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광해 -왕이된 남자
누르하치는 몽골계 세력들과 더불어 조선을 자신의 대명 전략에 끌어들이기 위해 1617년 음력 12월 조선에 서신을 발송했다. 이 서신은 지난 음력 4월에 발송된 녹봉수령지 변경 요구에 관한 서한과 마찬가지로 전 제주 판관이자 당시 함경도에 유배되어 있던 문희현에게 발송되었는데, 서신의 정확한 내용은 확실치 않으나 칠대한과 조위총의 사례를 열거하며 조선측에 자신의 대명전쟁에 대해 명의 편을 들어 참전치 말 것을 요구한 것으로 판단된다. 조선 조정에서는 서신을 받자마자 논의에 들어갔고, 곧 요동아문과 북경의 명 조정에 해당 서신의 수신 사실과 서신의 내용을 알리기로 했다. 그러나 그 이전에, 문희현에 대한 조사부터 선행하여 진행하고 자세한 정황을 파악키로 했다.
하지만 문희현에 대한 조사는 상당히 오랜 시간을 소모했다. 최소한 2월까지도 문희현에 대한 조사는 제대로 진행되지 않던 실정이었다. 결국 덕택에 2월 중후엽까지 자문과 주본이 발송되지 않았다.
사실 이렇게 명나라에 대한 후금의 서신 관련 보고가 지연된 것은 문희현에 대한 조사가 차일 피일 미뤄진 탓 때문만은 아니다. 이 문제를 보고할 시 조선이 후금과 지금껏 교섭과 교역 관계를 가져왔다는 것이 명에 알려질 수 있는 것을, 요컨대 '이간질의 의도에 얽히는'것을 우려한 탓이기도 했다.1 그리 되면 명은 조선에 대해 책임을 물을 수 있을 테고, 이는 당시의 정권에 대한 정치적인 타격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조선의 국가적 위기로 작용할 수 있었다.
이 무렵 비변사에서는 아직까지도 자문과 주본을 발송치 못한 문제에 대해 어서 빨리 문희현에 대한 조사를 진행하고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의견이 나왔다. 그러한 촉박함은 혹여라도 후금이 조선에 서신을 보낸 뒤 이를 역이용하여 조선의 서신에 대한 대응이나 지금까지 후금과 조선 사이에 있었던 관계, 즉슨 배후교섭/교역 관계를 먼저 명에 전달, 명과 조선간 공조체제의 붕괴를 꾀하려 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2조선이 후금이 보내온 서신에 대해 알리면서 배후교섭관계가 드러나는 것보다 후금이 명나라에 조선과의 외교 정황을 알려서 배후교섭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훨씬 더 안좋은 상황이었으므로 비변사는 차라리 이에 대해 우리가 먼저 보고하자는 논지를 내세운 것이었다.
그러나 문희현에 대한 조사는 여전히 빠른 속도를 내지 못했다. 더불어서 당시 발생한 명의 진강유격 구탄과의 마찰 문제 역시 조선의 외교체계의 발목을 잡았다. 해당 문제의 발생은 당시 의주부윤 이극신의 훈련과 초소 건설 문제로 인해 구탄이 이극신의 의도를 의심하고, 또 그와 관련하여 조선이 일본과 연합하여 명을 위협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진 것이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에 더불어 구탄은 진강에 축성을 진행했는데 구탄은 자문을 통해 이는 조선과의 마찰 문제와 상관이 없다고 알려왔으나3시기로 보건대 조선에서는 구탄의 그러한 해명을 믿을 수 없었다. 명나라의 지속적 부정으로 최소한 비변사서는 축성에 관해 어느 정도 해프닝 정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광해군은 이러한 의도에 대한 불신을 종식시킬 수 없었다.4
당시 이 문제는 실질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있었으므로, 아직 보고를 하지 않은 관계로 당장은 명과의 외교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던 후금의 서신 문제 보다도 해결이 우선시되었다. 그렇기에 일단 후금의 서신 문제는 미루어지고 변무와 축성중지에 관한 자문 작성이 선행해서 진행되었다.5
