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다 복속도)
1601년,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요구에 의해 본인이 점령한 하다를 복구시켰다. 그러나 정작 하다의 복구를 압박한 명나라가 하다의 복구 이후 그들을 제대로 지원치 못하고, 하다가 여허에 공격당하는 것을 사실상 관망하자 그것을 명분으로 하여 하다를 재병합하였다. 이 병합으로 건주의 주민들은 크게 늘어났다.
누르하치는 늘어난 인구를 보다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병합된 하다 인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 흡수하기 위해 기존에 존재하던 여진족 제도인 '니루'를 대대적으로 개혁하였다. 이 때부터 니루는 표준적으로 장정 3백명으로 이루어진 군사-행정 집단이 되었고 상설 조직화 되었다. 이는 향후 구축되는 후금-청의 기반 체제, '팔기'의 근간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당시 정국 상황의 허점을 파고 들어가 자칫 뱉어내야 했을 수 있던 하다를 성공적으로 병합하고 그들을 흡수할 합리적인 체제 역시 구축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다 병합의 부작용은 만만치 않았다. 하다 부민들의 반발은 사실 별 것이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당시 여진 세계를 강타한 기근이었다.
기근은 1600년부터 건주를 괴롭혀 왔다. 그런데 1601년에는 그 기근이 더욱 심해졌다. 그런 상황에서 하다를 병합한 통에 부양 인구가 크게 늘어난 건주로서는 상황을 이겨내기 쉽지 않았다.
기근이 심한 상황에서 누르하치가 하다 병합을 시도한 것이 잘못이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당시 상황상 그 때 하다를 병합치 않았으면 하다는 기근과 여허의 공격에 의해 뿔뿔이 이산되었거나 여허에 병합되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의 사위'라는 명분으로 하다의 버일러 우르구다이를 다시 불러들이고 하다 부민들 역시 흡수한 것은 오히려 적절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건주의 자체 식량 및 물자 생산량을 초과하는 인구를 부양하게 된 것은 누르하치로서는 또 다른 과제가 생긴 것이었다.
누르하치가 해당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고려할 수 있는 방법은 몇 개가 있었다. 하나는 전통적인 교역 관계였던 명나라와의 교역, 입공을 통해 물자를 충당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 하다 병합 자체는 명나라가 반대하던 것이었기에, 당시 명나라와의 갈등 분위기가 다소 심화된 상황에서 이 방식만으로 물자를 충당하는 것은 무리가 존재했다.
또 하나의 방식은 조선으로부터의 물자 충당이었다. 물론, 당시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충돌을 극히 꺼리고 있었기에 조선을 본인의 의지로 약탈하려거나 하는 방안을 고려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누르하치가 최초로 고려한 방안은 조선으로부터 직첩을 수여받고 그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받으려는 것이었다.
누르하치는 이미 조선의 번호로서 조선에게 직첩을 수여받고 조선에 내조했던 경험이 있는 번호들을 여럿 흡수했다. 그로서 조선의 번호들에 대한 직첩 수여와 그에 따른 녹봉 지급을 통한 번호 통제 정책에 대해 인식하고 있었다.1 누르하치는 본인 역시 이 방안을 활용하여 조선에게 직첩을 수여받고 그에 해당하는 녹봉을 지급받아 경제적 위기 극복에 유용하려 했다.
누르하치가 조선에 직첩에 관한 바를 처음으로 타진한 것은 1601년 음력 10월이었다. 누르하치는 이 무렵에 만포를 통하여 조선에 직첩을 받길 청한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하지만 당시 만포첨사 김종득은 이에 대해 '번호들에 대해서는 직첩을 발급하는 규정이 있으나 누르하치는 이미 명나라로부터 용호장군의 직첩을 받았는데 조선에서 다시 직첩을 발급할 수는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리고 이 사실을 평안병사 이기빈에게 보고했고, 이기빈은 그것을 다시 조정에 보고했다.2 조선 조정 역시도 누르하치에게 직첩을 보내는 문제는 이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3
누르하치는 자신의 직첩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대신 조선에 식량을 빌려줄 것을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 요동의 아문이 조선에 보낸 자문에서 조선이 요동에 선행하여 보낸 자문의 일부 내용이 확인되는데 '누르하치가 식량을 요청했다', '건주여진 관속하의 사람들이 조선에 식량을 요청한다' 는 내용의 기록이 다수 확인되기 때문이다.4 뿐만 아니라 조선왕조실록의 선조 34년 음력 10월 23일 기사에도 역시 누르하치가 조선에 식량을 통한 구제를 요청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누르하치가 조선에 직첩을 받는 대신 식량의 지급을 요구한 것은 확실한 사실로 파악된다.
조선에서는 이 문제에 대해 해결책을 찾고자 했다. 특히 직첩의 요구를 이미 거부했기에 식량 지원에 대한 요구마저 완전히 무시해버리자면 군사적 충돌이 일어날 수도 있었으므로 해당 문제에 대해 더욱 고심했다. 실제로 당시 민간에는 누르하치가 군사를 일으켜 조선의 변경을 침범한다는 이야기가 퍼져 있었으며, 또 조선 변경에 접근해오는 여진인들 역시 누르하치가 군사 행동을 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5실제로 누르하치가 조선을 공격하려 하진 않았겠으나, 이러한 위협적인 상황은 성과를 만들어냈다. 이런 상황으로 말미암아 조선에서는 변경에 접근해오며 구제를 청하는 누르하치 관하의 여진인들에게 식량을 지속적으로 지급하며 적당히 사태를 봉합코자 했다.6이 때에 조선에서는 만포에 접근하는 여진인들의 구휼 인원수를 정하는 규례를 세운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건주인들의 지속적인 만포 접근으로 인해 구휼 요청 여진인들의 수효가 늘어난 탓으로 보인다.
