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한 남자가 혼자 소주를 마시고 있다. 이름은 ‘R’이라고 하자. R은 어느 회사에 다니고 있다. 나이는 40대 초반이고 11년 다녔지만 만년 대리다. 그는 지금 반쯤 풀린 눈으로 대각선 방향에 앉은 젊은 남자를 뚫어지게 보고 있다. 젊은 남자는 ‘N’이라고 부르자. 어쨌든 말했다시피 R은 N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N은 젊고 체격도 좋은데다 잘생겼고 매너도 좋다. 심지어 머리털도 풍성하다. R의 이마는 맥도날드 로고처럼 웃기게 벗겨졌고 정수리 부분은 태풍의 눈처럼 탈모가 진행 중이지만 말이다. 어쨌든 젊고 잘생기고 매너도 좋은 N은 다른 회사에서 옮겨온 지 2주 밖에 되지 않았지만 팀 내 여성사원들의 인기를 독차지해버렸다.
R은 옹졸한 침팬지처럼 구석에 앉아 젊은 수컷이 고기를 굽는 모습을 흘겨보았다. 걷은 셔츠 아래로 드러난 보기 좋게 그을린 팔뚝과 꿈틀거리는 잔 근육. 아주 훌륭했다.
“이제 제가 구울게요. 좀 드세요.”
N의 옆자리에 앉은 여자가 말했다. 그녀는 입사 1년차 사원으로 이름은 ‘Y’가 좋을 듯하다. 그녀 역시 젊고 아름답다.
“괜찮아요. 재밌어요.”
‘고기 굽는 게 재밌다고? 미친 자식’라고 R은 생각했다. 그럼에도 Y는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둘은 집게를 두고 서로 자기가 고기를 굽겠다고 실랑이를 벌였다. 얼굴에 싱그러운 미소를 띤 채. R은 아래턱을 긁으며 바닥이 거의 드러난 술병을 들었다. 망할! 혼자 두 병은 마셨으리라.
“같이 한잔 하시죠.”
그때, N이 술병을 거의 뺏다시피 한 뒤 R의 잔에 술을 따랐다. 이 ‘건방진 자식’은 매번 이렇게 들이닥쳐서 안 그래도 불편한 R의 심기를 마구 헤집었다. 그는 R보다 8살 어린데다 키는 훨씬 더 크고 직급은 같다. 하지만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건 Y가 N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요. R 대리님. 같이 한 잔해요.”
Y가 잔을 들고 말했다. 평소 R에게 눈길 한번 준 적 없었는데.
“그럴까?”
잔을 부딪친 뒤, N과 Y는 실내 클라이밍을 주제로 20분을 넘게 떠들어댔다. 그 사이 R은 소주 한 병을 더 비웠다. R은 갑자기 화장실이 급해져서 주춤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나 미닫이문 쪽으로 향했다. 이미 술에 취한 상태라 걸음걸이가 위태로웠다. 그러다 사건이 터졌다. 그가 문 앞에 도착하기 직전 중심을 잃고 팔꿈치로 N의 뒤통수를 세게 친 것이다. 고의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R은 자신을 올려다보는 N을 향해 그렇게 내뱉었다. 정적이 흐르며 술자리에 있던 사람들의 이목이 둘을 향해 쏠렸다.
“방금 치셨잖아요. 사과는 못할망정...”
“사과? 내가? 왜!”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N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시 말하지만 그는 키가 매우 커서 R은 눈앞에서 커다란 기둥이 솟아오르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순간 두려워졌다. 하지만 여긴 사람도 많으니 차마 어쩌진 못할 거라 생각했다.
“지금 한번 해보자는 거야!!”
R이 고함쳤지만 N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는 물러서지 않은 채 무섭게 R을 내려다보았다. 마음 같아선 조용히 문을 열고 나가고 싶었지만 이제 와서 꼬리를 내리기엔 보는 눈이 너무 많았다.
“비켜!!”
R의 목소리에서 초조한 감정이 묻어나왔다. 제발 비켜주는 시늉이라도 해주길 바랐지만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사과부터 해요.”
N이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또 정적이 흘렀다. R은 이 일을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도무지 계산이 서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R은 결국 잘못된 판단을 내렸다. 손을 뻗어 N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던 것이다. R의 머릿속에서 그 후 10초 동안의 기억이 날아갔다. 그가 다시 눈을 떴을 때, 끔찍한 고통이 밀려들어왔다.
“아~아아악! 내 어깨! 어깨 빠졌어!!”