비단 문제의 해결 순서만이 문제는 아니었다. 진강유격부와의 마찰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명에 후금의 서신 사안을 보고할 시, 지금까지의 조선ㅡ건주/후금 관계가 드러나는 경우의 파급력이 당초 예상보다 훨씬 커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이는 조선으로선 매우 두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조선으로서는 당시 상황상 후금의 서신에 관한 보고를 올리기를 자연스레 꺼려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식으로 시일이 지체되다보니, 결국 조선은 후금이 조선에 미리 자신들의 전쟁 준비에 관한 바를 알렸음에도 실제로 전쟁이 일어난 시점까지 명나라에 이 사실을 알리지 못했다. 음력 4월 27일서야 후금이 보내온 서신에 관한 주문을 사은사편으로 발송할 것을 의논하였으나 그 시점은 이미 후금이 명나라와의 전쟁을 시작한 시점이었다.6그 뒤에 조선에도 전쟁시 발발하였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이와 관련하여 지금이라도 후금이 서신을 보내왔다는 사실을 자문으로 알리자는 의견이 나왔으나7, 사태가 터진 뒤에야 관련 자문/주본을 보낼 경우 후금과의 관계나 조선의 의도를 의심받을 것을 두려워하여 자문을 발송치 않았다.8
재자관 이잠이 전쟁에 관련하여 요동순무 이유한에게 보낼 자문을 가지고 요동으로 출발할 무렵, 다시 한 번 후금의 서신에 대한 보고 문제가 광해군에 의해 언급되었다. 그로서 해당 자문을 발송할 것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때 좌부승지 박정길이 지금서 이 문제에 대해 보고하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며, 차라리 순무의 회답이 왔을 때에 처치를 살펴 답변하거나 아니면 아예 중지하는 것이 좋겠다고 간하여 자문 발송은 다시 취소되었다.9 북경에 대한 직접적 주본 상주에 후금의 서신 문제를 언급하는 것 역시도 명나라가 조선에 대해 의심할 것을 우려하여 기각되었다.10
결론적으로 조선은 후금/누르하치로부터 명나라에 대한 전쟁을 시작할 것을 전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로 인해 이 사실을 명에 알리지 못했다. 조선이 이 서신을 수령한 지 4달여 뒤, 후금과 명은 전쟁을 시작했다.
조선은 몽골계 세력들과는 달리 명을 상국으로 삼고 책봉관계를 가진 나라였다. 비록 조선이 명나라에 후금의 전쟁 준비 사실에 대해 보고치 못한 것으로 결론이 났으나, 자칫 잘못했으면 조선이 명에 이 사실을 보고하고 덕택에 명이 후금의 전쟁 계획에 대해 사전에 파악할 수 있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었다. 상황이 그렇게 흘러갔다면, 누르하치로서는 전쟁을 기습으로 시작하려 했더니만큼 자칫 본인이 원하지 않는 형태로 개전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조선에 자신의 전쟁 의도에 관한 서신을 보냈다.
누르하치가 조선이 명에 자신의 서신에 대해 보고할 가능성을 간과했을리는 없다. 누르하치는 이미 임진왜란 시기부터 조선과 명의 관계를 파악하고 있었고, 조선이 명에 자신과 관련한 정보 자문을 수 차례나 올린 것 역시 인지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르하치는 자신의 전쟁 준비 사실을 알리는 초강수를 두며 조선에 서신을 보내어 곧 벌어질 자신과 명의 전쟁에 끼어들지 말것을 회유했다.
누르하치가 전쟁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조선에 중립을 요구하더라도 최소한 명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가한 뒤 조선에 전쟁에 관련한 서한을 보내며 중립을 지킬 것을 요구했어야 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전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러한 행동을 취했다. 누르하치가 그런 행동을 취한 기반은 무엇일까. 즉슨 무엇을 믿고 이러한 행동을 자신있게 취할 수 있었던 것일까.
