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95년에서 96년 사이, 조선의 관원 신충일은 통사 나세홍, 하세국등과 함께 건주의 퍼 알라를 방문하여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1신충일은 퍼 알라에서 며칠여간 체류하면서 건주의 여러 정보들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집할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건주의 전쟁과 외교 실황에 대한 정보 역시도 수집할 수 있었다. 이 때 신충일은 '몽고왕 나팔(剌八)'이라는 강력한 군주에 대한 바에 대해서도 전해 들었는데, 그 나팔이 건주에 보낸 사절단과 해당 사절단을 인솔하는 장수 '만자'등과도 실제적으로 만나 나팔의 실체 여부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2
여기서 '몽고왕 나팔'의 경우 필자는 그의 계급적 위치와 당시의 정황을 보건대 코르친 우익의 수장인 동시에 코르친 전체의 최고 수장격 위치에 있던 웅가다이라고 판단하였다. 동시에 체렝도르지의 견해를 수용하여 웅가다이가 아닌 그의 아들 오오바가 거론된 것일 가능성도 포괄하였다. 두 추정 모두 총체적으로 '코르친 우익의 수장' 혹은 '코르친 우익의 후계자'가 나팔일 것이라는 견해이다.
그렇다면 '몽고왕 나팔'이 건주 퍼 알라에 사신으로 파견했다는 '차장 만자'는 누구일까. 그의 정체를 추정하는 것 역시도 나팔만큼이나 힘들지만 필자로서는 가장 가능성 높은 인물로 코르친 좌익의 수장이었던 망구스를 떠올린다. 이는 '몽고왕 나팔'을 오오바로 추정한 바 있는 체렝도르지의 의견을 수용한 것에 더하여 필자 본인 역시도 근거를 세워 판단한 바에 의함이다.
만자라는 이름과 망구스라는 이름의 유사성은 제외하고서 만자-망구스 설에 대한 근거들을 나열하자면, 첫째로 만자가 이끌었던 사절단의 규모를 들 수 있다. 만자는 실록을 기준으로 120명, 건주기정도기 본문을 기준으로 130여명에 달하는 인원을 움직였고 1백여 마리의 말과 10여마리의 낙타를 건주에 대한 예물로 가지고 호송해왔다. 이러한 규모를 인솔했다면 만자는 일반적인 장수가 아니라 코르친의 유력 왕공, 수장급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비록 남사이계에 소속되어 있긴 하지만 망구스 역시도 코르친의 유력 수장중 한 명이었으니 후보로 거론될 만 하다.
둘째로 만자의 위치이다. 조선왕조실록과 건주기정도기, 연경재전집에 의하면 만자는 '차장(次將)'의 위치에 있었다고 한다. 코르친 전체를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에 망구스는 웅가다이의 버금가는 위치라고 할 만 했다. 남사이 계의 후계자인 콩고르, 밍간, 망구스 세 명 중 망구스는 연공서열상 첫째였고, 우익의 웅가다이에 비해서는 그 주도권이 밀렸으니 2인자라고 볼 만한 여지가 충분하다. 물론 콩고르, 밍간과 망구스는 대등한 수준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받으나 이론상의 구조서열상으로는 수장 '나팔' 다음가는 '차장'으로 서술되기에 충분하다.
셋째로 나팔과 만자의 세거 지역의 지리적 차이이다. 기록에 의하면 나팔은 퍼 알라로부터 동북쪽으로 1달여 노정 거리에 있었으며 만자는 12일여 노정 거리에 있었다. 이 기술을 신뢰한다면 만자는 치치케이 세력과는 떨어져 있는 다른 코르친계 세력, 즉슨 남사이계의 수장중 한 명일 가능성이 높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망구스 역시 남사이계의 수장중 한 명이었다.
넷째로 누르하치의 후대(厚待) 수준이다. 누르하치는 만자가 데리고 온 일개 장수들에게도 모두 비단옷을 선물할 정도로 그들을 극진히 대우했다. 일반적인 사신에 대한 대우 수준을 넘어선 이러한 대우는 사신단을 이끌고 온 만자가 유력 왕공급이라는 추정을 가능하게 해준다.
