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꺄아아!!! 아이 선배, 멋있어요!!!"
"아이 씨, 완전 멋있어!!!"
"아이 쨩! 여기도 봐줘!!!!!!"
코트 위를 질주하던 미야시타 아이가 멋지게 날아 올라 3점 슛을 성공시키자,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커다란 환호성이 사방에서 울려 퍼졌다.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면서 관중석을 향해 씨익 웃어준 아이는 문득 인파 속에 있는 한 사람을 빤히 쳐다보았다. 시선 끝에 있는 것은 얼굴 그림이 그려져 있는 스케치북으로 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자그마한 분홍 머리 소녀였다. 그리고 그 소녀는 미야시타 아이가 정말 잘 아는 아이였다.
'리나리,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꺅꺅 소리를 지르며 흥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만히 서서 코트를 바라보고만 있는 소녀의 모습에 아이의 마음은 돌을 얹은 듯 무거워졌다. 원래 그녀와 자신은 이런 불편한 사이가 아니였다. 이 학교에서 제일 친하고 사이 좋은 단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된걸까.
한참 고민에 빠져 있는 동안 어느새 경기 시간이 다 흘렀는지, 종료를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복잡한 속마음을 숨기고 평소처럼 씨익 웃고는 오늘 같은 팀이었던 아이들과 하이파이브를 하던 아이는 남 몰래 긴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왜 날 피하는 건데?'
단도직입적으로 물어 보고 싶었지만, 그랬다가 완전히 사이가 틀어져 버리면 어쩔거냐는 걱정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저 애가 앞으로 평생 자길 미워한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너무나도 쓰려서 엉엉 울고 싶어질 정도이다. 이렇게 완전히 겁쟁이가 되어 버린 제 모습이 자기가 생각해도 한심했는지, 아이는 기지개를 쫙 펴며 씁쓸한 웃음 한 조각을 피식 흘렸다.
"...그렇지만 이렇게 평생 살 수는 없잖아"
이러다간 정말 죽어 버릴 것 같다고. 답답함으로 가득 찬 한마디를 툭 내뱉은 아이가 잠시 후 향한 곳은 맨날 들리는 익숙한 장소였다.
LIKE OR LOVE
#
아이 : ...그렇게 됐는데
아이 : 제발 도와주세요!!!
아유무 : 으음, 도와달라고 해도...
시즈쿠 : 아이 씨, 정말 리나 씨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나요?
아이 : 모르겠어!!! 전혀!!!
카린 : 아이는 참 둔하단 말이지. 며칠 전에 리나 쨩이 아무도 없는 곳으로 불러내더니 제대로 말을 전하지 못하고 얼버무리며 돌아섰다. 그리고 그 뒤로 피하는 것 같다라... 이러는 이유는 딱 하나 밖에 없잖아?
엠마 : 맞아, 나도 알겠는 걸?
아이 : 뭐어? 엠맛치까지 알고 있다고? 뭔데, 뭔데? 가르쳐 줘!!!
엠마 : ...
카린 : 저런...
카스미 : 불쌍한 리나코...
시오리코 : 제가 할 말은 아니지만, 아이 씨는 정말 둔감하시네요
카나타 : 평소에 센스는 좋으면서~ 이런 데는 완전 둔감 폭발이네~
세츠나 : 그렇지만 이건 이것대로 좋지 않나요? 이러다가 어느 순간 자기 마음을 자각하고, 바로 그 애에게 달려가서 멋진 고백을...! 아아, 최고예요!
아이 : 둔감하다고, 내가? 으음... 그렇지만... 그나저나 고백이라니 무슨 말이야 그건? 무슨 고백?
세츠나 : ...우와아...
아유무 : 리나 쨩, 마음 고생이 심하겠네...
아이 : 우으, 다들 뭔지 모르겠는 말만 하고!!! 정말!!! 아무튼 제발 리나리랑 다시 친해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카스미 : 후후후, 아이 선배가 무릎까지 꿇는다면 어쩔 수 없네요~ 이 카스밍만 믿으세요!
아이 : 진짜? 완전 고마워, 카스카스~!!!
카스미 : 아, 정말!!! 카스카스가 아니라 카스밍이에요!!!
카린 : 이것 참, 정말 힘들겠네
카나타 : 그렇지만 재밌을 것 같긴 해~ 카나타 쨩, 눈이 번쩍 뜨였어~
#
카나타 : 맛있는 음식을 함께 먹으면 분위기가 부드러워지지 않을까? 대화할 기회도 생기고
카스미 : 맞아요! 거기다가 그게 수제 음식이라면 더할 나위 없죠!
아이 : 헤에... 그럼 내가 직접 만든 음식을 리나리랑 나눠 먹으면 될까?
카나타 : 바로 그거야~
아이 : 으음, 그런가아...
카스미 : 요리는 카나타 선배랑 제가 확실하게 가르쳐 드릴게요! 너무 맛있어서 기절할지도 모른다고요?
