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이어 내 아내 역할을 벅스 버니와 아버지 역할을 맡은 정신과 의사가 무대 위로 올라왔다. 그녀는 내게 다가와 나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얼굴의 온갖 주름을 쥐어짰다. 그 순간 오늘 아침 피해망상은 작가의 창의력에 불을 지펴준다며 빈정거렸던 모습과 대비되면서 참을 수 없는 역겨움이 치솟았다. 난 그녀의 뺨을 후려쳤다.
하지만 약속과 다르게 힘이 너무 들어간 바람에 그녀의 턱이 돌아갔다. 벅스 버니는 한동안 뺨을 부여잡다가 고개를 돌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상황의 심각성을 직감한 정신과 의사가 나를 격하게 밀고 바닥에 뿌려진 원고를 공중으로 뿌리며 수습을 하려 했다.
물론 그걸로 벅스 버니의 분노를 잠재우긴 부족했다. 그녀는 의사를 밀치고 내게 달려들어 내 머리카락을 있는 힘껏 움켜쥐더니 욕을 연발했다.
“이 개새끼야!! 불알을 잘라서 네 눈알에 끼워 줄까보다!”
그녀를 떨쳐내느라 정신없는 와중에 나 역시 입은 쉬지 않았다.
“제발 그 입 좀 닥쳐 썅년아!”
히치콕의 걸쭉한 웃음소리가 작은 공연장에 가득 메웠다.
얼어붙은 의사 양반은 그 광경을 잠시 바라보다 겨우 정신을 차리고 벅스 버니를 말리며 귓속말로 그녀를 진정시켰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숨을 골랐고 난 그 틈에 도망치듯 무대를 빠져나갔다. 무대 뒤 테이블에 올려놓은 권총을 가지고 다시 돌아온 난 이 총에 실탄이 들어있기를 기도했다. 먼저 이 지랄 같은 연극을 기획한 히치콕을 쏘고 그 다음에는 벅스 버니를 쏘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머리에 겨누고. 아! 집사 놈을 깜빡했네. 정말 그러고 싶었다. 난 분노에 찬 멧돼지처럼 그르렁 거렸다. 그리고 내 머리에 총을 겨누고 울부짖으며 협박을 했다.
이성을 되찾은 벅스 버니는 다시 겁에 질린 표정을 지었는데 정말 그 모습을 보고 있기 괴로울 지경이었다. 부녀는 바닥에 무릎을 꿇고 얼싸안으며 애원했다. 그러면서 흐느끼는척하며 온갖 얼굴 근육을 꿈틀거렸다.
그때, 천사 날개를 단 피글렛과 안경 쓴 여자, 그리고 악마 뿔을 단 부랑자가 차례대로 등장했다. 천사 자매는 손을 잡은 채 계단을 올라오려다 발을 헛디뎌서 하마터면 무대에 코를 박을 뻔 했다. 어쨌든 천사 자매는 내 주위를 빙빙 돌며 춤을 추었다. 그들은 허공을 향해 요란한 손짓을 해댔다. 대본에도 없었고 리허설 때도 없었지만 공연 시작 후 무대 뒤에서 즉흥적으로 합의를 본 모양이다.
얼굴에 땀이 흘러 간지러웠다. 땀을 닦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지만 그들이 내게 바짝 붙어 춤을 추는데 심취한 바람에 난 팔을 뻗을 수 없었고 그저 우두커니 서 있어야 했다. 먼저 천사 자매가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온갖 불쌍한 척을 하는 부녀를 가리키며 웅얼거렸다. 둘이 섞여 웅얼거리는 소리가 극히 부자연스럽고 괴상해서 정신이 혼미해질 지경이었다. 난 그들이 악마가 아닐까 하는 합리적인 의구심이 들었다.
악마 역을 맡은 부랑자는 내가 내동댕이친 타자기를 책상에 도로 올려놓고 타자기를 두들기는 흉내를 내며 웃었는데 그건 비열한 웃음이라기 보단 음식을 잘못 삼켜서 기침을 뿜어내는 소리에 가까웠다. 그들이 대충 설득하는 동안 나는 머리를 부여잡고 또 울부짖어야 했다. 부랑자가 자리를 비켜줘야 했지만 그 모자란 자식은 계속 의자에 눌러앉아있었다. 덕분에 내 목이 다 쉴 지경이었다.
