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17년 음력 1월 밍간과의 회동이 있던 도중에, 누르하치는 4백명의 군병을 차출하여 동해 여진으로 파견하였다. 해당 원정은 지금까지 존재했던 일반적 유형의 동해 여진 원정들과는 달리 1616년 음력 5월에 발생하고 반년여만에 진압된 보지리의 난의 잔존 세력에 대한 소탕을 주요 목적으로 삼았던 것으로 보인다. 해당 군병들은 6개월간의 작전 끝에 허투 알라로 복귀했는데, 3천여의 노획과 1백여의 가호를 확보하는, 투입 규모에 비하여서는 상당한 전과를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반란의 지도자였던 보지리를 붙잡지 못했다는 옥의 티를 범했다.
누르하치로서는 보지리를 붙잡지 못한 것이 아쉬웠을 터이지만 더 이상 보지리에 연연치 않았다. 그의 세력이나 연대 세력은 대부분 후금에 복속되었고, 나머지는 산산히 흩어졌으므로 더 이상 후금에 위협이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누르하치는 더 이상 보지리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당분간 외교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외교 활동이라곤 하지만, 이 시기부터의 누르하치의 외교 활동은 명나라와의 대립에 대한 실질적인 준비에 해당했다.
누르하치는 이 무렵부터 후금을 압박하는 상황의 해소를 위해 무력을 쓸 결심을 이미 마음먹은 상태였다. 지금의 상황이 유지되는 이상 자신의 여허 병합에 대해 명나라의 지지를 받기는 요원하리라 여긴 것으로 보이는데, 그 결정적 계기로 1616년의 월경인 문제로 인한 마찰에서 이유한의 경제/외교적 압박에 의해 자신이 끝내 잘못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큰 역할을 했던 것 같다.
겅기연 한 즉위, 즉슨 실질적인 후금 건국 이후로도 요동아문에 사절을 보내고 교역을 계속해서 이행하는 등의 행보를 보였던 것이 누르하치였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이 '적법하게' 처리한 월경인 문제 탓에 요동아문측이 자신이 보낸 사절들을 억류하고 시장을 폐쇄하는 등의 조치를 취하며 자신에게 잘못을 인정하길 요구한 것에 대해, 누르하치는 상당한 불만을 품은 것으로 보인다. 비록 당시 요동순무인 이유한과 누르하치 모두가 충돌과 손해를 경계하여 대립선에서 한 발짝씩 물러나긴 했으나, 누르하치로서는 결과적으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하는 제스쳐를 취하여야 했다. 그리고 그것이 외교적 해소책만으로는 명나라가 자신의 여진 통합과 정치적 권위를 인정치 않으리라는 판단에 결정타를 가했다고 생각된다.
물론 그 이전부터도 명나라의 외교적 압박은 누르하치에게 상당한 불만을 쌓아왔다. 하지만 명나라에 대한 불만이 많이 쌓였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후금을 건국한 직후까지는 누르하치가 외교를 통하여 자신의 권위와 여진의 통합을 인정받는 희망을 완전히 놓진 않았을 가능성이 정황상 존재한다. 누르하치가 자신의 겅기연 한 즉위를 명에 대한 도전의지 표명이 아니라 명과 자신간 외교관계 변화의 주요 전환점 정도로 삼으려 했다는 논지는 이러한 해석과 상호교환적으로 교류된다.
그에 의하면 겅기연 한 즉위 직후까지만 해도 누르하치는 명의 현재 변경정책(여진 세계의 이원화 유지)에 대해 반대하고 협조치 않되 전쟁까지는 의도치 않고, 세력의 독자화를 통해 관계를 재조정한 뒤 외교적 노력을 통해 명의 지지를 받아 여허를 병합하고 통합된 여진 경제권과 정치권을 확보하는 노선으로 가닥을 잡으려 했으나 결국 이미 미운 털이 박힌 세력으로서 명의 변경정책를 외교적으로 돌파하는데에 한계를 느끼고 군사적 행동을 취하기를 결심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전략이 관외에 강력한 세력이 등장하는 것을 전혀 반기지 않는, 그리고 이미 건주/후금에 대한 경계심이 극도로 상승해 있던 명나라에 먹힐리는 만무했으나 당시의 누르하치로서는 어느 정도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가졌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누르하치가 무슨 생각을 하였건간에, 1617년 시점부터 누르하치는 확실하게 명나라와의 충돌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누르하치는 여러 외교적 조치를 취했는데 그 중 하나는 후금에 특히 협조적인 칼카 5부 세력이었던 바유트의 엉거더르와 정략혼 관계를 구축하는 것이었다.
