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7년 음력 10월, 코르친 좌익의 왕공 바트마가 50여필의 말과 사신단을 데리고 후금의 허투 알라를 방문했다. 그것은 이전에 있었던 코르친 좌익의 후금에 대한 연례적 사신 파견과 궤를 같이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그러나 이번의 코르친 좌익계 사절 방문은 매년 연이어 2회, 두 명의 왕공의 방문이 이루어지던 이전의 방문들과는 다르게 바트마의 방문 한 번으로 그대로 끝났다.
필자는 이 이유가 당시 누르하치가 주변의 여러 세력들에 자신의 명나라 공격 계획을 알리며 협조 혹은 중립을 지킬 것을 제시하던 상황과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다. 상황을 유추컨대 당시 누르하치는 자신을 예방한 바트마에게 코르친 좌익의 대명전쟁 협조 의사를 묻거나 밍간에게 그 의사질문을 전달하라는 요구를 했던 것 같다. 그 이후 바트마는 영토로 복귀한 뒤 자신의 부친에게 이러한 누르하치의 질문/요구를 전했으며 이에 밍간이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것을 판단하고 2차로 보내려던 사절을 취소, 이어서 얼마간 후금과 거리를 두게 되었으리라 판단된다.
코르친이 이후 얼마간 후금과 외교적 접촉을 하지 않고 적당히 거리를 두고, 후금과 명이 초반 교전을 벌이는 동안 잠자코 상황을 관망하는 태도를 보인 것을 보자면 이러한 견해는 타당성이 있다. 다만 1617년의 후금의 외교적 행보에 관한 내부기록이 빈약한 탓에 확단까지는 할 수 없다는 것은 아쉬운 점이다.1
코르친이 이렇게 후금으로부터 거리를 벌리는 상황이 연출될 무렵, 누르하치는 다른 세력들에도 외교적 행동을 한 것으로 판단된다. 코르친 좌익계와는 다른 몽골계 세력인 칼카 5부나 차하르와 그 부속 세력들, 그리고 조선이 바로 그 대상이었다. 이전에 소개했던 이야기에도 언급했듯이 1617년의 후금의 외교적 행보는 확실한 내부기록이 적으나, 단편적 기록, 정황과 명나라의 외교 판세 파악, 그리고 조선의 기록 덕분에 이 시기 후금의 외교 행보에 대한 대략적인 윤곽의 파악이 가능하다.
먼저 이전에 서술했던 코르친에 대한 외교적 행보 유추와 연동하여 몽골계 세력들부터 시작해 보자면, 주지했다시피 누르하치는 코르친뿐만이 아니라 칼카 5부와 차하르등의 세력에 사절과 서한을 보내어 자신의 명나라에 대한 전쟁 계획과 그 명분을 선전하고 뒤이어 그들에게 자신의 전쟁에 협조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판단된다.
당시 누르하치의 서한의 내용은 후금에 관련 기록이 남지 않았을 뿐더러 수신자인 몽골측 역시 이 시기 기록이 미비하여 확실치 않다. 다만 후에 다룰, 후금이 조선에 보낸 서한의 내용을 생각해 보자면 자신의 부친과 조부의 목숨이 사실상 명나라에 의해 상실된 것을 필두로 하는 7대한에 관한 이야기는 분명 포함이 되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에 더불어 추후 칼카 5부 세력에게 보낸 서한2을 살펴보자면 아마도 원나라가 명나라에 의해 결국 중원 밖으로 밀려난 것을 상기시키며 명에 대한 보복전을 부추기고 자신의 전쟁에 협조할 것을 요구한 것 같다.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과거의 역사적 사례의 인용은 후금이 그 해 말 조선에 보낸 서한에서도 나타난다. 누르하치는 몽골에 연대를 제의할 무렵에 조선에도 서신을 보내면서 고려 시기 조위총의 반란 당시 조위총이 금나라에 귀순할 뜻을 보이자 금나라가 고려 중앙 정부의 외교적 태도를 고려하여 조위총과의 연대를 거부한 사례를 들며 조선을 회유했다.3 후에 후금이 칼카에 보낸 서신과 조선에 보낸 서신을 보건대 누르하치가 이 때 몽골계 세력들에게 과거의 사례를 들어서 그들을 회유코자 했을 가능성은 무척이나 높다.