R은 엎드린 자세로 바닥에 얼굴을 대고 있었고, N은 그의 허리 쪽에 선 채 왼팔을 뒤로 꺾고 있었다. 그는 꼴사납게 울부짖으며 바닥에 탭을 쳤고 남자 사원들이 달려와 N을 뜯어말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N은 R의 팔을 풀어줬다.
“이 개새끼야!!”
R은 어깨를 부여잡으며 일어났다. 하지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N의 얼굴이 아닌 자신을 바라보는 아주 끔찍한 시선이었다. 그들은 R을 보며 웃음을 참고 있었다.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들은 분명 웃음을 참고 있었다. R은 마치 시체를 발견한 것처럼 질린 얼굴로 뛰쳐나갔다.
***
‘그 사건’ 이후 R은 정말 얌전히 회사를 다녔다. 처음 며칠은 같은 부서 사람들과 눈도 못 마주칠 정도였지만 그래도 지금껏 꾸역꾸역 다녀온 회사였고 무엇보다 그는 하우스푸어였기에 겨우 이런 일로 회사를 때려 칠 순 없었다. 물론 N의 평판은 더 좋아졌다. 회사 사람들은 그 사건을 개의치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일로 이후로 분위기가 한결 더 경쾌해진 것 같았다.
불행한 것은 R뿐이었다. 이 사실이 그를 미치게 만들었다. 그것도 모자라 N과 Y는 연애 초기의 연인들처럼 미묘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R은 사실 그녀를 몰래 마음에 두고 있었다. ‘염병할!’ R은 자기도 모르게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리쳤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그를 향해 쏠렸다. R은 멋쩍게 웃었다. 그들 중 몇몇의 묘한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웃음 참는 표정’
***
“아니,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는데도 나를 노려보면서 멱살을 잡지 뭡니까?”
“저런. 화가 많이 나셨겠네요.”
R의 말을 듣던 의사가 담담하게 말했다.
“뭐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제가 참아야죠. 대신 그 때 일만 생각하면 속이 쓰리고... 하아! 살면서 이렇게 분노한 적이 없는데 이건 도저히 못 참겠네요!!”
의사는 R에게 신경안정제를 처방해줬다. 효과는 직방이었다. 다음날 회사 사람들은 온화한 얼굴로 웃으며 인사를 건네는 R을 볼 수 있었으니까. 사람들은 이 급격한 변화에 어리둥절해하며 ‘그 사건’ 때문에 그가 진짜 미쳐버린 것은 아닌지 의심했다. 사실 원래 좀 미쳐있긴 했으니까. 그러나 R이 원래대로 돌아오는 데는 일주일도 걸리지 않았다. 약에 내성이 생기자 꾹 눌러놨던 우울감과 불안감이 서서히 부풀어 올라왔다. R은 식은땀을 흘리며 병원을 향했다.
“더 센 약을 처방해줘요.”
“일주일 정도 더 지켜보죠. 2주 정도 경과를...”
“일주일이나 어떻게 더 기다려! 당장 돌아버릴 지경인데!!”
“진정하고 앉으세요. 일단 앉아요.”
“얘 취급하지 말고 더 센 약 내놔!”
“나가요. 경찰 부르기 전에.”
R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처방받은 약을 쓰레기통에 처박았다. 그리고는 태아처럼 쭈그린 자세로 소파에 돌아누웠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부동산 어플로 집값 시세를 확인했다. 지난 달 시세보다 천 만원이 더 떨어졌다.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집값이 추락하고 있다. R의 인생도 추락하고 있다. 꼬리에 불이 붙은 비행기가 서서히 포물선을 그리며 수평선으로 곤두박질치는 것처럼.
***
무료한 주말이 지나갔다. R이 조금 늦게 사무실에 도착했을 땐 N과 Y가 복사기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오늘 두 사람의 주제는 매운 음식이었다. 맞은편에서 그들의 대화를 무심히 듣던 R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뚜벅뚜벅 다가가 복사기 사이에 N의 머리통을 처박고 찍어 누른다. 뜨거운 피가 바닥에 뚝뚝 흘러내린다. 그가 망상에서 깼을 때 어느새 둘의 대화 주제는 운동으로 바뀌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씻지도 않고 뛰어요.”
“정말요?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물티슈로 책상을 닦던 R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끔찍하게 하기 싫은 날은 침대에서 뒹굴죠. 별 수 있나요?”
“그 끔찍한 날이 언제예요?”
“월요일 아침?”
N의 말에 Y가 키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