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쓴 후금 건국사 시리즈 모음(1~100편/번외 50편)
지금까지 쓴 후금 건국사 시리즈 모음(101~205편/번외 51~101편)
1593년 음력 9월 여허의 나림불루는 본인들의 세력을 포함하여 9개1나 되는 세력으로 구성된 연합군을 통해 한참 빠르게 성장하면서 여허의 위치를 노리고 있던 건주의 누르하치를 상대로 공격전을 시도했다. 기록상 3만에 달하는 대군을 동원한 여허의 공격은 구러산 일대에서 누르하치가 직접 지휘하는 건주의 방어군에 의해 연합군이 대패하면서 참혹한 실패로 끝났다. 해당 전투에서 연합군의 수뇌중 한 명이던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에게 사로잡혔고 부자이는 전사했다. 나림불루는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지만 뼈아픈 실패에 고통스러워 했다.
1597년, 구러산 전투로부터 4년여가 지난 시점에서 나림불루는 누르하치측에게 삽혈동맹과 동시에 정략혼을 제안했다. 지난 전쟁 이후로 누르하치의 영향력이 빠른 속도로 커진 반면 여허는 상흔을 회복치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던 데다가 당시 누르하치가 본인이 포로로 붙잡고 있던 부잔타이를 울라로 돌려보내어 울라의 권력을 잡게 함으로서 건주-울라간 연대체계가 구축될 징조가 보였기 때문이다. 이 때 정략혼 대상으로 거론된 이들 중 하나는 긴타이시의 딸, 즉슨 나림불루의 조카딸과 누르하치의 차남 다이샨이었고 또 하나는 나림불루의 사촌 부자이의 딸, 즉슨 당시 서여허의 버일러였던 부양구의 누이였다.
이전에 [누르하치 전기]에서 한 차례 다루었듯 이 혼담은 여허측의 취소와 대건주 적대기조 강화로 인해 취소되었다. 이 이후 긴타이시의 딸은 옹기라트의 자이사이에게 시집을 갔지만, 부양구의 누이는 한참동안 시집을 가지 못했다. 그녀는 햇수로 거의 18여년간 시집을 가지 못했는데, 세력간 정략혼을 통한 외교관계 진전/혼인동맹이 빈번했던 관외 북방세력의 지배층 혼인 특성을 제외하고 생각해보더라도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상당히 늦게까지 시집을 못간 경우였다. 중간에 시집을 갈 기회가 존재했으나 상황으로 말미암아 번번히 무산되어 그런 상황에까지 이른 것이라 추론할 수 있다.2
1615년에 이르러서 여허는 오래토록 외로이 여허에 남아 있던 부양구의 누이를 다시 한 번 정략혼의 매개체로 가용코자 했다. 대상 세력은 이전 1597년 무렵 긴타이시의 딸이 시집을 간 옹기라트였으며, 대상 인물은 해당 세력의 수장중 한 명인 바가다르한의 아들 망굴다이였다. 여허가 이렇게 부양구의 누이를 시집보낼 것을 결심한 까닭은 당시의 외교 상황이 그들에게 어느정도 유리하게 작용하고 있던 차였기 때문이다. 여허는 외교적으로 숨통이 트인 틈을 이용해 지금껏 '애물단지'에 가깝게 존재해왔던 부양구의 누이를 옹기라트와의 정략동맹에 투입하여 옹기라트와의 관계를 공고히 하고자 했다. 누르하치와 그의 버일러, 암반(신하)들은 이를 무척이나 고깝게 여겼고 실제로 버일러, 암반들은 정벌을 주청하기도 했으나 누르하치는 이를 여러 이유를 고려하여 결국 실행치 않았다.3
만문노당으로 이 당시의 기록을 살펴보자면 이 때 누르하치는 여허에 대한 정벌을 주청하며 부양구의 누이를 확보해야 한다고 한 이들에게 전쟁을 통해 부양구의 누이를 확보한다고 하더라도 부양구의 누이는 지금껏 수많은 나라들을 망하게 하느라 많은 힘을 써온 악녀이기에 얼마 못가 죽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것은 건주가 그녀를 확보하건, 아니면 다른 곳에 시집을 가던 마찬가지일 것이라고도 하였으며 건주가 그녀를 데리고 있는 상태에서 그녀가 죽는다면 건주에게 분명 불행한 일로 작용할 것이라고도 하였다.4
