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입문 18년만에 결실
MW 시험 난공불락 가까워
테이스팅·방대한 지식 요구
잠 쪼개가며 끈기있게 공부
현 전세계 MW 415명 활동
한국음식과 와인 페어링
고소한 파전 당도 없는 와인
불고기, 드라이한 와인 어울려
한국 와인시장 1조원 눈앞
한국인도 MW 배출 할 때
갓난아기때 노르웨이 입양
2022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8월 고국 방문
친모와도 첫 상봉 행운 누려
韓·노르웨이 가교역할 바라
와인잔을 가볍게 스월링한 뒤 코를 깊게 잔 속으로 들이미는 여자. 비강을 파고드는 여러 향의 단 한 줌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눈빛은 날카롭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유리잔 벽을 타고 발산되는 향들을 모두 분석한 그는 그제야 입으로 가져가 혀 위에 와인 한 모금 떨어뜨린다. 산미, 당도, 알코올의 밸런스는 적당한지, 맛은 클리어하고 잔향은 길게 이어지는지. 시각·후각·미각을 모두 깨워 한참을 맛보던 여자의 입가엔 희미한 미소가 감돈다. 드디어 만족할 만한 와인을 찾았나 보다. 여자는 한국인 피가 흐르는 노르웨이 국적의 아이나 미 미레(42·Aina Mee Myhre·한국명 신나미) 헤이데이 와인즈(Heyday Wines) 대표. 와인에 입문한 지 18년 만에 와인 전문가 세계 최고 경지인 ‘와인의 신’ 마스터 오브 와인(MW)에 등극한 그를 따라 향기 그윽한 와인의 세계로 걸어 들어간다.
#한국 태생 노르웨이 입양아 ‘와인의 신’ MW 오르다
“안녕하세요. 제가 한국말을 거의 못해요”. 지난 8월 말 2022 아시아와인트로피가 열린 대전 컨벤션센터에서 만난 미레 대표는 서툰 한국말로 짧은 인사를 건넨다. 이유가 있다. 그는 갓난아기 때 노르웨이로 입양됐고 한국을 찾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매년 대전에서 열리는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초대받으면서 늘 꿈에서 그리던 고국 땅에 감격스러운 첫발을 디뎠다. 아시아와인트로피는 국제와인기구(OIV)가 공인한 아시아 유일의 와인경진대회. 올해 전 세계에서 3600종이 출품돼 30여개국 심사위원 150명이 블라인드 심사를 거쳐 수상 와인을 선정했다. 미레 대표가 와인경진대회 심사위원으로 나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2017년부터 아시아와인트로피 심사위원으로 활동 중인 기자는 대회에 참석했다 우연히 ‘와인의 신’을 만나 단독 인터뷰까지 했으니 로또나 다름없다.
현재 MW는 30개국 415명에 불과하고 여자 MW는 150명 정도. 한국은 아직 MW를 배출하지 못했다. 미레 대표는 2017년 MW를 따냈는데 숱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다. “말도 마세요. 처음 공부를 시작한 지 무려 7년이나 걸렸답니다. 공부가 너무 어려워서 눈물을 쏟아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그의 말대로 MW에 이르는 과정은 매우 험난하다. 우선 국제공인 와인전문가과정인 WSET(Wine & Spirit Education Trust) 최고 단계인 디플로마를 획득해야 MW 응시 기회가 주어진다. 더구나 1년에 고작 1∼2명이 합격할 정도로 시험의 난도가 높다. 테이스팅 능력은 기본이고 이론까지 모두 패스해야 한다. 한 과목이라도 탈락하면 끝이다. “제가 타고난 한국인의 미각과 후각을 지녔나 봐요. 테이스팅은 한 번에 통과했답니다. 하루에 와인 12종을 블라인드로 테이스팅해 품종 등을 알아맞혀야 하는데 이런 시험이 3일 동안이나 계속됩니다. 모두 36종을 테이스팅하는데 한 번에 다 패스했으니 저 대단하지 않나요. 하하.”
