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91년 여허와의 외교 분쟁으로 인해 누르하치의 건주 세력은 나림불루, 부자이가 통치자로 군림하고 있던 여진세력 여허와 본격적인 대립에 들어갔다. 이 이후 두 세력은 서로간에 팽팽한 대치를 이어나가며 소규모 전투와 외교전을 이어나갔다.
당시 외교구도상에서 보다 우월한 입지를 가진 것은 여허였다. 여허는 울라, 호이파, 하다등의 해서여진 세력들과 연합하였고 이어서 주셔리, 너연등 조선에 근접한 샹기얀 알린부 세력들과도 연합했다. 무역을 매개로 하여 친교관계를 맺은 코르친과도 연합을 하였다. 그로서 여허는 건주를 압박할 강력한 연합군을 구성할 수 있었다.
본인들을 포함하여 총 9개 세력에 달하는 연합군을 구성한 여허는 1593년 음력 9월 기록상 3만의 대군을 동원하여 건주에 대한 최종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누르하치에게 대패함으로서 여허의 건주에 대한 경쟁력은 상당히 손실되었다. 반면 이 전쟁에서 승리한 누르하치는 본인의 세력을 미증유의 멸망 위기로부터 지키는 동시에 여진 최고 세력으로의 도약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다.1
이상의 9부 연합군과 누르하치간의 1593년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몽골계 세력인 코르친은 최초로 누르하치 세력과 접촉을 했다. 코르친 세력은 그 전쟁에서 완전히 패하였고, 그 수장중 한 명인 밍간은 뻘밭에 빠졌다가 자신의 바지를 내팽개치면서까지 도주하여 겨우 목숨을 부지하는 굴욕까지 겪었다. 첫 만남으로서는 최악이라고 할 만 했다.
하지만 그러한 만남이 코르친에게 손해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빠르게 성장해나가는 누르하치 세력과의 연대 필요성을 느끼게 되었다. 특히 코르친 좌익으로 정리되는 남사이 계통이 그러했다. 남사이 계통에 속하는 밍간 본인이 누르하치에게 막대한 굴욕을 입으면서 도주한 경험은 역설적으로 누르하치와 친교 관계를 맺어야 할 필요성을 그로 하여금 느끼게 했다.
그로서 1594년 밍간은 누르하치에게 사절을 보내며 처음으로 통교를 제안했다. 누르하치는 그것을 받아들였고 그로서 건주와 코르친간의 통교관계가 최초로 구축되었다. 동시기에 칼카 5부의 바유트의 왕족 로오사 역시도 건주측에 사절을 보냈는데 1593년의 전쟁의 여파로 누르하치의 이름과 그 성장세가 그들에게도 알려진 탓으로 보인다.2코르친 좌익과 칼카 5부 세력과 최초로 외교적으로 통교를 한 누르하치는 이후로도 다른 몽골계 세력들과 외교관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1594년 코르친 좌익계와 외교 관계를 구축한 것은 확실시 되지만, 코르친 우익은 이 때에 좌익과 함께 누르하치에게 통교를 제안치 않았다. 그렇다면 코르친 우익은 언제 누르하치와 정식적인 외교 관계를 구축했을까. 코르친 우익 세력이라는 거대 세력과의 통교라면 후금/청의 기록에 그 최초 통교 시기가 남아야 정상일 듯 하지만 아쉽게도 후금/청의 기록상에서는 최초 통교 시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조선의 기록을 통해서 이들의 최초 통교 시기를 파악할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유명한 신충일의 건주 파견과 그의 외교 활동은 조선왕조실록과 건주기정도기에 대략적으로 정리되어 있는데, 덕분에 해당 기록을 통해 당시 건주의 외교 상황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다.3 해당 기록에 등장하는 '몽고왕 나팔'은 1593년의 9부 전쟁에 참전한 것이 확실시 되는 것, 대세력의 최고 수장직으로 보이는 것을 생각해 보건대 코르친 우익이자 코르친 좌우익-남사이와 치치케이계를 아우르는 최고 수장 웅가다이 혹은 그 아들 오오바로 추정된다.4즉 몽고왕 나팔과 누르하치간의 외교관계가 수립된 정황과 시기를 고려하면 건주와 코르친 우익간 통교의 본격적인 시작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 신충일의 기록과 후금/청의 기록에 남은 당시 건주의 외교 관계를 통해 추론한 건주와 코르친 우익간 통교 정황은 대략적으로 다음과 같이 살펴진다. 건주에서는 1593년 구러산 전투를 마침표로 하여 9부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그 이후 누르하치는 코르친 좌익, 칼카 5부 세력등과의 통교 관계를 1594년부터 가지기 시작했다. 이는 코르친 좌익, 칼카 5부쪽에서 먼저 누르하치에게 통교를 제안한 바에 따른 것이었다. 