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카드가 있었다. 카드로부터 뿜어져나온 막대한 에너지는 우주를 탄생시켰으며, 여러 별들과 생명을 낳았다. 몬스터들과 인간, 맞서기도 하고, 어쩌다가 협력하기도 하는 날을 보내던 중, 몬스터들의 힘이 극도로 높아지기 시작했다.
인간들이 몬스터들에게 밀려 사라질 것을 염려한 '신'들과 '사신'들은, 몬스터들의 영역을 만들어주었다. 먼 훗날 그곳은 던전이라 불리게 되었다... 라는 것이 할아버지가 해준 이야기. 내 이름은 벨 크라넬, 할아버지와 지내는 소년이다.
"이 카드들을 받거라, 벨."
"아무것도 없는데요?"
일러스트도, 효과도 없는 카드... 이걸로 어떻게 해야하나! 듀얼 몬스터즈, 전국적으로 유행하고 있는 카드 게임으로서 듀얼디스크를 사용하면, 더욱 생동감 있는 듀얼(결투)을 할 수 있다.
"언젠가 나타날 거란다... 그것보다 벨, 오는 여자는 절대로 막지 마려무나."
"까딱하면 머리만 남겨진 채로 보트타게 되잖아요, 그거."
그것만큼을 절대 싫어. 아니, 할아버지 말대로 오는 여자를 막는 것도 찝찝하지만,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생각하다보면 무서워진다. 평온한 일상이 계속된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절이, 저에게도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정신 좀 차려봐요! 할아버지!!"
"에이잉...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건만... 벨, 나아가라. 앞으로 나아가는 거다. 벨...!!"
갑작스러운 고블린 무리의 습격, 둘이 같이 놈들을 그냥 시체로 만들어버렸으나, 늙은 몸에서 억지로 쥐어짜낸 힘은, 그 생명을 꺼뜨리게 된 것이다. 그날, 나의 마음은 해골 세 개를 받았다.
계속된 단아련, 곰을 하나 세트 턴 엔드!... 를 얼마나 반복했을까?
[여기까지 당도한 것을 환영하오, 결투자여. 나는 혼돈스러움을 굽어살피는 누메로니어스라 하오.]
아무것도 아니었던 카드들의 일러스트와 효과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반투명한 상태로 모습을 드러낸 누메로니어스, 뒤를 이어 나타난 게이트 오브 누메론 넷. 주위의 풍경이 누메론 네트워크로 변화하다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어이, 할아버지. 뭔가 엄청난 놈들이 와버렸는데요?
"... 누메로니어스."
[왜 그러지?]
"아무리 그래도 말이야... 한 번에 시간이 10년 가까이 지나가는 건 좀 너무하지 않아?"
[나한테 질문하지 마.]
내 나이 14세, 슬슬 오라리오로 갈 시기다. 내리쏟아지는 폭포에 양주먹을 번갈아 박아넣어 드로우 훈련을 하였으며, 겸사겸사 육체까지 단련시키다보니, 벌써 1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가버... 뭐야, 내 시간 돌려줘요. '당신의 시간, 강인한 육체와 큰 키로 대체되었다'냐?
[그것보다 진짜로 갈 거야?]
"오라리오를 향해 전속전진이DA!"
이곳에서 정신을 차리기 전에 가지고 있던 물건은 덱과 듀얼디스크 뿐, 할아버지와 만나지 않았다면 거기서 죽어버렸을 지 모른다. 미궁도시 오라리오, 대륙의 서쪽 끝에 자리잡은, 고대로 일컫어지는 시대부터 현재까지 존속하고 있는 세계 유수의 대도시. 세계에서 유일하게 미궁이 존재하고 있는 장소다.
본래 평범한 대도시였지만, 신들이 내려왔다가 바벨탑을 박살내버려 그냥 거기서 살게 됐다는... 뭐, 그런 이야기다. 도시, 나아가서는 던전을 관리하는 '길드'를 중추로 삼아 번영한 이 도시는 휴먼을 포함해 온갖 종족의 데미휴먼이 생활하는 장소다.
