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의 생각일 뿐이지만 만약 언더월드가 유나탈 링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되는 상황이 이제부터 시작되는 유니탈 링의 중심내용이라면 진짜 흥미진진한 내용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언더월드는 저의 생각일 뿐이지만 진정한 전사이자 순수한 투사들만이 들어갈 수 있는 진짜 영웅들의 영혼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신들의 세계라고 한다면 그곳을 200년의 시간동안 리얼월드의 지식으로 무장하게 된 200년후의 언더월드
그것도 미국의 용병인 크리터의 바보짓때문에 만들어지게 된 언더월드는 리얼월드의 근간을 흔들어 버릴 정도의 무서운 또 하나의 지구라고 불려도 부족함이 없지 않을까요.
거기에 그 언더월드의 정합기사들과 그들이 지휘하는 군대는 말 그대로 진정한 무인들 다시 말해서 진정한 명예에 목숨까지 바칠 수도 있는 진짜배기 전사들로 이루어져 있을텐데 과연 그런 전사들이 전 세계의 무인병기들을 완전히 장악까지 하게 된다면, 그리고우선 그들의 세계에 전쟁을 선포하고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짓까지 행한 미국에 대해서 응징을 가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 상황이 벌어지게 된다면 과연 일본과 키리토는 그들과 같이 미국을 상대로 싸울까요 아니면 그 전쟁을 막기 위해서
미국과 언더월드 둘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까요?
저의 생각이지만 바로 이런 상황이 앞으로 벌어질 그리고 앨리시제이션의 마지막에 나온 그 지성간 전쟁이 아닐까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앨리스를 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가면서 그 가브리엘 밀러( 암흑신 백터 )를 막은 베르쿨리 기사장을 보면서
문득 제1차 아프간 전쟁(러시아와 아프가니스탄의 8년 전쟁) 의 전설적인 영웅이자
체 게바라와 더불어서 불멸의 게릴라 전사로서 이름을 남긴
아흐마드 샤 마수드가 했던 말이 기억이 나네요.
'우리는 언젠가는 모두 죽을 것이다.
그러나 알라의 선택을 받은 진정한 전사만은 자신이 죽을 장소를 고를 수 있도록 허락을 받을 수 있다.'
저의 생각이지만 베르쿨리 기사장을 포함한 언더월드의 정합기사들과 암흑계의 권투사 단장을 포함한 전원은 모두 그런 신의 선택을 받은 진정한 전사이자
신께서 아끼시는 영웅들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그런 영웅들을 200년동안 다스리고 교육시킨 성왕 키리토....
유니탈 링이 만약 그런 가상세계의 전사들과 리얼월드의 군대가 정면으로 격돌하는 세계대전급의 이야기로 나가게 된다면
그리고 그 후반부가 액셀월드로 연결이 된다면....
진짜 코난을 능가할 정도로 한 30년은 우려먹고도 남지 않을까 생각이 되네요.
사실 21권이 나온지 7개월이 지나서야 22권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가 인터넷을 떠도니까 말이지요.
이번에 원작자님께서는 진짜 본격적으로 써 보시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제가 아까 베르쿨리 기사단장에 대한 저의 생각을 적으면서
참고로 한 인물인 아흐마트 샤 마수드에 대한 정보입니다.
참고하셔도 좋을 겁니다.
최근 수정 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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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위 문서 : 아프가니스탄/역사
본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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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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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지시르의 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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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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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9월 2일, 바자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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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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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9월 9일, 타하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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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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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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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불 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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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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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미아티 이슬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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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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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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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
1. 개요[편집]
전쟁은 누구도 좋아서 하는 게 아니오. 이건 의무이지. 국민이 침략의 희생자가 되었을 때 싸워서 스스로를 지키는 것 외에 다른 해결책은 없소.
-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지도자 아흐마드 샤 마수드,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와의 인터뷰에서.
마수드는 다른 지도자들과 달리 한 번도 조국을 떠나지 않았으며 한시도 적을 향한 총구를 내려놓은 적이 없다.
