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부림 中, 조선 관군과 맞붙은 이괄군 기병. 고일권 화백 작품)
병자호란이 일어난 뒤 평안감사 홍명구는 조선이 짜놓은 대후금-대청 방어체계에 따라 휘하의 군민들을 데리고 자모산성으로 입보했다. 그런 뒤 시일 미상인 시기에 별장 장훈을 대장으로 한 기병대를 자신의 휘하에서 차출, 남하시켜 조금에라도 근왕에 보탬이 되게 했다.
그러나 이들 평안 기병들은 남하하여 도원수(김자점, 심기원)와 합류한 뒤에, 그들 휘하에 예속된 채 계속해서 대기할 수 밖에 없었고, 결국 그 상태로 종전을 맞이하게 된다.
이 때 홍명구가 파견한 기병대의 병력이 몇 명이었는지는 기록마다 다르다. 특히 가장 적은 병력 기록과 가장 큰 병력 기록간 차이가 거의 3배 이상 가량이나 날 정도로 차이가 극심하다.
필자는 이번 글에서 홍명구가 파견한 기병대의 숫자에 관한 기록들을 거론하고 또 교차검증을 함으로서 홍명구가 파견한 실제 기병대의 숫자를 추측코자 한다.
우선, 홍명구가 파견한 기병대의 병력수가 가장 크게 기록된 사료는 본인이 파악키로는 청음집이다. 청음집은 당대 청서의 거두이자 척화의 대명사인 김상헌의 문집인데, 여기에는 홍명구의 신도비문이 나와 있다. 청음집의 해당 신도비문 서술 내용을 살펴보면, 홍명구는 별장 장훈등 네 사람에게 '수천의 기병'을 이관하여 근왕케 했다고 한다.1
그 다음으로 큰 기록은 택당집이다. 택당집 역시도 당대 청서계통이었던 이식의 문집이다. 여기에는 홍명구의 행장이 실려 있는데, 장훈을 위시로 한 세 사람에게 각각 8백명씩의 기병을 맡겨 총 2천 4백명의 기병대를 남파시켰다고 한다.2
그 다음으로 큰 기록은 조선왕조실록에 실려 있는 홍명구의 졸기이다. 여기에는 홍명구가 2천여명의 기병대를 장훈등에게 맡겨 남하시켰다고 기록되어 있다.3
그 다음으로는 백헌선생집, 속잡록, 남한일기, 조선왕조실록이 공통적으로 8백명을 기록하고 있다.
주화파에 가까운 성향이었으며 또한 최명길과 가까운 관계이기도 했던 이경석이 지은 백헌선생집의 정.충비명에는 홍명구가 장훈, 김운해, 한항길등에게 8백명의 기병대를 맡겼다고 기록되어 있으며4 광해-인조 시기 대표적인 사료중 하나인 조경남의 속잡록도 장훈이 8백여 기병을 이끌고 왔다고 기록했다.5
남급의 남한일기에도 평안도의 별장들이 8백여 기병을 이끌고 왔다는 보고를 당시 도원수 심기원이 올렸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6, 조선왕조실록에도 동월 동일 같은 기록이 보인다.7
필자가 발견한 평안도 남파 기병대의 병력에 대한 기록중, 그 병력이 가장 적은 기록은 동양위이자 척화파중 한 명이었던 신익성의 문집인 낙전당집이다. 낙전당집에는 홍명구에 대한 묘지명이 실려 있는데 여기에는 기병 7백명이 별장 네 명의 지휘 아래에 남하했다고 기록되어 있다.8
필자가 보건대, 최소 7백명에서 최대 2천 4백(혹은 수천)에 이르는 남하 평안 기병대의 병력 기록중 가장 진실에 가까운 것은 '8백명'이다.
