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의 첫 장을 펼쳐서 그대로 마지막 장까지 도달한다는 것은 독자의 입장에서 쉬운 일이 아니다. 보르자는 서두부터 자전거에 대한 끔찍한 몰이해를 당당하게 선보인다. "이렇게 체인이 하나만 있는 하이브리드는 체인이 빠지기 쉬워. 이건 앞 기어가 하나밖에 없어서 높은 기어로 바꿀 때 무리가 생기는 거 같아. 보통 로드 자전거는......" 이 문장은 일단 오류로 가득 차 있다. 기어가 하나 밖에 없는 자전거는 픽스드 기어 바이크, 약칭 픽시다. 픽시의 반대어는 그냥 변속을 지원하는 자전거이다. 하이브리드와 로드 바이크의 구분은 기어의 갯수가 아니라 타이어와 구동계의 종류 두 개를 이용해 구분하므로 저 용어 사용은 잘못되었다. 그 밖에도 이것 저것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크랭크가 변속을 지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뒷구동계가 무리한 변속을 지원할 이유는 무엇인가로 시작하여 통상적인 하이브리드 구동계는 크랭크와 뒷구동계 모두 변속을 지원한다는 것, 체인의 올바른 위치 선정이 어떤 것인가를 거쳐 보르자가 말하는 이 정체불명의 자전거가 얼마나 모순적인 것인가 따지는 것에 이르러 보르자는 정녕 이 문장을 쓰는데 단 한번의 검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에 도달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렇다면 보르자는 왜 굳이 이 문장을 넣어둔 것인가를 따지는 것이다. 고증따위는 극의 완성도를 위해 얼마든지 희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서술은 필요했던 것인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철수가 자전거에 관심이 있다는 듯한 묘사는 작품 내에 나타나지 않는다. 그렇다고 철수가 자신의 지식을 자랑하길 좋아하는 캐릭터도 아니다. 자전거가 도입부의 사건에서 중요하게 작용하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사건이 일어나는 기폭제로 쓰기 위한 소재에 불과할 뿐, 자전거 그 자체에 대한 설명은 필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자전거가 아니라 자전거를 두고 영희가 철수를 속였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보르자는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짓을 했다. 자전거 하나만으로 따지자면 이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단지 내가 잠시 화가 날 뿐이다. 그러나 자전거를 둘러싼 이 문제는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소설의 핵심적인 문제점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자전거 서술과 더불어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이 소설의 도입부를 몹시 고통스러운 것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 소설이 진행되는 환경(디에제스)에 있다. 사건의 배경이 되는 한림 커뮤니티 스쿨은 작 중 시간 상 중학교 3개 고등학교 3개, 미래엔 다수의 초/중등 학교를 가지게 될, 거대한 학원 단지이다. 입법/사법/행정의 거의 모든 권한은 학생들에게 있다. 정부와 학교 내 교무부의 권한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경제 또한 지역 내부에서만 통용되는 화폐로 돌아가고, 이 화폐는 또 다시 학원 단지 내에서의 독자적인 규칙에 의해 분배, 순환한다. 요컨데 작 중의 배경은 닫힌 사회이다.
닫힌 사회로서의 학교라는 개념은 일본 서브 컬쳐에서 그 원류를 찾는 것이 쉬울 것이다. 학교 내에서 통상의 고등학생 이상의 역량을 가진 학생들이 출현하고, 이들이 강력한 권한을 가진 학생회, 그리고 학생회의 권한을 인정해주는 교사진들과의 화학 작용으로 학교를 소규모의 국가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그 밖에도 아가씨 학교나 상류층 자제의 학교 등으로 외부의 개입을 막기 쉽게 학교의 정체성을 규정하거나, 학교 부지를 산 속의 외딴 곳으로 설정하는 것, 혹은 까다로운 입학 자격을 정하는 것은 모두 닫힌 사회로서의 학교를 강화한다. 작 중 인물이 일으키는 무수한 사건 사고는 교내의 독자적 권력 체계에 의해서 교외로 퍼져나가기 전에 은폐/축소된다. 이로서 학교는 외부의 법칙에서 벗어난 기이한 현상의 배경으로서 성립한다.
