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내가 꾸고 있는 이 꿈은 뭐지?’
그곳은 너무나도 어두운 곳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마치 안개같이 깔린 곳. 대부분의 시야가 가려지고, 빼앗겼다. 스스로도 자신이 무슨 상황 속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아니, 그저 누군가와 싸우고 있다라는 느낌만이 드는 꿈.
그래, 분명 그건 싸움이자,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었다. 금속과 금속이 맞부딪히며 끼긱거리는 기분 나쁜 소리와 지금까지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지만, 어째서인지 그리운 목소리들이 울려 퍼졌다.
내 앞에 있는 이는 누굴까. 어째서 나는 그와 싸우고 있는 걸까. 그를 보고 있는 존재가 ‘나’ 이기는 한 걸까. 그 누구도 답해주지 않는 그 모든 의문 속에서, 나는 그저 시선을 돌려 조금 떨어진 세 명의 존재를 보았다.
나와 맞서고 있는 이의 뒤에 위치한 두 존재는 어둠이 그 모습을 가려 티끌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무언가 소리치는 듯한 행동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꼈다. 다급하고, 흥분으로 가득 차 보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자리한 하나, 그 어둠 속에서도 유일하게 빛나는 한 존재. 아니, 그 존재가 들고 있는 무언가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었다. 그 빛이 그 존재를 비추고 있었다.
연갈색 단발머리 위로 보이는 두 개의 귀. 너무나도 밝은 빛 때문에 얼굴이 보이지 않았지만, 그 외형은 마치 나비를 닮은 듯 보였다. 하지만 그 신체는 지금의 나비와는 다른, 성인에 가까웠다. 그래. 마치, 나비의 언니같이 말이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에 한줄기 눈물이 흐르는 것 같았지만, 마치 무언가 결심이라도 한 듯 나를 향해 뻗은 손을 놓았다. 그러자 그 밝은 빛은, 나를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그리고...
‘삐-. 삐-. 삐-.’
알람이 울렸다. 나는 감았던 눈을 떴다. 여느 때와 같이, 변함없이 익숙한 내 방의 천장이 그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나’를 감싸고 있는 금속 몸에서 낯선 느낌이 들었다. 감각이 존재하지 않는 그 몸에 흐르는 것이 아닌, 머리와 가슴에서부터 흘러나오는 듯한 불안감.
의미를 알 수 없는 악몽을 꿔서일까. 아니면, 꽤 오랜 시간 동안 원래 몸으로 돌아가지 않아서일까. 그 이전에 그 꿈은 악몽이기는 한 걸까. 생각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 이토록 정신을 흔드는 격렬한 감각은 태어나서 처음 겪어보는 이질적인 느낌이었다.
“카일 님. 아침 기상 시간이십니다. 좋은 아침이십니다.”
익숙한 창과 익숙한 아트의 목소리가 어지러운 나의 정신을 하나로 모았다. 나는 빠르게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쏟아 되듯 아트에게 물었다.
“아트, 갑자기 미안한데. 내 원래 몸 상태 좀 확인해 줄래?”
“... 정말 갑작스럽군요.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네모난 창이 침묵을 이루는 사이,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스스로의 몸을 점검했다. 금속 몸의 손과 발 관절을 움직이고, 가볍게 몇 번 제자리에서 뛰어올랐다. 점검이라고 부르기에는 다소 허접한 행동들이었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나는 그 행동들을 반복했다. 오히려 물리적인 문제가 없다라는 결과를 낳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내가 한 그 행동은 이해할 수 없는 꿈이 남기고 간 찝찝함을 없애기 위한 약간의 몸부림이 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저 이 느낌이 그저 사라지기를 바라며 아트의 보고를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카일 님, 모든 것이 정상입니다. 냉동 수면 장치에서는 어떤 문제도 감지되지 않으며, 장치 속 신체에서도 그 어떤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혹시 무슨 문제라도 있으신 건가요?”
“... 아냐. 그냥, 악몽을 꿔서 말이야. 마음이 조금 뒤숭숭하네.”
“악몽 말씀이신가요? 이번이 처음이 아니실 텐데. 좋지 않은 내용이셨나요?”
“... 그냥, 평범한 악몽이었어… 과민반응이었나 봐. 조금 지나니까, 좀 괜찮아졌네. 걱정시켜서 미안.”
“... 내용을 말씀하지 않으시는군요. 알겠습니다. 비밀로 부치고 싶으시다면 제게는 아무 권한도 없으니 말입니다.”
“그냥 악몽이었어… 그냥 말이야. 나비는 어때? 일어났어?”
“나비 양이라면, 아직 잠자리에 누워있습니다. 제가 깨울까요?”