아이 : 오, 카스카스~ 자신감이 넘치는데?
카스미 : 카스카스가 아니라 카스밍이라구요!
아이 : 아하하, 아무튼 잘 부탁해. 요리 선생님들!
카나타 : 카나타 쨩, 의욕이 넘쳐~ 열심히 가르쳐 줄게~
카스미 : 카스밍도 마찬가지예요! 정신 차리고 잘 따라오세요, 아이 선배!
~다음 날~
카스미 : 얏호, 리나코! 있잖아, 저쪽에서 카나타 선배가 리나코한테 할말이 있다고 찾던데?
리나 : 카나타 씨가, 나를?
카스미 : 응~ 빨리 가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급한 일 같던데~
리나 : 으응. 알았어. 고마워, 카스미 쨩
카스미 : (이히힛, 성공이네요♪)
카나타 : 카스미 쨩, 엄청 못된 얼굴이 됐어~
카스미 : 네에? 정의로운 얼굴이겠죠! 정의를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데!
카나타 : 그건 포장하기 나름 아닐까아?
카스미 : 우에엥, 카나타 선배! 너무해요!
리나 : 카나타 씨, 날 불렀다고 카스미 쨩이-
리나 : ...
아이 : 아하하하... 안녕, 리나리
리나 : ...아이 씨. 안녕
아이 : 음, 어, 저기... 있잖아! 리나리, 이거 내가 직접 만든 케이크야! 한 입 먹어 볼래?
리나 : ...응. 고마워
리나 : ...
아이 : ...
아이 : (뭐라고, 뭐라고 해야 하지...)
리나 : 이거, 맛있어.
아이 : 그렇지? 아이 씨, 이래 보여도 요리 잘 하거든~
리나 : ...응. 알고 있어
아이 : (어떡하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어. 어색해 죽을 것 같아...)
아이 : 저, 저기! 리나리!
리나 : 아이 씨, 잘 먹었어. 고마워. 그럼 이만 가볼게
아이 : 앗, 아니, 그게... 어어, 그래
카스미 : 에엥? 아이 선배, 괜찮아요?
카나타 : 얼굴이 흙빛이 됐어~
아이 : 나 먼저 부실로 돌아갈게...
카스미 : 조심해서 가세요, 선배! 그렇게 넋 놓고 걷다가 넘어질 것 같아요!
카스미 : 하아...
카스미 : 작전은 완벽했는데! 대체 왜 실패한 걸까요!
카나타 : 글쎄에... 정말이지 바보 커플이네
카스미 : 맞아요. 아, 진짜! 유치한 사랑 싸움은 개도 안 주워 먹는다던데!
#
카린 : 아이는 이런 옷도 잘 어울리는구나
아이 : 우으으, 이런 왕자 옷은 처음 입어 봐
시즈쿠 : 다행히 왕자 역할을 했던 선배 키가 아이 씨랑 비슷해서 말이죠... 자, 그리고 머리를 이렇게-
카린 : 어디 보자. 화장은 좀 중성적인 느낌으로 이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
세츠나 : 우오오오오!!! 완전 왕자님이에요! 그야말로 백마 탄 왕자님!!!! 멋있어요, 아이 씨!!!!!!
아이 : 아하하핫, 셋츠. 그렇게 띄워 주면 아무리 아이 씨라고 해도 좀 많이 부끄럽다고오~
시즈쿠 : 어제 제가 준 대본은 다 숙지하셨나요?
아이 : 그렇긴 한데... 중간 중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데, 괜찮을까?
세츠나 : 아, 괜찮아요! 중요한건 뜨거운 열정과 좋아하는 마음이라구요! 그것만 있으면 진심은 틀림 없이 전해질겁니다!!!!!!
카린 : 세츠나는 오늘도 기운이 넘치네...
시즈쿠 : 세츠나 씨랑 공동 집필 한 대본이라 조금 자연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부분은 애드리브로 적당히 넘겨주세요
아이 : 오케이~ 열심히 해 볼게!
~몇 시간 후~
리나 : (오늘도 빨리 집에 가야겠다)
리나 : ...?!
리나 : 아, 아이 씨?!
아이 : 아아- 드디어 찾았다. 내 운명의 소녀(연인)――――!!!
리나 : 아이 씨, 잠깐... 왜 이러는 거야... 그 옷은 또 뭔데?!
아이 : 널 만나기 위해 억겁의 시간을 반복해왔어... 이젠 절대 놓치지 않아!
리나 : 으우, 저기, 아이 씨, 뭐라고 하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아이 : 자, 가자! 우리들의 낙원(이상향)으로!
리나 : ?!?!?!
아이 : 거기서 네 진심을 듣고 싶어... 나의 소녀(반려)여... 그리고 그 다음이... 으아아, 까먹었어!!!! 어떡하지!!!!
리나 : ...푸훗
아이 : 어라? 리나리, 지금 웃었지? 웃은 거 맞지?
리나 : 리나 쨩 보드 '정색'
아이 : 에엥?!