마수드가 살아 있었다면 카르자이는 대통령이 될 수 없었다. 그랬다면 마수드는 명실상부한 이 땅의 지도자로 지금의 혼란상을 극복하는 확고한 리더쉽을 발휘했을 것이다.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
소련과 맞서 싸우며 아프가니스탄의 발전을 도모하였던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지도자 겸 군인. 1953. 9. 2. ~ 2001. 9. 9. 원래는 카불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하였으나 후에 이슬람 원리주의[1] 운동가가 되었다.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자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서 무자헤딘을 이끌고 무장 투쟁을 했다. 덕분인지 지금도 아프가니스탄의 구국의 영웅 대접을 받고있다. 참고로 이른바 '페샤와르 세븐'이라 칭해지는 아프가니스탄 저항운동의 지도자들 중 유일한 타지크족 출신이다.
친소 공산정권이 무너진 후
2. 일생[편집]
2.1. 젊은 시절[편집]
1973년에 무함마드 다우드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이슬람주의 운동을 탄압하자 이슬람 사회(Jamiat Islami)의 멤버였던 굴부딘 헤크마티아르[4]가 선동한 봉기에 참여하였다. 마수드는 자신이 담당한 판지시르 지방의 선동에 성공했으나 헤크마티아르가 아프가니스탄 장교들을 반란으로 끌어들이지 못하면서 봉기는 실패로 끝났다. 이후 다우드는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의 씨를 말릴 기세로 탄압을 가했고 마수드는 파키스탄으로 간신히 탈출했다. 이 때부터 마수드와 헤크마티아르는 원수지간이 되었고 1976년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운동이 라바니와 헤크마티아르의 세력으로 갈라섰을 때 당연히 마수드는 라바니의 정당에 가입했다.
2.2.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편집]
사진은 당시 무자헤딘 활동 당시의 마수드.
1978년 아프가니스탄 공산당 세력이 쿠데타로 아프가니스탄 민주 공화국을 수립하자 마수드는 자신의 고향인 판지시르 계곡에 본거지를 구축하여 게릴라 투쟁을 시작했다. 이듬해인 1979년, 소련군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해 자신들의 꼭두각시 카르말 정권을 출범시켰고 마수드는 이에 대항한다. 마수드는 크게 4단계의 전략적 계획을 수립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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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들의 지원을 받는 게릴라 군대 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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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정규전의 수행과 그 동안 거점인 판지시르의 적극적 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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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략적 공세"로 마수드의 군대가 아프가니스탄 북부 대부분을 제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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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단계 계획을 아프가니스탄 전체에 일반적으로 적용하여 최종적으로 공산주의 정권을 붕괴시킨다.
1980년, 마수드는 파키스탄 쪽의 루트로부터 어렵게 입수한 7백여 정의 구식 소총과 제대로 훈련되어 있지 않은 1천여 명에 불과한 병사들을 이끌고 무자헤딘 활동을 시작하였다. 말이 좋아 게릴라지 난민이나 마찬가지였던 마수드 휘하의 무자헤딘은 마수드의 지도를 거치면서 한창 전쟁이 격화되었던 1984년에는 5천 명의 강병으로 탈바꿈했다. 종전된 1989년, 마수드 휘하 무자헤딘의 수는 무려 1만 3천 명에 이르렀다.
놀라운 것은 이 시기 전쟁을 이끌었던 주요 세력이 아프간 밖이나 소련군의 공세가 덜한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근거지로 자리잡은 데 비해 마수드가 근거지로 삼은 판지시르 계곡은 소련의 유일한 보급로가 지나가는 페샤와르 지역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당연히 전쟁 내내 소련군은 자신들의 유일한 보급로를 위협하고 있는 마수드를 최우선 제거대상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마수드와 그 휘하의 무자헤딘에 활약에 학을 뗀 소련군이 수천 명 규모의 게릴라를 때려잡겠다고 스페츠나츠를 포함하여 만 명 단위의 병력을 동원하고 폭격기까지 투입해서 대공세를 가한 횟수만 무려 9회였다. - 당시 카불 방송이나 소련군 발표에서 마수드의 체포 또는 제거를 거짓으로 보도한 것만 세 차례였다. - 하지만 소련군은 마수드를 잡기는커녕 오히려 마수드에게 역관광만 당하며 판지시르 계곡을 붉은 군대의 무덤으로 만들어버리기 일쑤였다. 마수드는 외부의 지원은 거의 받지도 못 하고 당시 세계 최강의 군대와 정면에서 맞붙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엄청난 전과를 올린 것이다.
