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닥이 떨렸다. 세상의 진동이 발을 타고 손으로 전달되었다. 총을 쥐고 있는 손은 진동에 저항하려는 듯이 힘껏 개머리판과 방열 손잡이를 고쳐잡았다. 이 순간을 제외했다면, 총은 수직에서 일도도 삐뚤어지지 않았고, 이는 다른 병정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부대는 2열 횡대로 늘어서서 발을 맞춰 진군하고 있었다. 전진방향에 대해 가로로 늘어선 이 횡대는 4리(약 1.5km)만큼 늘어서 있었다. 중대마다 양옆 간격을 일정하게 병정이 다섯 들어갈 정도가 되도록 띄우고 있었지만, 이들에게 4리는 결코 긴 거리가 아니었다.
우리 소대의 열 왼쪽 끝에서 스네어드럼과 트럼펫을 두 쌍의 팔로 들고 있는 군악 병정이 가옥 하나를 발로 차서 날려버렸다. 비록 1층 높이의 짚 지붕과 흙담으로 이루어진 초가집이었지만, 병정들에게는 인형놀이에 쓰이는 장난감 집이나 마찬가지였다. 나 또한 온 세상이 그들과 마찬가지로 보였다.
산으로 둘러싸인 영지, "사이프라사"는 거신병(巨身兵)들의 발 굴림 소리로 가득 찼다. 거신들은 코트에 가까운 형태의 두꺼운 합성갑옷을 입은 채 검같이 날카로운 광선을 뿜을 수 있는 하전입자포를 머스킷 매듯이 들고 횡렬로 전진하였다. 완벽하게 통일되어있는 거신들의 전열은 마치 '요새의 성벽'이 다가오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 '요새의 성벽'을 이루고 있는 구성요소인 나는 거신병을 다뤄본 지 1년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이건 익숙해지기 어려운 감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전까지만 해도 나는 거신병에서 내릴 때마다 갑옷에 '액체'를 토해 흘려버리기 일쑤였다. 그 '액체'는 토사물의 그것도 일부 섞여 있지만, 거신과의 신경연결을 돕는 유사 뇌수가 구성성분 대부분이었다. 내가 숙련된 기사들처럼 안에서 말끔히 처리하는 법을 터득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 일이었다.
“아직도 멀미날 것 같습니까, 도련님?”
부사관 놀런이 조소를 띄며 신문하였다. 그는 곧 최전방에서 열을 맞춘 지 8년이 되어가는 싸움의 전문가였다. 수차례의 집중포격을 돌파하여 동료를 구한 전적과 함께 지금까지 두 개의 무공훈장을 받은 그는 베테랑이었다. 덕분에 갓 대대에 취임한 이래로 줄곧 무시당했지만,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일은 계급을 앞세운 견제뿐이었다.
나는 장교이기는 하나 아직 준사관이었고, 실질적인 지휘는 호테 대위님이 맡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의 분수를 알고 있었다. 실제로 대위님의 지휘와 놀런의 통솔력은 전적으로 믿어도 되었다. 경험이 부족한 내가 아직 실전에서 낄 자리는 소대에 대위님의 명령을 전달해 주는 일과 화망형성에 보탬이 되어주는 일뿐이었다.
본래라면 나는 계급대로 부대기(部隊旗)를 들고 있어야 했으나, 실전 지향적인 대위님은 깃발을 등에 메고 대신 손에 총을 쥘 것을 지시하였다. 나는 군기에 어긋난 행위라고 재고를 건의했으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나는 거신병의 보행법을 수없이 연습할 필요가 있었다. 깃대는 여전히 행진 중에도 삐뚤어지면 안 되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용기병이 안 보이는군.”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며 말했다. 등에 달린 날개 두 쌍으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그녀들은 지상군을 보조하는 역할을 맡는다. 주로 빠른 속도를 이용해 적을 추격하거나, 히트 앤드 런 전술을 적극 사용하여 전격전을 펼친다.
“아무래도 오늘은 새 무덤을 더 만들지 않아도 되겠군요. 역시 윗대가리가 바뀌어야 삽질을 안 한다니까."
“경솔한 언행은 삼가라, 원사.”
