4일
니가타현 가리와군 후타다촌
(現 니가타현 가시와자키시)
사망
1993년 12월 16일 (향년 75세)
도쿄도 신주쿠구 시나노정 게이오기주쿠대학병원
재임기간
제64대 내각총리대신
1972년 7월 7일 ~ 1972년 12월 22일
제65대 내각총리대신
1972년 12월 22일 ~ 1974년 12월 9일
1. 개요
2. 일생
2.1. 자수성가한 정치인
2.2. 총리 재임과 록히드 사건
2.3. 총리 사임 이후 어둠의 쇼군 시절
2.4. 정치적 몰락과 사망
3. 평가
4. 기타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1. 개요[편집]
"政治は?であり、?は力、力は金だ"
(정치는 수이고 수는 힘, 힘은 돈이다)[4]
일본의 정치가, 제 64·65대 일본 총리.
별명은 서민재상(庶民宰相), 현대판 태합(今太閤, 이마타이코)[5], 어둠의 쇼군(闇?軍, 야미쇼군), 컴도저(コンピュ?タ?付きブルド?ザ?, 컴퓨터 달린 불도저[6]) 등.
파벌정치를 하는 일본에서 1970~1990년대까지 다나카 총리부터 타케시타 총리까지 일본/경제 부흥기를 이끌던 자민당을 지배한 주류 파벌은 다나카 가쿠에이로 대표되며, 다나카파[7]로 불릴 정도로 일본 정계에서 영향력이 컸던 인물이다. 전후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을 본 궤도에 올려 놓으며 일본 경제 부흥기를 이끌었으나 그 과정에서 기업과의 정경유착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한 금권정치로 호불호가 갈리는 인물이기도 하다. 취임 5개월 만에 중의원 의석 감소로 "제2차 내각"을 출범했고,[8] 73년 11월에는 후쿠다 다케오를 대장대신으로 하는 "타나카 개조내각"을 출범시켰다. 딸인 다나카 마키코가 병약한 어머니를 대신해 퍼스트 레이디 역할을 수행하였는데, 일본 국민들에게 인기가 높았다.[9]
의외로 자신이 총리로 재임한 기간은 2년 5개월 남짓으로 강렬한 이미지에 비해 길지는 않다. 하지만 '야미쇼군'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막후 실세로서 지낸 세월이 훨씬 길다.
2. 일생[편집]
2.1. 자수성가한 정치인[편집]
1918년 니가타현에서 태어났다. 다나카의 집안은 농사꾼 집안이긴 했지만 다나카의 아버지는 소와 말을 길러서 파는 일을 했고, 할아버지는 농가용 나무를 파는 일을 하고 있었으니, 중소농은 되었던 셈이다. 그러나 다나카의 어린시절 아버지는 잉어 양식업에 실패하고 씨받이 소를 대량으로 수입했다가 소가 모두 죽는 바람에 가세가 기울었고, 대단히 어려운 가운데 성장해야 했다. 어린시절에 말더듬이였다고 하는데 일본의 창(唱)을 연습해서 그것으로 말더듬이를 교정했다고 한다.
1933년, 고등소학교[10]를 졸업한 후 도쿄로 올라가 회사생활을 시작했다. 한편으로 야간학교에서 토목과를 다니면서 건축기사 자격을 취득해 건축사무소를 설립하면서 건축기사 일을 하게 된다. 한때 만주국에서 병사로 근무하기도 했으나 폐렴 때문에 귀국한 뒤, 다나카 토건공업이라는 회사를 차렸고 일본의 전쟁무기를 연구하던 이화학 연구소 관련 사업을 따내면서 회사의 규모가 성장하기 시작했다.
재미있게도 도쿄가 공습을 당하고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떨어졌지만, 다나카는 이화학 연구소 관련 사무로 대전에 와있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를 면했다.
사업가로서 그런대로 기반을 잡은 가운데, 정치자금을 꼬박꼬박 갖다바치던 오아사 다다오가 "출마해 보는 것이 어떠냐" 권유해서 진보당[11] 후보로 출마했지만 2위 득표로 낙선했다. 이후 이듬해인 1947년에 고향 니가타 3구에 민주당(역시 보수야당) 후보로 출마해 당선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했다.[12]
민주당의 아시다 히토시가 가타야마 데츠의 일본사회당과의 연립정권을 깨고 총리가 되었지만 불과 몇달만에 말아먹고, 이틈에 자유당의 요시다 시게루가 민주당 출신 의원들이 모인 민주 클럽 의원들과 연합해 통합정당인 민주자유당을 설립하면서 다나카도 민주자유당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이후 요시다 시게루가 총리가 되면서 법무차관으로 관료 첫 경력을 시작했지만,[13] 불과 2달도 안돼서 터진 "탄광국 뇌물수수사건"에 연루되어 옥살이를 하게 되었다. 가타야마 데츠 총리가 탄광 국유화를 발표하자 탄광주들이 로비를 위해 자금을 살포한 사건이었지만 재판부는 이건 "뇌물이 아니라 정치헌금"이라면서 정치인들에게는 무죄를 선고한다.
다나카는 자신은 무고하다면서 1949년 중의원 선거에 옥중출마를 선언했고 니가타 주민들은 열렬한 지지로 그를 재선시켰다. 국회의원이면서 나가오카 철도의 사장에 취임했고 건축법 개정안을 발의해 1급 건축사 자격증을 취득하기도 했다.
이때 사토 에이사쿠 당시 자유당 부간사장을 알면서[14] 그에게 충성을 바치면서 출세를 도모한다. 1955년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으로 보수대연합 자유민주당이 탄생하고 1957년, 기시 노부스케 내각이 출범하면서 우정대신으로 취임했다. 현재의 일본 방송체제, 즉 신문사가 방송사도 운영하는 소위 신방겸영 체제는 다나카가 이 시기 우정대신으로 있으면서 강력하게 추진했던 정책으로 이를 통해 다나카는 매스컴을 틀어쥐는데 성공했다. 특히나 방송국의 설립과 면허 유지 권한을 틀어쥔 것은 후에 다나카가 총리가 되는 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고 한다.
한편으로 여러 대신직[15]과 당내 요직들을 거치면서 차기 총리 자리를 노리게 되지만, 문제는 기시 노부스케 라인의 후쿠다 다케오가 만만치 않았다는 점. 후쿠다는 명문가 태생, 도쿄제국대학 법학부에 고시 수석으로서 전형적인 엘리트에 귀공자 타입이었다. 그래서 공업학교 출신의 짧은 가방끈, 서민 집안에서 빽도 없이 자수성가한 다나카와는 완전히 상극이였다.
또한, 신칸센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신칸센을 최초로 건의한 사람은 아니지만, 현재 신칸센 계획의 대부분이 그의 정책이다. 철도 사업체 출신이었던 특징을 살려 도카이도 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의 영향력을 대도시권간이 아니라 중심으로 지역의 경제를 부흥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도카이도 신칸센과 산요 신칸센을 제외한 신칸센 노선은 다나카가 추진한 것이다.[16] 그래서 신칸센, 고속도로, 지방공항 등 사회자본의 정비를 다나카의 공적으로도 본다.