1982년에 행해진 5차, 6차 공세에서 소련군은 3만 명의 병력과 200여 대의 헬기를 투입했지만 3천여 명 이상의 사상자만 발생했고, 이 와중에 공산 아프간 군 1천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해버렸다. 판지시르 무자헤딘 전부를 무장시키고도 남을 무기와 물자까지 빼앗겨버린 건 덤. 마수드에게 물자를 조공한 꼴이 되어버린 소련은 육로 수송을 대폭 축소하고 대신 항공 수송을 크게 늘린다. 당연히 소련의 전비 부담은 더 커졌다.
1983년, 소련은 마수드에게 정전을 제안하였고 마수드는 고민 끝에 이를 받아들였다. 소련의 속셈은 일단 자신들의 전력을 재정비하고 다른 곳부터 정리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이 기간을 적절히 사용한 것은 오히려 마수드였다. 1983년 7월 마수드는 파완, 라그만, 카피사, 쿠나르, 바다크샨 타카르, 바그란과 쿤드즈를 포함하는 아프가니스탄 북부 7개 주의 130명의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모았고, 그 곳에서 무자헤딘들의 행동을 확실히 조절하기 위한 군사 협의체인 감독 의회(Shura-ye-nazar)를 창설한다. 감독 의회를 통해 마수드는 정치적, 인종적인 문제로 분열되어 있어서 각자 움직이던 무자헤딘 세력들을 하나로 묶는데 성공한다.[5]
이로써 마수드의 영향력은 본거지인 판지시르를 넘어 타카르, 발한 주까지 뻗어나갔고 친소 카르말 정권은 기겁하며 소련군에게 판지시르에 대한 공격재개를 요청한다. 자신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에 당황하기는 소련군도 마찬가지였고 아예 마수드 세력의 씨를 말려버리겠다며 Tu-16 폭격기를 동원하여 판지시르 계곡에 전략 폭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마수드는 이미 카르말 정권에 침투시킨 첩자로부터 이 사실을 전달받았고 소련군의 폭탄은 5만 명의 거주민이 모두 떠난 텅 빈 계곡에 떨어졌다.
1984년, 소련-공산 아프간 군은 2만 1천여 명이 동원된 7차 공세를 시작했으나... 무자헤딘 5천여 명의 반격에 2천 5백여 명의 사상자를 남긴 채 후퇴해야 했고, 1985년의 9차 공세에서는 공산 아프간 군 5백여 명이 무자헤딘 측에 가담한 데 이어 공산 아프간 군 여단장이 무자헤딘의 공격에 사망(...)하는 막장 상황에 이른다. 결국 소련측은 1986년 판지시르에 대한 공세를 중단, 1988년 즈음 소련군은 판지시르 계곡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소련군은 마수드를 상대로 매우 무력했는데, 그 원인 중 하나는 소련군 장성들이 마수드와 내통하여 작전을 모두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건 마수드가 종전 이후 직접 러시아 기자들에게 밝혔고, 마수드를 오래 취재해왔던 다큐멘터리 작가 크리스토프 드 퐁피이는 그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6]
이 시기 마수드는 서방의 지원을 거의 못 받았는데 그 이유는 파키스탄 정보부 ISI의 농간과 CIA의 삽질, 그리고 영어를 몰랐기 때문. 그런 제한적 상황에서 저 정도의 활약상을 펼친 것이다.
인도와 대치 중인 파키스탄은 자신들의 배후인 아프가니스탄을 우호국 내지는 위성국으로 만들고 싶었고 자국 내의 상당수 존재하는 민족인 파슈툰족을 지원했다. 마수드는 타지크족이라는 이유로 변변한 지원을 못받았다. 일례로 미국이 휴대용 대공미사일스팅거 1,000여 기를 지원하면 파키스탄은 그 절반을 떼어먹었고, 나머지 분량이 퍄슈툰족에게 전해지면 또 그중 불과 몇십 기만이 마수드에게 보내졌다. 파키스탄의 지원을 얻은 헤크마티아르 등은 대 소련 투쟁보다는 기반 유지와 보신에 더 급급했고 이는 소련 철수 이후 파키스탄이 그들 대신 탈레반을 지원하는 원인이 되었다.
