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국지전도)
1593년 음력 9월, 누르하치가 이끄는 건주군과 여허의 버일러 나림불루, 부자이가 이끄는 9개 부족의 연합군이 건주의 허지거 성(hejigei hoton)과 구러산 일대에서 맞붙었다. 나림불루, 부자이가 이끄는 대(對) 건주 연합군은 무려 9개나 되는 세력이 연합했던 만큼 기록과 투항자의 언급상 약 3만에 달하는 대군이었고, 누르하치는 이에 비해 절대적인 열세인 상황이었다. 하지만 누르하치는 이들을 적절한 도발로 유인, 함정에 빠뜨림으로서 상대의 숫적 우위를 무력화하고 그 상황에서 적장 부자이를 전사시키면서 승세를 확보했다. 이후 건주군은 퇴각하는 연합군을 추격하면서 추가적인 타격을 입혔고, 그 과정에서 또 다른 적장인 울라의 버일러 부잔타이 역시 생포했다.
기록상 파악되는 연합군 세력의 전사자는 약 4천 정도로서 아주 많진 않으나 이 과정에서 발생했을 포로와 물자손실등을 생각해 보자면 해당 전투에서 9개 부족 연합군이 입은 피해는 무시될 수 없었고, 뭣보다도 누르하치의 가장 큰 경쟁자였던 여허의 버일러중 한 명인 부자이가 전사했으며 동시에 울라의 버일러중 한 명이었던 부잔타이가 건주군에게 생포되었다는 점에서 해당 전투는 건주군의 완승이자 여진 세계의 패권이 누르하치에게로 넘어가기 시작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9개 부족 연합군의 일획으로 참전했던 코르친 세력, 보다 자세히 언급하여 눈 코르친(nūn korcin)세력의 참전자들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견이 존재한다. 눈 코르친1 세력은 여허와의 무역관계를 기반으로 한 제휴 탓에 여허의 의도에 따라 건주 공격에 참여한 것이었는데, 기록에 따라 전투에 참여한 수장들이 다소 엇갈리는 것이다.
만주실록을 포함한 청태조실록에 의하면 1593년 음력 9월의 전쟁에 직접적으로 종군한 코르친 세력 지도자는 밍간, 망구스, 웅가다이였다.2 이 중에서 밍간과 망구스는 코르친 좌익계 지도자로 도랄 노얀 남사이의 후계자들이었고 웅가다이의 경우 우익계 지도자로서 치치케이의 후계자였다. 이는 9개 부족과의 전쟁 도중에 건주군에 투항한 포로의 공술로도 증명되는데 당시 건주군에 투항한 여허 소속 9부 연합군 병사는 코르친의 종군 수장들로 위의 세명, 밍간, 망구스, 웅가다이를 언급했다.
이러한 수뇌부 구성은 당시 코르친의 최고 수장들 중에서 '콩고르'가 빠진 구성이다. 콩고르는 밍간, 망구스와 형제였던 코르친 좌익계 수장이었다.
그런데 만문노당 경신년 음력 4월 17일의 기사에 언급된 누르하치가 칼카 5부에 송부한 서신을 살펴보자면, 해당 서신에 기록된 1593년 전쟁의 코르친의 종군 지휘관은 위 청태조실록에 기록된 것과 약간의 차이가 존재한다. 해당 서신에는 밍간, 망구스, 웅가다이와 더불어 청태조실록에는 제외된 콩고르가 기록되어 있다. 즉, 코르친의 수뇌부가 모두 종군했다고 언급한 것이다.3
뿐만 아니라 청태종실록에도 이러한 언급이 존재한다. 천총 8년 3월, 홍타이지가 잉굴다이와 마푸타를 조선에 파견하면서 인조에게 전달케 한 국서에는 이전 9부 연합과 부친 누르하치의 전쟁에 관한 바가 약소하게 언급되고 있다. 여기서도 역시 밍간, 망구스, 웅가다이와 함께 콩고르가 종군을 했다고 언급되고 있다.4
두 기록간의 차이로 인해, 과연 콩고르가 종군을 했는지 안했는지에 대해서 여러가지 추론이 발생한다. 몇 가지 가능성이 존재하는데, 그를 열거하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로 청태조실록의 기록대로 실제로 콩고르가 종군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만문노당과 청태종실록등에서 콩고르가 9부 연합군에 종군했다는 것은 콩고르가 코르친의 수장중 한 명이었기 때문에 실제로 참전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후금측에서 자연스레 착오하여 종군자로 언급한 것이고, 실제로는 청태조실록에 언급된 밍간, 망구스, 웅가다이만이 종군했다는 추론이다.
해당 추론에서는 또 두 가지 가능성이 발생되는데, 콩고르가 다른 수장들과 같이 9부 연합군에 참전하긴 했으나 본인이 직접 종군을 하지는 않고 병력과 대리지휘관만 보낸 뒤 본래의 영토에 남았을 것이라는 가능성과 아니면 다른 세 명의 지도자들과 달리 아예 해당 전쟁에 참전을 안했을 가능성이다. 전자의 가능성의 경우 울라의 만타이와 비슷한 경우를 상정한 가능성인데, 만타이의 경우 자신의 동생인 부잔타이를 대리자로 내세워 울라군을 참전시켰다. 콩고르 역시 이와 같은 행보를 보였다는 추론이다.
둘째로 만문노당과 청태종실록의 기록대로 실제로 콩고르가 종군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이는 건주군에 투항한 여허 병사의 진술 기록을 바탕으로 태조실록을 작성한 탓에, 혹은 다른 이유 탓에 콩고르가 태조실록의 기록에서 누락되었을 뿐이며, 실제로는 만문노당과 청태종실록의 언급대로 콩고르가 직접 전쟁에 종군했을 것이라는 추정이다. 그 다른 이유로는 콩고르가 다른 코르친 수장들과 달리 본대에서 함께 하지 않고 별동대나 후군(後軍)으로 활동했기 때문에 누락되었을 가능성과 같은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필자의 경우에는 당시 코르친의 대부분의 수장들이 전쟁에 직접 종군한 것을 생각해 보건대 콩고르가 1593년의 전쟁에 참전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본다. 그러나 만문노당에 언급된 1620년 칼카 5부를 향한 누르하치의 서신, 그리고 홍타이지가 조선에 보낸 서신등보다 뒤늦게 편찬된 태조무황제실록이 앞선 기록들의 오류를 바로잡고 편찬되었을 가능성을 생각한다면5콩고르가 직접적으로 종군하지 않았을 가능성 역시 무시할 수 없다. 그러나 이 경우 다른 형제들, 그리고 웅가다이와의 불화로 인해 종군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앞서 언급했듯이 만타이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저 대리지휘관을 세우고 본인은 영지에 남았을 가능성이 클 듯 하다.
1.이하 코르친
2.만주실록 계사년 음력 9월, 청태조고황제실록 계사년 음력 9월
3.만문노당 경신년 음력 4월 17일.
4.청태종실록 천총 8년 음력 3월 18일
5.만문노당의 경우 편찬시기가 건륭제 시기이나 이는 기존의 구만주당을 복원한 탓이다. 태조조 만문노당에 실린 서신과 기록의 원본은 무황제실록보다 앞섰다고 평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