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만주실록
1589년 음력 1월에 발생한 조오기야 전투는 건주 통일 전쟁의 막바지에 존재했던 전투였다. 또한 조오기야 전투는 당시 건주의 대부분을 점유한 누르하치에 대항하여 누르하치의 일족들 중 누르하치에 반대하는 세력들과 누르하치에게 아직 점령되지 않은 건주내 타세력들, 그리고 누르하치에 복속되었으면서도 누르하치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키고자 한 세력들이 연합을 하여 일으킨 살극찰 전쟁(혹은 살극찰의 난)의 일환으로 추정되는 전투이기도 하다.
실록에서는 살극찰 전쟁의 내용 대부분의 전말이 삭제되어 자세한 바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조오기야의 경우 누르하치에 한 차례 복속되었던 소오창가계 소유의 성이었더니만큼 살극찰 전쟁과 연계하여 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개연성이 충분하다.
해당 전투에서 누르하치 휘하의 지휘관 '나이후'는 중대한 실수를 범했다. 조오기야 공성 당시 전투가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건주군이 승리 직전의 분위기에 도취되어 무질서하게 약탈행동을 하는 것을 파악한 누르하치는 자신의 옆에 있던 지휘관 나이후에게 자신이 입고 있던 갑옷을 벗어 입히고 그에게 조오기야 성에서 벌어지고 있던 약탈을 멈추게끔 했다.
그런데 이 때 나이후는 누르하치의 갑옷을 대신 입고 누르하치를 대행하여 그의 지시를 전하는 역할을 부여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조오기야 성에 들어가서는 본인 역시도 물욕에 휩쓸려 약탈 대열에 동참했다. 이후 누르하치가 파견한 또 다른 장수 바르타이 역시도 나이후와 마찬가지의 전철을 밟았다. 그러한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자칫 역습을 당하여 자신의 사촌동생을 잃을 뻔 하기도 했으나, 결국 승리하는데에는 성공했다.1
이 전투의 '군율 붕괴'가 실록에 중대하게 남은 것을 보건대 이 이후부터 건주군의 규율이 강하게 확립이 되기 시작한 것 같다. 건주를 거쳐 후금 시기가 되어서는 장수들이나 병사들에 대한 처벌이 극히 강해지는데, 누르하치가 조오기야 전투와 같은 경험들을 몇 번이고 경험한 탓에 군율로서 군대의 통제를 무척이나 강하게 한 것으로 사료된다.
기록에 나타나지는 않으나 여기서 상당한 잘못을 저지른 나이후는 아마도 전투가 끝난 뒤 매우 높은 수위의 처벌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처형을 당해도 할 말이 없는 일을 저질렀으니 나이후로서는 이러한 형벌에 대해 스스로를 변호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이후는 처형되진 않은 것으로 보인다. 이 이후 나이후는 기록상에서 또 한 번 언급이 된다. 해당 기록은 1593년 음력 9월에 벌어진 누르하치와 여허의 나림불루를 위시로 한 9개 세력 지도자들간의 대전(大戰)이 한창 벌어질 당시에 관한 기록이다.
나림불루의 9부 연합군과 누르하치 세력간 전쟁이 진행중이던 도중, 나림불루는 건주를 한 번의 공격으로 몰락시키기 위해 무려 호왈 3만의 대군을 이끌고 건주를 침공한다.2 이 때 나림불루의 첫 번째 목표는 자카였다. 당시 자카는 그리 큰 규모의 성은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되며, 기껏해야 수백여명의 군사만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사료된다.
당시 건주의 역량과 누르하치의 대응전략을 생각해 보자면 누르하치는 자신의 영토에 있던 각각의 요새들에 최소한의 군병만을 배치해 두고 중심거점인 퍼 알라에 대부분의 군대를 집결시킨 뒤 적대 세력의 공격방향과 지점이 특정되면 야전군을 이끌고 요격에 나서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즉, 자카에는 나림불루가 이끌고 온 대군의 수십~최대 백수십분의 1에 불과한 병력만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도출된다.
당시 자카를 지키고 있던 것은 나이후와 산탄, 두 명의 장수였다. 이들은 자신들을 숫적인 규모에서 훨씬 더 상회하는 나림불루와 그의 사촌형 부자이, 그리고 그들이 이끄는 여허, 울라, 호이파, 하다, 코르친, 시버, 구왈차, 주셔리, 너연의 대군을 상대로 맞서 싸워 성을 끝내 보전하는데에 성공했다. 비록 전투 시간은 고작 반나절 혹은 그 미만 정도에 불과했던 것으로 추정되고, 또 9부 연합군의 경우 조직력과 지휘체계의 규합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다는 점도 고려를 해야겠으나 그렇다 해도 전력차이를 생각해 보자면 대단한 선전이었다.
나이후와 산탄의 방어를 뚫지 못한 나림불루는 초조한 나머지 자카에 대한 공략을 포기하고 군대를 끌고 허지거로 이동, 허지거를 공략하기 시작한다. 이로 말미암아 누르하치의 9부 연합군에 대한 승산은 초기보다 높아졌는데, 9부 연합군이 자카를 포기하고 허지거를 공략하기 시작한 덕에 누르하치가 허지거 근처에 있던 구러산을 이용해 적절히 매복지를 구축한 덕이었다. 이를 생각해 보건대 나이후와 산탄 두 사람은 상당한 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언급된 나이후가 과연 지난 1589년의 조오기야 전투에서 추태를 보였던 나이후와 동일인물인지 확실치는 않으나 필자의 경우 십중팔구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여진인에 동명이인이 많다고는 하나 거의 비슷한 시기, 같은 세력의 장수급에 동일인물이 있는 경우는 소위 '인기이름'이 아닌 이상 그리 흔한 경우는 아니었으며 하물며 나이후라는 이름의 경우 흔한 이름도 아니었다. 그런 것을 생각해 보건대 나이후는 1589년 누르하치가 직접 내린 지시를 물욕에 빠져 이행치 못한 '실망스러운 장수'에서 누르하치의 인생 전반부 최대 격전이라고 칭할 만한 '9부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장수로 성장한 것 같다.
나이후의 기록은 여기서 끊기는데, 아마도 후금이 건국 되기 전 죽은 것으로 사료된다.
1.만주실록 기축년 음력 1월
2.만주실록 계사년 음력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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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나이후라는 장수가 있었음
1589년 조오기야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직접 전투 중 약탈행위를 멈추게 하라는 지시를 받고도 그걸 이행치 않고 약탈에 동참함
저 때 가까스로 살아남더니 4년 뒤 1593년 구러산 전역 당시 자카성 전투에서 최대 3만의 대군을 고작 해야 수백~천여명의 병력으로 방어해 내는데 성공함으로서 누르하치 승리에 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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