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유니콘 프로젝트 3 독립닌자요원 잇토키 (815)

[에단 헌트]

트레이시는
자신이 이 병실에 온 후로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완전히 의식을 회복하고
12시간이 가까워져 가고 있다는 사실은 알았다.

12시간이 지났음에도
그녀는 침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의식을 찾았을 때만 해도,

두통이 느껴졌다,

눈도 제대로 보이질 않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두통은 조금씩 잦아들고
시력도 정상으로 돌아온 듯했지만,
머릿속이 뿌옇게 느껴지는 불쾌감은 아직 남아 있었다.

의사는
GHB의 부작용 때문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면서
부작용은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영구적으로도 남을 수 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약효가 끝나는 순간에
강한 우울증과 자살 충동이 찾아올 수 있다고도 경고했다.

적어도 24시간,

안전하게 48시간의
절대 안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의사의 지시가 있었지만,

트레이시는
이 침대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사실 의사의 지시는
그녀에게 그렇게 가치를 가지지 못했다.

단순히 의사의 지시뿐이었다면

그녀는
진작에 침대에서 일어나
이 병실을 벗어났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를 침대에 묶어 둔 것은
의사의 지시가 아니었다.

그 남자,

사쿠라바 잇토키가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기에,

그래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몇 번째인지 모를 식사를
다시 침대에 앉은 상태로 먹었다.

환자에게 제공되는 음식치고는
나름 먹을 만한 음식이 제공되는 식사가 끝나자,

트레이를 가져가기 위해
간호사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좀 어떠세요?”








트레이를 정리하며 간호사가 물었다.








“이제는 괜찮아요. 감사합니다.”







트레이시는
그녀에게 미소와 함께
감사 인사를 보냈다.

간호사도
트레이를 들면서
트레이시에게 미소를 지어 주었다.








“무엇보다 안정이 우선이에요.
걱정했는데,
웃는 걸 보니 다행이네요.”








간호사는 그렇게 말하고
트레이를 들고 병실을 나섰다.

트레이시는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침대에 누웠다.

그녀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웃을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그녀는 마음을 잠식하고 있는
지금의 기분이,
GHB의 부작용에 의한 우울증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을 되찾고,
상황을 파악한 후,
제일 먼저
자신의 음부를 확인했다.

성행위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중에 의사에게서도 확인을 받았다.

그녀는
성폭행을 당하지 않았다.

동양 여자들처럼
정조 관념이 투철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성적으로 자유로운 문화를 가진 미국인이라고 할지라도
성폭력은
육체와 정신에 상처를 남긴다.

비록
그것이 미수라고 할지라도.

그 이유
하나 때문만도 아니었다.

멈추지 않고
계속 되풀이되는 생각.


내가 다 망쳤어.


끝없이 이어지는
그 자책감이
그녀의 마음을 잠식하고 있었다.


츠네타카가
자신에게 수작을 부릴 것을 알고 있었다.

약을 쓰지는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조심한다고 했는데,
결국 마지막 한 잔에 당해 버렸다.

그런 자신의 미숙함을 참을 수가 없었다.

트레이시는 정신을 잃고 나서
다시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아무것도 기억해 내지 못했다.

그리고
그 누구도
그녀에게 설명해 주지 않았다.

잇토키,

그가 오기 전까지,

의사와 간호사를 제외한 그 누구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내가 다 망쳤어.


침대에 누운 트레이시는
그렇게 반복하고,
반복해서 생각하고 있었다.





***






통신실을 나온 잇토키는
트레이시가 있는 병실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국장과의 대화는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지막에
국장이 완전히 개박살나는 모습에
만족감은 가질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소득도 없었고,

오히려
패만 보여 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걸어가는데,

마주 걸어오는 사람이
잇토키의 시선에 들어왔다.

잇토키는
그녀가
트레이시의 병실을 지키던 간호사라는 것을
기억해 냈다.








“어머, 오셨어요?”








그녀도 잇토키를 기억해 냈다.

잇토키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그녀가
손에 들고 있는 트레이를 바라보았다.








“막 식사를 끝냈어요.
지금 들어가셔도 괜찮아요.”








간호사가 잇토키에게 말했다.

잇토키는
그녀에게 감사 인사를 하고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트레이시의 병실 문 앞에 섰다.

잇토키는
노크를 하기 전에
감각을 일으켜
문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미세한,

하지만 규칙적인 호흡 소리가 들려왔다.

잠든 사람의 호흡 소리는 아니었다.


트레이시가 깨어나 있음을 확인한
잇토키는
가볍게 노크하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누워 있는 트레이시의 모습이 들어왔다.








“괜찮아요. 누워 있으세요.”