이러한 개념이 확장된다면 중고일관교를 통해 구성원과 닫힌 사회의 법칙을 여러 학교에 걸쳐 이어나가거나, 아예 학원 도시라는 개념으로까지 나아가, 계급과 인종 등이 얽히는 보다 복잡한 닫힌 사회를 만들기도 한다. 학교란 결국 교육 시설이라는 측면에서 구태여 학원 도시라는 명목까지 끌어와 학교라는 공간을 연장시키는 것이 의문시될 수 도 있겠으나, 일본 서브 컬쳐에 있어서 학교란 종종 사회 내의 교육 시설로서의 무언가를 넘어서서 또 다른 하나의 세계로서 성립한다는 것에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 세계는 현실과 물리적으로 접합은 되어 있지만, 정작 위치/문화적 관계로서 끊임없이 학교 외부를 타자화한다. 학교 내의 비정상인과 학교 외부의 선량한 일반인이라는 구분은 아이러니하게도 학교를 학교 바깥의 세계로 학생들을 인도하는 교육 시설로서의 연속성을 상실케하고 배움 그 자체를 직업과 같은 일과로 치환한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가 묘사하는 학교 생활은 위와 같은 전제를 배경에 두고서 출발한다. 학교가 이 세계의 모든 것이라는 청소년이라는 한 시점에서의 인식을 끝없이 확대해, 학교의 졸업 이후의 세상을 인식으로부터 배제하는 것. 그를 통해 학교 안에서의 몰락이 곧 인생의 몰락이라는 등식을 성립시킨다.
여기서도 물어야 하는 것은 동일하다. 학교는 적절한 배경 설정이었는가?
신생 학교에서의 전면적인 자치란 곧 권력의 진공을 극복하고 그 속에서 질서와 체계를 세우는 일이다. 이는 절대로 간단한 과정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닫힌 사회가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어나가는 과정 혹은 명시적 관계로 구체화하는 단계에도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분명히 존재하는 권력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작품의 서사가 성립될 수 있었다. 파리 대왕과 같은 예를 생각해보면 쉬울 것이다. 권력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새로운 권력을 만들어내는 것이란 곧 끝없는 투쟁을 의미한다. 결국 파리대왕의 등장 인물들은 소설의 끝까지도 제대로 된 권력을 만들어내지 못한 채, 모두가 파멸하지 않던가. 이런 관점에서 한림 커뮤니티 스쿨의 자치 체계가 다소간의 정치성을 띄고 있을 것이라는 추측은 가능하다. 하지만 권력을 두고 경쟁이 일어날 수 있는 상황에서 권력의 뼈대조차 확립되지 않았다는 것은 한림 커뮤니티 스쿨의 자치 체계가 난잡하거나 분열적인 형태를 띌 것을 암시한다.
그런데 한림 커뮤니티 스쿨의 지배 체계는 지나치게 자연스럽다. 학생회장을 중심으로 한 단일한 권력 체계가 존재하고, 이것이 구성원들에게 명시적 권력 관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데, 한림 커뮤니티 스쿨의 체계는 이 정도 수준을 아득히 뛰어넘었다. 확립되어 있는 간부/일선 행정 인원의 선발 과정을 통해 인력 수급을 무리없이 해치우고, 직급에 따라 명확히 정해져있는 가이드라인 안에서의 권력 투쟁을 한다. 학생 회장을 필두로 존재하는 온갖 기관과, 이를 책임지는 직위들 - 관방차관 고등법무관 행정조정실장을 비롯한, 현행 정부 체계에서나 볼 법한 고위직들 -과 위원회로 이루어지는 사법 체계가 세워지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신생 학교, 그것도 고작 3년이면 정년 임기가 끝나는 고등학생들 사이에서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이러한 체계가 지나치게 작위적이라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당장 매 1년마다 고위직이 모두 사퇴하는 상황에서 권력 위계의 성립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리라고 보는 것이 이상한데다가, 권력 암투로 인한 이탈 인원까지 고려한다면 이 모든 직위가 제대로된 권력 행사를 하리라고 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무엇보다도 정부가 행정 수요에 비해서 지나치게 거대하다. 학생 회장이라는 직위가 학교마다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 스쿨 전체를 통괄하는 직위라고 해 봐야 기껏해야 전체 인구가 만 명을 겨우 상회할 만한 상황에서 관방 장관뿐만 아니라 관방 차관까지 존재하는데다가 감사원 정보원까지 있고 선도부는 부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도 위원회를 비롯한 수많은 조직들이 곁가지를 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실장이라는 직위조차도 고등 감사관이나 기획조정실장등으로 무수하게 분화되어 있는데, 바지 사장은 하나도 없고 다들 각자 하부 조직을 이끌고 있다. 권력의 대상은 존재하지 않는데 권력만이 존재한다
바로 위의 문제가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를 둘러싼 호오의 핵심일 것이다. 이 소설에서 10대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사회에 진출했으나 경쟁에서 지거나 상층부의 심기를 건드려 꼬리가 짤린 30~40대 중년들이 10대의 탈을 쓰고 종횡무진하는 것 뿐이다. 이 소설에서 학교란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범죄 조직 소탕을 두고 실적 경쟁에 열을 올리는 정부 부처와 소속 공무원들 뿐이다. 학교와 10대란 사회와 그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인간 군상의 축소판, 혹은 비유로서 존재한다. 그렇기에 규모에 맞지도 않는 정부 규모와 세심한 정부 구성이 존재하고, 각 부처의 말단 학생들은 마치 해당 업무를 20년은 했는데도 승진의 가망은 없는 듯 보신주의에 찌든 태도를 보이는 것일 터이다.