“... 아냐. 나중에 내가 깨울게. 오늘 점검은 대신 부탁할게.”
“예, 알겠습니다. 그럼, 용무가 생기시면 바로 불러주시죠.”
창이 닫혔다. 심란한 마음을 진정시키며, 아트에게 언제나의 업무를 밀어버렸다. 시설의 정비, 점검, 그리고 수정에 대한 자잘한 일들을 말이다. 항상 생각하지만, 이 시설과 수정은 이 금속 몸이 녹슬어 무너지고, 진짜 ‘나’가 늙어 죽는 그 날까지도 티끌 하나 문제없이 멀쩡할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그것들을 확인하는 이유에는 예기치 못한 사태의 발발 가능성 또한 있지만, 어째서인지 그것들을 확인하는 것이 내가 ‘여행하는 자들’의 소속감을 느끼는 유일한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최고 관리자’라는 칭호도, ‘게이트’를 넘어다니며 탐색하는 일도, 물론 나 자신이 만족감을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긴급사태에 주어진 권한을 이용한, 원래라면 불가능한 월권행위 같은 것이었다.
본디 그들이 나라는 존재에게 맡긴 일. 수정과 전력 시설, 그리고 관리 시설의 주기적인 점검과 유지보수. 그것들이 나에게 내려진 유일한 역할이자, 임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들을 아트에게 미룬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움직이자. 나비가 알아차리기 전에 일을 끝내놔야지.’
나는 방을 벗어나 눈앞에 늘어선 통로를 따라 걸었다. 목적지는 작업실, 아직 끝내지 못한 일을 최대한 빨리 마무리하고 싶었다. 아직 꿈나라에 있을 누군가를 위한 작업을 말이다.
꿈과 작업. 이 두 개가 얽혀, 내 머릿속은 계속해서 복잡하게 돌아갔다. 나는 그저 기나긴 통로를 바라보며, 벽면에 몸을 붙여 걸었다. 그러다 문득 놓치고 있던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내 방을 벗어나, 멀지 않은 옆 방이 나비의 방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그것을 기억해낸 나의 걸음걸이는 급격하게 느려졌다.
조심히, 또 조심히. 나비의 방이 가까워질수록, 나의 발걸음은 소리를 죽이려 노력했다. 최근 들어 밝아진 나비의 귀가, 내 발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것이 원래 나비의 청력인 것인지, 아니면 수정의 힘에 노출되어 각성한 능력인지. 또 하나 늘어난 의문을 머릿속에 가진 채, 그저 조용히 발을 움직였다.
‘나비는 그저 ‘들린다’라고만 표현하지만, 그게 가능한 일일까?’
수많은 세계의 수만큼, 삶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내가 우리 종족 중, 유일하게 이 세계에 남아있는 것 또한 그중 하나라 생각한다. ‘그녀’의 말처럼, 어쩌면 밤하늘의 별처럼 셀 수 없는 가능성 중에 말이다…
다행히, 큰 문제 없이 나는 그 공간을 걸어 나왔다. 그 짧은 거리를 그토록 신경 쓰며 걸은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비의 방 내부에서 들려오는 소리 또한 없는 것을 보아, 스스로에게 내린 임무는 완벽하게 성공하듯 했다.
뒤돌아본 나비의 방문에 잊고 있었던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시설 내부의 문은 사생활 보호가 전혀 되지 않는 것. 아직 시설의 시스템에는 나비의 방이 창고라고 등록되어 있는 것과 나에게 주어진 너무나도 높은 등급이 문제에 대한 원인이었다.
아트와 제네의 경우에는 나비가 직접 호출하거나, 내외부에서 사고라도 나지 않는 이상 일부러 들어가려 시도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긴급상황도 아니며, 위급한 문제가 발생하지 않아도 나비의 방에 맘대로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은 나 하나뿐이었다.
특이한 상황 속에서 내게 부여된 ‘계급’과 원래라면 이곳에 존재해선 안 되는 이세계의 ‘주민’이라는 두 개의 변수가 낳은 결과였다. 나중에 시간이 날 때, 관련 규정을 몇 가지 수정해야겠다. 저 천진난만한 소녀에게도 지켜져야 할 비밀은 존재할 테니 말이다.
‘나비가 이해할 수 있게 잘 얘기할 수 있겠지?.’
그 아이가 잘 받아들일 수 있게, 단단히 설명해야겠다. 권한 공유 같은 어려운 단어를 아직 모르기를 빌어야겠다… 혹시 모르니, 제네에게도 몇 가지 경고를 해둬야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거주 구역을 벗어나, 연구소라고 불리는 공동 구역으로 향하는 통로에 발을 들였다.
