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닝 공부하는 겸 쓰는 고려사 시간
오늘도 귀여운 코하루 짤 하나 올리고
지난 글 까지는 고려 초기 고려와 거란 사이의 관계를 중점으로 썼으니
이번에는 그 사이에 고려는 다른 나라들, 특히 송을 중심으로 어떤 외교 정책을 폈는지 정리해보겠습니다.
일단 고려의 건국 당시의 외교 전략에 대해서는 지난 글(1편)에 있으니 넘어가고
이번에는 고려 광종대부터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광종 13년, 고려는 처음으로 조광윤이 건국한 송과 국교를 맺습니다.
이때 고려는 송에 '책봉'을 받는 형태로 국교를 맺습니다.
그럼 고려-송 관계는 조선-명이나 조선-청 관계나 도찐개찐 아니냐고요?
그게 좀 다른 시각으로 봐야 하는데, 우선 저희가 조선시대 덕분에 매우 귀에 익은 단어를 하나 꺼내보도록 하겠습니다.
바로 화이사상이라는 단어죠.
화이사상이란 중원의 국가(화)와 그 외의 국가(이)를 구분하는 사상입니다.
화이사상에 기반하면 중원의 한족 국가와 그를 따르는 한반도 국가가 북방 이민족 국가보다 격이 훨씬 높다는 사상이죠.
이 화이사상은 여말선초에 제대로 세워지게 됩니다.
사실 고려시대에는 이런 화이사상은 크게 성하지 않은 사상이었습니다.
이는 고려가 송과 요, 금의 사절을 대할 때 보이는 자세에서 드러납니다.
나중에 다른 글로 더 자세하게 다뤄볼까 하는 내용이지만, 우선 고려는 타국의 사절을 대접할 때 관사, 즉 숙소에 크게 신경을 썼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고려는 송과 요 사절의 관사를 크게 구분하지 않았습니다. 1차 여요전쟁 이후 송과 공식적으로 단교한 이후에 요의 사신을 송의 사신이 묵던 관사에 그대로 묵게 했다는 점으로 추론해 볼 수 있죠.
그렇기 때문에 고려는 송에게 '겉으로' 책봉을 받는 제후국, 즉 번국으로 행동하면서도 '국내에서는' 황제를 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고려사를 배울때 흔히 쓰는 단어인 '外王內帝', 즉 겉으로는 왕이되 내부에서는 황제를 칭하는 성격이란거죠.
그리고 이런 사실은 송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면 문제가 안 생기냐고요?
중국사를 접해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사실 송은 경제력으로는 뛰어났지만 군사력은 역대급으로 약한 통일국가였습니다.
그로 인해서 벌어지는 여러 사건들이 전연의 맹, 정강의 변 등이 있었죠.
특히 송의 국방정책은 이 짤 하나로 요약할 수 있었습니다.
송은 거란, 여진, 서하 등 송을 위협할 수 있는 이민족 세력에게 영토, 세곡 등을 주면서 군사적 충돌을 미연에 예방하려고 했습니다.
그런 송 입장에서 고려는 포섭해둬야 할 상대였습니다.
고려는 송이 북방 이민족을 견제하는데 필요한 세력이었으니까요.
그러면서도 명분을 포기할 수는 없던 송은 고려를 '책봉국'으로 삼고. 고려는 간단히 고개만 숙여주는 방식의 외교 정책을 행했습니다.
그리고 이런 외교정책을 통해서 고려는 송에게서 여러 학문, 문물 등을 받아오게 됩니다.
오죽하면 송에서 사신 그만 보내라는 요구를 할 정도로요.
이런 고려와 송의 관계는 거란, 즉 요의 성장으로 인해 한동안 단교되게 되지만, 고려 문종 후기에 다시 국교를 맺게 됩니다.
이때는 다시 요가 쇠락하며, 송이 어느정도 국력을 회복하게 된 시기였습니다.
고려는 더이상 요의 눈치를 보지않고 송과 대놓고 외교관계를 맺은 겁니다.
송 입장에서는 요를 견제, 빼앗긴 영토 회복을 위해서 고려 포섭을 시도하게 된 거고요.
이런 배경에서 고려와 송은 다시 국교를 맺게 됩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른게 있었는데, 바로 '책봉을 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고려는 송과 국가 대 국가로 외교관계를 회복했을 뿐, 이전같은 조공책봉관계는 더이상 맺지 않았습니다.
여기서부터 두 국가는 서로 눈치싸움을 하게 됩니다.
송은 고려를 확실하게 자신의 책봉국으로 삼아 아래에 두고 싶어 하고,
고려는 송의 요구를 들어줄락 말락 하면서 계속 실리를 챙기고 싶어 한거죠.
이런 상황은 고려 예종이 죽고, 인종이 즉위하는 시점에서 확실히 드러납니다.
고려 예종이 죽자 송은 조문 겸 대규모 사절단을 보내는데, 이때의 사절단은 기존보다 훨씬 큰 규모의 사절단이었습니다.
(사실 송은 돈도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송은 이를 통해서 고려에게 송의 국력을 과시, 다시 예전처럼 책봉국으로 들어오는 것을 종용하려는 의도였습니다.
고려 역시 이를 의식, 송 사절단에 대한 영접 절차를 굉장히 치밀하게 계획합니다.
사신단을 맞이할 영접사를 행로 구석구석마다 배치, 송 사절단이 개경에 입장하고 체류하는 동안 개경의 최고 번화가를 경험시켜주며 고려도 만만치 않은 국가라는 것을 과시한 것이죠.
이렇게 고려는 고려-송-요, 그리고 여타 세력들과의 외교에서 굉장히 치밀하게 움직였습니다.
그리고 이런 외교 정책이 변하는 계기는
요의 완전한 몰락과,
그 사이에 성장해서 국가를 세운 여진, 즉 금의 등장,
그리고 요에 복수하기 위해 금을 끌어들였다가 금에게 통수를 제대로 맞아버린 송(이 사건을 정강의 변이라고 합니다).
이렇게 동아시아 정세가 변하면서 고려는 다시 한 번 외교정책에 대해 고민해 볼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고려의 여진(금)에 대한 외교 정책은 나중에 더 이어서 쓰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