사실 미국도 별반 다를 게 없는 게, 파키스탄의 정보부 말만 듣고 방관하였고, 그 때문에 마수드에게 호구 잡힌 구소련이나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마수드와 접촉에 어려움이 없었던 프랑스 측에서 마수드에 대해 더 잘 아는 현상이 벌어졌다. 일례로 미국 매스컴이 프랑스 매스컴에게 아프가니스탄 게릴라 취재 도움을 요청하자 프랑스 측에서 마수드와 연결해주겠다 하니 영어를 못 하는 사람이라고 영어를 하는 게릴라 지도자를 찾아달라고 하는 황당한 일이 있기도...(문제는 이건 CIA도 마찬가지...)
실제로 이 당시 미국은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해 아는 것이 '전혀 없다'고 해도 무방할 지경이었다.[7] 파키스탄의 ISI를 통해 지원을 한 것은 소련과의 직접적 충돌을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지만, 실제로 미국 CIA가 아프가니스탄 무자헤딘 조직들을 지원할 때 가장 중요한 기준은 '영어를 할 수 있느냐'였다. 이로 인해 두고두고 미국의 골치를 썩이는 헤크마티아르는 영어를 그나마 안다는 점에서 미국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았고, 마수드는 영어를 몰라서 지원은 고사하고 거의 듣보잡 취급을 당했다. 심지어 때로는 헤크마티아르와 ISI에서 조작한 정보로 인해 마수드를 경계해야할 대상으로 간주하기도 했다.
마수드 자신도 미국 정부의 군사적 지원을 받을 생각이 별로 없었다. 애초부터 마수드는 자신의 조국 아프가니스탄이 외세에게 휘둘리지 않는 자주적인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 그래서 서방 세계에 교육이나 의료, 식량 등 민간 지원은 여러 차례 호소했지만 군사적 지원은 단 한 번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갑자기 쳐들어와서 꼭두각시 정부를 세운 소련이나 이를 핑계로 무자헤딘에게 무기 지원을 하려는 미국이나 똑같은 외세로 봤기 때문이다. 마수드가 탈레반을 적대시한 이유 중 하나가 90년대에 파키스탄을 통해서 미국의 지원을 받아서였다.[8]
소련이라는 강력한 적과 대치하고 외부의 변변한 지원도 없었음에도 마수드는 주민들에 대한 배려를 결코 잊지 않았다. 이 점에서 마수드는 다른 무장 세력이나 탈레반과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마수드는 판지시르를 비롯한 그의 통치 하에 있는 지역에 법과 명령을 요구할 수 있는 관리 시스템을 구성했다. 판지시르는 군사 지도자와 민간 관리인에 의해 통치되었고 판사, 검찰, 관선변호인을 가지고 있는 22개의 구역으로 다시 나뉘었다. 주민들을 위한 정책은 여러 위원회를 통해 실행되었다. 주요 위원회를 살펴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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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원회 - 해당 지역의 경제와 전쟁자금 마련, 단 주민들에게 걷는 세금은 최대한 주민들에게 돌아가도록 배려하였고 전비는 주로 에메랄드 수출로 얻는 수익으로 충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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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강위원회 - 국제의료구호( Aide médicale internationale) 등 외국 인권 NGO의 지원 등을 받아 병원 운영과 의료 서비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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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위원회 - 학생들을 위한 교육시설 운영, 군대 양성과 관리 간부 육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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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위원회, 선전위원회, 사법위원회 등
마수드가 통치한 지역에는 수도와 전기시설, 이슬람식 남녀공학 초등학교와 12개의 의원(醫院), 그리고 외과 수술도 가능한 세 개의 종합병원까지 있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그나마 주민들이 살 만했던 곳이 마수드가 장악한 지역이었다.
