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너무...하게 제조했나?"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녀의 목소리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하다가...
"설마 한 병 마시고 기절할 줄이야. 의외로 허약 체질 일지도?"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잘못 들은 게 아니라는 것을 확실시 해주었다. 듣기만 해도 얼굴을 보고 싶을 정도의 귀여운 소녀의 목소리가. 머리 뒤통수로 느껴지는 포근함과 미약한 맥박은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일단 책대로 그리고 아카데미에서 배운 대로 약을 제조했으니, 문제는 없겠지만. 아마도."
소녀의 목소리 덕분인가? 조금씩 의식이 회복되는 느낌이었다. 덕분에 감은 눈동자도 서서히 떠져 갔고.
"아 일어났어?"
내 눈앞에 소녀가 깨어난 나를 향해 미소를 짓고 있었다. 등까지 내려온 핑크색의 네추럴 웨이브 머릿결의 앰버색 눈동자를 가진 소녀가 내 이마를 이루어 만지고 있었고.
"혹시 열나는 거라도 없어? 피곤하면 더 자는것이..."
퍼억!
양손으로 소녀를 밀어낸 뒤 뒤로 물러갔다.
"나한테 가까이 오지 마!"
확실했다. 저 분홍색 머리카락의 앰버색 눈동자. 나한테 이상한 약을 먹인 뒤 기절시킨 여자애였다. 그 뒤 나를 이상한 곳으로 끌고 가려고 했던...
소녀는 나를 진정시키려는 듯 양손을 벌리면서 외쳤다.
"진정해! 나 너에게 해를 끼치려고 한 게 아니야!"
"그러시겠지! 나한테 이상한 약을 먹인 뒤 기절시킨 틈을 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나는 한 손으로 입을 가려보았다. 위화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나는 분명히...
"진정됐어? 내 말 알아들을 수 있고?"
알아듣게 된 것이다. 소녀가 나한테 무슨 말을 하는지. 단순히 알아듣는 게 아니라 내 입에서 그녀가 말한 언어가 술술히 나오고 있었고.
"방금 진정됐냐고 물어봤지? 알아들을 수 있냐고도 물어보고."
"응! 응! 맞았어!"
정말로 기쁜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인 뒤 소녀는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조금만 움직이면 서로의 얼굴을 맞댈 정도로.
“단순히 알아듣는 것뿐만 아니라, 말도 할 수 있다니! 이건 대성공이야! 처음 만들어 보는 거라 좀 긴장했는데!”
경계가 풀리지 않은 상태에서 아까전 보다 더욱 더 밝게 빛나는 앰버색 눈동자의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나한테 가까이 다가오길래 왠지 모르게 소름이 끼쳤다.
'예쁘긴 하네...'
마음속으로 이 말이 나오고 있었다. 평소에 머리 관리를 했는지 핑크색 머리카락이 윤기를 내고 있었고, 호수처럼 맑은 엠버색 눈동자는 거울 보는 거처럼 내 얼굴을 비추었고, 분홍색 입술을 가진 하얀 피부에서 나오는 향기로운 향이 계속 해서 나의 코를 찌르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약을 먹였길래 뜬금없이 너의 말을 알아듣게 된 거야? 먹었더니 두통이 몰려오고."
"절대 기억 향상 약."
소녀는 가방 속에서 푸른색 커버로 된 책을 하나 꺼내었다. 표지에는 한글도, 로마자 알파벳도 아닌 난생처음 보는 언어들이 적히죠 있었는데...
"약을 먹은 뒤 네가 잠들어 있는 사이 이 책에 나온 내용들을 머릿속에 집어넣게 해주었지."
'어린이도 배울 수 있는 초간단 오케아나 언어' 라고 읽을 수 있었다. 소녀는 한 손으로 책을 펼친 뒤 촤라락-하면서 페이지들을 넘겼는데, 지나가는 페이지마다 보이는 문장들을 눈으로만 봐도 무슨 뜻 인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알려주었다. 마치 어릴 적부터 많이 접해온 언어라는 듯.
혹시나 해서 모국어인 한글을 잊어버린게 아닌가 했지만 아니었다. 머리속에 한글을 떠오르자 그대로 그림 보듯 하나 둘씩 보였지만 본능 때문인지 몰라도 한글이 아닌 소녀가 언급한 오케아나어가 먼저 입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단어는 어떻게든 내 머릿속에 집어넣어서 알게 된 거면..."
나는 검지로 입을 가리키면서 말을 이어갔다.
"발음은 어떻게 발음은 알게 된 거야? 언어만 알지 발음하는 법을 모르면은 읽을 줄만 아는 상황이 되잖아."
"이렇게."
소녀는 핑거리스 장갑이 껴진 오른손으로 내 이마를 짚은 뒤 왼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었다.
"이렇게 내 머릿속에 있는 정보를 너에게 건네준 거야. 내가 어릴 적부터 접해온 언어다 보니 고정 및 발음 등을 전달하는 데는 문제가 없었고."
"무슨 만화도 아니고…. 어떻게 그런 게 가능해?"
지금 내가 내뱉은 말에 소녀는 고개를 갸웃하였다. 소녀의 말에 나도 고개를 갸웃하게 되었고.
“딱 봐도 만화 같은 전개잖아. 무슨 약을 먹여서 외국어를 머릿속에 집어넣기 이런 거라든지 말이야. 만화 아니면 뭐야.”