이 비유가 제대로 동작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왜인가? 그것은 또 다른 세계로서의 학교라는 이세계를 현실의 공간에 접합시키는 것으로서 학원물이라는 정당성을 획득하는 통상적인 서브 컬쳐의 문법과는 달리 한림 커뮤니티 스쿨의 묘사에는 그러한 노력이 일절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통상적인 서브 컬쳐의 묘사를 볼 때 학생회가 휘두르는 권력이 막강하다는 것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학생회 권력이 개개인에게 미치는 강제력에 비교하면 학생회의 구성이란 굉장히 단촐하다. 회장과 부회장, 그리고 서기. 여기에 회계가 끼거나 해서 기껏해야 네 명 정도이다. 그조차도 권력은 학생회장이라는 단 한 명의 인물에게 집중되어 있다. 이것이 강력한 권력을 어떻게 학교라는 공간에 무리없이 투사할 것인가에 대한 일본 서브 컬쳐의 대답이다. 현실의 바지 사장에 지나지 않는 학생회의 조직 구조를 그대로 따오거나, 오히려 더 축소시키는 반면에 뛰어난 고등학생의 범주조차 뛰어넘는, 천재 고등학생을 학생 회장의 자리에 앉힌다. 명확한 능력 차이로 인해 위계는 손쉽게 정해진다. 조직적 역량의 부재는 모두 학생 회장이라는 개인 능력에 의존하여 해결한다. 이는 현실과 서브 컬쳐 속 학교라는 서로 다른 세계의 접합을 위한 최소한의 현실성을 부여하는 작업이다. 이 현실성은 곧 비현실적 능력에 의존한다. 현실적 체계(허수아비 학생회)로서 비현실적 결과(학생회 주도의 자치)를 이루어내기 위한 원동력으로서 비현실적으로 뛰어난 능력이라는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그런데 한림 커뮤니티 스쿨의 모습에는 학교 생활이라는 겉포장을 위한 최소한의 현실성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이 곳에서 일이 이루어지게 방향성을 만드는 일이란 지극히 현실적이다. 학생회 주도의 자치라는 비현실적 결과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는 비현실적 체계(강력한 학생회)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보르자는 서브컬쳐의 문법을 선택적으로 받아들인다고 할 수 잇다. 가령 학교를 배경으로 하는 작품을 만들되, 서브컬쳐의 문법에 의해 학교를 폐쇄적인 이세계로 만든다. 그러면서 정작 보르자는 여기까지만 서브컬쳐의 문법을 받아들이고, 나머지는 자기 자신의 플룻에 따라 모든 서사를 진행한다. 서브 컬쳐가 제시하는 문법과 보르자 자신이 제시하는 플룻 사이의 단절이 문제인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 자전거 묘사를 넣을 필요도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넣어 문제를 만든 것처럼, 오히려 비유를 하는 순간 가치가 더 떨어지는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보르자는 굳이 비유를 통해 표현함으로서 문제를 만들어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사회의 룰과 각자의 이상이 충돌하는 가운데 어떻게 하여 주역들이 그들 자신의 안식처를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이야기는 사회에 대한 분노와 저주로만 가득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 자신들을 몰아치는 이 사회 속에서 도망치지 않고 자신들이 있을 곳을 만들어내는가에 대한 고민이 만들어내는, 현실을 직시하는 용기와 그에 맞서는 만용이 바로 핵심이었다. 