잇토키는
몸을 일으키려는 트레이시를 제지한 다음,

병실 한쪽 구석에 있는 의자를 끌어와
침대 옆에 놓고 앉았다.









“좀 어때요?”









잇토키가 물었다.








“괜찮아.”








트레이시가 말했다.








“다행이군요.”









잇토키가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이 없었다.

누워있는 트레이시의 시선은
천장을 향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트레이시의 얼굴을
잇토키가 바라보고 있었다.









“국장을 만나고 왔어요.”









잇토키가 말했다.

트레이시의 고개가
천천히 사쿠라바 잇토키를 향했다.









“밀러…… 국장요?”









트레이시가
잇토키의 눈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요.”









잇토키가 말했다.









“어떻게?”

“통신실을 비워 주더군요.”









그 말에
트레이시는 시선을
다시 천장으로 향하면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CIA의 밀러 국장,

그리고
기프티드인 사쿠라바 잇토키,

두 사람이라면
미국 대사관의 기밀 시설인
통신실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뭐라고 하셨어?”









트레이시가 물었다.









“당신을 잘 보살펴 주라고 하더군요.”









잇토키가 말했다.

트레이시의 고개가 다시 돌아갔다.









“뭐라고 했다고?”

“당신을 잘 보살펴 주라고요.”

“밀러 국장이?”

“그래, 밀러 국장이.”









그 말을 들은
트레이시는
잠시 동안 말없이 잇토키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입가에
살짝 웃음이 걸렸다.








“올해 들은 거짓말 중에
가장 믿지 못할 거짓말이네.”








트레이시가
살짝 미소를 머금으며
그렇게 말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하지만 사실일 걸요?
말 그대로
내가 나오지 전에
완전히 개박살이 나는 것을 보고 난 뒤에
그런 말을 했으니까 말이지요.”








잇토키가 말했다.









“몸을 일으키고 싶어.”









트레이시가 말했다.

잇토키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침대 조절기 버튼을 눌렀다.

침대 상단부가
천천히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적당히 올라왔다는 생각이 들자
잇토키는
버튼에서 손을 떼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냉장고를 향해 걸어가면서 물었다.









“물 좀 마시겠어요?”


“아니. 괜찮아.”









등 뒤에서
트레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잇토키는
냉장고에서 물 두 개를 꺼낸 다음
몸을 돌렸다.

그리고
그중 하나의 물병을 살짝 돌려 딴 후
트레이시에게 건넸다.

트레이스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잇토키가 건네주는 물을 받아서
입으로 가져갔다.

잇토키는
그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자신도
물병을 따고 마셨다.









“어떻게 된 건지 알고 싶어.”









다시 트레이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잇토키는
트레이시가 원한 대로,

그녀에게 일어난 일들을
시간 순서대로 이야기해 주었다.

앞부분,
정확히 말하면,
잇토키가
창고 문을 따고 들어가기 전까지의 상황은
CIA 요원에게 들은 대로,

그리고
창고문을 열고 들어간 이후부터는
그가 본 사실을
가감 없이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한 놈은 데려왔지요.
배후가 누구인지 알아야 하니까요.”








잇토키의 말에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손을 좀 과하게 쓴 감이 없기는 하지만,
피해 당사자인 트레이시 입장에서는
그리 과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녀를 강간하고,
그 영상을 담으려던 놈들이었으니까,









“누구인가요, 배후의 인물은?”


“시마다.”


“시마다?”








트레이시가 물었다.

분명히 들어 본 이름인데,
묵직한 머리는
빠르게
그 이름에 맞는 인물을 연상해 내질 못했다.









“중의원이라고 하더군요. 시마다 아리히로.”


“아…….”








트레이시는
그 이름의 주인을 떠올렸다.









“그자가 왜 나를…….”









그렇게 의문을 표하다,
그자와
호텔 안에서 만났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기억을 떠올린 순간
트레이시의 등골에 공포가 스몄다.


설마,
그때 품은 음심을
계속 간직하고 있었다고?








“코시자와와 아는 사이였더군요.
이상한 친목 모임에서 만났고,
거기서 알려 줬다더군요.
내가 없다는 사실을.
경거망동하지 말라는 의미였지만
시마다 그자는
기회라고 생각했고요.”








잇토키의 말에,

트레이시의 감정이 변했다.


공포에서 분노로.


그 미친 변태 늙은이가
자신을 향해 품어 왔던 추악한 욕망에
분노가 치밀었다.








“일단은 손을 봐 줬지요.”








트레이시의 눈에서 공포와 분노를 읽어 낸
잇토키가 말했다.








“손을 봐 줬다고? 너가 직접?”


“그래요.”


“어떻게?”