1962년, 일명 다나카 구상을 통해 신칸센 정비법의 기반을 만들었다. 하지만 당시 고속선을 제외한 철도 건설비의 100년분에 해당하는 거액이라 무산된다. 하지만 이후 자민당 간사 선거를 앞두고 일본열도개조론(일본어 위키백과)를 출간하는 등 신칸센을 자신의 정책의 주 축으로 밀기 시작했고 특히, 그의 고향인 니가타현으로 향하는 조에츠 신칸센을 최우선 과제로 두었다. 일본열도개조론에 따라 총리가 된 후 경제개발을 진행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 경제에 붐이 일기도 했다.(버블 경제 이전)
1968년에 사토 에이사쿠가 총리에서 물러나려 하자 다나카는 화들짝 놀라면서 3선 도전 무드를 조성했다.[17] 그랬던 이유는 그 당시 사토 에이사쿠가 물러나버렸으면 기시 노부스케의 입김으로 인해 후쿠다 다케오에게 손쉽게 총리자리가 넘어갈 판이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사토 에이사쿠가 3번째 총리직을 수행하면서 한숨을 돌리게 된 다나카는 사토파 의원 대부분을 자신의 파벌로 만드는 작업을 시작해 결국 1972년, 사토 에이사쿠가 3번째 총리 임기를 마치고 물러날 때에는 사토파 의원 대부분이 다나카의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 해 7월 5일에 열린 자민당 총재선거에서는 다나카 가쿠에이, 후쿠다 다케오, 미키 다케오, 오히라 마사요시가 출마하였는데, 처음에는 후쿠다가 유리했으나, 캐스팅보트를 가진 나카소네 야스히로가 다나카를 지지함으로써 다나카가 유리한 형세가 되었다. 결국, 다나카는 미키, 오히라를 제치고 후쿠다와의 결선투표에서 후쿠다를 이기고, 마침내 대망의 총리 자리에 오르는데 성공하게 된다(제1차 각복전쟁).
2.2. 총리 재임과 록히드 사건[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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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대 총리 취임 후
70%의 높은 지지율을 안고 시작한 다나카 내각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이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는 등 미중관계가 개선되자(데탕트) 이를 따라하기 위해 1972년 9월, 전격 방중했다. 마오쩌둥 주석과 저우언라이 총리를 만나 정상회담을 하고 대만과 단교하기로 하였다. 그런데 이때 저우언라이는 다나카에게 메모지에 언필신 행필과(言必信行必果)란 글을 적어 건넸고 다나카는 속뜻을 모르는 채 메모지를 받고 매우 기뻐하며 "믿음은 만사의 근본"이라 써서 저우언라이에게 보여줬는데, 이 모습을 담은 사진이 신문에 실리자 쇼와 시대의 한 석학은 메모지에 적힌 말을 보고 "교양도 없는 놈"[18]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고 한다.
저우언라이가 건넨 메모지에 적힌 논어의 한구절인 "언필신행필과(言必信行必果)"의 그 뜻인즉 "말한 것은 반드시 신의가 있어야 하고, 해야 할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것이 선비의 본분이다)"라는 뜻이었다.[19] 이렇게 보면 중국이 다나카를 못 미더워한 것 같지만 실제 당시 중국 정부의 요인들은 다나카의 소탈한 언동에 호의를 품었고 중일국교정상화에서 다나카의 공로를 높이 평가했다. 후일 다나카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덩샤오핑, 후야오방, 자오쯔양, 장쩌민 등 일본을 방문한 중국 지도자들은 예외없이 다나카 저택을 방문하여 다나카를 위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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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9월 27일 저우언라이와 마오쩌둥을 만나며
중일수교 자체는 높은 지지를 받았던지라 이 기회에 의회를 해산하여 총선이 치러졋지만 자민당이 288석을 얻은 1969년 총선에 비해 의석이 271석으로 감소하는 예상 외의 부진한 성적을 거두고 일본 공산당이 약진하는 사태[20]가 발생했다. 이듬해인 1973년에는 다나카가 강력하게 밀어붙이던 열도개조론(즉 토건정책)의 영향으로 물가와 부동산 가격 상승의 문제가 대두하기 시작했는데 다나카는 이 와중에 소선거구와 비례대표 중복출마 제도를 시행하려고 했다가 야당의 강력한 반발에 무산되고 말았다.가쿠만타
오일 쇼크가 터지자 이스라엘 지지에서 아랍권 지지로 돌려서 석유를 확보하려 했다. 하지만 열도개조론으로 10%대로 올라선 물가상승률은 오일쇼크의 영향으로 1974년 23%로 올라가기에 이를렀고, 휴지같은 일부 생필품은 사재기로 품귀현상을 보였으며 일본은행에서 물가억제를 위해 모든 공공사업이 축소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은 마이너스로 떨어지게 되었고 이로 인해 다나카 가쿠에이의 지지율은 20%대로 급속히 떨어졌다. 이렇게 불리한 상황에서 치러진 1974년 참의원 선거에선 헬기를 타고 일본 47개 도도부현 중에서 도치기현을 제외한 모든 현을 돌아다니며 선거유세를 하고 500억엔에서 1천억엔으로 추정되는 어마어마한 자금을 동원하였지만 결과는 자민당의 의석이 크게 줄어들어 개선의석에서 자민당이 야당과 무소속에서 6석 뒤쳐지는 62석에 그쳤고, 전체 의석도 과반을 간신히 유지하는 패배였다. 1인구에서는 야당후보를 압살했지만 다인 선거구에서 말아먿은것이 패인이었다. 이것도 닉슨 닮았네 이 계기로 당시 혁신계 후보가 강세를 보이는 주요 지자체를 탈환하자는 TOKYO 작전[21]을 세우게 되었다.
1950년대 이후 처음으로 참의원에서 자민당과 야당이 백중세가 되었다[22]. 선거 패배로 인해 당내 내분이 일어나면서 내각에 참여했던 정적인 미키 다케오, 후쿠다 다케오가 장관직을 사임했다.
이런 와중에 결정적으로 저널리스트 다치바나 다카시가 문예춘추[23]에 "다나카 가쿠에이 연구- 그 금맥과 인맥", "에쓰잔카이(越山會)의 여왕"[24]을 연재해 다나카의 금권정치와 록히드 사건, 김대중 납치 사건 연루 의혹을 제기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돈을 뿌려서 정치하는 다나카의 정치행태에 여론이 급속도로 악화되면서 결국 1974년 12월 9일, 다나카는 사임을 발표했다.
2.3. 총리 사임 이후 어둠의 쇼군 시절[편집]
그러나 다나카는 권력을 내려놓을 마음이 추호도 없었다. 록히드 사건 의혹이 불거지면서 최대 정적인 후쿠다 다케오나 미키 다케오가 총리가 되면 자신이 밀려날 것을 우려한 다나카는 절친한 사이였던 오히라 마사요시를 지원해서 총리로 세운뒤 뒤에서 실권을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자민당 부총재 시이나 에쓰사부로가 "지금 국민들이 뿔나있는데 자꾸 그러면 뭔일 날지 아무도 몰라"라고 다나카를 거의 반협박하는 바람에 결국 총재선거에서 미키 다케오가 당선되었다.
본래 미키 다케오는 다나카와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다나카가 총리가 되는데에는 미키의 협력도 크게 작용하기도 했고. 그래서 다나카는 그에 대한 보답으로 미키를 부총리로 임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청렴한 정치를 추구하던 미키와 돈을 뿌려서 정치하는 다나카의 성향차가 드러나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격해졌고, 설상가상으로 다나카가 미키파의 지역구에 신인을 들이밀려다가 실패하면서 두 사람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고 말았다.
총리가 된 미키는 다나카의 예상대로 록히드 사건의 엄정수사를 다짐하면서 다나카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결국 1976년 7월 27일, 다나카는 5억 엔의 뇌물수수와 외국환 관리법 위반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되었다. 다나카는 당내의 압박에 자민당을 탈당했지만 내가 죽어도 미키와 같이 죽겠다라는 생각에 따라 당내 파벌들을 모두 규합해 미키를 끌어내리는 공작을 시행했다. 심지어는 다나카의 최대 정적인 후쿠다와도 손을 잡을 정도였다.
이런 다나카의 공작은 성공을 거두어서 미키 내각은 말 그대로 소수여당 정권이 돼버리고 말았다.[25] 나카소네 파를 제외한[26] 자민당 내 모든 파벌이 다나카 편으로 돌아섰으며, 심지어 미키가 총리로 당선되는데 일조했던 부총재 시이나 에쓰사부로조차 미키가 건방지게 까분다면서 다나카 편으로 돌아섰다. 이에 맞서서 미키도 다나카 파벌에는 장관 한 자리만 주는 것으로 맞대응했다.