2.3. 전쟁 이후[편집]
이 외에도 무자헤딘 사이의 다툼은 계속 이어졌으나 마수드는 나지불라 정권을 붕괴시키기 위해 나지불라 정부군과도 전투를 벌였다. 우즈벡족 군벌 압둘 라시드 도스툼[10]과 손을 잡은 마수드는 1992년 4월 18일, 카불에 입성하고 공산 정권을 무너뜨린다. 곧바로 카불에 같이 입성한 부르하누딘 라바니, 압둘 라시드 도스툼에 시브가툴라 모자데디,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압둘 하크 등 주요 무자헤딘 지도자까지 모두 포섭해서 새로운 정권을 세우려 했지만...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은 헤크마티아르[11]는 카불을 자신에게 넘기라고 요구하며 모든 수단을 동원해 수도 카불을 무력 점령하려 했고 결국 4월 25일, 카불은 헤크마티아르에게 넘어간다. 하지만 얼마 후 마수드와 도스툼은 헤크마티아르의 군대를 격파, 카불 탈환을 눈 앞에 두었다. 그런데 헤크마티아르가 철수하면서 자신이 넘겨주게 된 카불에 무차별 공격을 퍼부으면서 애꿏은 주민 1만 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진다. 카불에 돌아온 마수드는 카불의 참상을 보며 눈물을 흘렸다.
<img class='wiki-image' src='//ww.namu.la/s/83ae6dc78c4948f2cad1057de2446006e2827f749f6636209d9077c30a53b0cb5c5a90a754cc87e554105c07462513c42796f58ac82bc40e7a980d23c16b6380d1fab0664a917355d0f61c4a32cb647883e37d5cb1e54efc1a57b51133a60235' alt='파일:external/pds19.cafe.daum.net/download.php?grpid=AqeX&fldid=20k&dataid=3371&fileid=4&regdt=20050911212729&disk=6&grpcode=bulkot&dncnt=N&.jpg'>
이후 라바니를 대통령으로 하는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연방 공화국이 성립, 마수드는 국방장관을 맡는다. 하지만 아프간 정부의 부패와 무자헤딘 간의 내분에[13] 염증을 느낀 마수드는 새 정부가 출범한지 2개월만에 사임하였고 고향 판지시르로 돌아가려 했지만 라바니의 설득에 결국 카불에 남아 새롭게 창설된 아프간군의 지휘관이 되었다.
1994년 1월, 헤크마티아르가 도스툼을 포섭해서 다시 공격 해왔으나 마수드는 7월 20일 헤라트에서 헤크마티아르의 군대를 다시 격파했고 이듬해 3월 6일, 마수드는 재차 헤크마티아르를 공격하며 큰 피해를 입힌다.
1996년 9월, 세력을 키운 탈레반이 헤라트를 점령하고 카불로 진군해오자 정부 요인들을 호위하며 카불에서 탈출하여 아프가니스탄 구국 이슬람 통일 전선(속칭 북부동맹)을 결성하였고 마수드는 다시 국방장관에 취임한다.[14] 이후 아프간군을 지휘하며 미국과 파키스탄의 지원을 등에 업은 채 아프간 통일을 노리고 진격해온 탈레반과 전투를 벌였다.
한국에서는 북부동맹이 탈레반에게 밀리고 밀려 북쪽 귀퉁이에 찌그러져 있다가 미국이 아프간 공격을 시작한 덕에 이겼다고 알고있는 경우가 많은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상식적으로 산적으로 돌변한
2001년 9월 9일, 벨기에 여권을 소지한 서방 기자들이 마수드를 취재하러 왔는데 그들을 응대하던 마수드는 기자들로 위장한 알 카에다 소속 자폭테러범들에게 암살당했다.[16] 이때 그의 나이가 48세였다. 이틀 후 9.11 테러가 벌어졌다. 미국은 오사마 빈 라덴과 알 카에다를 내놓으라고 탈레반에게 요구했으나 자신들의 숙적인 마수드를 제거해준 알 카에다를 탈레반 정권이 내놓지 않았고 결과는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었다. 그의 죽음에 수많은 아프간인들이 슬퍼했다. 현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수립된 후 마수드는 국가의 영웅으로 선포되었고 기일인 9월 9일은 아프가니스탄에서는 국가기념일이기도 하다. 물론 탈레반이 점령하지 않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군 장악 지역에서만...
<img class='wiki-image' src='//w.namu.la/s/f1e95a532df6db7454f8e2dc68b07831845468d16b2066c2c0af761d108fbba22b2f21dc057801dd16e5e8b24db1351ff4cd5dfa0397165382f41b8f1c254b46e84ba396e7bcc950cb364232263d9868316f86e46cb84bed42b30342aa259098' alt='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Massoud_Memorial.jpg'>
매년 9월 9일, 마수드의 기념관에서 아프간 육군이 거행하는 기념식.