거친 입담과 함께 대대장을 넌지시 험구한 놀런을 대위님이 제지하였다. 돌연히 나타나 적을 타격한 뒤 유유히 사라지는 그녀들의 싸움방식을 빗대어 장교들은 용기병들을 "요정"으로 불렀으나, 사병들에게 그녀들은 "새"정도로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녀들은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상공에 있어 새처럼 작게 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사병들이 용기병을 가까이서 볼 기회는 벼락을 맞을 확률만큼이나 귀했다.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사이프라사로 파견된 우리 대대는 진지를 세우자마자 첫 포격을 받았었다. 그 중 포탄 하나가 대대장의 캠프 바로 옆에 떨어졌으니 그가 히스테릭을 일으킬 만도 했다. 하지만 그의 무모한 작전 명령 때문에 배치된 용기병 중 3분의 1은 '추락천사(Fallen Angel)'가 되어버렸다. 적 거신병들의 하전입자포는 용기병의 천적이다. 조준사격도 충분히 위협적이지만, 일제사격으로 하늘을 갈라버리면 그녀들조차 어쩔 도리가 없다.
물론 이들은 재산적으로도 귀중한 존재들이었지만, 그녀들의 희생을 보다 못 한 대위님이 대대장 앞에 나서서 4개 중대로 적을 섬멸하겠으니 출격명령을 내려달라고 간언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우리가 진격하기 전, 낮 동안은 하늘에서는 포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머리 바로 위, 질소와 산소가 닿지 않는 고고도 궤도에서 호위함이 실탄을 쏟아붓고 있는 것이었다. 대위님은 출격 직전에 휘하 장교들에게만 이 사실을 직고하였고, 우리는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백반 전지와 모험을 헤쳐 나아가신 '역전의 용사'님에겐 계급이 무의미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인맥이 얼마나 넓어야 군 체계를 초월하여, 한 해군 군함의 함장에게 '개인적인 부탁'으로 함포지원을 받아내신 것인지 우리들의 머리로는 상상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대위님은 우리보다 더 이전 세기부터 무기를 다뤄오신 분이란 사실을 믿지 못했기에 추상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적은 우리 대대와 비교하면 두 곱절 더 많았고, 적의 포병은 ―이때 지상에서 포격지원을 해주는 부대는 없었지만, 호위함의 자기식 투사포 하나를 자주포 하나로 치자면― 우리보다 네 곱절 더 많은 물량을 자랑했으나, 대기권 바깥에서부터 쏘아져 내려와 중력의 도움을 받고 가속하는 포탄 하나는 적의 자주포보다 수십 곱절 더 큰 위력을 자랑하였다. 포탄이 착탄 하면서 일으키는 흙먼지기둥은 하나하나가 110간(200m)을 약간 넘어서는 높이로 솟아올랐고, 이는 적 거신병의 출전을 강요하였다.
“대위님, 적 거신병 부대가 정렬하기 시작했습니다. 수는 900. 이 영지에 주둔 된 모든 거신병이 집결하는 모양입니다."
관측병이 대기 중인 거신병의 머리 위에서 보고하였을 때, 이 영지를 밝혀주는 해는 서쪽의 '유르스 산' 너머로 지고 있었다.
“전원 전투준비. 연락병은 효시를 발사하라.”
관측병은 거신병의 숙여진 고개를 따라 자연스럽게 벌려진 뒷덜미에 들어갔다. 주인이 거신에 들어오자 상처처럼 벌어진 뒷덜미는 순식간에 아물듯이 닫혔고, 거신병은 눈을 번뜩이며 숫자를 세듯이 자신의 손가락을 구부렸다 폈다. 자신의 상태가 정상임을 확인한 병정은 옆에 뉘어진 자신의 입자포를 들고 일어섰다.
연락병은 자신의 한쪽 팔만 한 활―물론 1층 건물높이 정도의 길이이다―을 들고,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그러자 화살촉이 아른거리듯이 미세한 진동을 내며 빛나기 시작하였다. 진동과 함께 방출되는 마그네슘이 산화 반응을 일으키면서 밝은 빛을 내는 것이다. 연락병은 활을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들었고, 이내 시위를 놓아 발사하였다. 효시는 이내 본격적인 빛을 내면서 본진에 신호를 보낸다.
잠시 침묵이 흐른 뒤, 하늘에서 선율이 울려 퍼졌다.