그리운 냄새가 흐르는 이곳. 물론 코는 없기에 냄새는 맡을 수 없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어질러진 공구와 잡다한 자재들이, 침대가 있는 내 방보다 더 큰 편안함을 주는 곳.
“그 이름은 작업실~.”
라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물론 이번에도 코는 없다.
나는 그대로 쭉 걸어, 작업대를 향했다. 잡다한 것들이 진열되어있는 선반과 설계도라고 부르기에는 아직 미숙한 청사진들이 널브러져있는 탁상을 지나서 말이다.
목적지 앞에 도달하자, 나는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시선을 밑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어제 마지막 모습과 다른게 하나도 없는 그대로의 작업대가 있었다. 정리되지 않아 나무, 금속 판재 조각들이 여기저기 나뒹굴었고, 그 옆에 그럴싸하게 모양이 잡혀있는 작업물이 하나 있었다.
“... 이건, 역시 다시 만들어야겠지...?”
나는 그것을 가볍게 들어 한 바퀴 돌려봤다. 완성이라고 부르기에는 맘에 썩 들지 않았다. 투박한 외형도 그렇지만, 스스로가 요구하는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어째서냐고 물어보면, 이건 내가 쓸 물건이 아닌, 나비를 위한 선물이기 때문이었다.
최근 들어 암울해 보이는 그 아이를 위해,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고는 고향 세계의 향수를 조금이라도 느껴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게 고작이었다. 얼마 전, 나비와의 대화에서 알게 된 배경을 바탕으로 나는 무언가를 만들었다. 목재와 금속, 두 가지의 이질적인 재료가 만나 만들어진 두 개의 곡선이 그려내는 그 모습은 ‘활’이었다.
물론, 미숙하다는 것은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만든다의 범주가 바뀐다는 것이 이렇게나 서툰 결과물을 낼 줄은 몰랐다. 기계나 장치를 만든 것에는 익힌 재주가 있었으나, 공예에는 재주가 부족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해주는 경험이었다.
나는 활의 손잡이 부분을 잡아, 가볍게 앞을 향해 세워보았다. 내 한 손보다도 공간이 조금 더 남도록 만든 나무 손잡이가 잡혔다. 이 부분은 나비를 위해 목재를 고집한 부분이었다.
이걸 위해 삼림의 나무 하나를 베는 고생을 하긴 했지만, 자신의 키보다 높은 나무를 열심히 베어 넘기는 느낌이 색다른 감상을 남겼다. 경우는 다르지만, 무언가를 해내기 위해 들인 노력에 결과가 답하는 건, 언제나 기분 좋았다. 물론, 20년 전에 이런 일을 벌였으면 이미 치안유지대에 잡혔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다음은 한오금부터 정탈목 부분이다. 뭐, 그냥 곡선의 봉우리 부분과 실을 거는 끝, 그저 이 정도로만 불렀던 부위에 이런 명칭이 있을 줄은 몰랐다. 그 외에도 저장소에는 다양한 부위에 대한 수많은 명칭투성이였지만, 일일이 기억나지는 않았다.
그것과는 별개로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이었다. 손잡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은 금속판재를 잘라 모양을 만들었다. 원래라면 목재를 이용해 활 몸 전체를 만들고 싶었지만, 하나의 목재로 전체를 만들기에는 스스로의 능력이 부족했음을 실감했다. 그렇다고 다른 재료들을 합쳐서 만들기에는 동물의 뿔과 다른 품종의 나무 등 현재로써는 구하기 힘든 재료에 더 섬세한 제작기술이 필요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나무로 만든 손잡이와 금속으로 만든 몸체 부분을 볼트와 너트로 결합시켰다. 이 부분이 고정되어버리면 활로서의 의미가 없어지기에 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나무 손잡이의 남는 부분에 조그마한 금속 판재를 고정하고, 이것과 금속 몸체 양쪽에 용수철을 하나씩 걸었다. 이렇게 되면 당겨지고 나서 용수철의 탄성을 이용해 되돌아오니, 활의 작동이 원활하게 될 것이다.
그다음 양쪽 정탈목 부분에 줄을 꿰어 전체적인 활의 모습을 갖췄다. 몇 번, 나는 그것을 당겨보고 하나의 가능성을 생각했다. 어젯밤 활의 대략적인 모습을 완성하고 깨달은 가장 중요하면서도, 가장 기본이 되는 조건.
‘이걸 나비가 사용할 수 있을까…?”