누르하치의 이러한 회유에 대한 칼카 5부나 차하르가 어떻게 답했는지 역시도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하지만 누르하치가 명을 상대로 전쟁을 시작한 이후 얼마간 칼카 5부 세력들과 차하르 세력이 후금의 작전 진행 당시 명을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하거나 혹은 명나라에 무상은과 통상을 요구하며 위협적인 기동을 보인 것을 생각해 보건대 이들은 최소한 전쟁 초반기에는 누르하치의 전쟁에 협조했던 것으로 보인다.4
다만 이시기에 칼카 5부 세력이나 차하르가 누르하치의 아래에서 종군하며 직접적인 지휘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누르하치가 최초로 명나라를 공격할 당시 후금군의 기동과 연계하여 활동한 몽골 세력들은, 누르하치의 조카사위였던 엉거더르의 바유트군을 제외하고서는 대부분 후금군과는 따로 행동했다. 후금의 전쟁에 협조는 하되, 누르하치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거나 후금군의 대열에 함께 하지는 않았다고 할 수 있다. 다만 누르하치로부터 어느 정도의 계획을 전달받고 그 계획에 따라 지정된 지점들을 공격했을 가능성은 존재하지만, 이러한 시각은 명의 시각에 의한 바가 크다. 실제로는 그런 간접적인 역할 지정 조차도 받지 않고 그저 누르하치가 거병함과 동시에 함께 움직여 요동을 공격하고 명을 압박한 정도가 아닐까 한다.
이들이 누르하치에게 협조한 이유는 누르하치의 명분론에 감읍하며 설득되었다거나 한 탓은 아니었다. 그들에게 중요했던 것은 본인들의 이익이었다. 특히 당시 차하르의 대칸으로 군림하고 있던 릭단의 경우 자신이 누르하치를 상대로 우위의 위치에 있다고 믿고 있었으며, 언젠가 몽골의 정치, 경제적 통합을 이루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를 공격할 동안 릭단이 군대를 이끌고 명의 변경을 공격한 것은 후금의 전쟁 계획이 자신의 세력 확장과 재원 확보에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고 후금이 명과의 전쟁을 통해 명의 이목을 강력하게 끌 동안 명의 다른 지역을 공격하여 약탈을 행하고, 명을 상대로 평화를 대가로 경제적 재화를 약속받는 협약을 체결하여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과 경제적 조건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즉, 릭단은 후금의 명에 대한 전쟁을 자신의 힘-그것이 정치적이건 경제적이건-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후금의 초기 대명전쟁에 협조한 다른 세력들, 요컨대 칼카 5부의 옹기라트나 우지예트등도 모두 저마다의 목적이 있었는데, 대부분은 본인들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후금의 명나라 공격을 활용코자 한 것이라고 정리할 수 있다. 후금이 요동을 공격할 동안 그들에 협조하는 움직임을 보인다면 명으로부터 여러 재화를 약탈할 수 있을 뿐더러 후금을 상대하는데에 집중코자 하는 명을 자신들과의 협상에 끌어내어 그들로부터 평화에 대한 대가를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릭단의 의도와 일맥상통하지만, 칼카 5부의 경우 릭단만큼 원대한 거시계획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이렇게 후금의 전쟁을 이용해 본인들의 이익을 확보할 목적으로, 칼카 5부-특히 바유트, 우지예트, 옹기라트, 그리고 차하르 세력과 그 산하 세력등은 일시적으로 후금에 군사적 공조를 하기로 했던 것으로 사료된다. 자루트와 바린은 명확히 확인되지 않으나 이들 역시도 자이사이를 맹주로 한 칼카 5부의 특성상 참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 역시 이들이 자신의 전쟁에 진정 한 마음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이익을 원하여 공조하는 것을 파악했겠으나, 당시 누르하치로서는 조금의 도움이라도 필요한 상황이었기에 이러한 몽골계 세력들의 의도를 묵인했다. 이러한 공조협의는 1617년 말에서 1618년 초에 이루어 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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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이 시기 후금의 외교는 대부분 내부기록의 미비로 인해 주변 국가의 사료나 정황으로 유추해야만 한다.
2.만문노당 천명조 제 15권 천명 5년 4월 17일
3.조선왕조실록 광해군 10년 음력 5월 5일
4.노기식, 후금의 요동진출 전후 만주와 몽골의 관계역전, 중국학논총, 중국학논총 제12집, 1999, p.103. 명사 외국전 달단 만력 4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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