자민당의 내분 가운데 치러진 중의원 총선에서 다나카는 전국 최다득표로 재선에 성공했지만(득표율 37%, 168,522 표[27] ) 자민당은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미키는 결국 선거 패배의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다나카는 다시 오히라를 앞세우려고 했으나, 이때 후쿠다 다케오가 내가 총리 2년한 뒤에 너한테 넘겨줄게라면서 오히라와 동맹을 맺으면서(오후쿠 밀약) 후쿠다가 총리가 된다.
만약 후쿠다가 약속을 지켰다면 모르겠지만, 2년 뒤인 1978년, 약속대로 후쿠다가 오히라에게 총리자리를 넘겨주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후쿠다와 오히라의 동맹은 깨졌다. 이틈을 노려 다나카는 다시 오히라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수족인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비공개인 당원명부를 빼돌리게 해서 그걸 바탕으로 1:1 접촉과 끝에 예비선거에서 오히라가 후쿠다를 누르게 되었다. 결국 후쿠다는 총재선거 본선에 나서는것을 포기하고 오히라가 무투표로 총리가 되게 되었다(제2차 각복전쟁).
오히라가 총리가 되긴 했으나, 다나카의 공작으로 된것임을 잘 알던 후쿠다는 사사건건 오히라에게 딴지를 걸었고 오히라도 이에 지지 않고 맞서면서 자민당은 급격한 내홍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이 와중에 같은 시기 그가 구상한 TOKYO 작전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보수후보가 승리하면서 결실을 맺었지만 1979년 중의원 총선에서 자민당이 의석이 줄어드는 패배를 당하자 후쿠다는 이를 빌미로 오히라에게 사퇴를 촉구했고, 오히라는 사퇴를 거부하면서 자민당은 분당직전까지 가는 급격한 내홍이 일어났다.(시토카 항쟁) 겉으로 보기에는 후쿠다와 오히라의 다툼이었으나 사실상 오히라의 뒤에는 다나카가 있었기 때문에 후쿠다와 다나카의 전쟁이나 다름이 없었다.
하지만 결국 사회당이 제출한 내각 불신임안이 가결되자, 오히라는 중의원을 해산하고 중의원-참의원 동시선거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선거 초반은 자민당이 극도로 불리한 상황으로 사회당-공명당-민사당으로의 정권교체가 예상되었지만, 선거운동 도중 오히라가 사망하면서 자민당은 그간의 내홍을 접고 일치된 체제로 선거운동에 임했고,[28] 결국 자민당은 284석의 압승을 거둔건 물론, 다나카는 역시 니가타 주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재선에 성공했다. - (3차 각복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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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2년 가족들과. 안경낀 사람은 아이키 카즈오 의원
이후 일본 정계는 사실상 다나카의 손아귀에서 놀아나게 되었다. 후쿠다가 오히라의 사망으로 입지가 약해지자 다나카는 오히라파의 스즈키 젠코를 총리로 세웠고, 스즈키 내각이 마음에 들지 않자 2년 만에 다시 나카소네 야스히로로 갈아치우는 등 뒤에서 일본 정치판을 쥐고 흔들었다. 이리되니 총리가 되려면 다나카의 마음에 들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래서 다나카에서 붙여진 별명이 어둠의 쇼군(闇?軍, 야미쇼군)이었다.
그러나 1983년 10월, 9년 만에 록히드 사건의 1심 재판의 판결이 내려졌다. 도쿄 지방법원은 다나카에게 징역 4년, 추징금 5억엔을 판결했는데 다나카는 여기에 불복해 항소했다. 야당들은 다나카의 뻔뻔함에 항의해 국회일정을 거부했고 결국 중의원-참의원 의장들이 나서서 중요법안을 처리해주면 의회를 해산하고 총선거를 치르겠다라고 설득해 12월 선거가 치뤄졌다.
그리고 해당 83년 총선에서 뻔뻔한 다나카를 심판하겠다면서 전 참의원 의원이었던 노사카 아키유키가 다나카의 지역구인 니키타 3구에 출마해 도전장을 냈지만, 니가타 3구 주민들은 "신경 끄셈. 우리에겐 오직 다나카뿐임."[29]라면서 다나카에게 무려 22만표, 46,6%라는 압도적인 지지를 보여주며 다나카는 당당히 재선에 성공했고, 노시카 아키유키는 결과적으로 사회당 후보와 표를 쪼개먹는데(5,8%의 득표율) 그쳐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와 별개로 일본에서 다나카에 대한 반감은 상당해 자민당은 250석으로 과반수 확보에 실패했고 다나카의 전횡에 반발하며 자민당을 탈당한 소장파 의원들이 창당한 군소보수정당 신자유클럽[30]과 연립정권을 수립해 간신히 과반수를 넘길수 있었다. 국민의 호된 여론을 체험한 나카소네 총리는 "이제부터 다나카의 정치적 영향을 모두 배제하겠다"라는 선언을 발표했다.
2.4. 정치적 몰락과 사망[편집]
그러나 다나카는 이런 정점의 순간에서 서서히 정치적 몰락의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했다. 장기집권도 충분히 가능했지만 다나카의 공작으로 총리자리를 내놓게 되어 원한이 깊었던 스즈키 젠코는 다나카의 최고 정적인 후쿠다를 끌어들여 다나카에게 역습을 가하게 된다.
스즈키가 노린 틈은 바로 다나카파의 분열이었다. 다나카는 어둠의 쇼군으로 불리면서 총리직도 쥐락펴락 할만큼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나, 정작 다나카파에서는 "나카소네도 총리 시켜주면서 왜 정작 우리에게는 총리를 안 시켜주냐!"라면서 불만이 팽배해있었기 때문이다.[31] 스즈키 젠코는 이틈을 파고들어서 다나카파의 2인자였던 니카이도 스스무 부총재를 총리로 옹립하는 구상을 시행한것이다.(니카이도 옹립구상 - 제4차 각복전쟁)
후쿠다파는 물론 자민당 외에 공명당까지 끌어들여서 시행하던 이 공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가고 나카소네가 재선에 성공하긴 했지만 스즈키의 역습은 다나카파에게 충분히 먹혀들었다. 다나카파 내에서 더이상 다나카를 못 믿겠다는 의원들이 다케시타 노보루를 중심으로 뭉쳐 "창정회"라는 새로운 파벌을 만든 것이다. 결국 1985년 2월, 창정회가 발족했고 다나카는 믿었던 다케시타가 배신하자 충격을 받아 뇌경색으로 쓰러져 사실상 더 이상의 정치 활동을 할 수 없게 되었다. 후쿠다 역시 옹립구상에서 실패했기에 리타이어.. 이것이 70년대와 80년대 일본 정치를 들썩이게 한 각복전쟁(가쿠후쿠 전쟁)의 끝이었다.
그럼에도 1986년 열린 선거에 또 출마하였다. 본인은 병 때문에 선거운동조차 못했고 지지자들만 선거운동을 했음에도 또 전국 최다득표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미 다나카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었으니 마침내 다케시타가 "경세회"를 만들면서 다나카파 대부분을 끌어가버렸다. 다나카는 이것에 매우 격분했고 다케시타가 다나카를 찾아갔지만 문전박대만 당했다. 그리고 다나카는 비록 병으로 움직이지는 못하는 처지였어도 다케시타를 공격했으니 황민당 사건이 바로 그것이었다. 비록 증거는 없었으나, 많은 이들은 황민당 사건의 배후에는 사실상 다나카가 깊게 개입했을 것이라고 보는게 일반적이다.
이후 다나카는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고 1990년, 정계은퇴를 선언해 파란만장한 정치인생을 마감했다. 1993년 딸 마키코에게 자신의 지역구를 물려주고 당선시킨 뒤 12월 16일, 도쿄도 신주쿠구에 있는 게이오기주쿠대학부속병원에서 향년 75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 이후에도 정계에 다나카파가 일부 남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지만,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가 일본우정 민영화 추진을 이유로 중의원을 해산한 뒤 당 총재로 공천권을 휘두르는 과정에서 대거 숙청되고서야 완전히 끝을 맺었다.