본진의 제단천막에서 기도하고 계시는 무녀님의 노래였다. 본진은 90리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무녀님이 하늘에서 노래를 부르시고 계시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녀님의 시는 평화를 기원하는 가사를 담고 있었다. 거신병은 의도적으로 눈을 감을 수 없지만, 나는 마음속으로 눈을 감고 노래를 음미하였다. 하늘엔 태양이 황혼을 망토 끌듯이 퇴장하자, 고개를 내민 수많은 잔별이 그녀의 냇물 흐르는 듯한 청아하고 고결한 목소리를 들으러 내신한 것 같았다. 모든 거신병들은 잠시 가만히 노래에 귀를 기울였고, 나도 별들과 함께 그녀의 무대를 집중하여 감상하고 싶었지만 끝내 그럴 수는 없었다.
곧이어 군악 거신이 무녀님의 악곡에 맞춰 드럼을 두드리고 트럼펫을 불기 시작했다. 군악 거신은 두 쌍의 팔로 그녀의 노래와 화음을 맞추었다. 아카펠라는 아리아가 되었고, 이내 무녀님의 노래는 군악이 되어 병정들을 상기시켰다.
악기가 내보내는 진동형 파장은 병정들의 갑옷 사이로 스며들어와 피부를 두드리고, 거신들은 미리 조교된 패턴에 따라 무의식적으로 아드레날린을 분비하여 혈압을 높인다. 빠르게 순환하는 혈액은 더 많은 산소를 운반하여, 거인의 에너지발산을 극대화해 전투력을 높이는 것이다. 거인의 신경은 주인과 연결되어있으므로, 필연적으로 기사도 흥분하게 된다. 보통 사람이라면 정상을 넘는 아드레날린분비 때문에 흥분을 넘어 미쳐버리겠지만, 거신병을 타는 기사는 항상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받았기 때문에 자신과 거신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
“제군들, 시간이 되었다.”
대위님은 일어나면서 비장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뒤에 이어지는 말은 농담거리도 되지 못하는 나사빠진 말이었다.
“배고프지? 빨리 일 끝내고 밥 먹으러 가자!”
실제로 우린 아드레날린이 의도적으로 분비된 상태였기 때문에 썰렁한 농담으로 힘이 빠질 수는 없었지만 말이다.
“대대, 정렬하라!”
대위님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교들이 아군 거신병들에게 명령을 전달했고, 바로 부사관들은 병정들의 줄을 맞추었다. 우리 ‘케르베로스’ 중대와 함께 ‘오리온’ 중대, ‘아파체’ 중대가 전방에서 전열을 유지하며 진군할 계획이었고, ‘골디우스’ 중대가 후방에서 바짝 붙은 채 따라옴으로써 빈자리가 생기면 곧바로 전방을 메우도록 대비하였다.
곧 적의 전열이 정렬됨을 확인하자 호위함은 포격을 멈추었다. 적이 게릴라전술을 그만두고 정공법으로 우리를 상대하게 유도하는 것이 호위함의 목적이었다. 이를 수행한 호위함은 궤도에서 벗어나 초계활동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무리한 포격지원은 아군오사의 확률을 높이고 민간인피해를 심화시킬 우려가 있었다.
“대대, 전진!”
“전진!”
대위님이 호령하자, 병정들이 복창하였다. 거신병들은 군악의 박자에 맞추어 절도있게 행진하였다. 병졸 거신병의 발성기관은 시끄러운 전장에서 간단한 상태보고를 할 수 있을 만큼만 발달하였기에 그들의 복창은 어눌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투수행은 정확한 행동이 필요하였으므로, 거신병은 계급 불문하고 골격계와 신경계가 특히 발달하였다. 이를 반영하듯이 그들의 행진은 매우 정밀하였다. 특히 나는 등에 멘 부대기가 수직 직각이 아닌 다른 각도로 삐뚤어지지 않게 조심할 필요가 있었다. 손으로 깃발을 들었다면 수고를 덜었을 터이지만 말이다.
전장은 다시 적의 자주포 사격으로 사이프라사의 흙을 곳곳에서 파내어갔다. 포격을 받은 병정이 몇 있었지만, 이내 줄을 다시 유지하였다. 실탄무기가 적을 정확히 조준하기 어려워서 직격을 기대하기 어려운 것은 넘어가더라도, 거신병은 전차포의 포격 따위 가려운 듯이 무시하며 전진할 수 있다. 비록 "이세계인(異世界人)"들이 쏘는 실탄은 이상하리만큼 매우 정확한 타격력과 무시무시한 위력을 자랑하지만, 이곳에서 그것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었다.
