삽화 출처 : 칼부림
1601년 조선의 북병사 이수일은 약 2천 5백여명의 군병을 동원하여 온성 경내 심처의 여진 세력인 수을허와 교로 부락을 정토하고 그에 대한 치계를 올리면서 정토의 본격적인 보고에 앞서 수을허와 교로에 대한 정토의 명분을 언급했다. 이에 따르면 조선이 수을허와 교로 부락을 정토할 때에 내세운 명분은 그들이 1600년 음력 8월 무렵 종성 인근의 번호 아당개와 연대, 그의 속하로 굽히고 들어가는 동시에 홀적(忽敵)과 손을 잡고 여러 친조선계의 번호들을 습격하였으며 동시에 온성을 공격하였다는 것이다.1이는 다른 시기에 존재했던 온성 전투들과 구분하여 1600년의 온성 전투로 지칭할 수 있을 듯 하다.
여기서 여진 세력들의 봉기의 주모자격인 아당개와 그와 함께한 교로, 수을허 부락이 손을 잡았다던 홀적은 바로 해서여진계 세력으로서 당시 누르하치의 건주, 그리고 나림불루의 여허등과 함께 경쟁하고 있던 북방세력 울라를 지칭한다. 홀적은 홀온 혹은 홀라온의 앞글자인 홀(忽)에 적(敵)자를 붙여 적대세력으로서 지칭한 명칭인데, 홀온 혹은 홀라온은 울라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훌룬의 한문음역으로서 조선에서는 당시에도 울라를 홀온이나 홀라온 등으로 지칭했다.2
위의 기록을 신뢰한다면 울라의 한(han, 임금)/혹은 버일러인 부잔타이의 조선 인근 번호 및 조선 변경 육진 지역에 대한 무력을 이용한 공략은 1600년에도 직접적인 단초가 보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보통 1603년부터 울라의 부잔타이가 누르하치와의 경쟁을 위해 본격적으로 번호들을 공략하기 시작했다는 논조를 많이 답습한다. 대표적으로 장정수와 한성주를 들 수 있는데, 해당 학자들은 1600년의 온성 전투에 대해 인지하면서도 부잔타이의 조선 및 번호들에 대한 공략이 1603년 음력 8월에 있었던 종성 및 동관 공격 시도를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판단했다.34
필자 역시 1600년의 온성 전투의 경우 1603-06년의 울라의 번호 공략과 조선과의 충돌과는 독립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판단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1600년의 온성 전투 및 그 부속 사건인 아당개와 친조선파 번호들간의 싸움에서 아당개와 교로, 수을허 부락이 조선 및 친조선 여진세력들에 대한 적대 세력으로서 활동한 것은 확실하지만 울라의 경우 사태에 개입한 것이 확실치가 않다. 조선의 기록상 해당 교전에 울라가 참전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실제로 울라가 참전한 것인지 아니면 조선의 판단오류로 말미암아 착오된 일인지는 확실히 하기 힘들다는 뜻이다.
1603년에 발생한 조선 변경에 대한 여진 세력의 대규모 공격이나 1605년의 동관 공격은 울라가 자행한 것이 확실하다. 그것은 조선측의 관측이나 번호들의 공술로 울라의 개입을 파악했을 뿐 아니라 울라가 실제적으로 포로들을 석방하면서 조선측에 본인들의 의사를 전달하고 나아가 서신까지도 보내면서 본인들이 침공의 주체임을 여실히 드러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1600년의 온성 전투의 경우 조선군의 관측과 번호의 공술5로만 상황이 파악되었기 때문에 확실히 울라가 개입했는지에 대해 확답을 내리기가 다소 힘들다.
당시 울라의 경우 건주에게 안출라쿠 지역에서의 주도권을 다시 빼앗긴 상황인지라6 당장 조선과 가까운 지역에 대해 큰 영향력을 발휘하기가 힘들었을 뿐더러, 당시의 시기는 울라가 조선과 번호에 대해 공격을 가하기로는 너무 애매한 시점이었다. 또한 조선측이 울라가 참전했다고 파악했다고 하더라도 당시 조선은 자신들과 교전한 세력이나 자신들을 적대한 세력에 대해 오인하기도 했으므로 조선군의 관측과 번호의 공술을 전적으로 신뢰하기에도 다소의 무리가 존재한다.