크기도 적당하고, 모양도 투박하지만 제 기능은 그럴싸하게 할 활이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있는 자원 상황과 자신의 능력 범위내에서 타협을 보며, 최대한 노력했다. 하지만 이걸 나비가, 그러니깐 아직 어린아이의 근력 수준으로 당길 수 있느냐를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제작 과정과 결과는 어느 정도 만족스러운 수준이지만, 이걸 사용할 이가 쓸 수 없다면, 그건 실패작이나 마찬가지였다.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나비에게 그저 물어보고 시험 삼아 당겨보게 하면 되겠지만. 활의 제작을 비밀로 부친 이상 그 방법은 위험했다.
“... 역시, 다시 만들어야겠지?”
나는 그 활을 뒤쪽 탁상에 대충 던져놨다. 분해하기에는 조금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꽤나 공들여 만든 물건이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는 탁상을 뒤로한 채 작업대로 돌아와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팔짱을 끼고,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하면, 어린아이도 쓸 수 있으면서 모양도 예쁜 활을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생각에 잠겼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자신이 만든 활을 가지고 놀며, 기뻐할 나비의 얼굴을 상상했다. 선물을 준비한다. 너무나도 오랜만에 하는 행동이었다. ‘그녀’를 제외하면, 부모에게도, 친구에게도 준 적이 없는데 말이다. 물론 내가 그런 걸 준다고 좋아할 사람들도 아니었지만 말이다.
’일단은, 나무 깎는 연습부터 해야 하나?’
그런 생각에 휩싸여, 주변을 무시하기를 몇 분이었다. 자신의 뒤쪽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그 소리에 반응해 자세를 풀고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역시나, 그곳에는 반쯤 잠이 덜 깬 나비가 서 있었다.
“하으암~. 수호신님. 좋은 아침-.”
“아, 나비. 일어났네. 잠은 잘 잤어?”
졸린 듯 반쯤 감긴 눈을 비비면 작업실의 내부로 들어서는 나비는 그 작은 발로 조금씩 나에게 다가왔다. 이제 이 아이는 이 시설과 하나가 되었다. 없어서는 안 될 일부가 된 것이었다. 물론, 지금의 상황 속에서 그 결과는 좋다고 말하기 힘들었다. 까닥 잘못하면 ‘나’와 같은 존재가 하나 더 만들어질 수도 있는 그런 상태였다.
“... 수호신님. 또 멍하니 있는다. 자주 그런다. 혹시 어디 아파?”
“응? 아, 아냐. 그냥 생각이 많아서 그래. 배고프지? 밥 먹으러 가자.”
“으응. 괜찮아. 제네가 말했다. 일어나자마자 먹지 말라고 했다. 나비, 밥 조금 있다 먹는다.”
“그래? 그럼, 식당에 가서 잠시 앉아있을까?”
“으응. 나비. 수호신님 옆에 앉아있는다. 수호신님, 할 일해라.”
“그, 그럼. 잠시만 앉아있다 갈까…”
나비가 탁상에 남아있는 의자를 내 옆에까지 질질 끌고 와서는 그 위에 앉았다. 문제가 조금 커진 것 같았다. 나비의 선물에 관해서는, 어디까지나 비밀로 하려고 했는데 말이다. 다행히 탁상 위에 둔 실패작을 보지는 못한 듯했지만, 시간문제였다. 일단은 나비의 시선을 돌리는 게 우선이었다.
나는 작업대 위쪽 갈고리에 걸려있던 검은 팔을 내렸다. 저번 탐색에서 가져온 보상 중 하나였다. 시간을 들여 천천히 뜯어보려고 했지만, 일단은 대충 이걸 조사하는 척이라도 해야겠다.
“... 수호신님. 바빠?”
“아, 아니. 왜? 물어보고 싶은 거라도 있어?”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지만, 나비가 말하기를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말하려고 하는 게 무엇일까 생각했다. 이렇다 할 짚이는 것이… 혹시 밥이 맛없다는 그런 부류라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다.
“... 탐험. 재밌어…?”
“탐험? 아, 탐색 말하는 거구나. 뭐라고 해야할까…”
나는 나비가 던진 질문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아마 제네가 촬영해 온 영상의 영향인 거 같았다. 나비가 그 영상들을 3번씩은 돌려본다는 걸, 제네한테 들은 게 떠올랐다. 솔직하게 나가야겠지. 어차피 거짓말도 잘 못하는 성격이니 말이다.
“... 솔직하게 말하면, 꽤 즐거워. 물론 때때로 위험이 도사리고, 위기의 연속이지만 말이야.”
“재밌어? 어떤 느낌?”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공구를 내려놓았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작업대 위로 팔짱을 얹고는 그 위로 얼굴을 베며 내 쪽을 쳐다보고 있는 나비가 보였다. 질문에 대한 답보다, 그 작은아이가 귀엽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 뭐랄까, 탐색을 나가는 세계랑은 말이 잘 통하지 않았어. 사용하는 언어가 달라서 그랬지. 그건 나비 너도 느꼈을 거라 생각해.”