하지만 이론 시험은 난공불락에 가까웠다. “디플로마 시험은 와인에만 포커스를 맞추지만 MW 시험은 와인 유통과 무역 등 산업적인 측면까지 모두 아우르는 방대한 지식을 요구해요. 핵심을 잘 전달하는 와인 전문가의 자질이 있는지 보는 거죠.” 일하면서 틈틈이 시간을 쪼개 공부했지만 합격은 쉽게 오지 않았다. “상상을 초월하는 질문이 많아 너무 힘들었답니다. 하루에 세 가지씩 질문하고 한 질문당 한 시간에 논술식으로 답을 써내야 해요. 첫날은 포도재배, 둘째날은 와인양조와 와인메이킹, 셋째날은 와인 비즈니스, 넷째날은 지구 온난화가 아시아 와인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묻더군요. 오전에는 테이스팅 시험이, 오후에는 이론 시험이 진행되는 방식이죠.”
또 하나의 걸림돌은 언어. MW 시험은 모두 영어로만 진행된다. “노르웨이어가 모국어이다 보니 영어로 명확하게 견해를 전달하기가 쉽지 않았죠. 새벽까지 공부하고 서너 시간 쪽잠을 잔 뒤 출근하기 전에 일찍 일어나 다시 공부하는 일상을 반복하다 보니 꼬박 7년이나 걸렸어요. 그래도 MW가 된 덕분에 한국까지 왔으니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얘기를 듣고 보니 끈기 있게 매달리는 한국인의 DNA는 그도 피해갈 수 없었나 보다. 미레 대표는 세 차례 도전 끝에 이론까지 통과해 ‘와인의 신’에 올랐다.
#MW는 와인 양조·비즈니스 최고 전문가 집단
MW의 역사는 195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의 와인 무역회사 빈트너스 컴퍼니(Vintners’ Company)와 와인 앤드 스피릿(Wine & Spirit)협회는 영국 와인 무역 종사자들의 와인 지식을 높이고 가장 재능 있는 회원에게는 별도로 공식적인 학위를 주기 위해 그해에 첫 번째 MW 시험 과정을 만든다. 모두 21명이 응시했고 6명이 합격해 최초의 MW가 탄생한다. 이어 2년 뒤 1회 시험에 합격한 6명이 현재의 MW 시험을 주관하는 IMW(The Institute of Masters of Wine)를 설립해 매년 MW를 배출하고 있다.
1970년 MW를 받은 사라 모피 스테판(Sarah Morphew Stephen)이 최초의 여성 MW다. 하지만 그 이후에도 MW는 남성들의 독무대였고 와인 거래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만 시험 응시가 허용됐다. 그런 유리천장을 깬 또 한 명의 여성 MW가 세계적으로 저명한 와인평론가 잰시스 로빈슨(Jancis Robinson)이다. 1975년 와인 매거진 와인 앤드 스피릿(Wine & Spirit)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한 그는 외부인에게도 문을 연 첫해인 1984년 처음으로 MW를 취득했다. 지난 10년간 여성 MW가 더 많이 배출되면서 성비는 남성 52%, 여성 48%로 거의 비슷해졌다.
“MW는 와인메이커, 양조학자, 포도재배, 와인 운송사업, 리테일, 작가에 이르기까지 와인 산업의 모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답니다. 와인에 관해선 이론과 실용 분야 모두 최고의 지식을 지닌 전문가 집단인 셈이죠.”
#와인 덕분에 한국 첫 방문서 생모와 극적 상봉
노르웨이와 스페인 대학에서 국제마케팅을 전공한 미레 대표는 졸업 후 웨이트리스와 소믈리에 등 외식업 관련 직업을 거쳤다. “MW가 되고 싶다고 했더니 직장 동료가 ‘너무 어려워 너는 불가능할 것’이라며 고개를 내젓더군요. 그 말을 들으니 오기가 더 생겨 31살에 공부를 시작했어요.”
