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장의 [푸른 눈]이 날린 연격에 처절하게 나뒹굴고 만 알핀은 알파드라는 이름의 소년으로서 움직이는 조직의 배신자에게서 썩어도 준치라는 말의 의미를 새삼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자기 말로는 수십년을 운운했지만 그의 눈빛이나 위압감은 수십년의 시간으로는 절대 만들어질 수 없는 깊은 세월의 무게를 담고 있었기에 자신도 모르게 그 기운에 움츠러들었고, 그대로 패하고 말았다. 하지만 어찌되었든 F조 2위를 확정지은 상황이었기에 알핀은 다음에는 반드시 그를 쓰러트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알핀 씨?"
"뭡니까?"
하지만 그에게 그런 기회는 오지 않았다. 잠시 후, 장외 경기가 선언되어 경기 진행을 위해 파견된 진행요원 몇 명이 막 자리로 돌아가려던 알핀을 에워싸며 다가오고 있었다.
"죄송하지만 당신의 덱에서 복제 카드 이슈가 발견되어 간단한 조사가 필요합니다."
"뭐요? 복제 카드? 아니, 어디서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는 거요?"
아무리 부정 행위 방지라는 명목상의 목적을 위해 전용의 듀얼 디스크를 지급했다고는 하지만 알핀은 복제 카드 이슈라는 터무니없는 사안으로 자신을 붙잡아들려는 진행요원들에게서 이상함을 느끼고 있었다.
"당신네들이 준 듀얼 디스크가 이상한 거 아닙니까?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저희들은 어디까지나 듀얼 디스크에서 발견된 이슈에 따라 움직이는 겁니다. 죄송합니다만 저희에게 협조해주셨으면 합니다."
SEM 컵에 시큐리티 포스도 숨어들어왔음을 알고 있었던 만큼 알핀이라는 가명을 쓴 2대 카론은 난감함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을 포함한 애프터라이프가 사용하는 카드들은 멀쩡한 정품 카드임을 확인하고서 참전한 것이기에 복제 카드 이슈를 핑계로 자신을 구속하려는 시큐리티 포스의 수작인지, 아니면 지급된 듀얼 디스크의 에러로 인한 단순한 해프닝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럼 당신들의 상관을 불러서 이야기합시다. 제대로 된 카드를 들고서 왔는데 어디서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자칫 소란을 일으켰다간 자기 손으로 자신들의 정체를 들춰낼 판이었기에 2대 카론은 최대한 침착히 대응하고자 했었다. 하지만 '진행요원'들의 표정을 본 2대 카론은 본능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있었다.
"순진한 척하지 맙시다. 본인 입으로 자기 정체를 밝혀놓고서 어물쩡 넘어가는 건 말이 안 되겠지요, 2대 카론?"
"젠장...!"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은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졌다. 애프터라이프를 배신한 카론을 응징하고자 자신의 정체를 까발렸던 사실이 진행요원으로 위장한 시큐리티 포스의 일원들에게 전해진 것이었고, 그걸 깨달은 2대 카론은 '진행요원'들이 자신을 붙잡으려는 것이 느껴지자 어떻게든 현장에서 탈출하려 했었지만 이미 그들에 의해 제압당하고, 체포되고 말았다.
"빌어먹을...!"
애프터라이프의 이름으로 자신들을 배신한 전대 카론을 응징하겠다고 자신의 정체를 까발렸던 경솔함을 후회하는 2대 카론이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
F조 2위에 안착했던 알핀이 복제 카드 등의 여러 이슈로 인해 탈락, 3위에 안착했던 마리우스가 32강에 진출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가명을 사용한 채 SEM 컵에 참전했던 애프터라이프의 일원들이 조금씩 술렁이고 있었다. 자세한 정황은 알 수 없었으나 복제 카드 이슈를 핑계로 2대 카론을 붙잡았을 것이 분명했기에 다음 날에 치러질 G조와 H조에 각각 참전하는 멜리노에와 디스는 자신들의 정체가 들통나지 않도록 몸을 더욱 사려야만 했었다.
"그나저나 그 알핀이라는 듀얼리스트도 어리석었군. 배신자를 처단하겠답시고 자기 정체를 자기 손으로 까발리다니."