“응. 나비도 안다. 수호신님이 쓰는 말. 나비네 부족어랑 다르다.”
“그렇지. 우리 나비처럼, 그 사람들한테도 일일이 장비를 쓸 수는 없으니 말이야. 하지만 제네가 합류한 뒤로는 탐색에 무척이나 도움이 됐어. 늦었지만, 지금은 다른 세계의 주민들과 소통할 수 있으니 말이야.”
나비는 아직 그 모습 그대로였다. 내 말이 재미없는 것일까. 이럴 줄 알았으면, 아카데미 시절 문학 시간에 졸지 말걸 그랬다.
“그러니까, 내 말은... 다른 세계의 주민과 소통할 수 있게 되면서 탐색이 재밌어졌다는 거지. 그전까지는 도망만 한가득 쳤는데. 지금은 그들과 말이 통하니,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내 이야기도 할 수 있고…”
“...?”
나는 잠시 말끝을 흐렸다. 나비의 두 눈이 궁금증을 토하듯 잠시 커졌다. 나비가 오고 나서의 탐색에 대해 잠시 생각했다. 그리 많은 수의 탐색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 네 번의 탐색이 지난 20년의 탐색보다 더 기억에 남았고, 그만큼 강렬했다.
“... 그만큼 다른 이들과 소통할 수 있다는 게 좋았다는 거야. 그리고 다양한 이들과 만날 수 있다는 게 말이야. 너비, 너하고도 이렇게 만날 수 있었잖아?”
나의 내려다보는 시선은 나비의 두 눈과 마주쳤다. 그제야, 그 아이의 두 눈이 아름다운 숲을 품은 듯한, 초록색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 눈에는 아직도 궁금증 또한 존재하는 듯했다. 20년짜리 고독을, 이 아이가 이해할 거라 생각은 하지는 않았다. 아니, 이해해서도 안됬다.
“그래, 왜 내가 탐색하는 것에 흥미가 생겼을까? 영상 찍어온 것 중에 궁금한 게 있었어?”
“우웅-. 수호신님. 부탁. 하나 있다.”
부탁이라는 단어가 신경 쓰였다. 아트와는 다르게, 그 아이의 사뭇 진지한 표정이, 그 작은 입에서 나올 말이 제발 조심하라는 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나비가 부탁이라. 조금 궁금하네. 우리 꼬마 아가씨는 뭘 바라는 걸까?”
“... 나비. 수호신님이랑. 같이. 탐험하고 싶다.”
“... 그건…”
나는 속으로 한번 말을 삼켰다. 역시 시설 내에서의 한정된 생활에 염증을 느낀 것일까. 최근 들어, 주눅이 들어 보인 것은 그 탓인 걸까. 이 부탁을 거절하면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나비가 자신의 세계로 돌아가 버리는 걸까. 그래도 답은 정해져 있다. 지금까지의 탐색과 나비를 생각하면 말이다.
“... 안 돼. 너무 위험해. 나비도 봤잖아? 내가 겪었던 그 모든 일, 그리고 항상 엉망인 모습으로 돌아와 아트한테 혼나는 거 까지 말이야.”
강렬하게 남은 기억들은, 그저 그들의 세계가 아름답기만 해서가 아니었다. 미지의 세계와 미지의 가능성, 그리고 미지의 위험까지. 이 작은아이를 데리고 다니기에는 그 예측불허한 수가 너무나도 크게 느껴졌다.
물론 위험천만한 상황을 전제로 잡고 가는 것이 잘못됬다는 것은 알지만, 그럼에도 그 확률이 그 반대되는 상황에 관한 것 보다도 높은 것은 인정해야 하는 사항이다.
“... 위험해?”
축 늘어진 나비의 어깨에는 그 아이의 실망감이 절연히 드러났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나는 자신을 변호했다. 이것이, 나의 울타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곳에서 내보낼 준비도 해야 하겠지.
“하지만 말이야.”
“... 하지만…?”
나는 나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라앉았던 두 귀가 쫑긋 섰고, 좌우로 흔들리는 머리에 나비는 자신의 두 눈을 꾹 감았다.
“만약, 나비가 그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성장하면 데려갈게.”
내가 손을 떼자, 나비는 몇 번 몸을 털었다. 그 아이는 자세를 세우고는 나를 곧바로 올려다봤다.
“언제쯤? 얼마나 크면. 나비. 같이 가?”
“... 생각보다 회복이 빨라서 좋네. 그래, 보자… 밤에 혼자 화장실 갈 수 있게 되면...?”
“... 나비. 노력할게.”