“CIA에게
어디 있는지 찾아 달라고 했더니
찾아 주더군요,
찾았고, 갔고,
함부로 남의 여자에게 손대면 안 된다는
따끔하고 뼈아픈 교훈을 줬지요.”


“……죽었니?”









트레이시가 물었다.









“아니, 죽지는 않았어요,
아마도.
조금 심하게 다친 정도로 끝났지요.”


“얼마나 심한데?”


“눈 하나, 무릎,
그리고
고환 두 개.”









잇토키는
말 그대로
평생 고자
아니
내시가 되고도 남을
그런 큰 부상을
작은 상처 몇 개 났다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트레이시는
잇토키를 보았다.

잇토키는 별일 아니었다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당분간은…… 움직이지 못하겠구나.”


“그럴 테지요.”









트레이시는 고맙다고 말을 하고 싶었다.

그러나 말을 할 수 없었다.

잇토키가 직접 손을 쓴 이유가
자신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마음에 안 드는 것을
그냥 두지 못하는
그의 성격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가
조금 전
‘남의 여자’라는 표현을 썼던 것도
마음에 걸렸다.

그녀를
잇토키가
‘자신의 여자’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츠네타카는 어떻게 되었니?”


“여기서 멀지 않은 곳에 누워 있지요.”


“많이 다쳤니?”


“시마다에 비하면
그렇게
많이 다쳤다고 말하기는 그렇군요.”


“그는 어쩔 생각이니?”


“어떻게 하고 싶은데요?”









잇토키가
피해 당사자인 트레이시에게 물었다.









“먼저 너의 이야기를 듣고 싶어.”


“흠,
일단 지금 당장은 손봐 줄 상황은 아니고.
그렇다고
시마다가 보낸 양아치들에게
두들겨 맞았다고 해서
그 죄를 사해 주고 싶은 기분도 아니군요.”









잇토키가 말했다.

그 말에
트레이시는 작게 미소 지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공포와 분노를 느끼고 있었는데,

잇토키의 말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를 지어 버렸다.









“일단은 교도소에 보낼까 생각하기는 했는데요.”


“교도소?”


“미국 교도소로요. 범죄인 송환을 해서요.”









트레이시는
잇토키의 의도를 이해했다.


츠네타카를
미국 법정에 기소하고,

미일범죄인인도조약에 의거해
그를 불러들여
법정에 새운다.

그리고
만인의 만인에 의한 투쟁 상태인
미국 교도소로
보내 버린다는 의도를.


트레이시의
지금 기분 같아서는
츠네타카를
자신의 손으로 직접 처리하고 싶었지만,

잇토키의 생각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해 보니
다른 활용법도 있을 것 같아서
지금 고민 중이에요.”









잇토키가 말했다.









“다른 활용법?”


“음.”


“어떤 활용법인데?”









트레이시가 물었다.









“불만이 있으신가 보군요.
애블린 양께서는.”









잇토키가 그녀의 말을 받았다.









“불만이라기보다…….
하고 싶은 것이 있기는 하지만,
너의 의견을 듣고 싶어.”










트레이시가 말했다.









“한국 영화 중에
내부자들이라는 영화가 있지요.
들어 봤나요?”









트레이시는 고개를 저었다.








“나쁘지 않아요.
나중에 기회가 되면 보세요.
그 영화에서 재미있는 장면이 나와요.
영화 주인공이
재벌 기업 회장이 비자금을 조성했다는 파일을 입수하고,
그 사실을 공개하는
기자회견을 열지요.
당연히 모든 언론에서 나와 취재를 했고요.
어떻게 되었을까요?”


“재벌 회장은 감옥에 가야 되겠지만……
아니구나.”


“회장은
언론을 이용해
비밀을 폭로한 주인공의 신뢰도를 떨어트리지요.
그리고
언제나처럼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다시 세상은 돌아가고요.”


“영화니까,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을 건데.”


“맞아요.
그 판을 뒤집은 카드가 뭔지 알아요?”


“뭐죠?”


“성 접대를 몰래 촬영한 영상.
일반 사람들은
복잡한 것을 싫어해요.
재벌이
비자금이나
돈 관련 부분에서 문제를 일으키는 데
그다지 관심이 없지요.
자주 있는 일이니까요.
그런데
섹스 스캔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요.
우선 자극적이니까요.”









트레이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코시자와.
그냥 두고 가기는 그렇고,
그렇다고
직접 손을 쓰는 것도
뭐…… 나쁘지는 않지만
그거야 언제든 할 수 있는 일이고요.
그를 죽여 버린다면
사회적 죽음을 안겨 주는 것이 먼저.
그게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츠네타카를 이용해서?”









트레이시가 말했다.









“그래요.”









잇토키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