적은 선봉부대와 후위부대로 자연히 나뉘었다. 각각의 부대는 우리의 대대와 거의 같은 규모였는데, 전열이 빨리 정리된 순서부터 행진한 결과였다. 후위부대는 선봉부대가 출발한 지 1분 뒤에 선봉부대의 뒤를 따라 같은 속도로 진군하였다. 이 사이의 거리는 110간(200m) 정도였다.
적 선봉부대와 우리 대대는 2열 횡대를 유지하며 서로에 대해 완벽에 가까운 평행을 유지한 채 거리를 좁혀갔다. 적과 우리 사이에 흐르는 강조차 전열과 평행―자연적인 강이었으므로 직선은 아니었지만―을 유지하였다. 강 자체는 냇물에 가까울 정도로 수심과 폭이 낮았으므로 전술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요소는 아니었지만, 강은 자연스럽게 피아를 구분하는 경계선이 되었다. 점점 서로 간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대지의 진동이 강해지자, 강은 그나마 품고 있던 물까지 사방으로 뱉어냈다.
이쯤 되자, 적 전열 사이사이로 보병들이 돌진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다. 그들이 밟고 있는 땅은 추수가 끝나고 허수아비와 짚가래가 군데군데 놓인 허허벌판에 가까운 농경지였다. 만약 관측병이 보병들을 미처 못 보았으면 그는 태형을 받아야 마땅했을 것이나, 나는 그가 알고도 무시한 채로 보고했을 것으로 생각했다. 보병은 평지 위의 거신병을 어찌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나는 무작정 달려오는 그들에게 미리 유감을 표했다.
곧 이곳은 보병이건 말건 맨몸의 사람은 남아날 수 없는 지옥으로 변할 예정이었다.
적은 우리의 완벽한 전열을 시각적으로 마주하였다. 신장을 전부 40자(약 12m)로 잰 듯이 딱 맞춘 거인들이 기계적인 보보행진으로 전진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발생하는 규칙적인 공진이 그들의 고막과 피부를 강타하였다. 그에 반해 반대편에 정렬된 적 거신병부대는 각 처에 빼돌릴 수 있는 거신이란 거신을 겨우 집합시켜 급조된 엉터리 군대였다. 그들의 거신들은 각자의 신장이 들쑥날쑥했을뿐더러, 보폭조차 제대로 통일되지 못했다.
이렇게 받은 심리적 압박감으로 적 선봉부대 거신병들은 총구를 우리보다 먼저 내려버렸다. 거리는 아직 3리, 648간(1178.7…m)이였다. 그들이 우리를 향해 겨누고 있는 입자포의 총구 안쪽이 반짝거리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우리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군을 계속하였다. 그 누구도 움찔하며 멈추는 이는 없었다. 횡렬 전열식 밀집대형에서 이 거리는 아직 유효사거리가 아님은 병졸들까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우리는 적이 먼저 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상대방과의 거리가 620간(1127.2…m)이 되었을 때, 적 거신병들은 그들 나름대로 일제히 사격하였다. 눈으로 세어보길, 먼저 쏜 병정과 가장 나중에 쏜 병정의 발사시간 차이가 약 1.3초였다.
푸른 빛줄기가 경지와 강을 가로질러 순식간에 우리에게로 다가왔다. 광선 하나가 내 머리 위로 지나가 메고 있던 부대기의 깃대를 잘라버렸다. 사방이 빛의 철창으로 가득 찼다. 일순간이었지만 감옥에 갇힌 듯한 메스꺼운 기분 또한 느껴졌다. 하전입자빔의 반이 우리 머리 위로 지나갔고, 또 나머지 반은 우리 바로 앞의 땅에다가 낙서를 싸질러놓았다는 이야기다. 빔이 대기와 반응하며 나타나는 써멀블루밍(Thermal blooming) 현상, 빔과 빔 사이에 발생하는 반발력, 행성의 중력과 지자기 때문에 하전입자포는 그들이 조준한 대로 적을 노리지 못한 것이다.