3. 평가[편집]
다나카와 그의 최대 정적인 후쿠다를 비교해보면 두 사람의 차이가 극명해지는데 명문가 출신으로 엘리트 코스를 밟아온 후쿠다와 달리, 다나카는 말 그대로 밑바닥 흙수저부터 올라온 자수성가한 정치인이었다. 심지어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비견되기도 했다. 그래서 붙은 별명이 이마타이코(今太閤: 지금의 태합. 태합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호칭). 그런데 본인은 오다 노부나가를 좋아해서 히데요시에 비견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집안 배경이 없던 다나카는 철저하게 인맥과 돈으로 정치를 했고, 좋든 나쁘든 일본 전후 정치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총리로 남게 되었다. 어찌보면 귀공자 스타일의 후쿠다가 다나카를 이기지 못한 건 당연한 귀결이었던 걸지도 모른다.
이런 다나카의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가 있는데, 다나카파의 한 초년 의원이 꽃뱀에게 걸려서 100만 엔을 토해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나 선거를 막 끝낸 참이라 빚만 졌을 뿐 돈이 없던 터라 고민하던 이 의원은 다나카에게 연락해 돈을 빌려달라고 요청해서 다나카는 흔쾌히 수락했다. 이 의원이 다나카의 사무실에 가보니 다나카는 없고 대신 비서가 두터운 서류 봉투를 건냈는데 봉투를 열어보니 안에는 300만 엔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같이 들어 있는 메모에서 다나카는 "100만 엔은 사고난 거 해결하고, 나머지 200만 엔 중에서 100만 엔은 신세진 사람들에게 밥을 사거나 감사의 선물을 보내는데 쓰고, 남은 100만 엔은 나중에 있을 문제에 대비해 남겨두도록 하라. 이 돈은 안 갚아도 된다."라고 써놓았다고 한다. 이 의원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면서 다나카에게 충성을 다짐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맞수인 후쿠다파의 의원들도 이런 식으로 돈으로 구워 삶았으며, 다나카에게 돈을 먹은 의원들은 다나카 비판도 자제할 정도였다. 다나카가 록히드 사건 와중에 모친상을 당했을 때는 무려 3천여 명이 장례식에 몰렸고 화환도 600여 개나 들어왔는데 그나마도 너무 많아서 절반으로 끊은 게 그 정도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이 모친상에 가겠다고 국철이 파업중인데 6시간이나 차를 몰고 간 의원이 있었는가 하면, 니가타까지 비행기를 타고 온 의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스타일 때문에 록히드 사건이 일어났고 일본 국민들의 혈압을 상승시키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도 사실이다. 다나카 자신은 정치적 영향력이 급상승하면서도 자민당은 내리막길을 걸었는데 그럼에도 다나카가 버틸 수 있었던 것은 자민당 내 최대 파벌을 꾸렸고 그 파벌을 쉴드로 록히드 사건의 예봉을 결국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의 파벌을 챙겨주지 못한 것이 화근이 되어 다케시타 노보루에게 배신을 당했으니 아이러니한 일.
흔히 자민당-보수관료-대기업(경단련[32])의 철의 삼각동맹을 자민당 38년 일당지배의 비결로 꼽는데, 다나카 가쿠에이 전까지는 대체로 중앙정부 차원에 그쳤다. 그러나 다나카 가쿠에이는 이걸 규모만 축소해서 지역 행정 단위까지 노골화해서 자민당의 지방조직을 강화했다. 72년 집권하면서 국토개조론을 내걸고 전국토를 공사장으로 만들고 이 과정에서 엄청난 이권을 미끼로 지역토호들을 모조리 자민당의 지역조직으로 만들어버렸다. 지방자치단체의 예산으로 대대적인 토목사업을 벌여서 지역토호들이 운영하는 건설업체에 이권을 안겨주고 반대급부로 정치자금을 받아서 자기 파벌의 사조직망을 강화하는 금권정치가 지역에서까지 대세가 되었다. 이 과정을 지원하는 관료는 퇴임후 자민당을 통해서 정계 입문하거나 혹은 산하 기관 및 유관 기업에 낙하산으로 들어가서 압력 단체가 된다. 이런 낙하산을 위한 산하 기관, 공기업이 엄청나게 비대해져서 빈약한 재정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다. 이런 정치구조에서 국민의 삶의 질 개선에 들어가야할 예산이 의미없는 토목사업에 대거 투입되면서 결국 부동산 버블 붕괴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지면서 잃어버린 10년의 원인이 되었다. 다나카에 의해 만들어진 건설업체-족의원 간의 정경유착은 자민당 부총재 가네마루 신에 의해 계승되면서 이어졌고 이러한 담합 시스템은 훗날 1993년 제네콘[33] 스캔들의 발단을 제공하게 됐다.
다나카가 정치 비리로 일본 국민들의 원성을 샀음에도 정작 고향 니가타현에서는 늘 압도적인 지지로 당선되었는데 고향에 막대한 투자를 했기 때문이었다. 니가타는 상대적으로 낙후되고 소외된 지역이었는데 다나카는 자신의 정치력을 총동원에서 니가타에 칸에츠자동차도와 조에츠 신칸센을 들어오게 했으며, 눈이 많이 오는 니가타의 특성을 고려해 니가타 각 도시에 제설 장치를 설치하고, 심지어 불과 60가구밖에 안사는 마을이 눈이 오면 고립되는 걸 막겠다고 터널을 뚫어주는 일까지 있었다. 이 터널 공사에는 반발이 많았으나 다나카는 이를 다 묵살해버리고 공사를 강행해 결국 터널을 완성시켰다. 또한 원자력 발전소의 유치에도 힘을 쏟았다. 이렇게 공을 들였으니 니가타 주민들이 나오기만 하면 우르르 표를 찍을 수밖에. 이런 탓에 니가타에서는 아직도 다나카 하면 영웅으로 대접하며 심지어 니가타 현에 소재한 역 중 우라사역의 앞에는 다나카의 동상까지 세웠을 정도니 말 다했다. 그리고 다나카의 장녀인 마키코가 출마하자 다시 마키코에게 우르르 표를 찍어주고 있다.
선거민을 향한 연설 중에 "미쿠니 고개(三?峠)를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겠습니다! 그러면 동해의 계절풍은 태평양으로 불어서 빠져나가 에치고에 눈이 내리지 않을 겁니다. 여기서 나온 토사는 동해안으로 옮겨 매립에 쓰면 사도와는 연륙될 겁니다!"라는 드립을 친 적이 있다. 한국에 비유하자면 강릉시 유권자들한테 대관령을 다이나마이트로 날려버리고, 토사로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매립해서 연륙시키겠다는 드립을 친 거다.
일본 넷우익들 사이에서는 다나카가 대중(對中)으로는 중공과 수교를 했고, 대한(對韓)으로는 역사 문제가 다분한 발언을 한 적이 없어서 그런지 고평가를 받지는 못한 듯하다.
4. 기타[편집]
다나카 총리의 생전 연설집 (노이즈가 있으니 볼륨을 줄이고 볼 것)
위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 다나카는 생전에 서민 출신답게 말투도 서민적이고 유머를 겸비하여 유권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는 스타일이었다. 다나카 이전 총리들이 죄다 도쿄제국대학 일색[34]의 명문가, 엘리트들이 즐비하여 천룡인으로 여겨진 것에 비하면 상당히 신선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35]
다나카가 1947년부터 90년까지 16번에 걸쳐 무려 43년을 니가타 지역구 중의원으로 재임했고, 장녀 다나카 마키코는 93년부터 현재 2012년까지 19년을 내리 재임했으니 두 부녀의 의원 재임기간을 합치면 무려 62년이 된다. 한마디로 1947년부터 다나카씨가 아닌 사람이 니가타 중의원을 한 적은 1990년에 딱 한번을 빼고는 62년간 계속 이뤄졌다는 이야기다. 우습게도 다나카 마키코는 비서 급여를 횡령한 혐의로 자민당에서 탈당 된 뒤에 무소속으로 다시 출마해 당선되었고, 이후 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겨서 민주당 정권을 말아먹는데 한몫했다.