그리고 SEM 사의 CEO, 오벨은 시큐리티 포스가 가명을 쓴 채 참여한 애프터라이프의 간부 중 한 명을 체포했다는 소식을 듣고서 알핀의 어리석음을 비웃고 있었다. 차라리 승리하기라도 했으면 모르겠지만 일을 시끄럽게 키워놓고서 수확도 제대로 못 건진 채 패배하고 시큐리티 포스에게 체포되었으니 그의 비웃음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 고맙네."
잠시 후, 비서에게서 방금 체포당한 알핀을 포함한 10명의 듀얼리스트에 대한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를 건내받은 오벨은 그의 서류를 제외한 9개의 서류를 확인해보고 있었다.
"이게 바로 애프터라이프의 단원으로 추정되는 64강 진출자의 인적사항이 적힌 서류라는 거군."
용의선상에 오른 9명의 듀얼리스트의 인적사항이 적혀있는 서류들을 찬찬히 살펴보던 오벨은 D조에서 1위를 확정지은 브릿의 인적사항과 덱 리스트를 보고서 뭔가를 직감하고 인터넷 검색을 시작했고, 잠시 후 그는 어느 뉴스 기사를 찾아 살피는 중이었다.
"심증은 가는데... 이거야, 원."
오벨의 심증이 맞다면 브릿의 정체는 이전에 있었던 큰 규모의 듀얼 대회에서 대회 우승자인 스트와의 치열한 싸움 끝에 8강에서 패배의 쓴 잔을 들이켰던 마카리아였다. 그러나 심증만으로는 브릿의 정체가 마카리아라는 것을 단언지을 수는 없었기에 시큐리티 포스 측에서 문제의 듀얼리스트들의 정체를 하루라도 빠르게 밝혀주길 바랄 뿐이었다.
*
"쯧...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그리도 신신당부를 했건만."
한 편, 제이라는 가명으로 SEM 컵에 참전한 플루토스는 관객으로 위장한 애프터라이프의 정보원을 통해 알핀에게 있었던 일들을 파악한 후 그의 경솔함에 혀를 차고 있었다. 시큐리티 포스가 대회 현장 곳곳에 있을 것이 분명하니 절대로 정체가 탄로날 만한 행동은 일절 하지 말 것을 명령했음에도 알핀이라는 가명을 쓴 2대 카론은 실적을 올리겠다는 욕심에 눈이 먼 나머지 알파드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히는 실수를 저질렀고, 그래놓고서는 그에게 처절하게 패하고서 진행요원으로 위장했던 시큐리티 포스에게 체포당하는 결말로 이어졌기에 플루토스 입장에서는 속이 쓰렸다.
"큰일이군. 이렇게 되면 놈들이 우리 뒤를 캐고 다닐게 뻔한데 말이야..."
게다가 2대 카론의 경거망동으로 인해 시큐리티 포스가 자신들의 정체를 의심할 여지가 생겼다는 것도 속이 쓰렸다. 당장 브릿이라는 가명으로 참전한 마카리아도 그렇지만 예전에 실종되었던 스트의 육신으로 다시 나타난 페르세포네도 경우에 따라서는 충분히 의심당할 수 있었기에 플루토스는 그 경솔함으로 인해 자신들의 대업이 망가질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심기를 건드는 다른 문제도 있었다. 일단 자신들의 뒤를 쫓는 시큐리티 포스도 그렇지만 어둠의 신이 흥미를 느낀 인물이자 '신의 그릇'으로 여겨지며 시큐리티 포스와 함께 자신들의 뒤를 쫓고 있는 브레이크, 시큐리티 포스의 조력자 중 한 명이자 새로운 몸을 빌려 다시 한 번 모습을 드러낸 스트, 한 때 어둠의 신이 현세에서 활동할 육신으로 선택했지만 지금은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는 어둠의 그릇인 인제, 그리고 정체는 확실치 않지만 빛의 그릇도 이번 대회에 참전한 상황이었다. 바람의 그릇 역시 모습은 보이지 않아도 브레이크의 탈주를 도운 건으로 자신들을 적대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짜증나는군..."
어둠의 신이 추방당해 현세에 아무런 영향도 미칠 수 없게 된 상황에서 플루토스는 자꾸만 운명이라는 것이 자신들의 발목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같아 짜증을 느끼고 있었다.
