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7년, 동해 여진 세거 지역에 은거한 보지리와 그 일파에 대한 수색전이 누르하치가 파병한 군병에 의해 진행되고 있을 무렵 누르하치는 조선에 서신을 보냈다. 해당 서신의 주요 내용은 녹봉수령지를 회령에서 만포로 옮겨달라는 요구였다. 후금이 그러한 요구를 전달한 것은 녹봉 수령에 있어서 보다 효율을 추구하는 동시에 조선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자 하는 의도였다.
여기에 더불어 명나라의 이목이 미치는 만포에서 교역을 시도하여 명이 조선을 의심케 함으로서, 내심 명-조선간 군사공조체제에 부담을 주려는 의도 역시도 존재했을 수 있으나, 이 경우 그 가능성을 확실히 확신치는 못할 것 같다. 다만 누르하치가 외교와 전쟁에 있어서 기만전략에 능했던 인물이고 실제로 전쟁이 벌어진 이후 명-조선간 공조체제를 뒤흔드는데에 진심을 썼던만큼, 이러한 의도의 가능성을 확신치도 못하지만 아주 없다고 할 수도 없을 것 같다.
후금으로부터 해당 요구를 전달받은 조선측에서는 후금의 요구를 거부했다. 그것은 기존의 규례를 무너뜨리는 것이었을 뿐더러, 만포를 통하자면 명나라에게 지금껏 숨겨온 조선-후금간 교역이 들어날 가능성이 있는데 그랬다가는 외교 문제가 커지기 때문이었다. 조선측은 후금의 요구를 거부한 것에서 더 나아가 후금1이 무슨 의도에서 지금까지 유지되어오던 녹봉의 회령수령을 급작스럽게 만포로 바꾸려는 것인지 그리고 후금에서 무슨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차인을 보내어 정탐을 해볼 계획도 세웠으나, 실제적으로 이루어 지진 않았다.
녹봉수령지의 변경 요구가 거부되었지만 누르하치는 이에 대해 당장 큰 신경을 쓰진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로서도 갑작스러운 요구에 조선이 응할 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다고 여긴 것이 아닐까 한다.
한편 이러한 외교적 조치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몽골계 세력들과의 외교에도 역시 신경을 썼다. 그러나 이 시기의 대몽외교의 경우 후금의 사료에 자세히 나타나지 않기에 자세한 논증은 불가능하다. 후금-조선간 외교의 경우 후금의 1617년 사료에 그 정황이 나타나지 않으나 조선의 사료가 존재하므로 당사국 사료로 논증이 가능한 반면, 1617년의 후금-몽골계 세력간 외교의 경우 후금의 사료에 단편적인 부분만이 드러날 뿐더러 이 당시 존재하던 몽골계 세력들의 경우 자체적인 사료가 남아 있는 경우가 그리 흔치 않기 때문에 후금의 사료에 조금이나마 남아 있는 기록, 명나라의 시선으로 본 후금-몽골 관계, 그리고 상황적 정황으로 논증을 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우선 1617년경 후금의 사료에 나타난 대몽외교의 경우 크게 두 사례가 있는데, 1.엉거더르와 누르하치의 조카딸 순다이의 혼인과 2.코르친과의 교류였다. 엉거더르와의 정략혼은 이미 서술하였으니 제외하고2, 또 다른 이야기인 코르친과의 교류에 관한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1617년 음력 10월 14일 코르친의 밍간계 왕공인 밍간의 오남 바트마가 누르하치를 방문한 것이 바로 이와 관련한 이야기이다.