엉거더르는 지난 1605년, 후금이 아직 건주였고 누르하치가 아직 일개 버일러였던 시절 허투 알라를 최초로 내조하여 누르하치에게 경건한 예를 취하고 예물을 바쳤었다.1 1606년에는 누르하치에게 아예 한(본인으로서는 칸)의 존호를 바쳤고, 그로 인해 누르하치가 쿤둘런 한으로 불리며 여진 및 몽골 세계에서 명실상부히 '왕'의 위치를 점유하게 되었다.2그 이후 1617년까지 잠시동안은 기록이 보이지 않으나, 그 중간 시기에도 건주/후금에 적극적으로 협조했을 것으로 유추된다.
이렇게 보면 엉거더르는 맹목적인 누르하치의 추종자처럼 보이나, 사실 이 시점의 엉거더르가 그러한 절대적인 추종자 같은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엉거더르는 바유트의 유력 계승자로서 건주/후금과의 관계 개선을 통하여 바유트의 생존과 발전, 그리고 자신을 비롯한 바유트 지배층의 생존을 도모했을 것이며, 그 방법으로 한참 성장세를 타고 있던 누르하치에게 고개를 숙이고 그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하는 방법을 택하여 이렇게 누르하치를 도운 것으로 판단된다.
엉거더르가 무슨 이유로 누르하치에게 협조를 했건간에, 엉거더르의 도움은 실제적으로 누르하치에게 도움이 되었다. 그러한 엉거더르의 행보 탓에 엉거더르는 몽골 세력계 왕공중에서는 가장 친후금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할 만했다. 뿐만 아니라 엉거더르는 바유트의 유력자로서 차후 바유트의 지배권을 계승할 만한 유력한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후금으로서는 상당히 유망한 조력자였다.
누르하치는 그런 엉거더르에게 자신의 조카딸이자 양녀인 순다이를 시집보내어 후금 왕실과 종친 관계로 엮고자 했다. 엉거더르는 안그래도 후금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싶어한 인물이었기에 그런 누르하치의 의사를 별 고민없이 받아들였다. 양측 모두에게 이득이 되는 이 정략혼의 결과 음력 2월에 실제적인 결혼이 진행되었다.3 엉거더르는 이후 약 5개월간 후금 땅에서 새 부인과 함께 기거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후 음력 7월에 누르하치에게 자신의 기존 부인을 다른 사람에게 재가시키고 후금으로 돌아와 순다이와 함께 바유트의 땅으로 돌아가겠다고 하였다.4 그것은 정처가 있는 이상 순다이가 후처로서 제 1의 자리를 차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논리에 따라 누르하치의 족녀인 순다이는 당연히 엉거더르의 최고 부인이 되어야 했다.
엉거더르의 정처는 엉거더르 본인이 했던 말과는 다르게 엉거더르와 이혼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5 하지만 처로서의 위계는 당연히 순다이가 으뜸으로 바뀐 것으로 유추된다. 이 이후 엉거더르는 후금의 왕실 부마로서 흔히 엉거더르 어푸라고 칭해지게 되었으며, 누르하치에게 가장 먼저 충성한 몽골계 왕공중 한 명 답게 최대의 예우를 받았다. 그 역시도 이에 대해 보답하여 홍타이지 치세까지 후금/청을 위해 일했다.
1.만주실록 을사년
2.만주실록 병오년 음력 12월
3.만문노당 정사년 음력 2월
4.만문노당 정사년 음력 7월
5.만문노당 정사년 음력 10월
(IP보기클릭)114.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