“만화가 뭐야?”
소녀의 얼굴은 다시 내 얼굴 가까이 다가왔다. 아까처럼 호기심이 가득 찬 얼굴로.
“재미있는 거야? 연금술만큼? 지금 볼 수 있어?”
“음 설명하자면 현실에서 절대 일어나지 않을 일들을 재미있는 그림으로 그려 주는 거? 애 어른 구분할 거 없이 부담 없이 볼 수 있고..”
“재미있는 거 맞네!"
소녀는 양손을 꼭 쥐면서 엠버색의 양 눈이 더욱더 반짝이고 있었고 그녀 특유의 활기참에 의해 내 몸이 서서히 밀려가는 듯했다. 보아하니 나하고 또래 나이인 듯 한데 이렇게까지 아무 걱정 없이 활기참으로 가득 찬 소녀는 난생 처음인 듯 하였다.
"그 만화란 거 가지고 있어 지금?”
"한 권도 없어."
"...에?"
"전부다 집에 두고 와서 지금 한 권도 없어. 미안."
"부우..."
실망했다는 표정과 함께 볼을 부풀리는 소녀였다. 저렇게 삐져있는 표정을 지으니 은근히 귀엽긴 하네. 볼을 부풀어 오르는 모습을 보니 검지로 찌르고 싶은 충동이 일어나기도 하였고.
"뭐 본론으로 넘어가서..."
저 소녀의 활기참 때문인지 긴장감이 어느 정도 풀리는 동시에 몰려오는 피로함으로 인해, 등을 벽에 기대면서 긴 숨을 내뱉었다. 누가 들으면 한숨으로 착각할 정도로.
"지금까지 일들 되짚어 보면 하나같이 만화에서나 볼 수 있는 상황이라고. 약물 마시더니 언어를 배우지 않나, 조금 전에 뿔 달린 토끼 무리가 나타나지 않나 무엇보다..."
아까전 토끼의 뿔에 스친 볼을 이루어 만지니 붕대 같은 것이 붙여져 있었다. 내가 기절한 사이에 붕대를 붙였나 보네.
"갑자기 주변에 불길이 일어나면서 마법사처럼 붉은 로브 입은 누군가가 나를 데리고 가고."
"이거 말하는 거야?"
소녀는 후드를 뒤집어썼다. 붉은색 망토에 달린 후드를. 짠-하는 소리를 내면서.
"역시 불붙인 애가 너였구나? 그 무슨 붉은 안개 나오는 약물까지 던지고."
"우후후-이 천재 미소녀 연금술사가 만든 특제 몬스터 퇴치용 약물과-"
따악-하고 손가락을 튕기니, 허공에 불꽃이 떠 올랐다. 소녀의 손바닥 크기만 한 불꽃이.
"화염 마법으로 뿔토끼 무리를 그대로 쓸어버렸지. 나의 아름다운 외모와 어울리는 불꽃으로 말이야."
말이 끝남과 함께 한 번 더 손가락을 튕기더니 펑! 하는 소리와 함께 불이 허공에서 폭발했다. 혹시나 해서 속임수를 쓰는 건가 했지만, 방금의 열기가 그대로 피부로 느껴져서 그건 또 아닌 거 같고.
"그렇게 된다면 고마워."
고개를 조금 숙였다. 저 이 세계 판타지 복장을 한 소녀에게 감사를 표하는 것이 예의겠지.
"그 뿔 토끼들로부터 구해준 거. 원래 진작에 해야 했지만, 안 하고있었던 것이 마음에 걸렸어."
"마음에 걸릴 거까지야 귀여운 소년 씨-"
나를 보고 귀엽다고 말한 저 핑크색 머리카락 소녀는 윙크하면서 혀를 쏙 내민 뒤 말을 이어갔다.
"서로가 말도 통하지 않았으니 제대로 된 대화가 오갈 수 없었잖아. 고맙다고 해도 나 못 알아들었을지도?"
"하하하 그건 그렇네."
그 언어를 배우기 위해 저 소녀로부터 머리 깨질 듯한 정도의 포션을 마시게 되었지만. 마음 같았으면 약 먹은 뒤 쓰러져서 너무 무서웠다고 솔직하게 말해주고 싶었지만, 쟤도 나를 도와주려고 했으니 오히려 그런 거로 따지는 것은 저 핑크 머리카락 소녀의 자존심에 상처를 주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 맞다!"
소녀는 양손의 손바닥을 짝! 하고 서로 부딪힌 뒤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 아직 통성명을 안했네. 서로의 이름을 모르고."
"그러고보니 그렇네. 하도 정신 없다 보니까 뭐."
에헴-하는 헛기침을 낸 뒤 오른손으로 자기 가슴을 두들겼다. 싱긋 미소를 지은 체.
"내 이름은 키스. 연금술사 키스 플레어필드. 이름이 뭐야 멋진 소년 군?"
짧은 자기소개를 마친 그녀를 보면서 나는 오른손으로 머리를 긁었다. 눈앞의 핑크색 머리카락의 미소녀에게 내 이름을 알려주려고 하니까 뭔가 쑥스럽고.
"정성운."
내 입에서 옅은 미소가 그려지자 마치 나를 따라 하듯 소녀 역시 미소를 지었다. 미소를 지으니까 확실히 귀여워 보였다. 뭐랄까 미소에 잘 어울리는 소녀라고 해야 할까.
"성운이라고 불러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