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4월 01일
여자 된 날-1일째
나는 식탁에 앉아 여느 때처럼 어머니가 해 주신 밥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 잠깐 멘탈이 붕괴됐지만 그렇다고 현실은 바뀌지 않는 법이다. 나는 냉정하게 상황을 인정하고 주섬주섬 옷을 입고 내려왔다. 그 브......여자 속옷을 찰 땐 이걸 찰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이 생겼지만, 막상 차보니 몸이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서, 설마 이건 주인공 보정이란 녀석인가! 여자로 TS된 나는 소설의 주인공처럼 보정을 받을 수 있게 된 건가!
잠깐 멋없는 상상을 하고 나는 현실로 돌아와 현재 상황을 분석했다. 밥을 먹기 전에 화장실에 들어가 다시 확인했지만, 몸 전체가 틀림없는 여자였다. 아, 네. 냉정해졌다는 건 역시 거짓말. 이게 뭐야. 게다가 동생과 부모님의 태도를 보아선 내가 여자인 것이 부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았다. TS와 함께 주변 사람 인식 조작이라니. 너무 판타지다워서 헛웃음이 나왔다. 현실감이 떨어진다. 애초에 하루아침에 성(性)이 바뀌어 버렸는데 현실감을 가지라는 게 우스꽝스럽다.
“언니, 어디 아파?”
내가 밥을 우물거리며 점점 멍해져 가자 동생이 나를 걱정했다. 어라, 내가 남자였을 땐 허구한 날 나 조롱하는 게 취미였던 얘가 내 걱정을? 설마, 여자로 변한 나는 앞으로 인생이 활짝 펴는 걸까? TS로 인한 인식 변화는 초 긍정적인 건가!
그렇다면 이걸 잘 이용하면 된다. 나는 자연스럽게 행동해서 평소에 꿈꾸던 가족 간의 평온한 일상을 손에 넣으면 될 뿐이다. 그런고로 나는 표정을 바로 잡고, 아니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야. 잠깐 무슨 생각 좀.”
안 돼. 변한 내 목소리가 적응되지 않아. 높아! 내 목소리가 높다니! 저음의 대명사였던 내 목소리가! 하지만 어찌 되었건 나는 평범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자, 어떻게 나올 거냐 한지영!
“그래? 언니가 했으니 쓸데없는 생각이겠지. 평소엔 짓지도 않던 진지한 표정 지으니깐 깜짝 놀랐잖아 바보 언니.”
아무래도 지금의 내 멍한 표정은 다른 사람이 보기엔 진지한 표정인 것 같다. 좋은 정보 고맙다, 동생아......가 아니라 뭐야 이거. 약간 방법만 달라졌을 뿐 내 취급은 그대로이다. 아버지는 벌써 출근 나가셨고 어머니는 부엌에 있을 때 이러는 이 교활함. 아아, 내 위치는 성 바뀌기 전 그대로인 거야?! 그보다 내 속마음 텐션 너무 높다. 성이 바뀐 여파인 건가. 아니아니 그런 건 지금 상관없지.
성이 바뀌었지만 여느 때처럼 동생의 조롱을 받으며 밥을 다 먹은 나는 등교하기 위해 집을 나섰다. 그러고 보니 평소에 난 자전거 타고 등교하는데, 치마 입고 어떻게 타지? 했지만 내 몸은 자연스럽게 문 앞에 걸려 있던 속바지를 입고 있었다. 어라. 이거 정말 주인공 보정인 거 아니야? 너무 자연스러워서 무서울 지경인데?
자연스럽게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 시작했지만 머릿속은 폭발 직전이다. 지금 학교에서 내 포지션은 어디지? 분명 동생이 날 대하는 태도는 똑같긴 하지만 조금 달랐다. 내가 남자였을 땐 직구였다면 지금은 포크볼인 느낌. 도착점은 같지만 가는 길이 조금씩 틀어져 있었다. 그렇다면 학교에선 난 어떻게 조용히 무시당하고 있는 거지? 어라, 근데 그나마 있는 친구들은 모두 남자인데. 그건 어떻게 되는 거지? 이거 설마 TS 하렘물? 으아 어떡하지이-아니, 그 애들도 여자로 바뀌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나는 지금 이 순간부터 생각도 못 했던 여고생 라이프를 보내는 건가? 으아아 뭔 소리야 그게. 이보시오 의사양반!
온갖 망상을 머릿속에서 뽑아내는 동안 학교에 도착했다. 그래. 도망칠 순 없어. 이래봬도 성적은 중하위권이지만 품행은 착실하다고 평가받는 나다. 겨우 이 정도 일로 학교를 빠질 순......아니 이 정도 일이 아닌데. 심각한데. 근데 다른 사람에겐 나는 처음부터 여자인 거잖아? 그럼 심각한 일이 아니잖아. 나 말고는!
머릿속은 아직 혼잡했지만 마음을 다잡고 나는 교실에 입성했다. 자, 와라 나의 새로운 학교생활!
그리고......
학교에서 수업이 끝나고 나는 집에 돌아왔다. 야자? 그런 거 없다. 아니 없는 게 아니라 내가 안 하는 거지만. 라노벨답게 말한다면 나는 ‘귀가부’라는 녀석이다. 물론, 부활동이 거의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한국 고등학교에선 성립이 안 되는 말이지만. 가끔씩 한국에도 부활동이 활성화 되었다면 어땠을까 생각해본다. 여러 의미로 그쪽에 엄청난 돈이 들어갈 것 같지만 말이야. 사교육 열풍은 어떤 시스템이 들어와도 사라지지 않겠지.