나비와의 약속이, 또 하나 늘었다. 그 약속들의 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지금의 나로서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아이라면 그것 또한 좋은 이야기가 될 것이다.
“자, 그럼 밥 먹으러 가자. 아침도 점심도 아닌, 어중간한 시간대가 돼버렸잖아.”
나는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났다. 그 모습을 본, 나비 또한 뛰어오르듯 의자를 벗어났다. 이 이르고도 늦은 식사 시간에 무엇을 먹을까에 대한 생각을 하며 문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무언가에 놀라는 나비의 목소리에 뒤를 돌아섰다.
“수호신님. 이거. 활!!”
조금 전까지의 침울함이 사라진 그 아이의 활기찬 소리. 그 아이의 반응을, 그 광경을 나는 잠시 지켜보았다. 짧은 시간 나와 함께한 비밀과 실패작이라 생각한 결과에 대한 미련을 내려놓으며 말이다.
바람에 흔들리는 풀잎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나뭇가지 사이로 새어드는 강렬한 햇빛이 비쳐 밝게 빛나는 물줄기를 따라 흐르는 냇가. 그리고 그 위를 나비가 한 발짝 내디뎠다. 첨벙거리는 물소리와 발끝에서 전해지는 시원함을 신경 쓰지도 않는 그 아이는 그저 주위를 둘러보며 무언가를 찾기 위해, 바닥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말이다.
“... 나비, 미끄러지지 않게 조심해.”
“응. 수호신님. 걱정해줘서 고마워.”
그 짧은 대답이 나에게 다가온 뒤, 나는 그저 그 자리에 서서 묵묵히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얼마 전에 있었던 산책에 대한 기억을 떠올랐다. 장소는 저번과 비슷하지만, 모습은 달랐다. 그때는 저 아이가 웃으며 풀밭 사이를 뛰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었는데 말이다. 지금은 하얀색 반팔과 반바지로 이루어진 평상복을 입고, 가슴에 내가 만든 조잡한 활을 매고 있었다.
그 활에 대한 나의 열렬한 열변은 아무 소용도 없었다. 나비는 그리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니, 오히려 내가 만들어 줬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그런 아이의 반응과 시설 생활로 답답했을 나비를 위해, 나의 약한 마음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그저 바람도 셀 겸 밖으로 나가, 만들어진 활을 연습 삼아 쏴보자는 간단한 제안이었지만, 그것은 곧 나비의 강렬한 주장이 덧붙여져 우리 두 사람을 이곳에 있게 만들었다. 그래, 5발의 조잡한 화살과 조잡한 단검, 그리고 마지막으로 조잡한 활까지.
화살과 단검은 내가 유일하게 붙인 조건인, 나비의 점심을 먹는 동안 급조한 물건들이었다. 화살은 남는 금속 대에 테이프로 깃을 만들고, 반대쪽 중심 부분에 공간을 내어 깎아낸 금속판재를 넣고 또 한 번 테이프로 고정했다.
단검 또한 두께가 있는 금속 판재의 절반 부분만 깎아 날을 세우고, 남은 절반은 테이프를 둘러 손잡이 부분으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썩 맘에 들지는 않았지만, 나비는 돌로 만든 것보다는 멋지다며 기뻐했다.
그리고 아쉽게도 멋진 단겁집과 화살집을 만들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기에, 화살은 나의 손에, 단검은 테이프로 만든 단검집에 넣어 나비의 허리춤에 자리했다.
나비는 화살 또한 자신이 들겠다고 했지만, 이거라도 들고 있지 않으면, 나비가 어디론가 홀연히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런 내 맘을 아는지는 몰라도, 나비는 그저 조용히 흔적을 찾고 있었다. 그렇다. 나비가 지금 하고있는 행동은 ‘사냥’의 준비이다. 그저 물가에 쭈그려 앉아 바닥을 훑어 보는 그 아이의 행동은 사냥감을 찾기 위한 첫걸음이었다.
부러진 나뭇가지, 짐승이 밟고 지나간 진흙탕, 그리고 냄새 등등. 사냥감이 남기고 간 그 모든 것을 뒤쫓는 것이라고 나비는 말했다. 솔직히, 어떻게 그것들을 가지고 추적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나비는 가능하다고 말했다. 그래서 믿기로 했다.
“... 찾았다. 발자국이다. 이건. 작은 거다.”
나는 나비의 뒤로 붙어, 허리를 숙여 그 흔적이라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앞은 날카롭고, 끝은 뭉툭했다. 대칭을 이루듯 찍힌 두 개의 모양이 집게 같은 모양을 하나의 발자국이었다. 나비는 그저, 눌린 진흙 모양으로 크기까지 가늠했다.
“... 그 옆에 큰 것도 하나 있네. 작은 건 다른 쪽 발 같은 건가?”