위의 사료들 중 가장 객관성이 강한 사료는 조선왕조실록의 심기원의 보고-그리고 남한일기의 심기원의 보고이다. 두 사료의 보고는 같은 보고인데, 조선왕조실록의 보고의 경우 사관이 기록한 반면 남급의 남한일기에 실려 있는 기록은 남급 본인이 해당 보고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본인의 일기에 적은 것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이 사료는 남한산성에 있는 임금에 대한 도원수의 직접적인 보고 장계 사료라는 점에서, '홍명구'라는 개인을 상당히 긍정적으로 서술할 수 밖에 없는 행장이나 신도비등에 비해 객관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보고자인 심기원이 거짓 전공을 보고했던 전적을 의심할 수도 있으나9, 자신의 산하에 집결한 부대와 그 부대의 병력에 관해서 심기원이 거짓을 보고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병력에 대한 거짓보고는 이득은 적으나 탄로날 시 발생할 손해는 상당하며, 뭣보다 전후에 심기원 본인과 함께 했던 지휘관(예컨대 김자점)이나 기병대가 발송된 자모산성에서 해당 기병대의 파견을 지켜보았던 지휘관, 혹은 기병대 자체의 지휘관들을 상대로 검증조사를 시행하면 너무도 쉽게 허위사실이 탄로난다. 그런 상황에서 심기원이 예하 부대에 대한 거짓 보고를 올릴 가능성은 적다.
거기다가 만에 하나 부대원 숫자를 거짓으로 보고했다 쳐도, 병력을 늘려서 보고하면 보고했지 그것을 일부러 줄여서 보고할 가능성은 더욱 적다. 아군 부대 병력에 대한 거짓 보고를 할 만한 이유는 남한산성에 구원에 대한 희망을 주어 항전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함 정도인데, 그러자면 군대의 수를 늘려서 보고했지 줄여서 보고하진 않는다.
즉, 심기원의 장계에 적힌 기병대의 병력은 청음집과 택당집에 실린 신도비문과 행장 기록, 그리고 실록의 홍명구의 졸기보다 상대적으로 객관성이 우월하다. 무엇보다 속잡록과 백헌선생집 역시도 '8백명'을 답습했으며, 낙전당집에 실린 묘지명 역시도 그에 근접한 병력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2천명~2천 4백명, 혹은 수천명에 관한 기록보다 우호사료면에서 우위이다.
여기서 택당집의 행장에 쓰여 있는 '3명의 별장에게 각각 8백명씩의 기병을 이끌게 했다'는 문구를 근거로 삼아, 홍명구가 별장 한 명당 8백명씩을 지휘하게 했을 뿐이며 심기원이 보고를 올릴 당시에는 오직 한 사람이 이끄는 군대만 도착했기에 심기원이 기병의 병력을 8백명이라고 보고했을 것이라는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남한일기와 백헌선생집, 낙전당집을 보건대 그 역시도 가능성이 적다. 남한일기본의 심기원 장계에는 '3명의 별장'이 '8백명'의 기병을 이끌고 왔다는, 실록에 실린 것보다 좀 더 자세한 전말 내용이 실려 있다. 즉, 3명의 별장이 각각 8백명씩을 이끌고 온 것이 아니라 3명의 별장이 함께 8백명의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이다.
비록 남한일기보다는 사료적 가치가 부족하나 백헌선생집과 낙전당집에도 '8백명', '7백명'의 기병을 '3명', '4명'의 지휘관이 이끌고 왔다는 서술이 존재함으로 볼 때에 기병대는 한꺼번에 안협10에 도착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사료적 근거를 제외하고도, 전략적으로 해석하더라도 결론은 쉽게 나온다. 조선군보다 월등한 전투력의 기병전력을 지니고 있는 청군이 이미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으며, 청의 후발 부대가 계속해서 남하하고 있는 상황에서, 세 부대로 쪼개어져 움직이는 것은 전략적으로 몹시 경솔한 행동이다. 해당 기병대를 지휘한 별장들은 모두 무관들인데 그런 이들이 자칫 각개격파당할 위험성을 스스로 높일 가능성은 그리 많지 않다. 그들은 부대를 합친 상태로 남하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청음집의 신도비문, 택당집의 행장에 2천 4백~수천에 달하는 기병대가 남하했다는 기록이 실린 이유는 무엇일까?