집에 와서 저녁은 간단히 즉석밥을 데우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내 먹었다. 동생은 오늘 놀고 온다고 했으니 먼저 먹어도 괜찮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는 일 때문에 조금 늦게 오시고 말이야. 재빨리 해치우고 방에 들어가 오늘 학교에 대해 생각했다.
평범했다.
아니, 진짜로. 뭔가 변화는 거의 없었다. 바뀐 건 내가 여자라서 그런지 친한 녀석들의 섹드립이 없어진 정도? 그 외엔 그 녀석들도 나한테 전과 다름없이 대했고, 반에서 내 위치도 그대로였다. 조용히 교실에 앉아만 있었고, 간간이 친구 녀석들이 와서 잡담을 떠는 정도. 여자 한 명과 남자 셋이 있는 모습은 고등학교에선 꽤 희귀한 것일 텐데 주변에선 “응. 원래 저런 애니까.” 정도의 인식인 것 같다. 오늘이 체육 같은 예체능 계열 과목도 없는 날이라 더욱 차이는 느끼지 못했다. 아, 매번 화장실에서 볼일을 앉아서 보는 건 좀 신선했나. 당연하게도 여자애들이 없는 걸 확인하고 화장실에 들어갔다. 어디까지나 나는 원래 남자였으니까 말이야.
결국 하루아침에 여자애가 된 결과는 아무것도 바뀐 것 없음. 이다. 뭔가 섭섭하다. 솔직히 조-금, 조금쯤은 기대하잖아? 여자애가 되었다구? 뭔가 신박한 시츄에이션이 있어도 되지 않아? 빵 물고 달려가다(밥이 식사인 시점에서 무리지만) 남자와 부딪치는 삼류 클리셰 같은 건 아니더라도 무언가 일상의 변화는 있어야 하지 않아?
하지만 나에겐 안타깝게도 이런 생각을 하는 현재조차 변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세상은 사람 마음대론 안 되는 거네에-것보다 내 텐션 왜 이렇게 높은지 알고 싶은데 알려 줄 사람?
그래도 아직 다행인 것이 하나 있다. 남자가 여자로 변했을 때 반드시 발생하는 빅 이벤트를 아직 난 수행하지 않았다. 사실 아침에야 너무 혼란해서 제대로 살피지도 못했다. 그래! ‘나의 몸 탐색’을 해야 할 때이다!
남자로서 여자의 몸을 탐구하고 탐하고 싶은 건 하나의 진리이다. 세계불변의 이치다. 무엇을 해도 바꿀 수 없는 대부분 남자의 숙명인 것이다. 하지만 이성의 몸을 탐하려면 조건이 너무 어렵다. 사귀거나, 결혼하거나. 그 조건을 클리어한다 해도 자기가 원하는 대로 마음껏 탐할 순 없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이 여성의 몸은 완전한 내 몸이다. 내 몸이니까 마음대로 할 수 있어! 평소의 호기심을 여기서 해방할 기회다! 결코 사심이 있어서 이러는 게 아니야!
나는 조금이라도 빨리 지식의 충족을 위해 교복 치마를 내리려 했다. 그러나
“언니? 엄마가 간식 사 왔다는데?”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동생의 말이 들렸다. 어라? 벌써 어머니가 오실 시간이 됐었나? 당황하며 시계를 보니 벌써 8시가 넘어있었다. 우와아, 무슨 생각을 이렇게 오래 하는 거냐 나. 시간이 정말 순식간에 지나가 버렸다.
결국 나는 몸의 탐색을 중단했다. 간식을 먹고 나니 졸리기도 했고, 도중에 중단됐기 때문에 김이 팍 새었기 때문이다. 지금 시각은 10시 정도. 원래 취침 시간은 12시 정도지만 오늘은 왠지 일찍 자고 싶었다. 그래서 옷을 갈아입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옷 갈아입으며 자신의 몸을 유심히 보는 사람은 없다.
“앗......어라? 이게 뭐지?”
갈아입던 도중 느껴진 아픔에 나는 거울에 등을 비춰보았다. 인제 보니 등에 상처가 있었다. 주변이 빨간 걸 보면 생긴 지 얼마 안 된 상처인데....근데 기억에 없다. 왜일까? 손을 힘껏 뻗어 살짝 만져보았는데 꽤 쓰라렸다. 지금까지 생긴 걸 모른 게 이상할 정도로.
“아앗!”
상처에 대해 생각하려 하자 갑자기 머리가 아파졌다. 기묘한 위화감이 전신을 감쌌다. 뭔가 더 생각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 그런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나중에 생각할까.”
그렇기에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상처는 이미 났고, 이제 할 수 있는 건 그것을 치료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갑자기 머리가 아픈 건 신경 쓰였으므로 이런 일은 기록해두는 게 좋을 것 같다. 혹시 모르지만 여자로 변한 것과 상관관계가 있을지 모르니깐. 음, 일기가 가장 좋으려나? 저번에 행사 상품으로 받은 자물쇠 달린 일기장이 있는데, 그게 적당하겠지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옷을 갈아입은 나는 침대에 잠기듯 파고들었다. 그리고, 여자로서의 첫 밤이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