“으응. 그거. 아마 부모. 발자국이 뒤섞여 있다. 새끼를 노리면. 부모가 뛰어온다.”
“신기하네. 그런 것까지 알 수 있다니 말이야...”
“... 오래되고 위험하다. 다른 거. 노린다.”
나비는 그 말을 남기고는 또다시, 강가를 조금 걸어 올라갔다. 방금 발견한 건, 만들어진 지 꽤 시간이 지났다는 의미일까. 갈수록 신기했다. 원래 세계에서도, 다른 세계에 있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런 생각을 가지며, 조금씩 멀어져가는 나비의 뒤를 따랐다. 잠시 후, 나비는 또 하나의 발자국을 발견했다. 그건, 전보다 더 뭉툭하고, 밑에는 송곳니가 옆으로 난 거 같은 모양을 했다.
“이거, 오늘 목표. 시간. 얼마 안 지났다. 거기에 혼자.”
“아까랑은 다르네. 크기는 처음 꺼 보다, 조금 크고… 혼자라는 건, 무리에서 떨어졌다는 거야?”
“응. 하지만 조심. 사냥은. 항상 조심해야 한다.”
“... 예, 오늘은 나비가 대장님이니깐. 솜씨 기대할게.”
“응!”
우리는 물가에서부터 시작해, 숲 속으로 연결된 발자국을 뒤쫓았다. 점점 삼림의 내부로 들어섰고, 나비의 시선은 빠르게 움직였다. 간혹 새들이 우리를 보고 놀라며 날아가는 것을 빼면, 다른 짐승들을 보지 못했다. 나와 나비를 경계하고 숨은 것일까, 아니면 이 넓은 숲 속에서 그저 운이 없는 것일까.
계속해서 나아갔다. 땅에 나뒹구는 나뭇가지를 밟아 부수며, 풀 속에 가려진 돌부리를 피하며 헤매기를 30여 분 정도. 아니, 어쩌면 헤맨 건 나 혼자일지도 모른다. 나비는 그저 묵묵히 입을 다문 채 발을 빠르게 움직였다. 선뜻 말을 걸어볼까 생각도 했지만, 어째서인지 망설이며 생각을 정리했다.
그때였다. 나비는 빠르게 덤불 뒤로 몸을 숨겼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지만, 나 또한 나비의 그 행동을 따라 몸을 숙였다. 무엇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나는 나비가 바라보는 방향을 쳐다보았다.
수많은 나무와 덤불 사이, 조그맣게 공간이 나 있는 터가 있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한 마리의 짐승이 있었다. 앞발로 땅을 팍팍 파며, 그 큰 코는 킁킁거렸다. 흑과 회색빛의 털이 한가득 짐승의 몸을 덮었고, 입가에는 둔탁한 송곳니 두 개가 보였다. 다행히 그 들짐승은 우리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아직은 말이다.
“... 수호신님. 화살.”
“어? 아, 여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화살 하나를 나비에게 건넸다. 그리고 그 아이는 조잡한 활에 조잡한 화살을 가볍게 갖다 대었다. 나비는 자세를 잡고, 조용히 무언가를 기다렸다.
작업실에서 나비가 말했다. 내가 만든 활은 나비가 자신의 세계에서 쓰던 것보다 강하고, 튼튼해 보인다고. 하지만 활에서 생기는 소음 또한 더 커졌다고 말이다. 활에 단 용수철이 문제인 듯했다. 나는 그것으로 인해 발생하는 소음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짐승들은. 귀가 밝다.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수풀이 들썩이는 소리만으로도. 우리를 알아본다.”
나비는 그렇게 말했다. 실사용자가 말하는 보완점, 그건 남을 위해 무언가를 만드는 이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정보이자, 더 나은 결과를 위한 하나의 가능성.
하지만 내가 당장 해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시간, 발상, 재료 그리고 능력. 그 모든 것이 부족했고, 내가 그것들에 관해 먼저 말을 꺼내보기도 전에 나비는 그저 고맙다는 말과 자신이 그 단점을 보완해보겠다고 말했다.
‘과연, 어떤 방법을 말하는 걸까?’
바람이 불어왔다. 조금 강하게 말이다. 또 한 번, 숲 속에 나뭇가지들이 서로 부딪쳤다. 그것들이 일으키는 소음을 들은 나비는 준비를 마쳤다.
나비는 숙였던 몸을 조심스럽게 일으켰다. 그리고 활에 화살을 메겼다. 천천히, 하지만 강하게 활시위를 당겼다. 자연이 일으키는 소음에 용수철이 늘어나는 소리가 모습을 감췄고, 그 화살촉의 끝은 짐승을 가리켰다.