신도비문과 행장은 다루는 인물에 대해 최대한 우호적인 서술을 지향한다. 홍명구를 다루는 행장과 신도비문에서 홍명구는 '충의지사'이자 '뛰어난 행정가', 그리고 '전쟁에 적극적으로 대비한 동시에 전쟁 수행에도 적극적이었던 인물'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부각되어야 한다.
물론 실제의 홍명구 역시 근왕을 위해 움직이다가 청군과의 교전끝에 전사한, 소위 '충의지사'임은 맞다. 그러나 행장과 신도비가 실제보다 해당 인물의 업적을 더욱 띄우는 역할을 수행하는 경향이 크다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그가 육성하고 또 근왕을 위해 선행해서 보낸 기병대의 수 역시 사료기조에 맞추어 증가했을 가능성이 크다. 거기다가 청음집과 택당집의 저자들은 모두 척화적 기조를 보였으며, 특히 청음집의 저자이자 신도비문의 작성자인 김상헌의 경우에는 실제로 홍명구와 나름 친분이 있던 사이였기에 더욱 우호적 서술을 지향했을 것이다.11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단은 완전히 실제에서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에, 택당집의 행장의 경우 객관성 높은 사료에 나온 '8백명'을 3명의 별장이 각각 이끌었다는 식으로, 신도비문의 경우 확실한 수를 명시치 않고 '수천' 정도로 명시한 것으로 보인다.12
한편 실록에 실린 졸기의 경우에도, 청군과 싸우다 전사한 인물에 대해 최대한 호의적인 서술을 지향함과 더불어 청음집, 택당집등과 공통적인 정보 출처를 유용했기 때문에 '2천'이라는 기병 병력수를 언급한 것으로 보인다.
졸기의 경우 실록에 실리긴 하였으나 객관적인 사료이기 보다는 주관이 강하게 섞일 수 있는 사료이며, 또 기반 정보에 따라 이야기도 실제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에 유의가 필요하다. 당장 같은 실록에 실린 심기원의 보고문과도 상반된 이야기를 실은 것이 바로 해당 졸기이다.
이 글의 결론을 다시 한 번 말하자면, 필자는 홍명구가 장훈등의 별장들에게 맡겨 남하시킨 기병대의 숫자가 '8백명' 혹은 그보다 근소히 많거나 적은 숫자일 것이라고 본다.
첨언하여, 병자호란에 관한 국내 최고 연구자중 한 명 이라고 할 수 있는 구범진 교수 역시도 홍명구가 보낸 기병의 병력에 대해 '2천여명'보다는 '8백여명'이 보다 신뢰성이 강하다고 평하였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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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각주
1. 김상헌,『청음집』권 25
2. 이식,『택당집』, 택당선생 별집 제 9권
3.『조선왕조실록』인조 15년 음력 1월 28일
4. 이경석, 『백헌선생집』권 45
5. 조경남, 『속잡록』권4 정축년 음력 1월
6. 남급, 『남한일기』정축년 음력 1월 15일
7.『조선왕조실록』인조 15년 음력 1월 15일
8. 신익성, 『낙전당집』10권
9. 심기원은 전공 및 각지의 전투 상황에 대한 허위 보고를 몇 차례 올린 전적이 있다. 이중 일부는 자신의 과실을 덮기 위한 의도적인 보고였고 또 일부는 정말로 심기원이 상황을 잘못 파악하여 의도치 않게 허위 사실을 보고한 경우이다.
10. 평안 기병대의 서신상 도착지
11. 다만『백헌선생집』에 기록된 정 충비명, 『낙전당집』에 기록된 묘지명 모두 홍명구에 상당히 우호적인 사료일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두 8백, 7백 정도로 부대 수효가 기록된 것을 볼 때에 택당집과 청음집은 이들의 정보출처보다도 우호적인 정보출처를 이용한 듯 싶다.
12.다만 택당집의 경우 본래 8백기라고 서술하려 했으나 의도치 않게 '각자 8백기를 이끌었다.'는 식으로 변형서술된 것일 수도 있다.
13.구범진,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까치글방, 2019, 101~1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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