바트마의 방문은 지난 1615년 상가르자이와 일두치3가 후금을 방문하여 말을 바치고 예물을 받아간 것, 1616년 하탄 바투루 타이지가 방문하고 1617년 음력 1월 초에 밍간이 직접 후금을 방문한 사례로부터 이어지는 정기 교류의 일환이었다. 바트마는 50여명의 사절단과 함께 예물로 바칠 말 50필을 데리고 왔는데 이는 밍간의 방문을 제외하고는 최대규모의 예물 진공이었다.4
하지만 1617년 말의 코르친 왕공의 방문의 경우 이전과 다르게 바트마의 방문 1회로 끝났다는 것이 이전의 매해마다 이루어진 코르친의 후금 예방과의 차이점이었다. 1615년에 2회, 1616년의 경우 1617년 초의 밍간의 방문과 합쳐 여전히 2회였던 것에 비하여 이 때에 오직 1회의 방문만이 있었던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다만 유추해 보자면 이 때에 누르하치가 코르친측에 명나라와의 전쟁에 협조해 달라는 요청을 보낸 탓일 가능성이 존재한다. 보다 나중에 후술하겠지만 이 무렵 누르하치는 여러 세력들(칼카를 비롯한 몽골계, 조선)과 외교적 소통을 주고받거나 혹은 최소한 서신을 보내면서 명과의 전쟁에 협조하여 자신과 함께 명을 치자는 설득, 혹은 최소한 중립을 지키라는 요구를 하고 있었다. 비록 정확한 사료는 남지 않았으나 코르친 역시 그 대상이 되었을 가능성이 농후한데, 아마도 누르하치는 이 때 자신을 방문한 바트마에게도 자신이 명나라를 상대로 전쟁을 한다면 바트마의 부친인 밍간과 코르친 (좌익 계통) 세력이 자신을 도울 수 있겠느냐는 참전 의사를 질문하거나, 혹은 더 나아가 밍간에게 전쟁에 참전할 것을 요청/요구하는 자신의 뜻을 전달하라고 요구했을 가능성이 존재한다.
누르하치는 지금까지 코르친의 밍간 계통, 즉슨 좌익층과 지속적인 교류를 주고 받고 정략혼 관계까지 구축했다. 그는 그 과정에서 코르친과 자신간에 상당한 관계 진전이 이루어졌다고 판단하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렇기에 바트마에게 이러한 요구를 전달하면서 코르친이 자신에게 협조할 것을 내심 기대했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막상 요구를 받았을 바트마로서는 이러한 요구가 난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물론 누르하치에게 대놓고 내색하진 않았겠으나, 그렇다고 이러한 제안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누르하치의 제안이 바트마에 의해 밍간, 혹은 2차 예방을 위해 후금으로 떠날 준비를 하던/ 이미 코르친령을 떠나서 후금으로 오고 있던 왕공에게 전해지고, 그 결과가 부정적이었다는 것은 매 해마다 후금에 방문했던 코르친의 2차 사절이 당해에 후금에 방문하지 않은 것을 통해 유추할 수 있다. 누르하치가 명나라에 전쟁을 선포한 뒤로 코르친이 얼마간 후금과의 교류를 자제했던 것을 생각해 보자면 확실히 밍간은 누르하치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끼어들 생각이 없었다. 초기의 명-후금 전쟁(총칭 명청전쟁) 당시 코르친의 행보를 보아도 코르친은 최소한 1618년에는 누르하치에게 직접적으로 협조치 않은 것으로 파악된다.
바트마가 코르친으로 돌아가고 얼마 뒤, 누르하치 역시 코르친이 자신의 편을 들지 않는다는 것을 파악했을 것으로 보인다. 코르친과의 동맹에 막대한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결과가 나온 것에 씁쓸했겠으나, 그렇다고 하여 누르하치가 코르친에 대해 희망을 버린 것은 아니었다. 코르친과의 관계는 향후 상황을 봐서 추가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을 뿐더러, 코르친 본 세력은 참전치 않았으나 코르친의 종속 세력이라고 할 수 있던 사할차/구왈차의 경우에는 전쟁에 참여한다는 의사를 타진했기 때문이다.5
사할차가 전쟁에 참전한 것이 코르친의 의도에 의한 것인지, 즉슨 밍간이 자신이 직접 전쟁에 참여치 못하는 것에 대한 양해의 뜻으로 대신 종속세력인 구왈차를 참전시킨 것인지 아니면 사할차가 누르하치와의 정략혼관계에 따라 코르친의 의중을 무시하고 독립적으로 참전한 것인지는 확실치 않으나, 누르하치로서는 그나마 다행인 결과였다.
또한 누르하치가 코르친에 대한 연대가 실패했다고 하여 다른 몽골 세력들과의 연대에 좌절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코르친 뿐 아니라 다른 세력들과의 연대를 모색했다.
1.조선에서는 여전히 건주로 여겼다.
2.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61113620
3.통고르라고도 한다.
4.만문노당 정사년 음력 10월 14일
5.이 시기 호칭되는 사할차는 구왈차와 동일 세력으로 판단된다. https://bbs.ruliweb.com/community/board/300143/read/593203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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