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595년에서 96년 사이, 조선의 관원 신충일은 통사 나세홍, 하세국등과 함께 건주의 퍼 알라를 방문하여 외교 임무를 수행했다.1신충일은 퍼 알라에서 며칠여간 체류하면서 건주의 여러 정보들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수집할 수 있었는데 그 과정에서 건주의 전쟁과 외교 실황에 대한 정보 역시도 수집할 수 있었다. 이 때 신충일은 '몽고왕 나팔(剌八)'이라는 강력한 군주에 대한 바에 대해서도 전해 들었는데, 그 나팔이 건주에 보낸 사절단과 해당 사절단을 인솔하는 장수 만자등과도 실제적으로 만나 나팔의 실체 여부를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었다.2
그러나 신충일의 경우 외부인으로서 고작 며칠여 동안 퍼 알라에 체류했을 뿐더러 신충일 본인이 여진과 몽골의 생리에 크게 해박하지 않은 탓에 그가 수집한 정보에는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그런 탓에 조선왕조실록의 신충일의 건주정탐기록과 건주기정도기에 기록된 '몽고왕 나팔'이 과연 실제로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그 추론이 힘든 면이 있다. 당시 사분오열되어 있던 몽골계 세력의 군주중 한 명임은 분명하지만 한자로 기술된 이름의 모호성등으로 인해 정확한 특정은 힘든 것이다.
그러나 힘든 면이 있다고 하여서 그 대상을 좁히는 것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기록상의 여러 간접적인 근거들과 사료의 교차적 파악을 통하자면 '나팔'이 누구인지 그 진실에 근접할 수 있다.
만주실록/청태조무황제실록/청태조고황제실록등의 청태조계실록의 갑오년(1594년) 기사를 보자면 당시 누르하치는 1593년 음력 9월에 있었던, 여허를 위시로 한 9개 부족 연합군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뒤 본격적으로 몽골계 세력들과 통교관계를 구축하고 있었다.3 해당 기사에서 거론된, 누르하치와 통교관계를 구축한 세력들은 직접적으로 언급된 세력 자체는 코르친 좌익의 밍간 산하 세력과 로오사의 바유트 세력 2개에 불과하지만 이 이후로 몽골계 세력들이 연이어 통교를 제안했다고 서술된 만큼 9부 연합 전쟁 당시 여허측으로 참전했던 코르친 일부 세력들과 당시에는 전쟁에 참전치 않고 중립을 지키고 있었던 칼카 5부 연맹 세력들이 누르하치와 통교 관계를 맺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통해 보자면 1595년~96년의 새해 당시에 퍼 알라를 방문했던 몽골계 세력의 사신들은 크게 코르친, 혹은 칼카 5부 계통 소속으로 판단되는데, 나팔이 보낸 사절단 역시도 당시 퍼 알라에 존재했으므로 이들 중 한 세력의 소속이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나팔의 정체를 유추하는데에 있어, 조선왕조실록에 실린 신충일의 보고문에 언급된 누르하치와 9부 연합군과의 전쟁에 대한 서술 역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해당 기술을 살펴보면 여허의 버일러 나림불루와 부자이는 울라의 부잔타이와 '몽고왕 나팔'에게 군대를 빌렸다고 서술되어 있다.4 즉 이를 통해 보자면 '몽고왕 나팔'은 칼카 5부 세력의 군주는 확실히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칼카 5부는 1593년의 9부 전쟁 당시에 참전치 않았기 때문이다. 9부 전쟁 당시에 참전한 몽골계 세력은 확실히 코르친 좌, 우익 계통으로 정리되므로 위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나팔은 코르친의 소속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당시 코르친, 특히 9부 전쟁에 참전한 눈 코르친의 수장급은 네 명이었다. 코르친 좌익으로 분류되는 남사이 계통의 군주 밍간, 망구스, 콩고르와 치치케이 계통-우익의 군주 웅가다이가 바로 그들이다. 여기서 밍간이 후금/청측의 기록인 청태조계실록에서 최초로 누르하치에게 통교를 제안한 코르친 수장으로서 기록된 것을 근거로 '나팔'을 밍간으로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나팔은 기록상 왕으로 통칭될 만큼 광범위한 몽골 세력의 통치자였다. 그는 자신이 소속된 세력의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아 수동적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 나림불루와 부자이의 요청을 직접 받고 자신의 산하 세력을 움직인 인물이었다. 즉, 표현을 보건대 코르친의 최고 수장이라고 비춰진다. 밍간은 코르친 좌익의 군주중 한 명이었을 뿐 코르친 전체의 대표자는 아니었으므로 밍간이 나팔일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떨어진다.