2대에 걸친 다나카 부녀의 니가타 지역구 장기집권은 결국 2012년 12월 16일 중의원 총선에서 마키코가 낙선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다. 아무리 다나카가 니가타에서 영웅이래도 마키코가 하도 전국적으로 쪽팔리는 짓을 많이 한 탓에 니가타 주민들도 결국 포기한듯 싶다. 그나마 득표수에 따라서 비례대표 구제를 받을수도 있는것도 못해서 완전히 낙선확정. 하필이면 선거날이 다나카 가쿠에이의 기일이었다는건 보너스.
이 사람을 풍자한 게임도 있는데, 바로 코어랜드/세가의 아임 쏘리. 다만 게임 내에서는 음독/훈독 차이를 이용한 변형으로 'ごんべえ(곤베에)'라고 히라가나로 나온다. 과거 국내에서는 일명 '이주일 게임'이라는 이름으로 많이 통하기도 했다.
차지맨 켄!으로 유명한 나크의 1970년대 괴작 투명소년탐정 아키라에 실명 그대로 등장한다. 가쿠에이 총리로 변장한 Z단의 단장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전시되어있던 모나리자를 훔쳐 달아나고, 이후 총리 본인이 뉴스에 등장해 모나리자를 회수하겠다고 발표한다.
2000년대 들어서는 비록 비리는 저질렀어도 추진력과 결단력은 존경할만하다라는 재평가 움직임이 일고 있다. 이런 재평가의 배경은 삽질만 거듭하는 일본 자민당과 민주당에 질려버린 국민들이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상황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동경대 명예교수 미쿠리야 다카시는 현재 일본에서 다나카 가쿠에이에 대한 붐은 일본 정계에 인물이 없는 인재난 때문이라고도 했지만, 비리로 일본 국민들의 혈압을 올리는데 공헌했던 그가 결단력있는 지도자로 재평가받는걸 보니 씁쓸해 하는 이들도 많다. 다나카 가쿠에이에 관한 책으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이시하라 신타로는 다나카의 금권정치를 비판하는 선봉에 섰으면서도 다만 자민당에서 금권정치는 오랜 세월 동안 존재해왔던 체질이라며, 다나카 가쿠에이가 정치적 배경도 없이 자리를 잡기 위해서는 금권정치를 더욱 더 활용할 수 밖에 없는 측면이 있었다고 했다. 그는 현대의 일본을 누가 만들었냐고 한다면 그건 다나카 가쿠에이라고도 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전 비서는 다나카의 과오는 록히드 사건과 금권정치가 꼽히지만 최대 과오는 정치가로서 자신의 후계자를 키워놓지 않은 것이라고 했다.
여담이지만 다나카 가쿠에이 때가 일본에서 가장 취업이 잘 된 시기였다. 위에 언급하다시피 열도개조론을 펼치며 지방 토건사업에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면서 건설직을 중심으로 일자리가 크게 늘어난 영향이다. 이 당시 유효구인배율이 1.7을 넘었는데[36] 1980년대 말-90년대 초반 버블경제기 때에도 그 기록을 깨지 못했고 2010년대 중반 이후로도 그 기록이 경신되지 않을 정도로 일자리가 넘쳐났다. 물론 오일쇼크가 닥치면서 일시적인 현상에 그쳤지만 말이다.
총리를 역임한 자가 사망하면 위계[37]와 훈장[38]이 수여되지만 다나카는 피고인 신분으로 사망하여[39] 아무것도 받지 못했다. 더욱 안습인것은 다나카의 보스였던 요시다 시게루와 사토 에이사쿠는 위계는 종1위에 이르렀고 훈장도 일본의 최고등급 훈장인 대훈위국화장경식을 수여받았다.
나카무라 기시로 의원이 그의 비서였다.
총리 재임시절에 김대중 납치 사건이 벌어졌다.
5. 소속 정당[편집]
소속
기간
비고
일본진보당
1946 - 1947
정계입문
입당
일본민주당
1947 - 1948
합당
무소속
(동지클럽, 민주클럽)
1948 - 1948
탈당
민주자유당
1948 - 1950
창당
자유당
1950 - 1955
합당
자유민주당
1955 - 1976
합당
무소속
1976 - 1993
탈당
사망
6. 선거 이력[편집]
연도
선거 종류
지역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47
제2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니가타 3구
일본민주당
39,043 (14.17%)
당선 (3위)
초선
1949
제2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민주자유당
42,536 (14.30%)
당선 (2위)
재선
1952
제2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자유당
57,071 (16.31%)
당선 (1위)
3선
1953
제2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61,949 (17.88%)
4선
1955
제2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55,242 (14.96%)
당선 (2위)
5선
1958
제2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자유민주당
86,131 (22.74%)
당선 (1위)
6선
1960
제29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89,892 (23.70%)
7선
1963
제30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13,392 (28.67%)
8선
1967
제31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22,756 (31.31%)
9선
1969
제32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3,042 (32.96%)
10선
1972
제33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82,681 (42.08%)
11선[40][41]
1976
제34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무소속
168,522 (36.99%)
12선
1979
제35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41,285 (31.06%)
13선
1980
제36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38,598 (30.24%)
14선
1983
제37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220,761 (46.65%)
15선
1986
제38회 일본 중의원 의원 총선거
179,062 (40.03%)
16선
대단한 선거이력을 가졌다. 출마한 모든 선거에서 당선되었으며, 중선거구 시절에 흔치않은 40%이상의 표를 얻은 정치인이다.[42]
[1] 제10대 방위대신을 역임했다. 원래의 성씨는 스즈키. 일본은 보통 남편의 성을 따르지만, 장인이 전직 총리인지라 아내의 성을 따른 듯하다.
[2] 제8사단 제24기병연대
[3] 1976년 7월 27일 록히드 사건으로 구속되면서 자민당을 탈당했다. 그럼에도 이 사건 이후 오히려 어둠의 쇼군이라 불리며 자민당의 실세로 군림했다.
[4] 다나카의 정치관을 간략하게 보여주는 말이다. 여기서 나온 말이 '수의 논리(?の論理)'.
[5] 비슷한 의미로 '20세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라는 별명도 있다.
[6] 이명박이 훗날 이 별명을 써먹었다. 그러나 원조가 따로 있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았다.
[7] 일본 자민당 즉 자유민주당은 1955년 자유당과 일본민주당의 합당으로 탄생한 정당이다. 다나카 가쿠에이는 자유당 총재였던 요시다 시게루의 후계자 사토 에이사쿠의 목요연구회(木曜硏究會)를, 그의 정적인 후쿠다 다케오는 일본민주당 총재였던 하토야마 이치로의 후계자 기시 노부스케의 십일회(十日會)를 이어 받았다. 자민당 파벌들 중에서 이 두 파가 세력이 가장 강하며, 목요연구회 즉 사토파는 온건 보수파로 비둘기파, 십일회 즉 기시파는 강경 보수파로 매파이다. 자민당 내 파벌 싸움은 바로 이 비둘기파와 매파의 대결이다. 다나카 가쿠에이 시대 일본 경제가 화려하게 발전했고, 그만큼 다나카 가쿠에이의 영향력이 워낙 강했기 때문에 목요연구회는 다나카파로도 불린다. 1985년 다나카파 소속 다케시타 노보루가 다나카 가쿠에이에게 반기를 들면서 분열이 시작됐고, 1993년 일본 정권교체로 다나카파는 완전히 분열됐으며, 매파인 십일회를 계승한 세이와 정책연구회(淸和政策硏究會) 즉 청화회(淸和會)가 자민당 내 최대 파벌로 부상하였다. 이후 자민당이 정권을 다시 되찾았으나 2000년대 이후부터 일본 총리는 강경 보수파인 청화회가 계속 배출하고 있으며, 아베 신조도 청화회 소속이다. 현재 자민당 내 온건 보수파로 다나카파를 계승한 평성연구회(平成硏究會) 즉 헤이세이연구회(平成硏究會)가 있으며 누카가 후쿠시로가 수장을 맡았고, 다케시다 노보루의 이복동생도 잠시 수장을 맡았으나 그 위상은 과거와 같지 않다. 일본이 보수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것은 이런 자민당 내 파벌 간의 역학관계와도 관련있다.
