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실로 올라온 사람들은 모두 내 돌발행동을 질책했고 그 다음엔 내가 수정한 대본을 비난했다.
“집주인은 귀가 잘 들리지 않는데 대사가 너무 많잖아요!”
안경 쓴 주황머리가 머리칼을 귀 뒤로 쓸어 넘기며 투덜댔다.
“그냥 대충 외워요. 몇 줄 되지도 않는구먼.”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비볐다.
“우리도 그 사람들처럼 웅얼대는 식으로 하면 되잖소.”
부랑자가 뺨에 난 작은 종기를 긁으며 말했다.
“그래요. 우리도 그냥 웅얼대요! 대사 따위 무슨 필요가 있다고!”
벅스 버니가 그의 말에 동조했다.
“차라리 무대 위에서 네 발로 기어 다니지 그래? 그 인간이 참 흡족해할 텐데.”
“그거 알아? 당신은 건방져. 만약 지금 누굴 목매달지 투표를 하면 다들 당신을 지목할걸.”
팔짱을 낀 피글렛이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방금 나한테 뭐라고 지껄인 거야? 목을 매달아?”
내가 다시 언성을 높이려는 순간 정신과 의사가 나섰다.
“그러지 말고 이제부터 대본을 외웁시다. 될 수 있으면 집주인이 들릴 수 있도록 큰소리로 하면 되잖아요. 지금 새로 대본을 짜는 건 무리에요. 우선 역할 분담부터 하죠.”
그는 필사적으로 머저리들을 설득했다. 나는 길길이 날뛰고 싶은 마음을 억누른 채 일단 닥치기로 했다.
배경은 재판정이었고 등장인물은 판사, 원고, 원고 변호인, 피고, 피고 변호인, 그리고 방청객이었다. 재판정의 부조리를 참지 못해 박차고 일어난 방청객의 대사가 제일 많았기에 내가 방청객을 맡았다. 피고 변호인의 대사가 그 다음으로 많았기에 의사 양반이 그 역할 맡기로 했다. 나는 대본조차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그들의 멍청함에 진저리가 났다. 몇 번의 연습 후 나는 피곤하다는 핑계를 대고 내 방으로 들어와 문을 잠갔다. 어차피 내 대사는 뒤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별 상관없었다. 될 대로 되라지. 나는 어제 내선전화로 주문해둔 발렌카야 보드카를 병째로 마셨다. 보드카를 반쯤 비우고 잠깐 잠이 들었는데 주변이 어두워져 있었고 불을 켜서 시계를 보니 7시가 조금 지나 있었다. 나는 문을 열고 응접실로 나갔다. 그들은 어김없이 만찬을 즐기고 있었다.
“문을 아무리 두들겨도 반응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이리 와서 좀 들어요.”
웬일로 피글렛이 날 향해 미소를 띠었다. 나는 군말 없이 빈자리로 가서 파이와 닭고기 한 조각을 먹었다.
“생각해보니 우린 너무 흥분해서 불필요한 다툼을 벌였어요. 아까 목을 매달자느니 한 말은 사과할게요.”
그녀는 와인을 한 모금 마시며 몹시 고상한 척을 했는데 그걸 보자니 속이 거북했다.
“신경 쓰지 마세요. 나도 병신이니 뭐니 험한 소릴 했잖아요.”
“그런 의미에서 다 같이 한잔 할까요?”
피글렛이 내 앞에 놓인 잔에 와인을 따랐다. 제발 그 말만은 하지 않길 바랐는데.
우린 와인 잔을 부딪치고 남은 음식들을 남김없이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같잖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급하게 화해무드를 조성됐고 그런 다음 대사 연습을 했는데 그들은 여전히 대사를 외우지 못해 계속 버벅거렸다. 난 그냥 모든 기대를 접었다. 8시를 조금 넘겼을 무렵 집사가 하녀 둘을 대동하고 다가왔다.
“이제 리허설을 하러 내려가시죠.”
우린 군말 없이 일어났다. 다들 이 배부른 죄수생활에 익숙해져 있었다.
***
공연장에 도착한 우리는 소품을 고르기 위해 무대 뒤 창고로 모였다. 5단 선반에 온갖 잡다한 잡동사니가 가득 차 있었고 그 옆으로 긴 옷걸이에 각종 의상이 걸려있었다. 우린 급하게 판사 복장과 재판정 망치를 찾아냈고 변호인이 입을 정장 두 벌도 골랐다. 그리고 각자 필요한 의상을 고르기로 했다. 원고 역을 맡은 벅스 버니는 빨간색 빵모자와 진주목걸이를 하고 전신 거울 앞에 서서 포즈를 취했고 부랑자는 그 옆에서 단발머리 가발을 쓰고 잇몸을 드러내며 바보처럼 웃었다.
“장난치지 말고 역할에 맞는 소품이나 찾아요!”
“왜 명령 투야?!”
내 잔소리에 벅스 버니가 날 죽일 듯이 노려봤다.
“10분 뒤에 대부님께서 도착하십니다.”
집사가 말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긴장이 됐다. 내가 이 염병할 공연에 똥줄이 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자 알 수 없는 수치심이 밀려왔다.
얼마 후, 장막 너머로 히치콕의 묵직한 발걸음소리가 들려왔다. 우린 뒤늦게 판사가 앉을 책상조차 준비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급하게 무대 뒤로 가서 책상을 하나 끌고 왔다. 책상이 없으면 판사는 허공에 대고 망치를 두들겨야 할 판이니까.