3. 평가[편집]
게릴라전과 무력 투쟁으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그가 역사적으로 훌륭한 평가를 받는 것은 무고한 양민을 대상으로 하는 테러만큼은 철저히 반대했기 때문이다. 약자에게는 명분이 무기이며, 그리고 그 명분이 이슬람의 진정한 전통이라고 생각한 마수드는 평생 동안 거친 사막과 먼지바람 부는 산악을 떠돌며 게릴라전을 펼쳤지만 결코 테러리즘의 유혹에는 빠지지 않았다. 오히려 카불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탈레반의 협박에 카불 근처까지 진군한 마수드가 무고한 주민의 생명을 해칠 수는 없다며 판지시르로 철수한 경우가 있었다.
진정한 이슬람 원리주의자답게 저항하지 않는 자, 아이, 여성들에게는 절대로 손을 대지 않았다. 또한 다른 사상에도 관용적이었다. 수피즘 관련 책을 항상 가지고 다녔으며, 유대인 프린스턴 교수 마이클 베리(Micheal Berry)의 증언에 따르면 마수드는 유대인과 크리스천을 같은 신을 믿는 형제라고 생각하고, 그들의 교리에 호기심을 보였다고 한다.
한국군 소속으로 유엔 평화유지군 고문단으로 아프가니스탄에 간 적이 있는 채수문 중령의 저서에 의하면, 마수드는 한국 인삼을 좋아했고 여성들에게 개방적인 모습을 보이며 여성의 권리에도 상당히 관심을 기울이는 등 탈레반과 정반대 정책을 취했다고 한다. 대표적인 것이 학교 등의 건설. 여성 인력 또한 아프간의 재건에 필요하다 여겨 여성 교육에 신경을 썼다.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여성 외교관인 체케바 하체미는 마수드 아내의 친구이기도 하다. 탈레반 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이슬람교 종파의 교리와 그 교리를 따르는 신자들이 여성들에게 얼마나 잔혹한지를 생각하면 의미하는 바가 크다.
그 외에도 마수드의 지인들을 만났을 때 지인들이 마수드가 죽기 며칠 전까지도 탈레반을 우습게 보지 말라면서 알카에다나 탈레반이 미국 본토에 심각한 테러를 저지를 것이라고 누차 경고하는 등 상당한 선견지명이 있었던 사람이었다고 말했다고 적고 있다.
인권 단체인 휴먼 라이츠 워치에 따르면, 마수드 장군이 지배하는 북부 지역에서 인권 탄압의 사례는 거의 없었고, 마수드는 인권 탄압을 명령한 적도 없다고 한다. 다만 카불에 있을 때는 탈레반을 견제하기 위해 각종 무장단체들을 끌어안았고, 그 결과 카불에서 인권을 탄압하는 극단주의적 무자헤딘의 난립을 막는 것이 어려웠을 뿐이다.
NGO, 즉 비정부기구의 활동에도 호의적이었던 것 같다. 오래 가지는 못했지만 국제 적십자사와 협력하여 아프가니스탄 내전의 평화를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소련군이 철군한 이후 민간단체에게는 지원을 호소하기도 했다.
작가 프레드릭 포사이스는 <아프간인(The Afghan)>에서 탈레반의 골칫거리이던 마수드의 암살을, 9.11 테러 거사 이후 미국이 탈레반 정권에 알카에다 핵심세력의 인도를 요구할 것을 예상하고 이를 막기 위해 미리 탈레반에게 준 선물이라고 묘사했다.
저널리스트 아흐메드 라시드는 <혼돈 속으로(Descent into Chaos)>에서 마수드와 압둘 하크[17]를 살해하면서 탈레반이 '국민적 지지를 받을 수 있는(national standing)' 아프간 지도자들을 모두 제거했다고 기술했다.