순간 숨이 멎는듯한 정적이 흘렀다. 팽팽하게 당겨지는 활시위의 끝에는 가녀리다고만 생각했던 손가락과 팔, 그리고 그 작은 등에는 힘껏 힘이 들어가 있었다.
서른 걸음 남짓의 거리, 강하게 불어오는 바람, 그리고 집념에 찬 한 소녀. 아침만 해도 천진난만해 보이던 그 눈빛은, 지금은 그저 냉철함과 침착함만이 깃들어 보였다. 그리고 그 눈은 화살의 끝과 함께 표적을 향했다.
그 모든 순간을 두 눈에 담았다. 그리고 그 행동들이 낳을 결과를 지켜봤다. 나비가, 당겨졌던 활시위에서 손을 놓았다. 화살은 그저 빠르게 활을 떠났고, 지금은 그 화살이 낳을 결실을 확인하는 것만이 남았다.
‘슈웅-!’
“꾸에엑!!”
화살을 날리고 돌아오는 활의 울림이 끝나기도 전에, 한 짐승의 비명이 정적만이 흐르던 숲을 깨웠다. 나는 그 소리가 시작되는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하지만 이미 그곳에 그 어떤 짐승도 존재하지 않았다.
“수호신님! 달려!!”
“어…?”
나비는 다시 활을 몸에 매고는 빠르게 덤불을 헤치고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나는 뒤늦게 그 아이를 따라 달렸고, 방금까지 짐승이 땅을 파헤치던 곳을 지나 우리는 더 깊은 곳을 향해 달렸다.
땅 위로 튀어나온 나무뿌리를 지나, 줄기로부터 빠져나온 나뭇가지를 부러뜨리며, 앞으로 또 앞으로 달려갔다. 조금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지금 우리가 하고있는 행동이 추격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순간순간 나무의 겉표면과 바닥에 짐승의 피로 보이는 붉은 흔적이 보였다. 그리고 우리가 빠르게 달리는 그 와중에도 나비는 계속해서 흔적을 찾아내어 짐승의 뒤를 쫓았다.
그리고 우리는 얼마 가지 않아, 우리가 만들어낸 결과를 마주하게 되었다. 앞을 가리는 수풀을 나비가 달려들어 지나갔고, 내가 그 뒤에 뛰어들어 벗어났다. 그리고 우리들의 앞에 쓸쓸히 쓰러져있는 짐승이 보였다.
몸에 박혀있는 화살이 그 짐승이 우리가 추격해온 존재라는 것을 증명했고, 이제 남은 것은 그 짐승을 가지고 돌아가는 일뿐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비는 그저 묵묵히, 짐승을 향해 걸어갔다. 그 아이의 그 모습에서는 그 어떤 즐거움과 성취감이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쓰러져있는 짐승에게 다가가 그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나는 의문을 가지고 다가갔다. 그리고 그 행동의 의미를 깨달았다.
그 짐승은, 아직 살아있었다. 거친 숨을 내쉬며, 그 눈동자는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생명이란, 이토록 질기다는 것을 느꼈다. 화살 한 발로는 끝나지 않는 그 강인함을 말이다.
“... 미안해, 그리고 고마워.”
나비는 허리춤에 묶여있던 단도를 꺼냈다. 그리고 짐승의 목 부분에 가볍게 찔러넣었다. 조금의 몸부림도 없이, 그 존재는 쓸쓸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다음 생에는, 들판을 같이 달릴 친구가 되기를.”
그 비문 같은 말의 의미를, 나는 나비에게 묻지 않았다. 그 아이의 눈빛이 너무나도 슬퍼 보였기 때문이었다. 비록 사냥꾼과 사냥감의 관계였지만, 나비는 진심으로 슬퍼했고, 또 그것을 과감히 받아들였다.
“... 수호신님. 집으로. 돌아가자.”
“... 그래, 이건 어떻게 할 거야?”
“들고가서. 분해한다. 피를 빼고. 가죽을 벗겨내. 뼈와 살을 분리한다. 그리고.”
“그리고…?”
“또 한 번. 감사한다.”
“... 그래. 일단 돌아가자.”
나는 그 짐승의 다리를 들어, 등에 이었다. 옆에서는 고개를 돌려 흘러내리려던 눈물을 닦는 나비가 있었다. 하지만 손에 묻었던 피가 얼굴에 빨간 얼룩을 남겼다. 그 아이 또한 그것을 알았지만, 지우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오늘은, 나비에게 맛있는 밥이라도 해줘야겠네.’
나비는 또 한 번 앞장서 돌아온 길을 되돌아 걸었다. 나는 그저,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불어오는 바람이, 그 아이의 혼란스러운 마음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를 바라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