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 튜튼 기사 수도회가 라보니아와 프로이센을 향한 북동 십자군 당시, 튜튼 기사 수도회는 언제나 수적인 열세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성지 및 여러 전쟁을 겪으면서 튜튼 기사 수도회는 여러 전쟁 기술 중 하나인 석조 성벽을 쌓아 대항했습니다. 당시 발트해 동부는 모르타르(mortar) 제조 기술이 없던 탓에 석조로 쌓은 성벽이 없었습니다.
또한 튜튼 기사 수도회는 이교도의 창과 화살에 대항하여 쇠뇌를 적극 도입했습니다.
튜튼 기사 수도회는 주로 보급과 상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강을 따라 성을 쌓았고 식량과 쇠뇌용 화살을 넉넉하게 쌓아 수성전 때 효율적으로 버텨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꼭 석조 성 만 건축한 것은 아닙니다. 14세기에는 여름 기간 동안 적지에서 원정을 다닐 때는 목재와 흙으로 쌓은 방벽을 건설해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도 튜튼 기사 수도회는 온갖 공성 병기를 선보이면서 이교도의 땅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14세기 후반에는 리투아니아 원정 당시 화기(firearms)를 사용하는 등, 튜튼 기사 수도회는 무기는 꾸준히 혁신적인 행보를 선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적인 도입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튜튼 기사 수도회가 선보인 모르타르를 이용한 석조 성벽은 14세기 초반기에 리투아니아의 성벽을 대부분 대체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프로이센과 리투아니아의 건축 기술 일부를 튜튼 기사 수도회가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1362년 12월에 튜튼 기사 수도회가 사용한 공성포(Lotbüchsen)를 20년 뒤에 리투아니아의 이교도들이 사용해 튜튼 기사 수도회에게 포격을 가했으며 중기병은 더이상 튜튼 기사 수도회 만의 병과가 아니었습니다.
(참고로 프로이센에 분포된 말들은 굳건한, 강인한, 이라는 의미인 스위크Sweike로 불렸고 키는 10핸드였다고 하는데, 지면부터 등성마루의 길이가 100cm를 겨우 넘는 소형말이었으며 리투아니아 프로이센은 경기병으로 사용했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우위는 튜튼 기사 수도회가 가지고 있었습니다. 기반 시설과 자금, 조직력을 넘보긴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튜든 기사 수도회는 쇠뇌 생산과 개량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15세기 초반에 이르러선 18개의 쇠뇌 공방을 가지고 있었고 염소 뿔, 힘줄, 어교를 이용한 합성 쇠뇌를 제작했습니다.
이 관심의 한 예로 1409년에 마리엔부르크(Marienburg)의 쇠뇌 공방엔 1,200개의 염소뿔, 36,000가닥의 힘줄, 1,200정의 쇠뇌를 습기에서 보호하기 위한 자작나무 껍질들이 쌓여 있기도 했습니다.
15세기 초반, 튜튼 기사 수도회가 점령한 프로이센에는 4,500정의 예비 쇠뇌와 백만 발이 있었으나, 타넨베르크 전투(tannenberg battle 1410)에서 패배하며 상당수 소실됐습니다.
출처
(IP보기클릭)221.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