필자의 개인적 유추이나, 아마도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에 자신의 서신을 보고할 가능성이 그리 높지 않다고 본 것 같다. 당시 후금 역시 조선으로서는 조선-후금간 배후교섭/교역에 관한 사실이 명나라에 들어가선 안된다는 것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당장 1617년 음력 3월~4월에 후금은 조선에 회령에서 만포로 녹봉수령지를 옮길 것을 요구했었다. 여기서 조선은 명에 후금과의 교역 사실이 들어갈 것을 우려하여 강력히 거부했다. 이를 통해서 후금은 조선이 여전히 자신들과의 배후교섭/교역 관계를 명나라에 보고치 않고 있으며 그 정보가 명나라에 들어갈 것을 꺼려한다는 것을 재차 파악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후금이 보낸 서신을 명나라에 보고한다면 조선으로서는 지금까지 존재했던 건주/후금과의 배후 교섭 관계와 교역 관계를 명나라에 파악당하게 된다. 그리 된다면 후금과의 관계를 명나라의 의심을 받고 곤혹을 치를 수 있게 된다. 누르하치는 조선이 그러한 상황을 두려워하여 자신의 서신을 명에 보고치 않을 것이라고 여긴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조선이 보고를 주저한 이유에는 건주/후금과의 배후 교섭이 드러나기를 꺼려한 것이 분명 존재한다. 배후 교섭이 드러날 것을 꺼려한 것이라는 서술은 기록상 극히 제한적이거나 단편적이며, 대부분은 문희현의 심문으로 인해 오래 걸렸다는 논지가 많이 보이나 이는 방어적 논리에 가깝다고 판단된다. 실제로는 그와 더불어 후금과의 교섭 관계가 드러나는 것을 꺼려한 것 역시 이유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고 무방하다.11
만에 하나 조선이 후금측의 서신에 관한 보고를 명나라에 전달한다고 해도 그것은 곧 명과 조선간 공조에 균열을 만들 가능성이 농후했다. 기습의 효과는 다소 소실되겠지만, 조선과 명과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면 누르하치로서는 그 역시도 나름의 외교적 효과는 생기는 것이었다. 또한 조선의 보고로 인해 명의 사태 조사가 진행된다고 하더라도 그 역시 명나라, 특히 요동의 명령체계상 얼마간 시간이 지연될 것은 분명했다. 그것을 생각해 보면 누르하치는 조선이 명나라에 자신이 전쟁에 관련한 서신을 보낸 사실을 보고 한다고 하더라도 얼마동안은 기습 공격이 가능할 것이라 판단한 것 같다.
이상의 여건의 종합적인 계산을 통하여 누르하치는 당시의 외교적 상황상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조선에 자신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음을 알리고 중립을 요구하는 서한을 보내는 것이 더 이득이라고 판단, 조선에 서신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의 실제 생각이 어떠했건, 조선은 누르하치가 본인들에게 보낸 서한과 정보를 명에 보고치 않았다. 이는 간접적으로 후금을 돕는 결과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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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5월 2일
2.비변사등록 광해군 10년 음력 2월 22일
3.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3월 8일.
4.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4월 27일
5.구탄에 대한 자문 작성과 당시의 외교 상황은 조선왕조실록과 비변사등록에 기록되어 있으나 혼란한 정세 탓에 두 기록간 일자의 차이나 날짜의 오기가 많다. 그리하여 정확한 전개의 파악이 어렵다. 다만 2월~4월에 진강유격부와 의주간 마찰, 그리고 진강의 축성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음은 파악이 가능하다. 윤 4월의 날짜로 기록된 기록이 많으나 시기를 보건대 이 중 일부가 실제적으로는 4월달의 기록으로 파악되는 탓이다. 장정수 역시 4월에 축성에 관한 자문 문제가 중점적으로 다루어졌다고 보았다. 장정수, 7세기 초 조선의 대(對)건주여진·후금 교섭과 조(朝)·명(明) 군사공조의 실상, 역사실학회, 역사와실학 73, 2020, 148쪽. ;진강성 축조 문제는 관련 논문이 작성 중에 있으나 기존의 짧은 견해를 살펴보고자 한다면 한명기, 1999, 임진왜란과 한중관계, 역사비평사, 211~213쪽을 보면 좋다.
6.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4월 27일
7.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윤 4월 13일, 비변사 자문 안건
8.비변사등록 광해군 10년 윤 4월 21일
9.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5월 2일
10.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5월 14일
11.장정수, 앞의 논문, 2020, 14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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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역사를 보다보면 한민족을 그렇게 괴롭히던 수많은 북방민족들은 어디가고 없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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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다 중국에 동화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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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금의 역사를 보다보면 한민족을 그렇게 괴롭히던 수많은 북방민족들은 어디가고 없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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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sk빌런
죄다 중국에 동화되서.... | 23.07.05 20:10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