뭣보다 밍간은 후금/청의 기록에 따르면 자신 쪽에서 먼저 누르하치측에게 통교를 요청했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과 건주기정도기에 의하면 나팔과 누르하치간의 본격적인 외교 관계는 누르하치측이 먼저 9부 전쟁에서 생포한 몽골(코르친) 포로를 돌려보내며 시작된 것으로 판단된다. 양측의 기록간에 생략된 부분의 문제로 인해 밍간이 건주측에 먼저 통교를 제안하고 그 통교를 받은 누르하치가 그에 대한 회답으로 지난 9부 전쟁 당시에 생포한 포로를 돌려보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본다.
밍간이 나팔이 아니라면 과연 나팔은 누구일까. 필자는 또 다른 코르친 수장이자 밍간, 망구스, 콩고르와는 계열이 다른 '우익 세력'-치치케이 계열의 수장인 웅가다이일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다. 당시 코르친의 주도권은 서열 구조상 치치케이 계열에게 있었다. 웅가다이는 치치케이의 아들로서 그의 세력을 물려받았으며 1593년~1596년 당시 코르친의 최고 수장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1593년의 9부 전쟁 당시에도 코르친 군대의 통솔자로 전쟁에 종군했다. 조선의 기록에 언급된 나팔과 맞물리는 정황(코르친 세력의 최고 수장=왕으로서 나림불루와 부자이가 군대를 요청할 만한 인물, 9부 전쟁에 종군함)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나팔은 당시 코르친 치치케이 계통의 세력군주이자 코르친 전체의 최고수장 지위를 지니고 있던 웅가다이일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다. 그러나 체렝도르지의 경우 나팔의 팔(八)에 주목하여 이름의 유사성상 웅가다이의 아들이자 후일 웅가다이의 세력을 계승하는 오오바가 나팔일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결국 치치케이 계통의 수장 후계자가 나팔일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므로 필자의 판단과 대략적으로 일맥상통하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필자는 실록과 건주기정도기에 기록된, 여허와 연대하여 누르하치를 공격했으며 이후에는 누르하치와 통교를 맺기도 한 '몽고왕 나팔'이 여러 정황을 고려해 보건대 당시 코르친의 최고 수장격 지위에 있었던 웅가다이라고 판단한다. 여기에 체렝도르지의 의견을 반영하자면 웅가다이의 아들인 오오바일 가능성 역시 포함한다.
1.신충일의 외교임무에 관하여서는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23270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45376
https://bbs.ruliweb.com/etcs/board/300780/read/53274953
참조
2.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30일, 건주기정도기
3.만주실록 갑오년
4.조선왕조실록 선조 29년 음력 1월 30일, 如許酋長夫者、羅里兄弟, 患奴酋强盛, 請蒙古王剌八、兀剌酋長夫者太等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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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음집 링크 안올려서 지우고 다시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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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줄 요약 조선의 기록에 '몽고왕 나팔'이라고 기록된 인물은 당시 몽골의 유력자중 코르친 우익의 수장 웅가다이거나 그 아들 오오바일 가능성이 높다. 핵심 주장은 이거고 나머지는 그냥 근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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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팔최고...랑은 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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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잘 모르는 상황인데 몽고에 직접 방문한 게 아니니 정보가 더더욱 떨어질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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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리웹-034626775
두줄 요약 조선의 기록에 '몽고왕 나팔'이라고 기록된 인물은 당시 몽골의 유력자중 코르친 우익의 수장 웅가다이거나 그 아들 오오바일 가능성이 높다. 핵심 주장은 이거고 나머지는 그냥 근거임 | 23.05.16 20:28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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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팔최고...랑은 좀 다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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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도가 떨어진 것도 있지만 잘 몰라서. | 23.05.16 20:39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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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하엘 세턴
하긴, 잘 모르는 상황인데 몽고에 직접 방문한 게 아니니 정보가 더더욱 떨어질 수 밖에 | 23.05.16 20:44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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