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낮에 써보는 한국사
일단 귀여운 시로코부터 올리고
지난 글에서 2차 여요전쟁의 끝까지 썼는데.
2차에서 고려는 현종의 친조를 조건으로 걸고 전쟁을 끝내긴 했지만, 사실 아무도 그게 실현될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현종이 직접 갔다가 무슨 불상사가 생길 줄 알고요...
즉, 요와의 3번째 전쟁은 무조건 일어날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시작은 고려가 공식적으로 단교한 송에 복속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고려가 다시 송에 사신을 보낸다는 건, 다시 말해서 요와 다시 한 번 싸울 것을 천명하는 의미기도 했으니까요.
거기다 고려는 지난번 전쟁에서 조커이자, 여전히 대요전선 요충지였던 흥화진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주변 소규모 이민족들을 포섭하려는 시도를 끊임없이 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당연히 요의 재공격에 대한 방비였지요.
그렇지만 이번 전쟁은 이전처럼 갑자기 대군 대 대군으로 터지지는 못했습니다.
요는 이전처럼 한번에 우르르 밀고 내려오지 않고, 천천히 고려 국경에서 소규모 파상 공세를 행했습니다.
왜 이전처럼 한 번에 밀고 내려오지 못했을까요? 최근에 나온 고려거란전쟁 드라마에서는 생략된 이야기지만...
이미지 선생님의 [태평한 변방 : 고려의 對거란 외교와 그 소산]을 인용하자면 거란은 그 시점에서 고려와의 협상에서 진전을 기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따라서 천천히 전초기지를 구축하는 방식으로 파상공세를 펼친거지요.
그리고 1015년 정월, 소배압이 10만 군사를 이끌고 고려로 본격적으로 공격합니다. 제 3차 여요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고려는 다시 한 번 사신을 보내면서 화평을 요구하는 한편, 송으로 사신을 보내서 협조를 요청합니다.
결과적으로는 둘 모두 의미가 없었지만요.
요는 당연히 이번엔 화평을 받을 생각이 없었습니다.
...요 입장에선 계속 이걸 당한 거니까요.
송은 여전히 고려를 지원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한 얘기지만 아직 외교관계가 완전히 복구된게 아니었으니까요. 송은 고려를 믿지 못하고 있던겁니다.
거기다 이 시기 송은 거란에 대한 강경책 대신 유화책을 펼치면서 전쟁을 가능한 한 피하려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3차 전쟁도 고려 혼자만의 힘으로 견뎌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고려는 강감찬을 상원수, 강민첨을 부원수로 삼아 대비했습니다.
2차 전쟁에서 흥화진을 기억하던 소배압의 전술은 다음과 같이 변했습니다.
2차 전쟁때 요의 전술은 기본적으로 지나치는 모든 성과 요충지를 점령하고 있었습니다. 끝까지 점령당하지 않은 흥화진이 예외인거였죠.
이번에는 달랐습니다.
이번 요의 공격은 지난번처럼 모든 요충지를 점령하는 것이 아니라, 빠르게 개경으로 진격하는 것을 기조로 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지난 전쟁보다 훨씬 빠른 시간에 개경 주변까지 진격할 수 있었죠. 그 과정에서 여러번 패전하기도 했지만, 아무튼 개경 근방까지 진격에는 성공했습니다..만
개경을 함락시키는것은 예전과 달리 무리였습니다.
현종은 요의 3차 침입에 대비해서, 지난 2차 전쟁에서 개경을 순식간에 빼앗긴 것을 기억하고 이를 막기 위해 개경 주변을 굳게 방어했습니다.
나성의 건축, 개경 주변의 주요 군사 시설 등을 지속적으로 건설한 결과 소배압은 개경 점령에 결국 실패하고 맙니다.
더군다나 상술한 바와 같이 많은 고려 군사를 등 뒤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소배압의 개경 공격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언제든지 통수를 치고, 보급선을 지속적으로 방해하고 있었으니까요.
결국 소배압은 개경 공격을 중단, 퇴각을 시도합니다...만
퇴각로에는 그 동안 준비해둔 강감찬이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강감찬은 퇴각로인 귀주에서 대비하고, 소배압 역시 강감찬을 뚫지 않고는 퇴각할 수 없다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결국 양군의 전면전이 벌어지는데, 이게 그 유명한
귀주대첩입니다.
자세한 전투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아는 바가 적고 지금 가지고 있는 단행본이 없어서 길게 서술하지는 못할 거 같습니다.
아무튼 이 귀주대첩에서 고려군이 승리, 소배압은 극소수의 군사와 함께 요로 퇴각하게 됩니다.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서술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3차 여요전쟁은 고려의 대승으로 끝나게 되지만, 양국 모두 오랜 전란에 대해 큰 부담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요는 계속된 패배로, 고려는 오랜 전란에 대한 방비로 인해 손실이 컸으니까요.
더군다가 요는 이 이상 분쟁이 이어지면 지금까지 방관하던 송이 언제 뒤를 칠지 모른다는 불안 역시 가지고 있었습니다.
슬슬 성장하고 있던 여진의 세력도 있고요.
결국 1019년 8월을 시작으로 요에서 먼저 사절을 보내고 고려가 이에 화답하면서 여요전쟁은 끝나게 됩니다.
이후 고려는 다시 요에 칭번하여 조공책봉관계를 새로이 정립하고 [요사]에 따르면 요는 고려의 죄를 용서한다는, 이른바 황제국과 신하국의 관계를 정립하게 됩니다.
결과적으로 요는 압록강 동부의 보주, 선주를 차지했으나 전쟁비용에 비하면 너무 작은 이득이었고,
고려는 이를 기점으로 왕권의 강화 및 정계 상하의 단결을 이루어내게 됩니다.
이후에도 여요간에는 소규모 분쟁은 있었으나 대체로 무난한 관계를 이어나가게 됩니다.
이후 문물교류에 있어서, 요와 고려의 교류는 크게 다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기록이나 사료의 부족, 그리고 고려-요의 무역은 사행무역(사신이 가는 길에 이루어지는 무역입니다)과 밀무역이 병행되었기 때문에 정확한 내용까지는 파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불교사에서는 꽤 중요하게 다루어지는데, 요에는 원효대사의 '대승기신론소'가 전해져 반포되어 이후 북방민족 불교사에 영향을 끼치고,
반대로 요의 대장경과 불교자전도 고려로 넘어오게 되면서 양 국가의 불교 발전에 꽤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IP보기클릭)211.234.***.***
(IP보기클릭)211.234.***.***
퍼가서 고려사 사람들이 많이 보면 나야 좋지 ㅋㅋㅈㅋ | 24.04.25 11:08 | | |
(IP보기클릭)118.235.***.***
원숭이손 :알았다(UI가 디시 역갤로 바뀌어서 퍼짐) | 24.04.25 11:11 | | |
(IP보기클릭)211.234.***.***
하필.. | 24.04.25 11:12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