2005년 세계적인 주류 유통기업 페르노리카에 입사해 2년 반 정도 영업담당으로 일한 그는 이후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큰 주류유통그룹 아노라(ANORA)에 취업한다. 자회사 스텐베르그&블롬(Stenberg & Blom)과 솔레라(Solera)에서 수입와인을 결정하는 브랜드 매니저를 거쳐 모에스투그룹셀렉션(Moestue Grape Selections) 프로덕트 매니저로 활동했다. 이어 2015년 와인유통기업 아르쿠스(Arcus) 계열사인 헤이데이 와인즈(Heyday Wines)를 설립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
와인은 어떤 매력이 있을까. “자연은 포도를 만들고 사람은 와인을 만들죠. 예술가의 작품활동과 비슷해요. 그래서 와인은 단순한 술이 아니리 감성적이고 문화적인 상품이죠. 와인을 다루는 사람은 음식과 여행도 좋아해요. 와인 업계에서 일한 지 18년 정도 됐는데 그런 사람들과의 만남은 아주 매력적인 시간을 제공한답니다.”
1980년생인 미레 대표는 태어난 지 9개월 만에 노르웨이로 입양됐다. 그동안 기회가 있었을 것 같은데 왜 한국을 한 번도 찾지 않았는지 궁금했다. “양부모도 늘 한국에 한 번 가 보는 게 어떻겠냐고 권했고 여행을 좋아해서 진작 한국에 오고 싶었답니다. 하지만 좀 더 프로페셔널한 직업을 가진 뒤 한국을 찾고 싶었어요.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40대가 돼 버렸네요. 사실 저는 고향이 서울인 줄 알았는데 입양 기관을 통해 확인해보니 대구예요. 노르웨이로 돌아가기 전 대구를 방문할 예정입니다. 친부모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사실 그의 이름 ‘아이나 미(Aina Mee)’에는 친부모가 지어준 한국 이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입양 때 여권에 적힌 이름이 바로 ‘신나미(Shin Na Mee)’다. 양부모가 본명 ‘Na Mee’를 그대로 살려 노르웨이식 이름을 지었단다.
MW가 추천하는 한국 음식과 와인의 페어링이 궁금했다. “유럽에서 한국 음식을 많이 먹어봤어요. 특히 독일 뒤셀도르프의 한국 음식점들이 유럽에서 한국 음식을 가장 잘하는 것 같아요. 파전이 가장 인상적이에요. 그런데 한국에서 먹어보니 역시 훨씬 맛있네요. 어렸을 때 노르웨이에 사는 한국분의 요리 강습에서 만두를 만들어 본 기억이 나요. 기회가 있으면 한국 요리 강습도 듣고 싶네요. 고소한 파전에는 당도가 거의 없는 스파클링인 브뤼(brut)나 나뚜르(nature)가 어울려요. 스페인 리아스 바이사스 지역의 알바리뇨 품종 화이트 와인과 잔당이 전혀 없는 스페인 스파클링 카바도 추천합니다. 한식은 대체로 살짝 단맛이 있어서 드라이한 와인과 아주 잘 어울린답니다. 불고기에는 스페인 가르나차 품종 레드와인이 잘 어울리겠네요. 드라이하지만 입에서는 달콤한 과일향이 도드라져 불고기와 찰떡궁합입니다.”
한국 와인시장은 급성장하는 추세다. 관세청에 따르면 2021년 국내 와인 수입액은 5억5981만달러(약 8031억원)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기 전인 2019년보다 두 배 넘게 볼륨이 커졌다. 올해는 1조원 돌파를 바라본다. 그렇다면 이제 한국도 MW를 배출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조만간 한국인 MW가 몇분 나올 것으로 기대해요. 한국인 피에는 도전 정신과 끈기가 흘러요. 과정은 힘들지만 보람과 성취감을 분명 얻을 겁니다. 섬세한 여성이 좀 더 유리할 수 있어요. 가장 중요한 것은 열정이랍니다. 일단 도전해 보세요.”
PS. 노르웨이로 돌아간 미레 대표에게서 얼마 전 카카오톡으로 연락이 왔다. 한국 방문 때 생모를 어렵게 찾아 서울에서 멋진 하루를 함께 보냈단다. 친모를 찾은 것은 ‘축복’으로 빨리 한국에 다시 오고 싶다는 말도 덧붙였다. 내 일처럼 기쁘다. 이제 그가 좀 더 자주 한국을 찾을 이유가 생겼다. 한국과 노르웨이의 가교 역할을 하며 비즈니스도 하고 싶단다. 한국 와인시장에도 큰 도움이 될 것 같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며. Keep in tou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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