물론 그 중 럭키샷은 있었다. 우리 소대에서는 두 거신병이 쓰러졌는데, 각각 다리와 복부에 피격당했다. 충분히 가속된 하전입자포는 전차포와 달리 갑옷을 걸친 거신의 배에 바람구멍을 뚫고 다리를 자를 수 있는 위력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당사자들은 끔찍한 고통을 겪겠지만, 본체가 들어가 있는 뒷덜미 부분이 파괴된 것이 아니니 나중에 멀쩡하게 거신으로부터 꺼내줄 수 있다. 첫 번째 횡렬에 생긴 빈자리는 두 번째 횡렬에 서 있는 병정이 앞으로 나옴으로써 즉시 채워졌다. 다른 소대의 피해도 마찬가지로 경미하였다.
빛줄기가 걷히자, 입자포의 작렬로 말라버린 강 너머는 안개로 가득 차 적 부대가 보이지 않았다. 하전입자포의 매개체는 이온화된 수소가스인데, 하전입자를 발사하면서 전하를 잃어버린 수소는 재장전을 위해 배출되는 과정에서 주변의 산소와 연소하여 물이 된다. 이 물은 기체상태인 수증기가 되어 찬 외부공기와 만나 하얀 김으로 변하여 안개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안개는 규모가 굉장하여 쏜 당사자를 가려버릴 정도다. 적 거신병 근처에 알짱거리던 사람들은 순식간에 사라진 산소에 질식하기도 전에, 입자포에서 방출되는 수증기에 화상을 입어 고통스럽게 죽을 것이 틀림없었다. 그와 달리 거신병은 이러한 환경에서 버틸 수 있는데, 거신의 외피는 불이나 고온에 대한 저항력이 강력할 뿐만 아니라, 거신의 특화된 근육은 다른 육상생물들보다 십 곱절 이상 더 많은 미오글로빈을 함유하고 있기 때문에 한번 숨을 들이켜는 것으로 한 시간을 호흡 없이 활동할 수 있다.
적 거신병의 섣부른 일제사격으로 우리는 치명적인 반격을 실행시킬 기회를 획득하였다. 입자포가 밀집된 환경에서 포신을 냉각시키는 데에 90초, 입자를 가속시키는 데에 30초 정도 걸리니 120초 가량의 준비시간이 주어진 셈이었다. 저들이 쏜 거리보다 180간 짧은 440간(800m)이 평균적인 전열거신병의 교전거리였지만, 선봉대와 후위대가 만나고 나서 우리에게 두 번째 일제사격을 가하기 전에 적을 괴멸시켜야 했다. 이를 위해서는 더 짧게 접근해야 하지만, 초당 11자(약 12km/h)정도 되는 보행속도로는 2차 사격이 들어오기 전에 접근하는 것이 어려웠다. 속력을 더 높여야 했다. 적과의 거리 590간(1072.7…m), 1차 교전으로부터 18초 경과했다.
“대대, 속보로 전진하라!”
“속보 전진!”
대위님의 명령에 군악의 박자간격이 짧아졌고, 우리의 발걸음 또한 이에 맞추며 아까의 두 곱절로 속도를 높였다. 거리 550간(1000m), 30초 경과
뿌연 안개가 걷히면서 적 부대가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선봉의 거신병들은 방열판을 열어 포신의 열을 식히고 있었다. 후위에 있던 부대는 좌우로 갈라져 우리를 포위하고자 했으나, 1차 사격에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행진하는 우리 대대를 보고선 선봉대와 합류하고자 방향을 틀었다. 명령의 번복 됨으로써 후위의 병정들은 잠시 우왕좌왕하여 적의 전열이 잠시 흐트러지게 되었다. 거리 484간(880m), 50초 경과
적 선봉대 병정들은 자신이 들고 있던 입자포를 포신이 위로 향하도록 땅에 세웠다. 그들은 옆구리에 달린 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그들이 꺼낸 것은 화약과 실탄 대신 이온 수소가스가 충전된 탄약 하나였고, 그것을 총구 안으로 집어넣었다. 이어서 밀대같이 생긴 막대기를 등 뒤에서 꺼내 총구에 밀어 넣었다. 이 밀대는 탄환을 뇌관 역할을 하는 입자가속장치까지 밀어 넣어줌과 동시에 하전입자를 가속시키는 데에 필요한 에너지를 충전시켜준다. 거리 418간(760m), 70초 경과
적 선봉대는 그들 지휘관의 지시에 따라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이는 좋지 않은 징조였고,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다시 전열을 갖춘 후위대가 선봉대 바로 뒤에서 총구를 내린 것이다. 후위에 선 거신병이 지면과 수평이 되도록 세운 총구는 선봉대 병정의 머리 위에 있었다. 총구 안쪽은 이미 빛을 띠고 있었다. 1차 교전으로부터 80초가 경과한 시점, 적과의 거리는 385간(700m)이었고 이번 2차 사격은 어느 정도 피해를 감수해야만 했다.