[8] 그러나 이 기록도 곧 깨질 것으로 보이는데, 제100대 내각총리대신인 기시다 후미오가 2021년 10월 4일에 총리로 취임하여 14일에 중의원을 해산시키고 31일에 선거를 실시함으로서 패배한다 하더라도 단명 정권으로 남게 되고, 승리한다 하더라도 취임일로부터 1개월이 채 안되는 시점에 제2차 내각을 출범시키기 때문이다.
[9] 다나카 마키코는 다나카 가쿠에이의 고향이자 '다나카 왕국'으로 불리던 니카타현에서 6선 중의원을 하며, 일본 최초의 여성 외무대신이 됐다. 다만 외무대신으로서 자질은 높게 평가받지 못했다. 남편은 방위대신을 지낸 다나카 나오키로, 처가의 성씨인 다나카 성씨를 따랐다.
[10] 오늘날의 중학교.
[11] 진보당이라는 말을 썼지만 보수우익계열이다. 당시 일본의 진보/좌파세력을 언론에선 혁신(革新)계란 표현을 사용했고, 진보는 발전의 의미였다. 한국도 그 흔적으로 1970년대까지는 혁신계, 혁신정당이란 용어를 사용했고, 이것이 민중정당 등을 거친 뒤 다시 미국식 표현인 진보정당으로 넘어가게 된 건 1990년대 초부터였다.
[12] 이때 선거 유세 당시 공약으로 군마현과 니가타현 사이에 있는 미쿠니 산맥을 다이너마이트로 날려버리고 거기서 나온 흙으로 니가타 연안 해안을 매우는 개발 사업을 할것을 제시했다.
[13] 학력도 경력도 없는 새파란 초선의원이던 다나카를 요시다가 발탁하였고 이때부터 다나카는 요시다의 측근으로 활동한다. 다만 요시다는 자수성가한 부류의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특이하게도 다나카만은 총애하였다. (요시다 본인은 자수성가형 인물이 아니라 명문가 금수저 출신이었다.)
[14] 당시 사토는 차가운 외모 탓에 같은 관료 출신들조차 기피하면서 당내에서 제대로 융화하지 못하고 붕 뜬 상태였는데, 정작 다나카는 사토가 거물이 된다고 생각하고 접근했다. 사토도 당내에서 튀는 분위기를 보이던 다나카의 내면에 숨은 능력을 짐작하고 그를 받아들여 키웠는데 덕분에 50년대 사토의 별명은 "귀밝은 사토"였다고. 총리 막판시절의 권위적이고 독재적이기까지 했던 행태와는 딴판이다.
[15] 대장대신(한국의 기재부장관)에 있었을 때는 "다들 아시다시피 나는 무학입니다. 그러나 여러분들은 천하의 준재들입니다. 마음껏 일해주십시오. 책임은 내가 집니다."라는 취임사로 대장성 관료들의 마음을 한번에 사로잡았다. 기자들 앞에서 아직 편성도 시작하지 않은 예산안을 구체적인 수치를 나열해가며 예언하여 관료들과 기자들이 비웃었는데, 정작 통과된 예산안은 다나카의 예언과 거의 동일하게 맞아 떨어졌다고.
[16] 그가 총리로 재직하며 신칸센을 추진하며, 최초 철도건설심의회와 협의된 노선은 홋카이도, 호쿠리쿠, 큐슈 동(東), 큐슈, 큐슈 서(西). 이 3가지(사실상 5가지) 였으며 이후, 홋카이도 남회, 츄오, 서부 종관, 일본해 종관, 오우, 코토(湖東) 신칸센, 산인. 이 6개를 추가로 추진하였다. 이후 서부 종관선은 시코쿠와 큐슈 횡단으로 나뉘어 총 12개.
[17] 그나마도 후쿠다를 싫어한 당시 당 부총재인 가와시마 쇼지로가 언질을 주지 않았다면 꼼짝도 못했을 것이라고. 실제로도 사토 3선 무드의 조성은 가와시마가 다 했고, 다나카는 구경만 했다.
[18] 실제로 다나카는 대학은커녕 정규 고등학교도 못 나오고 야간 공업학교 다닌 게 학력의 전부라 가방끈이 짧았던 탓에 이러한 멸시 풍조가 제법 만연했었다.
[19] 저우언라이가 적은 이 말은 논어 제 13장 자로편에서 나온 말로, 자공이 공자에게 선비라 할 수 있는 본분에 대해 묻자 공자가 최저선으로 설정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해 저우언라이는 다나카에게 "당신도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그저 그런 사람으로 여기겠다."란 뜻을 전한 것이다.
[20] 그래서 1970년대의 일본정치를 자-공(自-共)시대라고도 한다. 사실 일본공산당의 약진할 조짐은 60년대 말부터 있었고(사실 그때도 자민당의 득표율이 줄긴 했지만 어찌되었건 의석수 유지에 성공한 반면에 일본사회당이 의석수도 말아먹으면서 묻혀졌긴 했다.) 당시 자민당 부총재인 가와시마 쇼지로는 70년대는 자민당과 공산당이 일본정치를 주무를 것이라고 예언했다. 당시 총리인 사토와 간사장인 다나카를 포함한 당내 거물들은 노인네가 걱정이 많다!고 무시했는데, 정작 그 사태가 오자 패닉에 빠졌다고. 그래도 공산당의 약진으로 인해 본격적인 복지정책이 일본에도 도입되기 시작했으니 얼씨구 좋을시고.
[21] 각각 Tokyo, Osaka, Kyoto, Yokohama, Okinawa를 뜻한다.
[22] 이 선거에서 다나카는 1천억 엔을 뿌렸다고 한다.
[23] 1974년 11월 호
[24] 다나카의 비서이자 애인으로 정치자금을 관리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뽐내던 사토 아키코(佐藤昭子)를 지칭한다. 다나카와의 사이에 딸도 하나 낳은 것으로 추정되는 인물.
[25] 이때 미키 다케오가 공명당이나 사회당을 끌여들였다면 소수여당이라는 핸디캡에서 벗어날수는 있었겠지만 1955년 자민당 창당 이래로 진영을 넘나드는 정당간 연대라는 개념자체가 익숙할 때가 아니었다.
[26] 정작 나카소네는 72년 당시 다나카 총리 당선에 불출마로 일조했었는데..
[27] 당시엔 중선거구제 였기에
[28] 반대로 2000년 총선에선 오부치 게이조 총리의 사망으로 선거 초기에 자민당이 압승할거같았지만 후임인 모리 요시로 총리가 망언을 내뱉으면서 지지율이 떨어져 과반확보에 실패했다. 뭐, 공명당이 31석을 확보했기에 자민당은 안정적인 의석확보는 할수있었긴 했었고, 예측치에 비하면 조금 더 나오긴 했다.
[29] 사실 다나카가 문제가 많은 인물이기는 했지만 후술하듯 니가타에 온갖 투자를 하면서 니가타 성장에 큰 공헌을 했으니 주민들이 다나카를 밀어주지 않는게 더 이상하기는 했다.
[30] 이곳의 리더가 한국인들에겐 고노 담화로 유명해진 고노 요헤이. 신자유클럽은 다음번 선거에선 쫄딱 망하면서 결국 자민당으로 전원복귀했다.
[31] 다나카는 자기 파벌에서 총리를 배출하면, 현실권력인 총리때문에 파벌내에서 영향력을 잃을 것이라는 우려를 하고 있었다. 때문에 파벌후계자를 키우지 않고 끝까지 자신이 모든 것을 틀어쥐고 있었다.