“10초 뒤에 공연 시작합니다.”
집사의 말에 서둘러 각자의 자리로 가서 앉았다. 내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장막이 걷혔다.
“내 개가 담벼락을 넘었다고 죽였어요. 총으로 쏴서.”
원고 측 자리에 앉은 벅스 버니가 맞은편에 피고역할의 부랑자를 가리키며 어린애처럼 쫑알거렸다. 대사의 순서가 뒤죽박죽인건 둘째 치고 그녀의 말에는 어떤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피고 변호인을 맡은 정신과 의사가 일어섰다.
“피고는 원고의 개가 자신의 사유지를 침범하는 일이 빈번했고 이에 큰 위협을 느꼈습니다.”
의사는 객석에 앉은 히치콕의 눈치를 보며 큰소리로 외쳤다.
“그 개는 단순히... 어... 그냥 개가 아니라 어... 원고와 동고동락한 유일한 가족이었...”
원고 변호인을 맡은 안경 쓴 여자가 말을 더듬자 벅스 버니가 그녀가 할 대사를 가로챘다.
“그래요. 마을 사람들도 코코가 사람들을 잘 따른 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피고 역시.”
“하지만 피고는 참전용사로 전쟁 트라우마가 있습니다. 신경쇠약인 피고에게 개가 집 앞에서 짖는 소리는 끔찍한 고문이나 다름없었죠. 이 참사는 개를 관리하지 못한 원고의 책임이 큽니다.”
정신과 의사가 변호를 하는 동안 옆에 앉은 부랑자는 정신없이 다리를 떨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도무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때, 판사역할을 맡은 피글렛이 느닷없이 재판정 망치를 쥐고 세 번 두들겼다. 난 당황했다.
“자! 그렇다면 피고 측은 진단서를 제출하세요. 어디 진짜 신경쇠약인지 아닌지 확인해봅시다! 내가 밝혀낼 겁니다.”
그녀는 그 기괴한 대사를 아주 당당하게 외쳤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 누구도 진단서 역할을 종이 한 장 준비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종이쪼가리 한 장 때문에 무대 전체에 정적이 흘렀다. 정신과 의사는 주머니를 뒤지더니 주변을 둘러보다 방청객에 앉은 나와 눈이 마주쳤다. 혹시 준비했냐는 눈빛이었다. 나는 급하게 주머니를 뒤졌다. 저녁식사 중 코를 풀고 둥글게 뭉쳐놓은 냅킨 하나가 손에 잡혔다. 어쩔 수 없이 난 자리에서 일어나 그 더러운 냅킨을 펴서 정신과 의사에게 건넸다. 방청객으로 돌아오는 중에 히치콕의 얼굴이 보였다. 몹시 흉한 것을 본 것 마냥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 제대로 망했다. 정신과 의사는 그걸 쓰레기 마냥(쓰레기가 맞지만) 손가락 끝으로 쥐고 그걸 피글렛에게 건넸다. 그녀는 내 콧물이 잔뜩 묻은 냅킨을 바라보며 진지한 표정을 쥐어짰다.
그때, 벅스 버니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저 놈이 내 가족을 죽였어! 내 유일한 가족을!”
라고 전혀 격분에 차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엔 네 차례야!”
라고 부랑자가 일어나 그녀를 향해 건성으로 말했다.
보다 못한 히치콕은 몸을 일으켜 그대로 공연장을 떠났다. 그 옆에 있던 관객들도 그 뒤를 따라 나갔다.
우린 마네킹처럼 멈춰 서서 서로의 눈치를 봤다. 그때 집사가 박수를 치며 무대 위로 올라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뒤에서 옷을 갈아입으세요. 객실로 모시죠.”
“끝난 거예요?”
안경 쓴 여자가 물었다.
“네. 끝났습니다.”
집사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
1층 홀로 올라오자 집사는 홀의 오른쪽이 아닌 왼쪽으로 향했다.
“잠깐! 이 방향이 아니잖아요.”
내가 말했다.
“오늘은 반대편 객실로 모시겠습니다. 짐은 저희가 다 옮겨놨습니다.”
엽총을 어깨에 맨 하녀 두 명이 등 뒤에서 따라왔기에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집사를 따라 왼쪽의 복도로 들어섰다. 다들 이 상황에 의아해하긴 했지만 어찌됐든 오늘도 가자마자 거하게 한잔 할 태세였다. 복도 끝 엘리베이터에 다다르자 집사는 먼저 3층으로 올라갔고 엘리베이터를 잡아타는데 익숙해진 우리는 차례대로 칸에 올라탔다.
3층에 도착하자 집사가 열린 복도 문 앞에 우두커니 서있었다. 그는 랜턴을 들고 있었는데 그 희미한 빛 너머로 깜깜한 복도가 드러났다.
“왜 이렇게 어둡죠?”
벅스 버니가 물었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있는 법이죠.”
“뭔 개소리요?”
그는 내 말에 아랑곳 않고 복도로 가서 랜턴을 벽에 걸었다.
“방 위치는 맞은편 객실과 마찬가집니다.”
마침 엽총을 든 하녀들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왔다. 우린 어쩔 수 없이 복도 안으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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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월요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