*
다음 날, G조와 H조의 듀얼리스트들이 32강으로 향하는 티켓을 두고서 각자의 자리에 모여들고 있었다. 다양한 듀얼들이 선보여졌던 64강전도 이제 절반을 지나고 있었고 관객들은 오늘은 어떤 듀얼이 펼쳐질까하며 기대하고 있었다. 빠른 진행을 위해 4000의 LP로 진행되는 만큼 페이스가 빨랐고, 덕분에 64강은 하루에 2개의 조의 경기를 동시에, 당일치기로 진행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관객들은 듀얼이 다소 빠르게 끝나는 것은 아쉬워했지만 소위 말하는 '골라먹는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정령계에서 온 듀얼리스트라... 뭐, 상관없어. 그까짓 불꽃은 내게 안 통한다는걸 증명해보일테니."
'블루'라는 이름의 가명으로 참전한 멜리노에의 첫 상대는 히타였다. G조에 속한 듀얼리스트 중에서는 유력한 32강 진출자 후보였던 멜리노에였지만 히타만큼은 정령계에서 현실 세계로 직접 강림한 것 때문인지, 실전성을 논하기 애매한 컨셉형 덱을 들고서도 잘도 64강에 올라온 것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상할 정도로 마음에 걸렸다. 그렇기에 멜리노에는 반드시 그녀를 잡아내어 그 꺼림칙함을 이겨내고 싶었다.
"여어! 네가 그 블루라는 듀얼리스트구만? 나, 히타야. 잘 부탁한다!"
블루의 눈 앞에 모습을 보인 히타라는 이름의 듀얼리스트는 배꼽을 드러낸 하얀 탱크탑에 검은 핫팬츠, 그리고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검은 스타킹과 갈색의 워커화 차림을 한 털털한 인상의 여성이었고, 그녀의 상대인 블루는 그저 고개만 끄덕일 뿐 달리 대꾸는 하지 않았다.
"야박하네, 거. 기왕에 이렇게 만난 거 잘 부탁한다는 말 하나도 못 해줘?"
"시끄러운 건 질색이야."
"재미없는 여자네. 뭐, 상관없지만."
히타는 블루의 냉랭한 태도에 살짝 불만을 드러내기도 했지만 이내 그냥 넘겨버리고 첫 듀얼을 준비하고 있었다.
블루(멜리노에) LP 4000
히타 LP 4000
코인 토스의 결과에 따라 선공을 가져간 멜리노에였지만 시작이 썩 좋질 않았다. 그녀가 이번에 선택한 덱은 [얼터가이스트] 덱이었지만 패에는 초반 전개를 도와줄 만한 카드가 단 한 장도 잡히지 않았다.
"마법 카드, [욕망과 졸부의 항아리]를 발동. 엑스트라 덱의 카드 6장을 무작위로 골라 뒷면 표시로 제외하고서, 2장을 드로우."
일단 엑스트라 덱의 자원을 다소 소모하더라도 선택지를 좀 더 늘리고자 멜리노에는 [욕망과 졸부의 항아리]를 발동했고, 그녀가 드로우한 카드는 [대대적 체포작전]과 [얼터가이스트 쿤티에리]였다. 썩 내키질 않는 상황이었지만 일단은 뭐라도 해야했다.
"카드 3장을 세트하고, 몬스터를 세트하고 턴 엔드다."
그녀가 세트한 카드는 [대대적 체포작전], [모래 먼지의 태풍], 그리고 [군웅할거]의 3장이었고, 세트한 몬스터는 현 상황에선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얼터가이스트 실키타스]였다. 패의 카드 역시 방금 드로우했던 [얼터가이스트 쿤티에리], 2장째의 [욕망과 졸부의 항아리]였으니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그럼에도 멜리노에는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를 쓰고 있었다.
"헤에, 아무 것도 안 하는 걸보니 패가 말렸나보네?"
"닥쳐."
그런 와중에 히타는 그런 멜리노에를 놀리듯이 떠보고 있었고, 그녀는 퉁명스럽게 응수했다.
"뭐, 상관없지. 자, 간다! 드로우!
히타가 카드를 힘차게 드로우하고, 멜리노에는 기고만장해진 그녀의 모습을 못마땅하게 여기며 세트한 카드 중 한 장을 발동했다.