건주인들에 대한 식량의 지급이 이루어진 것은 확실하지만, 이 때에 '누르하치의 식량 요구가 조선에서 완전히 수용되었다'고 판단하는 것은 힘들다. 누르하치는 후술할 명의 조사에서 자신이 수본을 보내어 식량을 빌려달라고 요청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으로부터 식량을 지급받지 못했다고 답변했다. 조선은 변경에 접근하는 소규모의 건주인들에 대해서는 식량을 지급하며 구휼 조치를 진행했으나 누르하치의 양곡 차용 요구(+이전에 누르하치가 돌려보낸 쇄환인들에 대한 식비 환급 요구)는 거부한 것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 조선에서 누르하치의 요구중 일부는 수용되지 않았고 조선이 수용할 수 있는 일부만이 수용되거나 혹은 누르하치의 요구가 조선이 수용할 수 있는 형태로 대처되었다고 하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요컨대 당시 조선은 지금까지의 사례를 통해 충분히 변경정책 차원에서 실행이 가능했던 건주인민에 대한 '구휼'은 하되 건주라는 세력에 대한 '지원'으로 비추어질 수 있는 행동은 자제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조선이 누르하치의 식량 요청을 완전히 무시한 것은 아니되, 그렇다고 하여 누르하치의 요구를 완전히 들어준 것 역시 아니라고 해석할 수 있다. 즉,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조선의 조치는 봉합과 절충의 방안에 가까웠다.
무엇이 되었건 조선 조정의 변경에서의 식량 지급은 건주인들에게 작건 크건 어느정도나마 도움이 되었다. 비록 그 규모가 건주 여진의 전체 인민수에 비하여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조선으로서는 나름 건주와의 평화를 위해 최선을 다한 조치였다. 그러나 누르하치가 조선의 이러한 조치에 만족했는지는 확실한 결론을 내리기 쉽지 않다. 누르하치가 향후 얼마간 식량/물자 문제 해결 성격의 요구를 조선에 행하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누르하치가 조선의 구휼 조치에 만족했다고 볼 수도 있다.7 그러나 누르하치가 추후 그러한 요구를 하지 않은 것이 구휼 조치에 어느정도 만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조선이 명나라에 자문을 보내어 자신의 식량 요구 행동를 명나라에 알리고, 명나라로 하여금 자신을 선유토록 하게 했기 때문이었으리라는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 같다.
조선은 누르하치가 식량을 요구한 이후, 건주의 행동에 대해 명나라에 자문을 보냈다. 해당 자문은 누르하치가 조선에 곡물을 요구한 정황, 그리고 누르하치의 군사적 위협 가능성이 존재하니 명나라에서 이에 대해 조치를 취해달라는 조선의 요청이 포함된 자문이었다.
조선이 해당 자문을 요동에 발송한 목적은 누르하치 세력이 조선의 구휼 조치에 만족치 않고 조선을 위협할 수 있었기에, 그러한 가능성을 명나라의 선유를 통해 종식시키고자 함이었다. 그와 더불어 명나라에 건주와의 외교 보고를 올림으로서 당시 건주와의 통신이 어쩔 수 없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한 조치의 성격도 있었던 것 같다. 당시 조선과 건주의 공식적인 통교는 명나라에 의해 금지되고 있었으므로, 조선 조정은 이런 상황에서 혹여라도 명나라가 조선과 건주간 접촉에 대해 파악하고 자국을 질책할 것을 염려, 당시 상황의 불가피함을 설명하기 위해 '선제적 외교 조치'를 단행했다는 것이다.8
요동측에서는 누르하치에 대한 선유를 단행했다. 이 과정에서 누르하치가 조선을 침략하려는 정황은 파악되지 않았으며, 선유도 누르하치의 항변외에는 별 갈등 없이 마무리되었다. 이 이후로 누르하치는 조선에 재차 식량 요구를 하지 않았는데, 그렇기에 필자는 앞서 언급했듯이 명의 선유 탓에 누르하치가 조선에 추가적인 식량 요구 행동을 하지 못했다는 논지에도 설득력이 있다고 판단한다. 어쩌면 누르하치가 조선의 조치에 어느 정도 만족하는 동시에 외교적 갈등을 고려하였기에, 즉슨 위의 두 이유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조선에 더 이상 식량을 요구치 않았을 가능성도 존재한다.
1.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음력 2월 20일
2.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음력 10월 23일
3.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음력 10월 28일
4.사대문궤 10책, 만력 30년 4월 4일
5.조선왕조실록 선조 35년 윤 2월 2일, 사대문궤 10책 만력 30년(1602년) 음력 4월 4일
6.조선왕조실록 광해군 5년 음력 2월 19일
7.장정수는 본인의 논고에서 이러한 견해를 보였다. 장정수, 17세기 초 朝鮮의 이원적 對女眞 교섭과 ‘藩胡規例’, 명청사연구 54, 명청사학회, 2020, p.197.
8.장정수, 앞의 논문, 2020, p.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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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9.20 16:3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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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부림에서 ㄹㅇ 멋있게 나오다가 원숭환한테 지고 비참해진 모습 나오는데 엄청 입체적이고 인상깊었어.. | 21.09.20 16:40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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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09.20 16:4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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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아무리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고 영웅호걸일지라도 나약한 한 인간이라는게 느껴짐 | 21.09.20 16:45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