"무슨 일로 오셨나요?"
"모험가를 하러 왔습니다."
길드로 들어가 적절한 수속을 밟은 뒤, 자신이 속할 파밀리아를 고르게 됐다. 없다, 아무도 없다. 저기요, 아무도 없나요? 왜 도착했는데 아무도 없는 거지? 생각해보니까 여기 올 때까지 식사를 안 했다. 일단 배부터 채우고 생각하기로 하자.
"이 냄새는...?"
북쪽 메인스트리트에 도착한 순간, 어딘가에서 흘러나온 감자 냄새가 콧가를 맴돌았다. 이 냄새는 해시 브라운, 감자돌이라 불리는 그거다. 감자돌이 노점, 한 소녀가 감자돌이를 만들고 있다. 하얀 옷 위에 입은 앞치마, 흑빛의 트윈테일... 간단히 말하마, 존나 귀엽다.
"감자돌이 하나 되겠습니까?"
"음, 알겠다!"
바삭하면서 고소한 맛이 입 안 가득 퍼져나갔다. 뜨끈뜨근 할 때 바로 먹을 수 있기에 더욱 진한 맛이 느껴져왔다.
"그것보다 자네, 모험가인가?"
"아, 네. 아직 파밀리아에 들어가진 않았지만...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아무도 없어서, 일단 배부터 채우러 온 거에요."
"그ㄹ... 헤스티아 파밀리아에 들어오겠다고!? 저, 정말이냐!? 우, 우으으으... 흐끅..."
에엑따! 왜 갑자기 우냐구요!! 그녀는 헤스티아 파밀리아의 주신, 헤스티아... 라고 본인이 알려주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쎄한 눈으로 보기 시작했어...! 보지마, 그런 눈으로 날 보지마!!
"자, 어서 들어오거라!"
다 쓰러져가는 폐교회... 역시 내가 잘못 찾아온 게 아니었구만. 헤스티아님에게 필나를 부여받아, 등짝을 보여 그녀가 스테이터스를 새기게 해주었다. 힘(STR), 내구(VIT), 기교(DEX), 민첩(AGI), 마력(MAG)의 수치인 스테이터스. 각 숙련도마다 I에서 S까지의 10단계로 능력의 고저차가 표시된다.
I, 0에서 99까지의 단계. H, 100에서 199. G, 200에서 299. F, 300에서 399. E, 400에서 499. D, 500에서 599. C, 600에서 699. B, 700에서 899. S, 900에서 999.
"자, 등짝... 등짝을 보자!"
"아아... 좋은 감촉이다..."
부드러운 손길에 온 몸의 피로가 풀리는 듯 하다. 순간, 헤스티아님이 놀란듯이 숨을 들이켰다. 새기는 일을 마친 그녀가 종이에 스테이터스와 스킬 등을 적어 내게 건내주었다.
<듀얼리스트의 혼:자신 덱의 몬스터들의 힘의 아주 약간을 스테이터스로서 이어받는다.>
<테크 세터:덱의 몬스터 중 하나를 무작위로 골라, 힘을 갑주로서 두른다. 듀얼리스트의 혼과 효과 중복 불가능.>
"... 벨, 대체 뭘 했던 것이냐?"
"곰을 하나 세트하고 턴 엔드입니다."
"그거 외에는..."
"그걸 묻는 것 자체가 Sexy하지 않네요."
"괜찮다면 덱을 보여주면 안 되겠느냐?"
보여주지 않을 필요는 없었기에 곧장 헤스티아님에게 내 덱을 건내주었다. 역시 누메론 카드에서 멈추는가.
"벨... 이 카드들은..."
"누메론 카드들은 할아버지가 건내주신 거에요. 처음 받았을 땐 그냥 아무것도 없는 카드였지만..."
누메론 카드들을 쓰지 말라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니 안심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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