당시 부양구의 누이의 나이는 비록 오래 세월 혼인을 못해 혼기를 놓쳤다고는 하나 여전히 33세에 불과하여 가까운 시일내에 죽음을 예상하기 어려웠다. 부양구의 누이가 병약했기에 누르하치가 요절을 예상할 수도 있었으나 망굴다이에게 정상적으로 시집을 간 것으로 보건대 최소한 당시에는 병환등을 앓고 있지 않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당시 누르하치가 부양구의 누이가 머잖아 죽을 것이라 주장한 것은 실제 실현가능성은 그리 크지 않은 예측이었다. 출산등의 문제로 인한 사망을 예측할 수 있긴 하지만 최소한 이 시점에서는 그 가능성이 높다고 하기는 애매했다. 누르하치가 이때 어차피 부양구의 누이가 머지않아 죽을 것이라고 한 것은 안그래도 내부상황이나 외교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 와중에 그녀의 혼인같은 사안으로 전쟁이라는 큰 부담을 감당하고 싶지 않은 누르하치의 의지의 발현의 일환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부양구의 누이는 실제로 망굴다이에게 시집을 간지 1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요절했다. 요절의 원인은 확실치 않은데 시기를 생각해 보건대 아무래도 병환이나 물리적 사고보다는 난산(難產)등 출산 문제로 인한 사망으로 판단된다.
구만주당과 만문노당등 원본 만문사료에는 부양구의 누이의 망굴다이와의 혼인의 후일담에 대한 부분, 즉슨 부양구의 누이의 사망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다. 그저 부양구의 누이의 정략혼과 그에 대한 후금 내부의 반응 및 누르하치의 대응과 관련한 부분만이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실록이 편찬되면서부터는 부양구의 누이의 죽음에 대한 서술이 해당 사건과 관련하여 첨입되었다. 한문본 무황제실록에서부터 '정말로 (누르하치의 말대로) 그 여자(부양구의 누이)가 몽고에게 시집을 간 지 1년도 못되어 죽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5, 만문본 만주실록 역시도 비슷한 논조로 서술하고 있다.6고황제실록 역시도 마찬가지다.7
이렇게 부양구의 누이가 죽은 시기를 기사에 첨입하고 '정말로 태조의 말대로 일이 이루어졌다'는 논조가 더해진 까닭은 아무래도 누르하치가 부양구의 누이가 얼마 안가 죽을 것이라는 것을 빗맞추지 않고 정확히 예측했다는 것을 기록에 실어 태조(누르하치)의 행적에 앞일을 예측하는 신묘한 모습을 더하여 그를 숭상하기 위함으로 풀이된다. 그로서 누르하치를 하늘이 내린 인물로서 서술하고자 한 것으로 풀이된다.
결과적으로 부양구의 누이가 옹기라트로 시집을 갈 당시 누르하치가 그녀가 얼마 안가 죽을 것이라고 한 것은 확실한 근거를 기반으로 한 예상이라고 판단하기가 쉽지 않다. 이는 당시 사세상 전쟁을 일으키는 것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던 누르하치가 전쟁론을 부정하기 위해 큰 근거 없이 초자연적 요소에 기반하여 거론한 예측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부양구의 누이가 실제로 얼마 안가 죽자, 후금/청은 실록에 이 사례를 인용하여 누르하치의 행적에 신묘함을 덧붙이고자 했던 것으로 풀이된다.
1.동여허와 서여허를 분리하자면 10개이지만 이는 특별히 거론치 않는다.
2.이에 대해서는 후술
3.이에 관한 자세한 것은
4.만문노당 을묘년 음력 6월
5.태조무황제실록 을묘년 음력 6월, 其女聘與蒙古未及一年果亡
6.만문본 만주실록 을묘년 음력 6월, tere sargan jui be monggo de bufi emu aniya onggolo yala goidahakv vucehe.
7.청태조고황제실록 을묘년 음력 6월, 尋葉赫以此女嫁蒙古, 未一年果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