"네 스탠바이 페이즈에 지속 함정, [군웅할거]를 발동한다. 난 마법사족을 선언하지. 넌 무슨 종족을 선언할 거지?
"화염족이야. 그런 고로, 나는 패에서 [라이트닝 스톰]을 발동할거야!"
"칫...!"
그러나 히타가 [라이트닝 스톰]으로 자신의 마법 & 함정 존의 카드를 모조리 박살내자 멜리노에의 표정이 조금은 어두워졌고, 히타는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역시 패 말린 거 맞네! 일단 [라바르 아처]를 일반 소환!"
멜리노에의 표정을 보자마자 히타는 자신의 승리를 확신했는지 자신의 전개를 시작해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라바르 아처]의 효과로 [라바르의 마그마 포병]을 추가로 일반 소환하고, 거기에 [염열전도장]을 발동! 덱에서 [라바르 염호반의 숙녀]와 [라바르 란스로드]를 묘지로 보낸다! 그리고 [라바르의 마그마 포병]의 효과로 패의 [라바르 염화산의 시녀]를 묘지로 보내고, 너한테 500 포인트 데미지를 준다!"
"쯧...!"
블루 LP 4000 → 3500
[라바르의 마그마 포병]의 등에 매어진 캐논 중 하나에서 마그마 포탄이 발사되고, 세트 몬스터 1장만으로 겨우 버티고 있는 멜리노에에게 마그마 포탄이 그대로 직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그녀는 마땅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답답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묘지로 간 [염화산의 시녀]의 효과로 덱에서 [라바르 염호반의 숙녀]를 묘지로 보내고! 이어서 묘지의 [라바르 염호반의 숙녀]의 효과 발동! 이 카드와 [라바르 란스로드]를 제외해 네 필드의 세트 카드 1장을 파괴한다!"
"제길..."
답답한 상황은 여전해서 [얼터가이스트 실키타스]가 파괴되었어도 그 효과를 발동할 수 없었고, 멜리노에는 왜 저런 자기 컨셉에만 충실한 듀얼리스트 따위에게 자신이 밀리는지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리고 내 비장의 카드를 발동! [진염의 폭발]! [염호반의 숙녀]와 [염화산의 시녀]를 묘지에서 특수 소환!"
히타가 발동한 [진염의 폭발]을 본 순간, 멜리노에는 자신에게 다음 턴은 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확신할 수밖에 없었다. 두 장의 튜너가 그녀의 필드에 모습을 드러낸 이상 이래서는 도저히 이길 방법이 없었다.
"[마그마 포병]에 [염호반의 숙녀]를 튜닝! [라바르바르 샐러맨더], 싱크로 소환이야!"
[라바르]의 또 다른 거룡, [라바르바르 샐러맨더]의 싱크로 소환에 성공한 히타는 그 효과로 드로우한 [라바르 염수해의 요녀]와 [염천재앙 선번]을 그대로 묘지로 보냈지만 이미 승기를 확신한 만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그리고 다음은 레벨 5 몬스터를 싱크로 소환하는 건가. 젠장."
"정답이야! [라바르 아처]에 [염화산의 시녀]를 튜닝! [라바르 트윈 슬레이어], 싱크로 소환이다!"
그리고 이 시점에서 멜리노에는 사실상 손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결국 G조의 첫 대결은 히타의 승리로 돌아갔고, 멜리노에는 현 시점에선 실전성을 논할 만한 덱이라 말하기도 애매한 [라바르] 덱을 쥔 히타에게 말 그대로 무력하게 졌다는 사실에 깊은 수치심을 느낀 나머지 그녀의 인사도 받아주지 않고서 그대로 그녀에게 등을 돌려버렸다.
"야박하네. 사람이 그렇게 야박해서 어디 좋은 소리 듣겠어?"
히타의 투덜거림도 패배의 수치에 파르르 떨고 있는 멜리노에에겐 들려오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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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강의 묘사가 다소 애매하게 나와서 쓰는 김에 4000 라이프로 진행하는 만큼 페이스도 빠를테니 하루에 2개의 조 경기를 치러 32강 진출자를 결정하는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즉 64강은 하루에 2개의 조 경기를 치러 8일 간의 여정을 거치는 것으로 묘사하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나깨나 말조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