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보다 이렇게 유게에 썰풀듯이 하니까 공부가 더 되네
이전 글에서 정종 즉위까지 다뤘으니 다시 정종부터 광종까지 가봅시다
박술희, 왕규 등 라이벌들을 제거하고 왕식렴 등 측근세력의 지지를 통해 왕위에 오른 정종.
정종은 항상 견제에 시달리던 혜종의 전철을 따라가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면 정종이 해야 할 일은 뭘까요?
숙청이죠. 나중 얘기지만 최승로(시무 28조로 유명하죠)의 상소문을 인용하자면 「일찍이 혜, 정, 광 3종이 상계한 처음을 보건대 박사가 미령할 제 양경의 문무관이 반이나 살상되었으며」라는 대목이 있습니다.
즉 정종/광종 대에는 대대적인 숙청이 있던 걸로보이는데, 여기서 양경(兩京)이란 개경과 서경을 얘기합니다. 학계에서는 이때 숙청된 세력은 저 둘 중에 개경 세력인걸로 추정하고 있죠. 왜냐면 왕식렴으로 대표되는 서경 세력은 정종에게 굉장히 우호적이었으니까요.
그리고 정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서 아버지가 했던 방법을 따라하기로 합니다.
'아빠...나라 세우고 왕권 강화를 위해서 했던 거...'
천도입니다.
정종의 기반 세력은 서경 세력이었고, 개경 세력은 反정종 세력이었으니까요. 서경으로 천도를 시도합니다.
왕식렴 등 서경 세력은 이를 강하게 지지했는데, 뭘 명분으로 삼죠? 이 시기에 인기있던 사상이 있습니다.
(물론 이건 따라하면 안됩니다)
풍수지리설입니다. 이때 정종과 서경파는 '아무튼 서경의 풍수지리가 좋으니까 천도할거야 흥칫뿡'을 시전합니다. 그래도 실현되지는 못했죠. 왜냐면..
정종은 이른 나이에 사망하고 말았으니까요.
결과적으로 정종의 왕권 강화는 성공하지 못했지만...
정종의 이복동생, 광종이 왕위에 오르면서 얘기는 달라집니다.
광종은 정종보다 강력하게 왕권강화책을 밀..지는 않았습니다. 광종 초기 정책들을 보면 공신 대우를 통한 호족 회유 등 온건책부터 나오거든요.
그렇지만 그러면서도 뒤에서는 후주를 바롯한 중국 국가들과 밀접한 외교 교섭을 통해, 왕권강화 개혁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광종 7년(956년)에 그 시작은 유명한
노비안검법 입니다. 수능이나 시험에 자주 나오니까 체크하세요. 혹시 몰라서 노비안검법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도록 합시다.
고려 초기에는 나말여초 시대를 지나면서 전란으로 인해 노비로 전락한 양민들이 많았는데, 노비안검법은 이들을 조사해서 양민으로 풀어주는 정책입니다. 노비는 여러 의미가 있는 존재였죠.
호족들의 노비들은 일도 하고, 싸움이 나면 무기 쥐어주고. 즉 경제적, 군사적 기반이었던 겁니다. 그런데 이런 노비가 없어진다?
즉 호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을 없애는 겁니다. 덤으로 양민이 되면 세금을 내야되니, 국가 재정 확보에도 용이합니다.
그런데 이런 정책에 호족들이 감히 반대하고 예전처럼 난을 일으키지 못했다는 건...광종의 왕권이 그만큼 강해졌다는 얘기입니다.
여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과거제를 통해서 새로운 인사들을 등용하고, 이들을 위한 관직제도를 정비하죠.
이걸 수능 단계에선 9품관제, 더 깊게 들어가면 관계와 관직제의 정비라고 합니다.
이건 전부 다 호족들한텐 마음에 안드는 제도들이지만, 광종은 이들을 제압할 강력한 지지세력이 있었습니다. 형처럼 특정 인물에 한정된 지지세력보다 더 강한 거였죠.
균여를 비롯한 불교계와, 군제 편성으로 등장한 시위군입니다.
사상적 지지세력과 무력. 이 둘이 있는데 광종의 개혁을 누가 막겠습니까? 이런 힘을 바탕으로 광종은 반대하는 호족은 끊임없이
숙청, 처리하면서 왕권을 강화해 나갑니다. 물론 사람을 좀 많이 죽이긴 했죠. 광종의 유언엔 '내가 사람을 좀 많이 죽이긴 했지 ㅎㅎ;;;' 라는 말도 있다고 하니까요.
아무튼 이렇게 광종대에 들어서면 나름 왕권이 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이런 왕권 강화책이 빛을 발하는 건, 후의 경종과 성종대에 정점에 이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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