하지만 코르친 우익과는 통교 관계를 가지지 않았는데 이는 그들이 앞서 언급한 다른 몽골계 세력들과는 달리 건주에 먼저 손을 내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코르친의 최고 수장으로서의 자존심을 지키며 우선 상황을 관망하고 시점을 보았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코르친 우익과 통교 관계를 맺기 위해 먼저 손을 뻗기로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지난 전쟁에서 사로잡은 코르친 우익의 지휘관급 포로들에게 비단옷을 입히고 말을 주며 후대하는 동시에 그들을 석방하여 코르친 우익에게로 송환했다. 이렇게 석방된 코르친 고급 포로들은 당시 코르친 우익의 수장인 웅가다이와 후계자인 오오바에게 누르하치에 호의적인 조언을 한 것으로 생각된다. 누르하치가 자신들에게 선물을 쥐어주며 석방을 한 것에 긍정적인 감정을 가진 것에 더하여, 퍼 알라에서 포로 생활을 하면서 건주의 무서운 성장속도와 누르하치의 잠재성을 체감하며 누르하치와 평화적인 관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웅가다이는 석방된 포로들의 조언을 수용하여 누르하치와 통교 관계를 가지기로 한 것으로 살펴진다. 이 때 웅가다이는 자신의 휘하 장수인 차장 '만자'(晩者)를 수장으로 한 20여명의 고위급 사신들로 하여금 1백여명의 호종단5을 데리고 건주로 가서 누르하치에게 포로 쇄환에 대한 답례로 1백여마리의 말과 10마리의 낙타를 주게 했다.6 이는 상당한 규모인데, 1617년 밍간이 누르하치에게 제공한 낙타와 말의 숫자와 동일한 것이었다. 물론 전체적인 답례품의 양은 밀렸으나, 이러한 막대한 답례품 규모를 보건대 웅가다이가 돌려받은 포로들은 상당한 고위급 포로들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더불어서 웅가다이가 건주와의 통교를 시작하는데에 있어 다른 세력들보다 그 시기가 이르지 못했던 만큼 좀 더 정성을 쓴 것으로 판단되기도 한다.
누르하치는 퍼 알라를 방문한 사신단을 후대하여 만자를 포함한 그들에게 모두 비단옷을 주며 친선 통교를 환영했다. 이 때 누르하치는 그들이 가져온 말과 낙타의 5분의 3을 소유했고 슈르가치는 5분의 2를 소유했다고 한다. 이로서 누르하치는 코르친 우익과도 통교 관계를 맺게 되었다.7
이 시기는 신충일이 방문했던 시기와 멀지 않은 시기로 생각되는데 신충일이 퍼 알라에 방문했을 당시 코르친에서 파견한 차장 만자가 아직 퍼 알라에 머물고 있으면서 신충일과 만났기 때문이다. 즉, 코르친 우익과 건주가 직접적으로 통교를 맺은 시기는 1595년 후반기로 추정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시기상 코르친 좌익 및 칼카 5부와 최초로 통교를 맺은 시기와 비교하여 약 1년에서 2년 가량 늦은 시기였다.
앞서 가벼이 언급했듯 코르친 좌익이나 칼카 5부 세력들과는 다르게 누르하치쪽이 먼저 포로들을 석방하며 우호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누르하치가 그만큼 코르친 우익의 힘을 높이 평가하며 그들의 수장인 웅가다이에게 상대적인 저자세를 취했던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마도 이것이 후금/청의 기록에서 코르친 우익과 최초로 통교를 맺은 것이 명시되지 않은 이유가 아닐까 한다. 누르하치가 상대에게 저자세를 취한 것이었으므로 그저 '밍간과 로오사의 사절 파견 이후 여러 몽고 버일러들과 사절을 끊이지 않고 주고받았다'8는 정도로 이 시기의 대몽외교를 서술함으로서 이 부분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누락했다는 추정인데, 가능성이 없진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1.만주실록 계사년 음력 9월 기사 참조
2.만주실록 갑오년
3.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30일
4.나팔이 세력 수장으로 서술되는 것을 생각해 보자면 웅가다이일 가능성이 높으나 이름의 유사성에서는 오오바가 좀 더 높다. 필자는 전자의 가능성이 좀 더 높다고 판단한다. 자세한 것은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1493268 참조
5.조선왕조실록에는 1백여인으로 기술되어 있는데 건주기정도기와 연경재전집은 110여인으로 약간의 규모 차이가 존재한다.
6.차장 '만자'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존재한다. 코르친 좌익의 수장 망구스에게 중재를 요청했다는 추정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으나 다른 의견 역시 존재한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만자를 코르친 좌익 수장중 한 명인 망구스라고 호칭치 않고 '만자'로 호칭한다. 또한 만자의 정체 유추에 관하여서는 추후 따로 서술코자 한다.
7.조선왕조실록 선조 30년 이상과 동일, 건주기정도기/연경재전집 권 50
8.만주실록 갑오년, tereci ba bai monggo gurun i beisei elcin lakcarakv yabuh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