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때 이후로 잠시 의식을 잃었었던 것 같아. 깨어나보니, 쓰러져있던 내가 몸을 일으키고 있었고, 주위는 황폐했지. 아무도, 어떤 흔적도... 없더라고."
레이무는 말했다. 허벅지에 올려놨던 손을 뒤집으며 양손바닥을 뚫어져라 쳐다봤는데, 지금마저도 그 때의 비릿한 피 향이 풍겨올 것만 같았다. 깨어났던 그 때와 마찬가지로 겉은 더없이 깨끗하지만 그 내부로 스며들은 피의 기색은 아직도 빠지지 않아있다. 자신도 그걸 잊을 생각이야 결코 없다.
"하나만 물어볼게 유카리."
"……."
침묵하는 유카리를 레이무는 치켜뜬 눈으로 쳐다봤다. 가슴팍을 움켜쥐더니 그 손을 잡아당기자 여러갈래의 실이 엉망진창으로 끊어지며 뒤엉켰다. 실타래를 억지로 끊어낸 레이무는 딸려나온 부적뭉태기를 손에 쥐며 잠시 그것에 시선을 둔다. 따라서 고개는 숙여진다. 덩달아 흘러내린 탓에 시야를 가리는 머리카락이 단아한 검은색에서 제비꽃의 보라색으로 이제는 변화한다. 레이무는 지금까지 숨겨왔던 사실을 밝히면서 유카리에게 냉정히 묻는다.
"나는, 가족과 친구를 요괴 때문에 잃었어. 그것 때문에 요괴까지 되어버렸어. 지금까지 말했듯이 말이야. 그렇다면, 난 요괴를 증오해도 될 자격이 충분하지 않을까?"
"……."
"증오 때문에 난 자처해서 하쿠레이의 무녀가 됐고, 그것 때문에 수많은 생명의 위협을 넘어가면서까지 억지로 생을 붙들어왔어. 단 하나 때문에. 모두의 복수 때문에."
레이무가 숙인채로 읊던 행동을 바꿔 유카리를 빤히 응시한다. 대답을 촉구함에 틀림없다. 하지만 유카리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처량히 있을 뿐이다. 그녀는 대답할 처지가 못 되었다. 레이무는 그런 처지를 알면서도 다시 한 번 대답을 재촉한다. 유카리의 처량한 고개를 땅속 깊숙히까지 박아버린대도 계속할 거다.
"그렇다면 충분한 거잖아. 이 정도까지 말했으면, 넌 날 이해할 수 있을 거잖아. 나를 소중히 한다면, 그 정도까진……."
"난……."
"응? 제발 말해줘. 뭐라도 대답을 해줘. 말해봐. 말해보라고!"
여기에서 침묵을 지키는 것이 과연 좋은 생각일까. 유카리는 생각을 이어본다. 레이무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대답하라는 말을 반복하다 지쳐 헛웃음을 내뱉듯이 가쁜 기침을을 내쉰다. 꽉 쥔 레이무의 손은 떨림이 주체되지 않았다. 분노로 점칠된 레이무의 행동 하나하나에 유카리는 죄책감을 느꼈다. 애석히 뜬 눈을 푹 숙인 탓에 정면으로 레이무와 마주하지도 못하면서 그녀에게 손을 갖다대 조심히 포개어들려 든다. 레이무는 그 여린 손을 고통스럽도록 꽉 쥐어붙들고 이를 갈며 대답을 요구한다.
"자격은……."
유카리의 입은 웃고있지만 웃는 것이 아니다. 흘러내리려는 눈물을 참으려고 어떻게해서든 발버둥치는 억지웃음이다. 유카리는 도저히 대답할 수가 없었다. 레이무가 자격을 없다는 말만을 못 내뱉어서가 아니라, 여기에서 그녀의 분노와 증오를 인정했다가는 방금까지와 같던 일상들마저 싸그리 다 잃어버리게 될 것이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들어서였다. 그녀가 이렇게 분노를 보이는 것만으로도 유카리는 동요했다. 서로가 마음을 혼란스러워 하는 모습이 없었으면 해서 지금까지 막아왔었다. 레이무가 그저 화를 내지 않고, 평온한 일상을 지내기를 원하는 바람만으로 계획을 세워왔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복수에 긍정을 표해주었다간… 해왔던 모든 일은 물거품이 되어버릴 것이었으며, 미래마저도 물거품처럼 꺼질 것만 같았다. 종래에 모든 복수를 마쳤을 때의 레이무는…… 모든 것을 허탈하게 생각해버리게 되어선…, 결국 스스로 목숨을 끊어버리지 않을까?