그렇다면 주역들의 행보에 발맞춰 소설또한 그런 방식으로 나갔어야 했으나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는 결과적으로 사회라는 강대한 적에 맞서 승리한 패배자의 모임이라는 훌륭한 구도의 가치를 학교와 학생이라는 비유 속으로 도피해버림으로써 스스로 떨구고 말았다. 약자가 승리하는 이야기는 강자가 강대하면 강대할수록 그 가치를 더한다. 최소 수 백만이 살아가는 도시. 그리고 그 양면을 지배하는 정부와 폭력 조직이라는 이면. 이 속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모여 정부와 폭력 조직 모두에게 응당 가해야 할 복수를 하면서 화려하게 재기하는 것. 그리고 아무리 이 세계가 영원할 것 같이 묘사되어도, 결국 '졸업'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학교에서의 몰락과 복수와 재기. 어느 쪽이 이야기로서 더 매력있는가를 따지자면 굳이 말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가 가지고 있는 또 다른 문제점은 바로 캐릭터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 등장 인물은 존재한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 사건에 선행하는 '캐릭터'는 존재하지 않는다. 등장인물은 모두 플룻의 도구에 불과하다. 가령 이 소설에서 델몬트의 위치를 소심한 여교사로 바꾸어도 이야기는 여전히 성립된다. 그리고 이는 영희, 철수, 오라클, 바세린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할 수 있는 이야기이다. 왜냐하면 이미 존재하는 플룻에 따라 이런 상황에서 이런 행동이 이어지면 결말에 이른다는 도식이 존재하고, 거기에 등장 인물을 끼워맞춘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이 소설은 'XX는 A라는 행동을 하면 이에 대한 반응으로 YY가 B라는 행동을 한다. 그 결과 C가 산출된다'라는 알고리즘 수백개를 모아 400페이지 분량의 책으로 만든 것이다.
플룻에 등장인물을 끼워맞춘다는 것은 즉 등장 인물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감정, 상황에 대한 인식등이 서사에 투영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가위바위보를 한다고 생각해보자.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의 서술 방식이란 "A와 B가 가위바위보를 해서 A가 바위를 내고 B가 가위를 내서 A가 승리했다"라는 도식에서 A와 B에 등장 인물의 이름을 집어넣는 식이다. 여기서 A와 B는 가위바위보에 대한 플룻을 '재현'하기 위해서 불러온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 어째서 A가 B에게 승리했는가? 가위바위보의 룰에 따르면 바위를 낸 사람은 가위를 낸 사람에게 이기기 때문이다. 'A가 어떤 사람인가.' 'A가 왜 가위바위보에 참여했는가.' 'A는 이 상황에서 어떤 감정을 느끼는가' 와 같은 것에 대한 설명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말하자면 룰 자체에 대한 롤플레잉 게임이다. 캐릭터에 선행하는 알고리즘이 룰이 된다. 그리고 캐릭터의 행동은 자신이 현재 도식에서 어느 위치에 존재하는가에 의해 알고리즘이라는 룰에 따라서 행동한다.
