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태조의 세력기반에 대한 가능성 및 주장 (46p)
태조 가문은 신라말 성장한 해성 호족세력일 것이라는 견해
강충, 당 숙종, 작제건 설화 등 태조의 先世에 대한 說話, 野史는 모두 ‘바다’와 관련
강충~용건(왕륭) 대에 축성, 노역에 백성을 동원한 기록이 존재 : 해당 지역의 세력가였을 가능성
높은 신분이 아니거나, 세력이 강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 존재
호경 : 이미 소멸된 성골 신분 자칭
당 숙종, 작제건(용녀) 설화 등 가문, 혈통 미화 시도 → 출신에 대한 콤플렉스
단 왕건의 가문이 상당 기간 지방 호족 권세가문으로 존재했던 것은 거의 분명
「고려사 1권」, 왕륭이 궁예에게 귀부했을 당시 환영했다는 기록 : 서해 해상세력/지방 군벌세력 = 지방호족으로서 세력이 인정받았을 것
2. 고려 건국 후 태조의 정책(~통일) (49p)
철원 → 송악(개성, 개경) 천도 시도 : 송악(왕건의 본거지) = 정치적, 군사적 기반 강화
중국 5대 각국과 외교관계 수립 : 고려의 국제적 위상 확립
신라에 대한 우호적 태도/ 후백제에 대한 강경 대응 : 신라 경순왕의 귀부 / 일리천 전투
→ 삼국통일 달성
3. 태조의 호족연합정권 (50p)
건국 및 통일 당시 호족 정권의 특징
지방호족 등의 독자적 무력, 재정적 기반
건국 공신 및 건국 과정 참여자 : 전쟁이익으로 확보한 재정, 사병 등
→ 정국의 불안 – 환선길의 난, 이흔암 반란모의 등
→ 정국 안정을 위해 호족세력 흡수 필요
‘호족연합정권’?
연합정권으로 보는 시각
- 귀부한 호족들은 왕실과 호혜적, 협조적 관계 우지
- 왕조체제 편입 이후에도 상당한 독자성 유지
→ 중앙 집권 체제 미약 / 호족과의 연대 필요
연합정권이 아니라고 보는 시각
- 귀부에 의한 신속은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실질적인 것
- 정치, 군사 제도 상 고려의 중앙집권체제가 성립되어 있었음
→ 단, 이런 주장이 존재할 정도로 고려 초기 왕권은 미약했음
고려 초기를 ‘호족연합정권적 성격이 짙은’ 시기로 보는 견해도 존재
→ 귀부 시기에 따른 타협과 통제 수준 차이가 존재했음
4. 태조의 대 호족 정책 (52p)
중폐비사 : 호족에 대한 저자세 외교(화친의 의미)
결혼정책 : 정주 유씨, 나주 오씨 – 서해 해상 세력
충주 유씨 – 중부 내륙지역
황주 황보씨 – 예성강 서북, 패서 내륙지역
신라왕실
사성(賜姓)정책 : 의제가족적 관계 생성, 유지
사심관/기인 제도
사심관 : 공신 등을 출신 지방 사심관으로 임명, 수도에 거주하는 출신 지배계층을 매개로 지방운영 시도
기인 : 유력 향리, 호족의 자제를 인질로 잡아두는 제도
서경(평양)에 대한 지원과 발전
고려 왕실의 독자적 세력기반 필요
왕권을 뒷받침할 수 있는 새로운 근거지
→ 왕권 강화를 통한 호족 세력 억제 시도
5. 태조의 통일 후 정책 (56p)
조세 감면, 유이민 안정 → 궁예, 견훤과의 차별성 강조
고구려 계승 정신 : 발해 유민 훕수
북진정책 추진 : 변경 지방에 대한 국토 개발, 이민정책
고려적 농업사회의 확대
+ 황향주, 김선미는 왕무(혜종)을 태자(정윤)으로 책봉하여 왕실 내부를 공고히 하였다고 주장
→ 그러나 혜종 즉위 후 왕규, 왕요, 왕소 등 강력한 정적 세력에 대한 완전 억제 실패
달게받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