결국 나는 그 지겨운 놈에게 나오라고 총구를 휘저었고 그제서야 악마는 어색한 웃음을 멈추고 자리에서 어색하게 일어났다. 나는 드디어 책상에 앉아 관자놀이에 권총을 겨눈 채 흐느껴 울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진짜 눈물이 나왔다. 그 순간 맞은편에 앉은 히치콕의 진지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때 눈물이 나왔는지 나도 모르겠지만,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뺨을 타고 굵은 눈물이 흐르자마자 눈에서 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그러자 다들 숙연해졌고 주저앉은 부녀의 연기도 한층 짙어졌다. 그들은 진짜 부녀라도 되는 듯 꼭 껴안고 덜덜 떨며 겁에 질린 연기를 훌륭히 해냈다. 천사 자매와 악마의 과장된 몸짓도 참아줄만한 수준으로 잦아들었다. 나는 이게 진짜 총이라고 생각하고 방아쇠를 당기며 크게 외쳤다.
“타아아앙!!!”
그리고 고개를 푹 떨구며 눈을 감았다. 진짜로 눈을 감아버렸다. 곧이어 부녀가 내 팔을 부여잡고 흐느껴 우는 소리가 들렸고 뒤에서 악마가 춤을 추는지 쿵쿵거리는 울림이 느껴졌다. 어둠속으로 향하는 천사자매의 둔탁한 발걸음 소리도 들려왔다. 잠시 후, 느리고 묵직한 박수소리가 들렸다. 뒤이어 박수갈채가 터져 나왔다. 나는 눈을 떴다. 히치콕이 자리에 일어나 박수를 치고 있었고 주변의 앉은 경쟁 상대들도 마지못해 일어나 박수갈채를 보내고 있었다.
“브라보!! 브라보!!”
히치콕이 열렬히 박수를 쳤다. 믿기지 않았다. 다시 기름진 음식을 목구멍에 쑤셔 넣을 수 있다는 기대감에 심장이 요동쳤다. 그때 누군가 내 팔을 잡고 흔들었다.
***
“좀 일어나!! 어제 잠 안자고 뭘 한 거야?”
그가 소파에 잠든 나를 깨웠다. 잠에서 깬 나는 장식장 유리에 비친 모습을 보고 나도 모르게 놀라 입술이 벌어졌다. 거기엔 히치콕이 앉아있었다.
“히치콕! 네 원고를 다 읽어봤어. 역시 예상한대로야.”
나는 그제서야 꽤 이 모든 것이 꿈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너무 생생하고 꿈이었다. 당장이라도 이걸 모조리 글로 옮길 수 있을 정도였으니까. 그 이상한 저택의 구조와 그 저택의 주인이 나라는 점, 그리고 그 꿈의 주인공이 내 앞에 있는 저 재수 없는 자식이라는 사실까지.
“그렇게 부르지 마. 옛날 별명이잖아.”
“이번 이야기도 네 몸뚱이처럼 굼뜨니까 그렇지. 히치콕!”
그는 내 아랫배를 주먹으로 가볍게 쳤다. 녀석은 나와 대학교 동창이었고 종종 내 원고를 봐주며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지만 나를 하대하기 시작한건 꽤 됐다.
“말했잖아. 시작부터 강력한 한방이 필요하다고. 네 이야기를 기다려 줄 독자는 아무도 없어.”
나는 이마를 매만지며 녀석의 말에 반응을 보이는 척 했지만 실은 방금 전 꿈에서 본 이야기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내용이었으니까.
“이렇게 하자. 일단 이번 출간되는 내 소설 교정 일을 좀 도와줘. 물론 수당은 저번과 마찬가지고. 그런 다음에 네 원고를 어떻게 수정할지 조언해줄게. 어때? 나쁘지 않지?”
나는 소파에서 엉덩이를 떼며 일어났다.
“왜 그래?”
“저기... 급히 갈 곳이 있어.”
“갈 곳? 딱히 만날 사람 없잖아. 정신과 예약이라도 잡혔어?”
“아니, 귀머거리의 저택.”
-귀머거리의 저택 끝
===================================================================================================================
첫 단편이 끝났습니다.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