물론 이 소설에서 캐릭터의 감정이 존재하기는 한다. 아예 그런 것이 없으면 소설이 성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부분에서 보르자는 일종의 트릭을 사용한다. 각 캐릭터의 감정을 소설에 선행하는 것으로 만든 것이다. 영희가 왜 철수를 좋아하는가? 그에 대한 대답은 이 소설에서 진행되는 사건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 본 전개 내에서는 감정 묘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영희가 이런 사건을 벌이는 이유는 '과거에 철수가 영희를 구해준 적이 있었고, 영희는 철수에게 반했다. 영희는 그 사건에 관계된 인물들을 구해주고 싶었다."라는, 배경설명 뿐이다. 이 배경 설명은 사건의 본편으로 소환되어 캐릭터의 감정의 영역에 합치되지 않는다. 과거의 사건에서 어떻게 영희는 철수의 어떤 행동에서 어떤 감정을 품게 되었는가? 그리고 그 감정을 품게 되기까지 영희는 어떤 생각과 느낌을 받았는가는 과거에 대한 설명에서도, 본편에서도 나타나지 않는다. 소설 본편에서 존재하는 것은 오로지 사건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 철두철미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냉철한 지략가로서의 영희 뿐이다. 철수를 처음 만난 장면에서 영희의 감정이 무엇이란 파악 불가능하다. 철수를 보고 깜짝 놀라는 장면에서 호구를 꿰어내기 위한 사기꾼의 면모로서의 영희 이외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가? 없다. 보호 욕구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사기꾼이 호구에게 의식적으로 취하는 행동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철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어째서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정의를 구현하는 것을 목표로 하던 철수가 뒷공작에 참여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하기 위한 최소한의 감정 묘사 - 배경 설정으로서의 감정 -은 존재한다. 하지만 정작 소설의 본편으로 들어가면 철수또한 플룻의 도구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소설의 본편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란 철수에게 있어 자신이 쌓아 올려 온 철학에 대한 극점이다. 서로가 서로를 속이고, 정정당당한 승부 대신 음모와 모략으로 사건을 해결하고 공공선의 구현을 위해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권력 투쟁을 위해 상대방을 짓밟는 사적인 전체 의지와 결탁하는 것. 아무리 자신이 그런 것임을 각오하고 들어갔다고는 해도 사건과 진행에 대한 감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영희와 오라클을 비롯한, 여러 인물들은 어떠한가? 이에 대한 철수의 생각은 어떤가? 철수가 묘사하는 이들은 책의 플룻 - 이 자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현재의 상황까지 도달하였는가? 앞으로 어떤 행동을 어떤 목적을 염두에 두고 하려는가? 나를 속이고 있는가, 아닌가 -를 지지하는데에만 충실할 뿐, 정작 이들에 대한 철수 개인의 생각은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철수와 영희의 로맨스는 극히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되었다. 이는 단순히 무뚝뚝한 캐릭터와 활발한 캐릭터의 연애와는 다르다. 무뚝뚝한 캐릭터와 활발한 캐릭터가 주연이 되는 연애물을 읽는 것은 명백하게 서로가 가지고 있는 감정을 어떻게 서로 교환하여 연애라는 구체적 형태의 계약으로 만드는가에 있다. 그러나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에서는 그 기본 전제, '둘은 서로에게 명백한 호감을 가지고 있다'라는 것 조차 성립이 되어있지 않다. 두 등장 인물의 감정은 소설 이전의 감정에서 정지되어 있고, 소설에서 현재 파트가 진행되는 동안 이들에게서 변화하는 감정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배경 설정으로서 존재하는 과거 시점에서 영희는 철수를 명백하게 좋아하지만 철수또한 그런지는 미지수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연애물의 기본적인 공식조차 성립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 결과가 어떤가는 결말을 보면 알 수 있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의 결말에서 철수가 영희에게 자전거를 타자는 말을 꺼내고 영희가 이를 수락하면서 끝나는 것으로 둘이 사귄다는 것을 암시하고는 있다. 하지만 이러한 암시를 독자로 하여금 알아차릴 수 있게 하는 정보의 빈약함으로인해 이 책은 둘의 결합을 일러스트에 의존해서 설명하기까지 한다. 과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과의 성립조차 설득력이 떨어지는 것이다.
다른 캐릭터들은 사정이 더 나쁘다. 델몬트의 감정이란 무엇인가? 오라클은? 바셀린은 어떠한가? 츕스는? 그들은 1년 전부터 자신의 인생을 몰아치고 있는 이 사건에 대한 그들의 반응은 어떠한가? 알 수 없다. 그들에게는 심지어 배경 설정으로서의 감정조차 나타나지 않는다. 이들에게는 표면적인 개성은 존재한다. 이지적인 사업가와 같은 이미지의 오라클이나, 뭔가 덜떨어진 색기 담당인 델몬트, 천연계인 바셀린. 그러나 이러한 속성이 캐릭터성의 발현에 쓰이는 것이 아니라 그저 라이트 노벨의 분위기를 내기 위한 '트릭'에만 머물 뿐, 그 이상의 어떠한 활용이 없기 때문에 이 소설의 캐릭터성은 파멸했다.