[32] 경제단체연합회의 준말. 일본판 전경련. 애초에 이병철 삼성그룹 회장이 경단련을 모델로 만든 게 전경련이다. 회원사에서 모금한 정치자금을 가지고 자민당과 거래하면서 대기업에 유리한 정책을 관철시켰다.
[33] General Contractor의 일본식 약어로 종합건설업체를 가리킨다. 건설업자를 Contractor로 표현하는데서 나온 단어.
[34] 다나카 이전의 전후 총리들 중 도쿄제대 출신이 아닌 사람은 히가시쿠니노미야 나루히코(일본육사), 이시바시 단잔(와세다대학), 이케다 하야토(교토제국대학)밖에 없었고, 이들 중 교토제대는 도쿄제대에 버금가는 제국대학 그룹, 와세다대학도 예나 지금이나 소케이로서 양대 최상위 사립대학이며 제국 시절의 육사는 완전히 엘리트 집단에 히가시쿠니는 무려 황족 가문이다.
[35] 딸 다나카 마키코도 대민 연설을 할 때 아버지의 말투를 그대로 따라하여 다나카에 대한 주민들의 향수를 불러일으키고 지지층을 결집하는 데에 써먹었다. 다나카와 오랫동안 반목했던 정적 후쿠다 다케오와 그의 아들 후쿠다 야스오가 귀족적이고 정제된 말씨를 쓰는 것과 대조적이었다. 유튜브에 남아 있는 후쿠다 부자의 영상과 다나카의 영상을 보면 차이를 느낄 수 있다.
[36] 구직자 1명당 일자리가 1.7개가 있다는 얘기다. 월별로 본다면 1973년 11월에 유효구인배율이 1.93을 기록했다. 1명당 일자리가 2개가 있다는 얘기.
[37] 일반적으로 정 2위 또는 종2위
[38] 일반적으로 대훈위국화대수장
[39] 재판도중 사망하였으므로 유죄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
[40] 72.7~72.12 1차 내각
[41] 72.12~74.12 2차 내각
[42] 당장 구마모토 2구(노다 다케시의 지역구), 군마 3구(나카소네 야스히로&후쿠다 다케오의 지역구), 야마구치 1구(아베 신타로의 지역구)등의 선거결과만 봐도, 각 지역구의 3명 내지 5명이 균등하게 득표하여 당선되는 것에 비해, 다나카는 후보 두명분의 득표를 혼자서 독차지하고 있다. 특히 총리시절과 탈당하면서 수사를 받는 중에도, 혼수상태가 되어 쓰러져 있는 동안에도 압도적으로 당선되었다.
일본 재무성
財務省ざいむしょう
재무성 | Ministry of Finance
일본 재무성 로고
약칭
MOF
설립일
2001년 1월 6일
전신
대장성(大?省)
소재지
도쿄도 치요다구 카스미가세키3초메 1-1
(東京都千代田?霞が?三丁目1番1?)
대신
(장관)
스즈키 슌이치
부대신
이토 와타루(伊藤?)
오이에 사토시(大家敏志)
대신정무관
고무라 마사히로(高村正大)[1]
시게모토 마모루(繁本護)
사무차관
다야 에이치(茶谷?治)
내부부국
(?部部局)
대신관방(大臣官房)
주계국(主計局)
주세국(主?局)
관세국(??局)
이재국(理財局)
국제국(?際局)
외국(外局)
국세청(???)
소관 독립행정법인
조폐국(造幣局)
국립인쇄국(?立印刷局)
직원 수
16,251명(외국 제외)
55,906명(국세청)
공식 사이트
https://www.mof.go.jp/
SNS
페이스북 아이콘 트위터 아이콘 유튜브 아이콘
Zaimusho
재무성 청사 (뒤에 보이는 빌딩들은 중앙합동청사 제7호관)
1. 개요
2. 상세
3. 조직
4. 역대 대신
5. 역사
5.1. 메이지 이전
5.2. 메이지 이후
1. 개요[편집]
일본의 중앙성청 중 하나. 한국의 기획재정부에 해당한다.
2. 상세[편집]
건전한 재정의 확보, 적정하고 공평한 과세의 실현, 세관 업무의 적정한 운영, 국고의 적정한 관리, 통화에 대한 신뢰의 유지 및 외환 안정 확보를 꾀하는 것을 임무로 한다(재무성설치법 제3조).
국가의 예산?결산과 회계, 통화, 조세, 일본 국채, 재정 투자 및 융자, 외환, 국유재산, 주류?담배?소금 등에 관한 사무를 관장하며, 담배나 주류의 제조?판매 사업과 담배세 및 주세 관련을 관할한다. 또 일본담배산업(JT), 일본우정 및 일본전신전화, 도쿄메트로, NEXCO 서일본/NEXCO 중일본/NEXCO 동일본 등 국가가 대주주인 특수회사 다수를 관장한다.
2001년 1월 6일, 중앙성청 개편 때 대장성의 폐지에 따라 그 후신으로 신설되었다. 이 때 예산 편성 권한은 경제재정자문회의로, 금융행정은 내각부 외국(外局)인 금융청 관할로 넘어갔다.
여러 가지 이유로 터무니없이 방위 예산을 후려치기 때문에[2] 일본 밀리터리 매니아들에게 죄무성(罪務省[3])이라고 야유되기도 한다. 그런데 2018년 재무성이 모리토모 스캔들, 가케학원 스캔들에 가담했다는 사실이 폭로되면서 죄무성이 더는 농담이 아닌 상황이 되고 말았다.#1, #2 또한 2010년대 들어서 일본 국공립대학에도 지원을 줄이고 있어서 국가가 학문과 연구의 자유를 해친다고 비판받기도 한다.
하지만, 대쪽 같은 모습을 보여준 일화가 있으니 바로 일은포 사건이다. 해당 항목으로.
2002년부터 후지와라 노리카 등 연예인들을 동원해 개인용 국채상품 광고를 많이 내보낸다. #
서울대 경제학부가 꽉 쥐고 있는 한국의 기획재정부와 달리 도쿄대 법학부(1類) 출신이 헤게모니를 쥐고 있다. 일본의 고등고시 격인 국가공무원 시험 1종에서 법률 직렬 선발 인원이 제일 많기 때문이다. 법률 직렬에서 왕창 뽑아서 재무성을 포함한 각 부서로 보내는 것. 그러다보니 법률 직렬에서 가장 우수한 성적을 거두는 도쿄대 법학부 출신이 재무성 역시 장악하게 된다. 특히 과거 대장성 시절엔 대학 재학중 사법시험을 합격하고도 사법연수원을 안 가고 대장성 관료로 일하는 등 정말 판검사보다 윗줄의 1류중의 1류 관청이었다.[4] 후루카와 모토히사 중의원 의원이나 성희롱 사건으로 면직된 후쿠다 준이치 전 재무성 사무차관이 이런 케이스. 사법연수소에 가지 않았지만 관료 경력으로 변호사 자격증을 발급받아 현재 변호사로 활동중이다. 로펌 소개페이지
3. 조직[편집]
간부
대신 : 스즈키 슌이치
부대신 : 이토 와타루, 오이에 사토시
대신정무관 : 고무라 마사히로, 시게모토 마모루
사무차관 : 야노 코지
재무관 : 타케우치 요시키
비서관 : 무라마츠 이치로우
내부부국
대신관방
총괄심의관 1인
정책평심의관 1인
심의관 11인
참사관 10인
후생관리관 1인
비서과
문서과
회계과
지방과
종합정책과
정책금융과
신용기구과
주계국
차장 3인
주계관 11인
주계감사관 1인
총무과
사계과
법규과
급여공제과
조사과
주세국
참사관 1인
총무과
조사과
세제제1과
세제제2과
세제제3과
관세국
총무과
관리과
관세과
감시과
업무과
조사과
이재국
차장 2인
계획관 2인
총무과
국고과
국채기획과
국채업무과
재정투융자총괄과
국유재산기획과
국유재산조정과
국유재산업무과
관리과
국제국
차장 1인
총무과
조사과
국제기구과
지역협력과
외환시장과
개발정책과
개발기관과
심의회
재정제도등심의회
관세·외환등심의회
관세등불복심사회
시설등기관
재무종합정책연구소
회계센터
관세중앙분석소
관세연구소
지방지분부국
재무국
홋카이도재무국
도호쿠재무국
간토재무국
호쿠리쿠재무국
도카이재무국
긴키재무국
주고쿠재무국
시코쿠재무국
규슈재무국
세관
하코다테세관
도쿄세관
요코하마세관
나고야세관
오사카세관
간베세관
모지세관
나가사키세관
외국
국세청
영국의 의원내각제를 본딴 현대 일본의 정치 제도 특성상[5], 재무성의 위치가 일본 내각에서도 총리대신과 부총리에 이은 2~3위에 속하기 때문에, 재무대신을 거쳐간 사람중에 거물 정치인이 아주 많은 편이다. 노다 요시히코, 간 나오토가 재무대신을 거쳐 총리직에 올랐으며, 아소 다로는 총리를 역임한 후 재무대신으로 재직하였다. 이부키 분메이는 재무대신직을 거친 이후 자유민주당 간사장을 역임했고, 다니가키 사다카즈는 이후 자유민주당의 총재를 지냈고 아즈미 준은 원내대표의 위치인 입헌민주당 국회대책위원장직을 맡고 있다. 내각관방장관과 함께 사실상 일본에서는 총리 등용문이라고 불리는 직책이다. 2012년부터 2021년까지 아소 다로가 9년이나 대신을 지내며 위상이 정권운영 파트너급이었다.