온성 전투가 있은 뒤에 울라의 사신 겸 체탐자인 만도리가 조선의 변경에 접근했다가 조선에 의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던 만큼, 이 사건과 온성 전투를 결부지어 울라가 온성 전투와 관련이 있었다고 할 수도 있다. 실제로 당시 조선측, 정확히 말하자면 온성측은 온성 전투에 울라가 개입했다고 판단하고 있던 차에 울라 소속의 만도리가 변경에 나오자 만도리가 온성 전투 이후 재침을 위해 정탐을 하러 나온 것으로 판단하여 살해했다.
하지만 이 부분 역시도 재고의 여지가 있다. 만도리가 나온 시점은 사실 온성 전투 뒤라고는 하나 실제로는 온성 전투가 있던 시기로부터 해가 지난 1601년으로서 아무리 못해도 최소 4개월, 넉넉 잡으면 1년 이상의 시간이 지난 시점이었다.7이렇다보니 울라가 조선 변경에 만도리를 파견한 사실만으로 울라가 온성 전투와 관련이 있었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다. 울라로서는 온성 전투와 상관없이 단지 번호의 내속을 위해 사신 겸 체탐자인 만도리를 파견했으나 조선측에서는 당시 울라가 온성의 공격에 힘을 보탰다고 파악하고 있었기에 그로부터 반년~1년이 지난 뒤에 조선의 변경에 접근한 만도리를 울라의 2차 공격에 선행해서 파견된 정탐자로 의심하여 오해끝에 처형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런 점들을 생각해 보건대 당시 온성 전투를 촉발시킨 중심인물 아당개가 일부러 당시 가장 강력했던 거대 여진세력중 하나였던 울라의 위세를 빌리기 위해 울라가 실제로 전투에 참전치 않거나 그저 간접지원만을 했음에도 울라가 자신을 돕는다고 선전했을 가능성도 무시하진 못할 듯 하다. 실제로 번호들 중 일부 세력들은 울라의 위세를 빌리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다. 1594년의 조선의 역수 부락 정토 당시에도 역수측은 울라에 지원을 요청했다며 그 위세를 빌리려 하기도 했으나 끝내 지원이 오지는 않았다.8이 외에도 번호들이 울라군이 올 것이라는 정보를 전달했지만 끝내 울라군이 나타나진 않은 사례들 역시도 존재한다.
울라의 개입 가능성 및 울라와 번호들간 연계 가능성에 관련하여 1603년 음력 9월 1일 올라온 북병사 이용순의 치계 내용에는 흥미로운 문구가 존재한다.
[홀라온(울라)는 종성, 온성, 경원 등의 번호와 원수를 맺은 지 이미 오래 되어 전혀 왕래하지 않습니다]9
이는 1603년 동관과 종성 지역이 울라의 공격을 받은 직후 올라간 치계의 내용이다. 물론 실제로는 울라에 협조하던 번호 부락이 풍계부락등 어느정도는 있었을 것으로 사료되나 이러한 기술은 종성 인근의 반호 아당개 및 온성 경내의 수을허, 교로와 울라간의 연대가 실제로 이루어진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보여준다.
물론 그렇다 하더라도 아당개의 봉기에 울라가 실제적으로 개입했을 가능성을 무시할 수는 없다. 비록 확단을 내릴 수는 없지만 엄연히 울라의 참전을 시사하는 기록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당시 온성 전투의 전개과정 역시 비록 단편적 흔적만이 발견되긴 하지만 1603년 당시 울라군이 사용했던 전략과 유사성을 띄고 있다는 것 역시 염두점이다. 앞서 언급했던 만도리의 살해 문제 역시도 온성 전투와 관련이 있는지 확신할 수 없으나 반대로 관련이 없다는 것을 확신할 수도 없다.