이내 섬광이 작렬하였고, 내 바로 왼쪽에 있던 병정의 머리가 사라져버렸다. 아랫니와 하관만이 덩그러니 남은 채 힘없이 쓰러지는 거신병의 모습은 그리 좋게 볼 수 있는 광경이 아니었다. ―위안거리를 찾자면, 탑승자는 머리가 날아가는 느낌을 받지도 못한 채 정신을 잃었을 뿐이라는 사실이리라.― 앞줄에 전진하던 열다섯 병정 중 다섯이 쓰러졌다. 이 여백은 곧바로 채워졌으나, 뒷자리에 생긴 일곱 개의 빈자리는 뒤따라오던 골디우스 중대가 마저 메워주었다. 이들은 각 소대에 생긴 공란을 충당하느라 대여섯 병정 정도를 남겨두고 뿔뿔이 흩어져버렸다.
적 선봉대는 총구에서 밀대를 빼고 입자포를 다시 들어 우리를 향해 조준하였다. 거리 359간(652.7…m), 88초 경과
“대대, 포신을 예열하라!”
피해 보고를 받을 틈도 없이 대위님은 무녀님의 노래를 통해 염화(念話)로 긴급히 지시했다. 우리는 곧바로 방아쇠를 당겼다. 하전입자포는 방아쇠를 당긴다고 해서 곧바로 발사되지는 않는다. 하전입자는 충분히 가속되어야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발사명령이 떨어지기 전까지는 방아쇠를 절대 놓지 않는 것이다. 거리 352간(640m), 90초 경과
적 후위대의 첫째 행렬과 둘째 행렬이 서로의 위치를 바꾸었다. 아까 2차 교전 때에는 후위대의 앞줄만이 발포했을 뿐이었다. 적은 방금 장전을 끝마친 선봉 2열과 아직 한 번도 발포하지 않은 후위 1열이 동시에 사격하여 우리를 끝내버릴 생각이었다. 이를 긍정하듯이 적 거신병들의 총구가 환해지기 시작하였다. 거리 341간(620m), 93초 경과
“속도를 유지해! 20초만 힘내!”
놀런이 소대원들을 고무하였다. 우리 대대의 진격을 차단하려는 듯 포격도 거세지기 시작하였다. 포탄 수십 개가 동시에 지면으로 착탄하였지만, 아군 병정들의 보폭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리 319간(580m), 99초 경과
아군과 적 부대의 운용 가능한 화력은 1.5배나 차이가 났다. 그럼에도 진군을 멈추지 않는 우리 대대에 당황한 몇몇 적 거신병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무시하고 하나 둘 당기고 있던 방아쇠를 먼저 놓기 시작하였다. 일정하지는 않지만, 광선은 대략 3초마다 하나씩 각각 소대의 거신병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30초간의 입자가속과정을 제대로 거치지 못한 빔은 전차포에도 미치지 못하는 위력으로 갑옷을 약간 그을리게만 하였을 뿐이었다. 1차 교전 경과시간 112초
“대대 정지!”
대위님의 호령이 떨어지자마자 대대는 멈춰 섰다. 군악 병정도 주악을 그만두었다. 적과의 거리 275간(500m), 적군의 3차 사격까지 남은 시간 8초
“사격 준비!”
대대는 일제히 총구를 내렸다. 5초
“조준!”
타이밍을 대위님께 맡긴다. 2초
“발사!”
반사적인 릴리즈(Release), 일제사격.
오백 가닥의 하전입자빔은 완벽한 평행을 유지하며 곧장 날아간다.
곧바로 눈앞은 새하얗게 변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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