5. 역사[편집]
5.1. 메이지 이전[편집]
메이지 이전의 율령제 하에서는 8성 중 하나였으며 재정, 특히 출납에 관한 사무를 맡았다. 구체적으로는 조정의 창고를 관할하며 조정의 화폐?금은?세금?공물의 출납, 보관과 여러 쿠니(?), 백성간의 도량형과 매매가격의 공정(公定)등이었다. 단 세금, 호구, 토지 등은 민부성의 관할로 국가재정기관으로서의 역할은 크지 않아 관영공방으로서의 역할이 컸다. 즉 조선으로 치면 호조보다는 공조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5.2. 메이지 이후[편집]
금곡출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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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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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장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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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무성
1868년 음력 1월, 조정의 정부운영을 위한 자금조달기관으로 금곡출납청이 설치되었다. 이름은 몇번 변경되어, 태정관제가 도입될 때 쯤에 회계관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869년 음력 8월, 2관8성제가 된 것을 계기로 대장성으로 개명되었다. '대장성(大?省 おおくらしょう)이라는 이름은 율령제 시절부터 유래했는데, 의미는 '큰 창고[6]'이다. 구체적으로는 조정의 창고를 관할하며, 조정의 통화?금은?조?공물의 출납, 도량형과 매매가격의 공정 등을 관장했다. 음력 9월, 민정과 제정의 일체화를 주장하는 오쿠마 시게노부의 안에 따라 민부성을 합병하고 대형관청이 되었다. 이에 대장성의 권한강화에 반발하는 세력과의 다툼이 일어나 1870년 음력 8월, 민부성은 다시 분리되었다. 그러나 통합파의 반격에 의해 1871년 음력 7월 민부성은 다시 통합되었다.[7] 최종적으로는 1873년 11월 내무성이 설치될 때까지 대립이 이어졌다. 또한 1880년에는 공정한 회계감사를 원하는 각 성의 요구에 의해 회계부문이 독립, 회계감사원이 설치되었다.
1885년 말 내각제도가 발족했을 때, 초대 대장대신은 마쓰카타 마사요시였다. 그 후 관제가 정비되어 세입-세출, 조세, 국채, 조폐, 은행 등을 관장하는 관청이 되었다. 국가예산의 배분, 조세정책이나 금융정책 등의 재정정책을 실질적으로 결정하는 아주 강력한 권한을 가졌으며,[8] 똑같이 무소불위의 권한을 휘둘렀던 내무성[9]이 전후 해체될 때에도 거의 멀쩡하게 유지되었다. 특히 전후에는 '성 중의 성', 대장성의 관료는 '관료 중의 관료', 대장성 차관은 "차관 중의 차관"으로 불렸다. 대장성 내에서는 주계국이나 주세국 등의 재정부국은 '2층 팀', 은행국이나 증권국 같은 금융 관련 부문은 '4층 팀'이라고 불렸다.
1998년에는 그 악명높은 노팬티 샤브샤브 접대사건이 일어났다. 경찰이 해당 업소를 공연음란죄로 수사하려던 도중 이용객 명단에서 대장성과 일본도로공단, 일본은행 고위직들과 일부 재계 인사들이 연루되었음이 밝혀지면서 일대 파란이 일어났고, 해당 연루자들은 당연히 체포되거나 직장에서 쫒겨나는 등의 말로를 맞았다.
2001년 중앙성청 개편에 의해 대장성은 분할되어 재무성과 금융청(내각부의 외국)으로 각각 권한을 이관했다. 재무성은 여전히 예산 분배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지만 예산 편성권은 경제재정자문회의로 넘겨졌으며 금융행정은 내각부 금융청으로 이관되었다. 무소불위의 최강 관청 대장성의 전설은 막을 내렸지만 여전히 정부 부처중에선 영향력이 가장 강하며 관료 중에서도 재무성 관료가 최일류이다.
일각에서는 오랫동안 써오던 '대장성'이라는 이름을 두고 왜 이름을 바꾸냐는 의견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하시모토 류타로는 '그럼 겐비이시[10]를 부활시킬까?'라 야유하기도 했다고...
일본 재무성
일본 재무성
[1] 고무라 마사히코의 장남.
[2] 예: 방위성 - "명중률이 높아졌습니다!" / 재무성 - "그럼 총알이 그렇게 많이 필요 없겠군. 예산 삭감이다." | 방위성 - "신형 전차와 신형 장갑차를 양산할 계획입니다."/ 재무성 - "둘 다 포 달려 있네. 둘 다 전차 아냐? 둘 중에 하나만 만들어!"
[3] 재무성과 죄무성은 ざいむしょう(자이무쇼)로 발음이 같다.
[4] 물론 당시엔 관료로 몇년 이상 일하면 변호사 자격을 주긴 했으나, 법조인보다 관료가 더 윗길의 진로로 취급받았다.
[5] 영국 재무부는 예로부터 내각부에 이은 권력 서열 2위였으며 실제로 총리 관저인 다우닝가 10번지의 옆인 다우닝가 11번지가 재무장관의 공관일 정도로 재무장관의 권력이 강력한 편이다.
[6] 영어에도 Treasury라는 비슷한 표현이 있다. 뜻은 성(城) 등에 있는 금고(보고). 그래서 미국과 영국의 재무부에도 이 단어가 들어가며, 특히 영국 재무부(His/Her Majesty's Treasury)는 일본에서도 '대장성'이라 번역한다.
[7] 단 식산흥업 부문은 1870년 음력 윤10월에 공부성(지금의 국토교통성의 전신)으로 민부성에서 분리되었다.
[8] 오죽하면 그 안하무인 관동군조차 대장성 관료 앞에서는 쩔쩔 맸을 정도였다.
[9] 지방행정 조직 및 경찰 조직을 휘하에 두고 있었다.
[10] ?非違使(검비위사). 일본 율령제 하의 영외관의 하나이다. 이름은 '비위(非違, 법이 아닌 것 즉 위법행위)를 검찰하는 천황(天皇)의 사자'라는 뜻이다. 즉 한국으로 치면 '호조를 기재부로 바꾸는 게 싫으면 의금부를 부활시킬까?'가 된다. '대장성'이란 이름은 멀리는 율령제 시절부터, 가까이는 메이지 시절부터 써 온 이름이니.
본문
[연재] 유니콘 프로젝트 외전 퍼스트 컨텍트 (227) [2]
2025.11.30 (00: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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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도 칼도 안든 날강도지요. | 25.11.30 14:54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