둘째로 1600년에 벌어진 온성 전투에 울라가 직접적 개입을 했다고 하더라도, 즉슨 군대를 실제적으로 파병하여 전쟁행위에 동참했다고 하더라도 온성 전투에 대해 언급을 하고 있는 사료를 기반으로 상황을 판단해 볼 때에 어디까지나 종성 인근에서 조선에 대해 반기를 들었던 아당개가 적대 세력의 주축이 된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1603~1606년의 부잔타이의 번호 공략 및 조선군과의 교전은 명실상부히 부잔타이가 스스로 주체가 되어 시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1600년의 온성 전투 및 반호와 번호간 싸움은 그와는 다르게 울라가 참전했다고 하더라도 부잔타이 본인이 중심이 된 것이 아니라 그저 아당개의 싸움에 손을 얹은 모양새로만 파악된다. 그렇기에 흔히 부잔타이의 본격적이고도 주체적인 조선 변경 및 번호 공략 행보에 포함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셋째로 1600년에 벌어진 온성 전투와 주변 번호들에 대한 습격 사건은 1603~1606년에 지속, 연속적으로 이루어진 울라의 번호 침탈 및 조선과의 교전 행위등과 시기적으로 상당히 떨어져 있음을 들 수 있다. 1600년의 온성 전투와 1603년의 동관, 종성 공격전 및 온성, 경원등에 대한 공격등은 약 3년여의 시기 차이가 존재한다. 그 사이에 부잔타이는 조선에 대해 따로 본인이 주체가 되는 공격행위를 하지는 않은 것으로 판별된다. 그러나 1603년부터 시작된 울라의 조선 변경에 대한 공격과 번호 복속 시도는 1605년까지 단절되지 않았으며, 1605년 건퇴 전투 이후 울라가 조선과 번호규례를 기반으로 하여 협약을 맺은 뒤에도 울라는 조선을 상대로 직접적이고도 의지가 확실한 공격을 가하지 않을 뿐 여전히 번호들을 공략하며 조선에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를 기반으로 볼 때에 1600년에 있었던 온성 전투는 1603~1606년의 번호 공략 및 조선과의 충돌과는 본질적으로 떨어트려 놓고 보아야 하는, 독립된 사건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판단된다.
필자는 이를 기반으로 보건대 1600년의 온성 전투와 주변 여진 세력들간 충돌 사태는 울라가 개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없지 않다고 본다. 또한 조선의 기록대로 울라가 개입하였다고 판단하더라도 해당 교전에서 울라가 적성세력의 주체가 되진 않았으며, 그와 연관하여, 그리고 1603~1606년에 진행된 부잔타이의 번호 공략과 관련하여 해당 사건이 울라의 본격적인 번호 공략의 일환 역시도 아니라고 판단한다.
조선의 기록을 기반으로 하여 해당 사건에 울라가 개입되었다고 한다면, 당시 울라의 지도자였던 부잔타이로서 아당개와 연대하여 벌인 1600년의 온성 공격 및 번호 공격은 일종의 시범공격에 가까웠을 것으로 보인다. 누르하치 세력에 대해 대항하기 위해 번호들을 본격적으로 공략-복속하기 전에, 마침 조선에 대해 반란을 일으킨 아당개와 연대하여 번호들과 조선간의 연대체계를 확인해보고 향후 도모 가능성을 확인해 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600년의 온성 전투는 사료와는 다르게 부잔타이가 개입하지 않았을 확률이 다소나마 존재하며, 개입했다고 하더라도 본격적인 번호 공략 및 조선에 대한 공격 시도라고 하기에는 애매하다. 그렇기에 1603~1606년에 존재한 울라의 대번호 공략 및 조선과의 충돌과는 분리해서 분석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사료된다.10
1.조선왕조실록 선조 34년 음력 2월 15일
2.장정수는 울라가 스스로도 여전히 훌룬이라고 지칭했을 것이라는 견해를 보였다. 장정수, 宣祖代 末 朝鮮의 對明 ‘虜情’ 보고와 그 여파, 명청사학회, 명청사연구 51, 2019, p.65
3.장정수, 선조대 對女眞방어전략의 변화 과정과 의미, 조선시대사학회, 조선시대사학보 67, 2013, p.183.
4.한성주, 조선 선조대 후반 忽剌溫 부잔타이[布占泰]의 침입 양상, 부산경남사학회, 역사와 경계 100, 2016, p.279.
5.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8월 24일
6.만주실록 무술(1598)년, 추영과 바야라의 안출라쿠 공략 참조
7.조선왕조실록 선조 38년 5월 15일
8.조선왕조실록 선조 27년 음력 10월 11일
9.조선왕조실록 선조 36년 음력 9월 1일
10. 한편 장정수는 온성 전투에 대해 울라가 개입했을 가능성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내비쳤다. 그러나 1600년 온성 전투에서의 울라의 영향력이나 개입 정도가 상대적으로 약했을 것이라는 데에도 대체적으로 긍정하는 견해를 보인 바 있다. 장정수, 선조대 말 건퇴 전투의 발발배경・경과와 대(對)여진 관계상의 변화, 한국사연구회, 한국사연구 196, 2022.;장정수, 선조대 조선의 對여진 征討와 그 실상―李廷龜의 箚子⋅獻議를 중심으로―,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민족문화연구 94호, 2022.
---
원래 2021년에 써둔 글이고 올리는 것만 2023년에 올리는거라 최신 논문 반영이 미흡해서 10번 각주로 대체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