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문을 열고 들어가자 조니가 행주로 카운터 주변을 닦고 있었다. 모자를 벗는 시늉을 하며 조니에게 허리를 굽히자 조니가 눈을 찡그리며 피식 웃었다. 나는 내 지정석으로 향했다. 묵직한 레밍턴 타자기와 호퍼의 <밤을 새우는 사람들>이 여전히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자리에 앉아 손끝으로 자판의 촉감을 느끼듯 타자기를 만지작댔다.
“마티니 한잔?”
“술 마시러 온 게 아냐. 그냥 너를 보러 왔어.”
“개소리!”
조니는 걸걸한 웃음소리를 내며 선반에서 진과 베르무트를 꺼냈다.
마침 어마 토마스가 부른 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나는 그 노래의 가사를 곱씹으며 오른쪽 검지만으로 타자기를 두들겨 이런 글을 쳤다.
'최고의 술은 다음날 숙취가 없는 술이다. 다다음날 깨어날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영원히 깨어나지 않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참 신기해. 장난삼아 타자기를 두들기는 사람들은 많아도 너처럼 몇 시간이고 죽치고 앉아 글을 쓰는 사람은 없거든.”
내가 타자기를 두들기는 모습을 보던 조니가 말했다.
“조니, 글이란 건 그냥 가려운 엉덩이를 긁는 행위야.”
“그건 작가들을 모독하는 말 같은데.”
“아마 그들 모두 내 말에 동의하며 지금쯤 엉덩이를 긁고 있을걸?”
조니가 코웃음을 치며 내게 마티니를 건넸다.
“직원을 고용해 보는 게 어때? 혼자서는 너무 힘들잖아.”
“여긴 그리 넓지도 않고 내 힘만으로 충분해.”
“선원은 필요 없다는 뜻이군요. 에이허브 선장.”
“굳이 네 비유를 따르자면 여긴 작은 뗏목이야. 바다에 떠다니는 손님들을 건져내서 술을 먹이고 다시 바다로 빠뜨리는 거지.”
“끝내주는 표현이군. 훔쳐야겠어.”
“좋을 대로.”
나는 왼손으로 올리브 꼬치를 집고 마티니를 단숨에 들이켰다.
“좀 느긋하게 마셔. 음미하는 법 좀 배우라고.”
“술 안에 진리가 있다는 말도 몰라? 진리가 사라지기 전에 서둘러 비워야 해.”
“아니 그 반대야. 술이 바닥을 드러내면 진리도 사라져버려.”
그의 말이 맞았다.
“가봐야겠어.”
나는 옆자리에 놓아둔 외투를 챙겼다.
“웬일이야! 벌써 일어나다니?”
“말했잖아. 네 얼굴을 보러 온 거라구.”
나는 술값을 카운터에 올려놓고 외투를 입었다.
문 앞에 서자, 등 뒤에서 조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메리 크리스마스.”
“아직 이틀 남았잖아!”
“미리 받아 두라고. 그날은 나도 쉬어야지.”
나는 싱긋 웃는 조니를 향해 어색하게 손을 흔들고 바를 빠져나왔다.
***
창밖에 굵은 눈발이 휘날리고 있었다. 밤사이 많은 눈이 내렸던 것 같다. 도로는 제설 트럭이 지나갔는지 비교적 깨끗했지만 차 위와 길거리에는 눈이 잔뜩 쌓여있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였고 길거리에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나는 책장 맨 위에 놓인 아버지의 우표수집앨범을 꺼냈다. 그중 우표를 하나 골라 뒷면에 침을 묻힌 뒤 갈색 서류 봉투에 붙였다. 서류 안에는 그간 쓴 3편의 원고들을 담겨있었다. 그 사이, 밖의 눈발이 가벼워져 바람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공중에서 요란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거리로 나갔다. 이미 허리 높이의 눈사람이 아파트 입구 쪽에 세워져 있었다. 내 앞으로 젊은 아버지가 어린 딸을 썰매에 태운 채 길거리를 내달렸다. 장갑을 낀 꼬마가 자동차 후드에 쌓인 눈을 긁어모아 친구에게 던졌는데 하마터면 내 얼굴이 맞을 뻔했다.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들은 근처 공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멀리서 반짝이는 대형트리가 공원 입구에 세워져 있었고 그쪽에서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공원으로 향하는 대신 발걸음을 돌려 외곽지역으로 향했다. 그곳은 오르막길인데다 그 너머는 숲으로 둘러 쌓여있어 평소에도 인적이 드물었다. 길을 걷던 중 세워진 자동차 창문에 누군가 손가락으로 'H.E.L.P'라고 써놓은 것이 보였다. 난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래서 그 글씨 옆에 웃는 얼굴을 그려 넣었다.
외곽의 가게들은 모두 셔터가 내려져 있었다. 아마 중심가 쪽에는 몇몇 가게들이 화이트 크리스마스로 모여든 인파를 위해 가게 입구에 전구 따위를 주렁주렁 걸고 할인행사 같은 걸 할 테지만, 여긴 턱도 없다. 크리스마스인데도 공동묘지 같은 엄숙한 분위기가 흐르고 있었다.
계속 길을 거닐다 불이 켜진 곳을 발견했다. 작은 커피숍이었다. 창가에 김이 가득 서려 있었지만 검은 옷을 입은 누군가가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어른거렸다. 나는 조금 떨어진, 그늘진 곳에서 한동안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마치 쓸쓸한 풍경화 앞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그 가게 옆에는 눈이 수북이 쌓인 빨간 우체통이 서 있었다. 저 우체통이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나는 외투 품 안에서 넣어두었던 서류 봉투를 꺼낸 뒤 그걸 우체통 안에 우겨넣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집배원이 내 서류 봉투를 발견하는 상상을 한다. 우체국 직원이 아니라 집배원이 발견했으면 한다. 왜냐하면 수취인란에 ‘이걸 처음 손에 쥔 당신에게’라고 적어놨기 때문이다. 봉투에는 영국에서 1840년에 발행된 페니 블랙 우표를 붙여 놓았다. 일종의 깜짝 선물이지만 처리하는 쪽에선 찜찜한 기분이 들지도 모르겠다.
글을 통해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일종의 깨달음 말이다. 그리고 그걸 남들에게 전해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진실은 정반대였다. 내 몸뚱이를 짊어지는 것조차 버거웠다. 결국 이 모든 것이 그저 몸부림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 나는 코를 훌쩍거리며 흩날리는 눈을 맞고 있다. 조니의 바에서 듣던 어마 토마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돈다.
나를 탓해도 괜찮아요.
나를 창피 줄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 당신을 좋아해요.
나를 속일 수도 있고
나를 깎아내릴 수도 있지만
그래도 난 당신 곁에 있을 거예요.
세상은 나를 바보 같다고 하겠죠.
그들은 내가 당신을 보는 것처럼 보지 못해요.
하지만 누구라도
사랑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 마음을 이해할 거예요
누구라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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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소설이 끝났습니다.
읽어주신 모든분께 감사합니다.
다시 글로 만날 기회가 있었으면 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