이것이 어떤 결과를 불러오는가는 이 소설의 에필로그에서 확인할 수 있다. 에필로그는 사건의 이후라는 시간이 초점이 된다. 사건이 끝난 이후를 그리기 때문에 본편과 같은 거대한 플룻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고 필요하지도 않다. 따라서 에필로그가 제대로 기능하기 위해서는 등장인물이 사건과 서로에 대해서 어떤 감정이 존재하는가를 연결짓는 것이 필수적인데, 오직 플룻만을 위해 존재하는 이들 조연들에게는 감정이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에필로그는 이 소설에서는 활자 낭비에 불과하다.
보르자가 이들에게 적합한 감정 묘사를 불어넣을 수 있느냐와는 별개로 각 캐릭터를 이렇게 버리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이 소설의 발단은 결국 영희를 둘러싼 부조리에 반대 의견을 낸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다. 어째서 그들은 반대 의견을 내고 그 결과 몰락하였는가? 이것을 감정이라는 근원 없이 설명할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합리성이란 곧 이득과 이득이 되지 않는 것을 구분하는 이기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합리성과 이성에만 의존하는 인물들이었다면 이들은 구태여 반대 의견을 표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결정을 순순히 승복했을 것이다. 이 소설이 시작되는 배경의 근저에는 정의와 공공선이라는 이념에 대한 열망이 있다. 그들의 감정을 무시하는 것이란 곧 문제의 핵심을 피해가는 것과 같다.
그러나, 이제까지 전개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흔히 보기 힘든 작품이며, 구태여 말하자면 괜찮은 소설이다.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매력이란 캐릭터에서도, 캐릭터의 감정에서도, 배경 설정에서도 나오지 않는다. 그런 것들이 소설의 가치를 끊임없이 깎아먹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플룻 그 자체의 힘만으로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자신이 있을 자리를 만든다.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디스토피아적 정부를 개인이 쓰러트리는 이야기를 그린다. 디스토피아 속에서 거대 부패 권력에 대한 개인의 정면 대결은 곧 해당 개인의 파멸로 귀결한다. 거대 부패 권력에 대항하는 권력을 만드는 단계 또한 그 전에 싹이 밟힌다. 그래서 결국 이 난제에 대해서 퇴학이라던가, 일시적 반항에 그치는 등의 결론을 내는 것조차도 개인의 파멸과 다르지 않다. 도피는 반항이기는 하되, 결국 자기 자신이 문제 대상을 쓰러트릴 수 없다는 것에서 나온다. 결국 또 다른 순응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디스토피아 소설에서의 반항적 개인을 묘사함이란 결국 비관주의적으로 빠지기 쉽다는 맹점을 가지고 있다. 비관주의란 결국 소설의 패배이다. 1984가 나왔다는 것은 이미 디스토피아 그 자체의 무서움을 지적하는 작품들이란 1984의 열화된 재생산에 지나지 않는 작품임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디스토피아 소설의 주제 의식은 디스토피아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 점에서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도피하지도, 정면으로 충돌해 파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정교한 플룻을 이용해 독자와디스토피아적 권력 모두를 끊임없이 속인다. 이 훌륭한 기만이 만들어 낸 결과는 독자에게는 신선한 의외성으로 다가오고, 소설 내에서는 자신들을 위협한 권력 그 자체를 이용해 자신들의 안식처를 창출한다. 물론 순간적인 권력의 불안정을 이용했다는 측면에서 이들이 만들어낸 안식처는 또한 자신의 존재적 불안정성을 태생적으로 안고 있는 존재라는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긍정조차도 만들어내지 못하고 파멸한 무수한 다른 소설을 생각해본다면, '그녀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그래도 괜찮은 인간찬가라 할만 하다.
P.S 1 여기서 의문을 제시해야 할 것은 바로 편집부의 문제가 아닌가 싶다. 과연 학교라는 이 거대한 비유가 보르자의 의중에서 나왔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서브 컬쳐의 문법에 대한 수용과 거부 사이의 단절이 지나치게 단호하다는 것이다. 마치 타협해서 일부러 받아들인 것처럼 말이다.오히려 학교에 대한 의존은 편집진의 요구가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한다면, 이는 노블엔진이라는 레이블과 보르자라는 작가 둘 모두에게 그다지 좋지 못한 결과만을 불러오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노블엔진 팝으로 최근 레이블을 바꾼 것처럼 보이는데,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지켜 볼 일이다.
P.S 2 철수가 발차기 하는 장면의 일러스트가 너무 어색했다.
(IP보기클릭).***.***
(IP보기클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