유카리는 답지 않게 머리를 붙들며 결국에는 소리쳐버렸다.
"몰라…! 모르겠어! 레이무, 제발 나한테 묻지 말아줘! 난 그저, 그냥, 네가! 아무런 걱정이 없었으면 좋겠어! 왜 스스로를 구렁텅이에 빠트리려고 하는 거야? 왜 스스로를 그렇게 몰아세우는 거야? 그냥, 제발! 잠시라도…."
"……."
"잠시라도 좋으니까…, 제발 모든 걸 잊고 나랑 웃어줘…. 난, 화나 분노같은, 그런 게 싫은 거야…. 제발…."
레이무는 유카리의 호소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피식 하고, 비웃음을 머금은 듯한 표정으로 모든 기운을 잃어 혼이 없어져버린 것처럼까지 되어버려 고독히 생각을 이을 뿐이다. 결국에 너도 복수는 긍정하지 않아주지. 너는 마지막에는 항상 요괴의 편이야, 라며. 무조건적인 편가르기를 하면서.
그리고 자신도 이어진 연전에 정신이 너무 피폐해져서, 레이무는 그 생각을 끝으로 벽에 뒤통수나 기대며 생각을 놓아버렸다. 하늘은 여전히 맑았다. 주위는 결코 평온하진 않지만 있다보면 그렇게 될 거다. 호수의 표면에 일은 파문은 언젠가 멎는다. 그것처럼 세상도 언젠가는 이변의 여파가 끝나 조용해질 거다. 자신처럼 끝없이 충격을 주어서, 수면의 흔들림을 멎지 않게 하는 경우만 빼면 말이다.
"모르겠네…."
뭐를 모르겠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모르겠다고, 막연하게 레이무는 중얼거렸다.
"그냥, 그래. 오늘은…… 쉴래. 지쳤어."
샤메이마루 아야는 텐마의 명령 아래 무기한 근신중에 있었다. 수많은 이목으로부터 분리될 단 하나의 방법으로서 근신이라는 처벌아닌 처벌을 받는 아야는 스스로 피폐해져서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줄 무언가도 찾지 못하고 직속 텐구의 감시 아래에서 그저 숨쉬기만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가 생각하는 것은 모토오리 코스즈의 안위다.
나를 이렇게 무시하고도 가만히 있을 줄 아느냐, 같은 의미의 언어 나부랭이나 내뱉던 야사카 카나코는 불현듯 떠올린 생각을 분노한 이의 특징인 돌발적 행위로 갑자기 옮겼다. 그녀의 손으로부터 하나의 불덩이가 타오르더니 점차 작은 구로 축소되면서 그 위력이 응집되었다. 밝은 붉은색으로 불타오르는 구슬은 그녀의 손을 태우고 근처의 벽마저도 불결에 녹아내리게 했지만 카나코는 아랑곳하지 않고 압축만을 반복했다. 뼈가 드러나고, 그것이 재생되고, 다시 뼈가 되는 과정이 수 주동안 수십회 반복되고 나서 온전한 붉은색으로 변해 구인데도 단지 이차원의 원처럼 보이게 된 구슬을 카나코는 바닥에 냅다 집어던졌다.
"……이것은 신벌이다."
카나코는 그렇게 중얼거리고서 응집시켜놓은 마지막 자신의 힘이 이 환상향에 벌일 재해를 기대하며 본존을 나선다. 밖은 용암의 열기에 반짝이던 방과는 다른 의미로 밝았는데, 정말 상쾌한 온기였다. 카나코는 두 팔과, 눈과 귀와 코와 입을 모두 크게 벌리고 외친다.
"네년이 아끼고 지켜왔던 환상향이 어떻게 되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며 감히 신을 우롱하였던 과거의 자신을 탓하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