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 난 응접실 바닥에 너부러진 내 동료들을 깨웠다. 굶주린 그들은 금방 눈을 떴다.
나는 어제 쓴 대본을 돌려 읽게 했다. 그들은 대사가 나오지 않는 무언극이라는 사실에 마음에 들어 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대본에는 5명밖에 등장하지 않아요. 여자 역할 한명이 더 필요해요.”
의사 양반이 그 사실을 지적했다.
“어머니 역할을 추가하죠.”
주황머리가 의견을 제시했지만 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까지 나오면 극의 분위기가 산만해져요. 게다가 가족이 많으면 작가가 죽고 난 뒤, 부녀에게 남겨질 비극적인 느낌이 약해지잖아요.”
“남은 가족은 잘 살 거예요. 어차피 이 작가는 가족에게 득이 되지 않는 기생충이나 다름없으니 죽어도 별 문제는 없을 걸요?”
벅스 버니의 말에 나는 며칠간의 피곤과 짜증이 겹쳐 덜컥 짜증이 났다.
“지금 그거 나한테 하는 말이에요?”
“피해의식이 심하시네. 하긴 어디서 보니까 그런 망상이 작가들의 창의력에 불을 지펴준다던데.”
나는 그녀의 말을 애써 무시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빨 사이에 껴서 도저히 빠지지 않는 고기 찌꺼기처럼 내내 신경이 쓰였다.
“어쨌든 어머니 역할을 추가하는 건 반대예요.”
“그럼 어떤 역을 추가할건데요?”
피글렛의 물음에 나는 그녀와 안경 쓴 여자를 손을 붙잡은 천사 자매로 만들어버렸다. 작가 역할은 내가 맡았고 벅스 버니가 작가의 아내를, 정신과 의사가 그녀의 아버지를, 부랑자가 악마를 맡기로 했다. 친절한 의사 양반이 내 대본을 타이핑해서 5개의 복사본을 만들어줬다.
각자 대본을 보며 연습하는 동안, 굶주린 피글렛은 혹시나 히치콕이 아침 식사에 우리를 초대할지도 모른다고 들뜬 기색을 보였지만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아마 우리 대신 이틀 전 괴상한 연극에 영혼을 불태운, 이 어두운 객실에 있었던 그들이 히치콕과 함께 만찬을 즐기고 있겠지.
이번에도 하녀가 트롤리를 끌고 왔다. 우린 스프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묽은 국물로 배를 채웠다. 점심에는 푸석한 감자와 소금이 나왔고 저녁에는 삶은 달걀 하나가 나왔다. 가뜩이나 형편없는데 갈수록 더 가관이었다. 우린 저녁에 나온 물주전자로 배를 채우기 위해 서로 다퉜다. 플라스틱 병에 물을 공평하게 나누기로 했지만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병에 물을 한 뼘 더 따른 것에 모두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그를 힐난했다. 그가 쌓아올린 중재자로서의 신뢰가 한 모금의 물 때문에 처참하게 무너져 내렸다. 물론 절대 실수는 아니었다. 물을 따르자마자 냉큼 플라스틱 병을 자기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으니까. 누가 봐도 의심할만한 조합한 속임수였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우린 망원경으로 맞은편에서 온갖 기름진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우는 그들을 보며 군침을 흘렸다. 그들의 한손에는 와인이 다른 한 손에 대본이 들려 있었다. 8시가 되자, 집사가 엽총을 맨 하녀 둘을 이끌고 복도 문을 열었다.
“여러분. 이제 공연실로 내려갈 시간입니다.”
그는 점잖고 공손한 집사로 되돌아와 있었다.
***
우리는 지하 공연장으로 내려갔다. 히치콕은 크고 푸짐해 보이는 소파에 미리 앉아있었다.
“앉으시오! 오늘 공연은 무척 기대되는군요.”
히치콕이 등을 돌려 좌우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그를 중심으로 좌우에 늘어서 앉았다.
장막이 오르고 우리의 맞은편에서 만찬을 즐기던 돼지들의 연극이 시작됐다. 어느 술집을 연상케 하려는 듯 책상 너머에 선 남자가 헝겊으로 술잔을 닦았다. 앞에 놓인 나무의자에는 두 남녀가 앉아 있는데, 연인인 듯 턱을 괴고 서로를 향해 느끼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그 옆 테이블에는 두 여자가 조용히 술을 마시고 있다. 그러다 갑자기 중절모를 눌러쓴 한 남자가 발로 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시늉을 하더니 연인 옆에 앉았다. 그리고는 주인에게 술을 한잔 시키려는 듯 뭐라고 웅얼거린다. 연인은 그를 한번 흘겨보고 다시 대화를 나누지만, 옆자리 남자가 술잔에 담긴 물로 목을 헹구자 인상을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보며 히치콕은 킥킥 웃어댔다. 우린 슬슬 불안해졌다.