이상과 같은 근거를 통해 필자는 코르친 좌익(남사이계)의 수장중 한 명이 만자일 가능성이 있으며 그 중에서도 망구스가 가장 '만자'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만자가 망구스가 아니고 다른 인물이었을 견해 역시도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그에 대한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망구스는 엄연히 코르친 좌익의 수장중 한 명으로서 비록 웅가다이에 비하여 그 위계서열이 밀리긴 하지만 웅가다이가 함부로 사신과 같은 임무를 맡기고 퍼 알라의 방문을 부탁할 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수많은 군대와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망구스였으므로 웅가다이가 그에게 이러한 '무리한 요구'를 지시할 수는 없었다. 하물며 당시에는 웅가다이 역시 9부 전쟁의 패전으로 말미암아 그 영향력이 다소 꺾인 시점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둘째로 후금/청의 기록에 1595년의 망구스의 방문에 관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다. 비록 이 시기의 청 국내의 실록 기록이 상당히 축약되어 있긴 하지만 망구스와 같은 몽골계 세력 최고위 수장의 방문과 같은 초거대 행사는 충분히 기록될 만한 일이었다. 조선의 신충일의 방문이 실록에 기록되지 않은 것처럼 타국의 외교관의 방문 사례가 후금/청측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경우도 빈번히 존재하나, 망구스는 그러한 일반적인 외교관들과는 궤가 다른 인물이었다. 그와 비슷한 위상의 부잔타이의 퍼 알라 방문3이나 그보다 상대적으로 작은 위상을 지니고 있었다고 평가되는 여희원의 퍼 알라 방문4과 같은 사례가 실록에 남았으므로, 망구스급이라면 분명 실록에 기록되어야 했다고 본다. 하지만 후금/청의 실록에는 망구스의 방문에 대한 기록이 살펴지지 않는다.
셋째로 조선의 기록상에서 만자를 '차장'이라고 서술한 것에 대하여, 차장이라는 표현이 코르친의 왕공들 중에서 차석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왕공들을 제외한 장수들 중에서 차장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인지. 그리고 코르친 전체에서 차석의 위치인지 웅가다이의 직접적 산하 세력인 코르친 우익에서 차석의 위치인지 불분명하다는 점 역시 염두점이다. 만약 코르친 우익의 웅가다이의 장수들 중에서 차석의 위치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만자의 위상은 대폭 꺾이게 된다. 만자의 세거지가 기록상의 나팔(웅가다이/오오바)의 세거지와는 차이가 크다는 것이 변수이지만 몽골계인 코르친으로서는 큰 변수가 아닐 가능성 역시 무시하기 어렵다.
이렇기 때문에 만자가 망구스가 아니라 다른 인물일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만자가 망구스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가능성이 높을 뿐 다른 인물일 가능성 역시도 충분히 존재한다.
만약 만자가 실제로 망구스라면 그가 '나팔'의 사절로 퍼 알라를 방문한 것은 단순히 '나팔'이 지시를 하고 그것을 받든 형태로서 사절로 파견되었다기 보다는 코르친 우익 세력이 이미 1594년서부터 밍간을 필두로 누르하치와 통교 관계를 맺기 시작한 코르친 좌익 세력의 중재를 받아 누르하치와 통교를 하고자 했고 그것이 망구스에 대한 '퍼 알라 방문 요청'으로 이어져 망구스가 '나팔'대신에 퍼 알라에 사신 자격으로 방문했을 가능성이 있다. 만약 이러한 가능성을 사실로 받아들인다면 건주/후금에 최초로 방문한 코르친 수장은 1617년의 밍간이 아니라 1594년의 망구스로 바뀌어야 할 것이다.
한편 만자가 망구스가 아니라면 그 정체는 코르친 우익이나 좌익의 수장급 아래의 왕공이나 장수중 한 명으로 판단할 수 있다. 코르친 우익이라는 가정의 경우 웅가다이 혹은 오오바가 휘하의 직속 장수나 친족중 한 명을 사신으로 정하여 퍼 알라에 파견했을 가능성이 있고 코르친 좌익이라는 가정의 경우 앞서 언급했다시피 이미 1594년서부터 건주와 통교관계를 구축한 좌익의 중재를 빌려 건주와 통교를 하려했을 가능성을 들 수 있다. 기록에 실린 지리적 위치를 보건대 후자의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1595~96년 당시 건주 퍼 알라를 방문하여 누르하치에게 막대한 양의 예물을 선물하고 그 곳에서 조선의 관원 신충일과 만났던 코르친 장수 '만자'가 망구스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판단한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망구스일 확률이 높을 뿐 망구스라고 확정할 수는 없으며 다른 인물일 가능성 역시 배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된다.
1.신충일의 외교임무에 관하여서는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23270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45376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74953
참조
2.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1493268
3.만주실록 무술년 음력 12월
4.만주실록 병1신년 음력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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