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영원정엔 의술이 뛰어난 약사가 있고, 하루종일 집안일하기에 바쁜 달의 토끼도 있다. 그리고 하루종일 노닥거리기만 하는 백수의 탈을 쓴 공주도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일로 하루를 보내는 반면에 그 공주는 '오늘은 무얼 할까?' 라고 고민하는 것을 하루 일과로 삼는다. 그녀의 이름은 호라이산 카구야였다.
*
아나타는 탁자를 쓰러뜨린 일로 레이센과 함께 꾸중을 듣고 얼마 지나지 않아 비슷한 일을 반복했다. 아나타는 선반을 떨어뜨렸고, 에이린에게 다시 꾸중을 들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레이센에게까지 한 번 더 꾸중을 듣고 나서야 아나타는 풀려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청소는 끝나지 않았다. 에이린은 한 번 갈 때까지 가보라는 말투로 아나타에게 청소를 계속하라고 말했고 레이센은 더이상 상대하기 지친다는 표정으로…… 에이린한테 끌려갔다.
아나타가 보기에─물론 제대로 보이지도 않지만─ 영원정은 결벽증 환자한테 결벽증 있냐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비할 데 없이 깨끗했다. 하지만 에이린이나 레이센에겐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남녀의 차이? 아니면 자라온 환경의 차이? 어쩌면 사소한 시점 차이일지도 모른다. 정확한 건 청소를 끝내려면 그녀들의 기준에 맞춰야하고, 그래서 청소는 끝이 없었다.
"대충 해버릴까 보다."
아나타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재활운동이란 건 둘째치고…… 무임금 노동이라는 사실이 머릿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그 단어를 머릿 속에서 지워버릴 수 없었기 때문에 찜찜할 따름이었다. 그렇다고 목숨을 살려줬는데 그까짓 청소 안하겠다고 하는 건 염치 없지 않은가. 하지만 청소는 아직 시작에 불과할 거라는 짐작이 강하게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한 손만으로 빗자루를 들고 바닥을 쓸던 아나타는 자신이 어느새 고풍스러운 방문 앞에 서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제서야 아나타는 자신이 영원정의 구조를 거의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긴 처음 와보는 곳이고, 청소하기 전까지는 병실에서 나가본 적도 없었다. 아나타는 되돌아가서 레이센이나 에이린에게 이 집 좀 소개시켜달라고 할까 생각해보앗지만 그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이센은 모르겠지만 에이린은 확실히 똑똑했다. 주의해야될 사항이 있다면, 그러니까 들어가지 말아야할 곳이 있다면 미리 말해주었을 것이다. 말해주지 않았다는 소리는? 없다는 소리다. 아나타는 에이린을 믿었다. 그녀는 분명 불쾌할 정도로 영리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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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그러고보니……."
"왜요, 스승님?"
"음…… 아니야. 별 일 없겠지."
"아, 네……."
*
아나타는 만에하나 에이린이 실수했을 것을 대비하여 문을 샅샅이 살펴보았다. 이때까지 보아온 영원정의 다른 문들과 달리 고풍스러운 미닫이문이었다. 인상부터가 남달랐다. 그렇지만 접근 금지나 출입 금지로 보이는 글자, 문양, 표식 같은 것을 찾지 못한 아나타는 굳이 들어가지 말아야할 이유를 느끼지 못했다. 그렇다고 잠겨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중요하면 잠궈놓기라도 하겠지.
아나타는 조심스레 문에 귀를 가져다대었다. 안에선 미세한 숨소리가 들려왔다. 누군가 자고 있는 걸까? 아무래도 자고 있는 방에 들어가는 건 실례인가? 하지만 그것이 들어가지 말아야할 이유라도 되……겠지만 잠 좀 깨운다고 별 일이 있겠는가? 될 대로 되라지. 아나타는 아무 생각 없이 문을 열었다.
예상대로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예상대로 방 안엔 누군가 자고 있었다.
검은 생머리를 길게 기른 여자였다. 단 한 올도 윤기를 잃지 않은 새까만 머리카락 아래로 잡티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이 보였다. 단지 자고 있는 모습이지만 아나타는 그녀의 모습이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이 여성의 아름다움은 뭔가 에이린이나 레이센과는 달랐다.
아나타는 감상을 멈추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문만큼이나 고풍스러운 벽지로 도배된 방이었다. 벽지엔 붓으로 대충 휘갈겨 그린 듯한 그림들이 그려져 있었다. 아나타는 왠지 그 휘갈겨 그린 것들이 달과 지구를 닮았다고 생각했다. 방구석엔 분재가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 분재는 흥미나 관심, 그리고 의미를 느끼지 못한 아나타의 시선을 잠시도 잡아두지 못했다. 아나타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여성과 눈을 마주쳤다
언제 깨어났지? 라고 고민할 필요를 느끼지도 못했다. 왜냐하면 그런 고민을 하기엔 이미 늦었다. 여성은 상체만 일으켜 세워 머리카락만큼이나 새카만, 그렇지만 빛나는 듯한 눈동자로 아나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직 졸린지 두 눈은 반쯤 풀렸고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그래도 눈동자만해도 흑요석만큼이나 아름다워 보였다. 묘하게 백치미가 느껴지는 놰쇄적인 모습이었다.
여성은 멍하니 있는 아나타에게 말했다.
"당신, 누구?"
아나타는 목소리는 대강 천사의 목소리와 비슷하다고 여겼다. 물론 그런 목소리를 기억을 잃기 전엔 들어보았을 지도 모르지만, 현재 기억나는 목소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둘은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하여튼 간에 둘 모두 기억 속엔 없는 목소리였다.
목소리는 목소리고, 질문은 질문이기에 아나타는 정중히 대답했다.
"아나타입니다."
"아……나타……?"
여성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상태로 5초 정도의 시간이 흐르자 여성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히며 입이 열렸다.
"아! 에이린이 말한 그 남자?"
"장담은 못하겠는데 아마도 맞을 겁니다."
"흐음? 듣기보다 재미없어 보이는 남자네."
아나타는 쓴웃음을 지었다.
"남 웃기는 게 취미는 아니라서요."
"기억을 잃어버렸다면서? 취미는 기억나나보내?"
아나타는 흠칫하더니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새로 취미를 하나 개척 중 입니다만?"
여성은 금세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아, 그래 그런데 내 방엔 어쩐 일이지? 내 잠까지 깨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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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깜빡하고 못 올렸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