옆 자리 남자가 무례한 중절모에게 손을 격정적으로 뻗으며 항의의 표시를 했지만 중절모는 아랑곳 않고 바텐더에게 그르렁대는 소리를 냈다. 대충 한잔 더 달라는 뜻이었다. 중절모는 남자에게 대충 무어라 지껄인 뒤 바텐더에게 건네받은 술을 그에게 끼얹었다. 그러자 한바탕 싸움이 일어났고 둘은 멱살을 잡고 일어섰다. 그때 갑자기 옆자리에 앉아있던 여성 두 명이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며 그들의 싸움에 환호했다. 싸움에 휘말린 남자의 여인은 구경꾼들에게 욕을 하며 덤벼들었다.
곧 무대는 난장판이 됐다. 그들의 싸움은 진짜를 방불케 할 정도로 격렬했는데 남자들은 서로 맞잡은 옷이 찢어질 정도로 세게 움켜쥐었고 여자들도 서로의 머리털을 억세게 쥐며 찢어지는 비명을 내질렀다.
우린 모두 그 공연에 할 말을 잃었다. 히치콕은 감탄한 듯 멍청한 얼굴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바텐더가 술잔을 바닥에 내던졌고 유리가 깨지는 소리와 함께 모두 싸움을 멈췄다. 바텐더는 손에 쥔 헝겊으로 멱살을 잡은 남자들의 얼굴을 채찍처럼 후려쳤고, 서로 엉켜 붙은 세 여자들에게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자 약속이라도 한 듯 그녀들은 서로 손을 뻗어 겹치며 화해를 했고, 옆 자리 남자는 바닥에 떨어진 불청객의 중절모를 쥐어주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바텐더는 화통하게 웃으며 손님들에게 건배를 제안했다. 그러자 모두 잔을 들고 그의 합을 맞춘 경쾌한 외침과 함께 잔을 부딪쳤다. 놀랍게도 히치콕의 얼굴에는 흐뭇한 미소가 걸려있었다. 이 망할 짐승들은 주인을 위해 정말 열정적으로 울부짖었다.
이번엔 우리 차례였다. 우리에게 주어진 준비 시간은 10분밖에 없었다. 하지만 타자기가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집사가 타자기를 구해다줬다.
“부셔도 상관없죠?”
“물론이죠. 대부님을 위해서라면 뭐든 상관없습니다.”
우린 무대 배치와 각자의 소품을 점검하고 마지막으로 대본 연습으로 했다.
“저 사람들 한 것 봤죠? 적당히 해서는 씨알도 안 먹혀요.”
내 말에 처음으로 다들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이번에도 지면 우린 또...”
“알아요. 그 어둡고 찬 바닥에서 빵 쪼가리나 뜯으면서 군침을 흘리겠죠. 빵이라도 나오면 다행이지...”
내 말을 피글렛이 이어받았다.
“명심해요. 이건 연기가 아니라 전쟁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더 절박하죠. 이제 저 배부른 놈들 깃발을 빼앗고 목구멍에 기름칠 합시다. 미쳐보자고요!”
“좋소! 미쳐봅시다!!”
부랑자가 두 팔을 번쩍 들며 크게 외쳤다.
“다들 최대한 크게 울부짖고 과격한 동작을 쓰세요. 특히 작가님 역할이 중요합니다.”
물 한 모금 사건으로 권위가 추락했던 정신과 의사도 한마디 거들었다.
“그래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우리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한번 해봐요.”
피글렛이 정신과 의사의 어깨를 다독이며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었다. 그녀의 질책은 물 한 모금 치고는 너무 가혹했으니까.
“10초 뒤에 공연 시작합니다.”
집사가 무대 아래에서 말했다. 나는 서둘러 책상에 앉았고 다른 사람들은 무대 뒤로 향했다.
붉은 장막이 올라갔다. 히치콕을 중심으로 명연기를 펼쳤던 배우들이 객석에 앉아있었다. 나는 눈을 감고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일종의 결심이 필요했다. 눈을 뜨자마자 나는 책상에 놓인 타자기를 미친 듯이 두들겼다. 그러다 갑자기 분노에 차서 원고를 집어 뜯고 책상을 발로 찼다. 그것도 모자라 타자기를 무대 바닥에 내리꽂아 산산조각 냈다. 잠시 객석을 바라보았는데 히치콕이 놀란 듯 입술이 살짝 벌어진 것이 보였다. 시작이 나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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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드렁크 타이핑 10화 - 귀머거리의 저택(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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