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 살려주세요. 어머니! 어머니!”
“하늘에 계신 전지전능한 신이시여 지금 이 순간 저희에게 축복을….”
“젠장! 난 아직 여기서 죽을 운명이 아니라고!”
허겁지겁 도망치던 아군의 팔꿈치에 턱을 맞고 쓰러진 나의 귀에 작은 모래 알갱이와 처음 보는 아군들의 절규와 비명이 쏟아졌다.
시야가 흐릿하기는 하지만 제대로 서 있을 정도는 됐고 정말 다행히도 아직 창을 들 힘이 남아있었다.
보이지 않는 등 뒤로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살기가 느껴졌다. 바람처럼 나를 스쳐 지나가는 아군들은 무기와 방패도 버린 채 울음을 터뜨리거나 패닉에 빠져 기괴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팔이 절반쯤 절단된 사람은 자신의 팔을 들고 도망치고 있었고 눈알이 빠진 사람은 조심스럽게 눈알을 쥐며 도망치고 있었다. 인류의 멸망 직전에 다가오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전장에 투입됐다. 저기 저 어린아이는 무기를 들 힘도 없어 안간힘을 쓰며 창을 쥐려고 하고 있고 저기 저 젊은 여자는 땅에 주저앉아 오줌을 터뜨리며 절망에 빠져 도망갈 의지도 상실했다.
동쪽 바다 심해에서 나타난 규격 외의 마수들은 S랭크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내며 정말 운이 좋아야 간신히 잡을 정도로 강했다. 정말 본능이 외치는 압도적인 강함이었고 인류는 일주일 만에 모든 영토를 파괴당하고 이제 마지막 남은 수도를 지키기 위해 들판에 나와 기초적인 훈련도 받지 않고 허무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소식이 처음 들릴 때 집에서 그림이나 그리면서 별일 아니겠거니 생각했는데 정말 이렇게까지 큰일이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직도 심장의 격한 고동이 멈추지 않는다. 그 괴수들을 보는 순간 다리가 굳어버려 머릿속으로 도망가라고 외쳐도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죽음의 여인들이 내 다리를 붙잡고 있는 것처럼, 분명 아무것도 없음에도 나는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고 있다.
너무 두렵다. 이대로 인류가 전멸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는 것이 너무나 두렵다. 죽음이 코앞에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정말 끔찍하다. 차라리 고통도 느낄 틈도 없이 죽어버리면 그게 더 나을 텐데. 부모님은 이미 5일 전에 세상을 떠나셨고 여자친구는 여자친구 부모님과 함께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 분명 저항할 수 없는 공포를 느끼고 그나마 편안한 죽음을 가족들과 함께한 것이겠지. 솔직히 말하자면 먼저 죽은 여자친구가 부럽다. 지금 저 잔혹한 괴수들을 마주하지 않아도 되기에.
사람들의 비명이 이제 점점 멎어가고 괴수들의 발걸음이 가까이 들린다. 뒤를 돌아보는 게 너무나 무섭지만 그래도 어차피 죽을 운명 인류를 멸망시킬 녀석들의 얼굴을 한 번 봐야겠다고 생각하고 서서히 등을 돌렸고 마침내 나는 역사상 최강이자 최악의 괴수와 눈을 마주쳤다.
괴수는 수십 미터는 거뜬한 키에 전신에 날카로운 갑옷을 입고 있었다. 저만한 크기의 생물체가 존재한다는 것에 놀랐고 생각보다 빠르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에 더 크게 놀랐다. 한 손에는 자기 키만 한 검을 들고 있었고 희미한 푸른 빛이 맴돌고 있었다. 눈은 갑옷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대신 날카롭고 험악한 이빨이 기괴하게 웃고 있었다.
“너무 무서워요….”
한쪽 손목이 없는 어린 여자아이가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다가와 내 다리를 고사리손으로 움켜쥐었다.
“걱정하지 마. 이건 그저 꿈이니까. 숫자 10을 세고 눈을 뜨면 아빠랑 엄마가 어서 일어나라고 깨워줄 거야.”
“아빠랑 엄마는 저를 지켜주려다가 돌아가셨어요.”
“그러면 내가 깨워줄게. 걱정하지 마. 그냥 나쁜 꿈을 꾸고 있는 거니까.”
“죽고 싶지 않아요. 부모님이 보고 싶어요. 친구들도 보고 싶고….”
“자, 눈을 감아 봐. 내가 10을 셀 때까지 절대 뜨면 안 돼. 알았지?”
“네.”
어린아이를 감싸듯이 안고 서로 눈을 감은 채 마지막 카운트다운이 시작됐다.
“10… 9… 8…”
괴수의 비명이 더 크게 들렸고 눈을 뜨지 않아도 거대한 그림자가 생긴 걸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3… 2… 1!!!”
거대한 검이 바람을 찢는 소리가 들렸고 눈을 뜬 순간.
“어…?”
수천 년 전 괴수의 침략을 아무런 도움도 없이 홀로 막은 전설적인 인물.
“내 후손들은 고작 이런 것도 못 막아서 어쩌려고 그러나? 다들 부끄러워서 하늘 위로 숨었나 보네. 하하!!”
드리스탄 로진이 10cm만 한 작은 단검으로 괴수의 거대한 검을 막아내고 있었다.
“이, 이게 어떻게….”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하겠지만 아무래도 꽤 똑똑한 연금술사가 과거의 인물들을 살려낸 모양이야. 일단 이 녀석들부터 처리하고 더 말해줄게!”
그의 검술 한 번에 수천만, 아니 수억 명의 생명을 앗아간 괴수들이 상반신과 하반신이 깔끔하게 분리돼 쓰러졌다.
인류의 희망은 아직 남아있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