만일 마수드가 알카에다에게 암살당하지 않고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이후 아프가니스탄의 지도자가 되었다면 지금 양국간의 정치적 관계는 전혀 다른 양상이 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마수드는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민족에게 존경을 받은 유일한 인물이었고[18]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에 보여준 훌륭한 민생 정책, 그리고 타 민족도 포용하려 했던 그의 성향을 감안하면 탈레반 정권 축출 이후 아프간 정국이 안정되었거나 혹은 축출된 탈레반 세력과의 내전이 벌어졌어도 이를 조기에 제압했을 가능성이 크다. 무엇보다 이슬람교 신자로서 여성을 차별하지 않고 동등하게 대하는 등 전반적으로 인권 문제에 관심도 많고 인권을 수호하려 했던 만큼 인권 탄압 종교가 되어버린 이슬람교의 희망이 됐을 수도 있다.
참고로 아프가니스탄인들에게는 거의 국부나 신급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4. 전술[편집]
마수드는 자신의 부대를 셋으로 나누었다. 지역군(mahalli)은 판지시르 계곡과 거점의 전략적 방어를 담당하였다. 지역군의 정예를 따로 뽑아 편성한 충격군(i-zarbati)은 각 지역에 위치한 중요 요새를 방어하는 준 기동부대였다. 마지막으로 이동군(i-mutaharek)이란 이름의 부대가 있었는데 이들은 경무장한 특수부대로 주로 판지시르 계곡 외부에서 치고 빠지는 게릴라 전을 수행하였다. 1983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동군은 거점에서 100km나 떨어진 지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이동군은 말이 좋아 무자헤딘이었지 사실상 전문 군인이었다. 훈련도 가장 잘 되어있었으며 무자헤딘의 상징과도 같은 파쿨(pakul)이라는 모자와 군복을 착용했다.
5. 의혹[편집]
그러나 이에 대한 반론도 존재한다. 우선 존 제닝스 기자가 사야프군이 학살한것을 목격하긴 했으나 마수드군이 오기 전에 현장을 떠나 마수드군의 학살 여부를 직접 확인 할 수 없었던 점, 하자라족이 1996년 마수드가 이끄는 북부동맹에 참가했다는 점,[20] 마수드 장군이 하자라족을 보호하기 위해 탈레반과 격렬하게 싸웠고, 사야프군과 하자라족의 충돌을 막기 위해 중재에 노력했다는 점[21] 등을 고려해보면 학살 동조설이 사실이 아닐 가능성도 높다. 거기에 이슬람 특유 신발 던지기를 생각하면 위 사격 연습은 아프간 지도자한테 하는 억울함 호소이지. 완전 적대가 아님도 고려해야 한다. 신발 쪽이 더 비속 요소가 강함을 생각하자.
한편 아프간 내전 도중 마수드는 CIA에게 소외되었다는게 정설인데, CIA측은 퇴직 에이전트들의 입을 빌어 금전적인 이유에서 마수드가 불신요인을 제공했다는 입장이다.http://sonnet.egloos.com/m/3319942" class="wiki-link-external" href="http://sonnet.egloos.com/m/3319942" target="_blank"># 정보기관, 특수부대, 국무부 출신자들의 저서들이 그다지 신뢰성이 없단걸 감안하고 이해할 필요가 크다
6. 명언[편집]
7. 대중문화에서[편집]
라이트노벨풀 메탈 패닉!의 주인공 사가라 소스케의 아프카니스탄 시절의 양부격인 바티크샨의 호랑이 마지드 장군은 이 사람을 모델로 한 것이 확실한 것으로 여겨진다.
Cat Shit One '80에도 주요 등장 인물로 등장하며, 여기서는 마수드 왕자[22]라고 불린다. 다만 여기서는 실제와 다르게 CIA 소속으로 마수드에게 군사고문으로 파견된 래츠 화이트로부터 많은 군사적 도움을 받는것으로 묘사된다. 나중에는 보타스키가 자신의 중국 커넥션을 통하여 마수드에게 중국제 무기를 지원하며, 퍼키 역시 종종 군사적으로 마수드를 지원한다. 다만 '의혹' 문단의 링크 문서에서 보듯 미국은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처럼 마수드에게 아예 관심을 주지 않은 것도 아니고,[23] 마수드의 형제들이 워싱턴에서 로비활동을 하기도 하는 등, 아예 개연성이 없거나 하진 않다. 다만 이 만화에서처럼 서로 화기애애한 분위기라기 보다는 서로 불신하고 사사건건 트집을 잡는 서로 불편한 관계에 있었을 확률이 높다.
문명 6에서는 정보 시대의 위대한 장군으로 등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