카린 : 후훗... 미야시타 아이. 드디어 만나게 됐군
아이 : 응? 카린? 아, 아! 맞다! 이 사악한 마왕... 이젠 이 지독한 악연을 끊을 때다!
카린 : 어머, 과연 네 힘으로 날 이길 수 있을까? 옆에 있는 성녀(선택 받은 소녀)가 네 뺨에 뽀뽀라도 해서 도와준다면 모르겠지만, 우후후
아이 : 으윽...!
리나 : 어, 그러니까... 아이 씨, 카린 씨. 난 이만 가볼게. 그럼... 이만
아이 : 앗, 잠깐!!! 리나리!!! 아직 안 끝났는데!!!
카린 : 후우... 역시 실패할 것 같더라
세츠나 : 아아아아앗!!!! 클라이맥스 직전에서 이렇게 싱겁게 끝나다니!!! 아아아아아아아 아쉬워요!!!!!!!
시즈쿠 :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판타지 설정이 많이 들어간 게 아닐까 싶은데요, 세츠나 씨...
세츠나 : 그렇지만~ 원래 저런 스토리가 왕도라고요, 왕도! 두 사람이 힘을 합쳐서 마왕을 쓰러뜨린 뒤, 진실한 사랑을 깨닫고 해피 엔딩으로 직행해야 되는데... 하아...
카린 : 둘이서 대본 쓰는 모습 슬쩍 보니까 시즈쿠 쨩도 신이 나서 거들고 있던데?
시즈쿠 : 예에?! 그, 그건 말이죠... 이런 스토리를 싫어하는 건 아니라구요!
아이 : 아하하하... 난장판이네...
#
시오리코 : 복잡할 수록 곧바르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하죠. 즉, 직구를 던지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겁니다.
엠마 : 나도 그렇게 생각해~
아유무 : 혹시나 미움 받게 될까봐 두렵긴 하겠지만... 피하고만 있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잖아?
아이 : 으으으으! 그래, 맞아! 그게 맞긴 한데! 리나리가 상대도 안 해주니까아...
아유무 : 으음, 그렇네... 그게 제일 큰 문제네
엠마 : 그럼 아예 좁은 공간에 두 사람을 넣고 밖으로 못 나오게 가둬 버리는 건 어때?
시오리코 : 네에?!!?
아유무 : 엠마 씨, 진심이에요?!?!
아이 : 엠맛치?!??!
엠마 : 응? 다들 왜 그래? 도망갈 구석을 없애면 피할 수 없어서 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 볼 수 밖에 없으니까 원활한 대화가 이뤄지지 않을까?
아이 : (저 순수함이 무섭다...)
시오리코 : (역시 동호회 최종 병기...)
아유무 : (엠마 씨...)
시오리코 : 엠마 씨, 감금은 범죄예요
엠마 : 으응?! 감금? 시오리코 쨩~ 그런 무서운 건 하면 안 되지!
시오리코 : ...죄송합니다... 제가 많이 죄송해요...
아유무 : 근데 둘한텐 어쨌든 서로를 마주보고 대화하는 시간이 필요한 거잖아? 그럼 일단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게 중요하지 않을까?
아이 :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
리나 : (아이 씨를 일부러 피하는 거... 고역이야)
리나 : (하지만, 그렇지만...)
아이 : 리나리이이이!!!!
리나 : 응?
리나 : ...으응?!
아이 : 우오오오!!! 아이 씨 돌진!!!
리나 : 자, 자, 잠깐마아아안!!!
아이 : 에잇~ 꼬오오오옥! 드디어 잡았다, 리나리!!!
리나 : 아, 아이 씨. 이것 좀 놔줘...
아이 : 안 돼! 오늘은 꼭 리나리랑 대화를 해야겠어!
리나 : 난 별로 할 말이 없는데...
아이 : 매번 그런 식으로 도망치려고 하고! 오늘은 절대 안 놔줄거야. 리나리의 진짜 마음을 말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리나 : ...
아이 : 난 말야, 리나가 나한테 무슨 마음을 가지고 있어서 계속 날 피한 건진 모르겠지만
아이 : 리나리랑 이런 불편한 관계로 있는 건 싫어! 완전 싫다구!
리나 : ...
아이 : 저기, 그러니까. 제발 솔직하게 말해줘... 어떤 말이 나오든 간에 난 받아들일 수 있으니까!!!
리나 : 아이 씨, 있잖아...
아이 : 응...
리나 : 알겠으니까, 사람 없는 데로 가서 마저 얘기하면 안 될까...?
아이 : 으응? 그게 무슨-
니지가사키 모브코 A : 꺄아아~ 드디어 저 둘이 사귀는 거야?
니지가사키 모브코 B : 어머나, 세상에... 아이 선배 완전 당돌해!!! 역시 니지가사키에서 제일 가는 히어로!
니지가사키 모브코 C : 으으으읏, 너무 좋은 걸 봐서 심장에 무리가...!
아이 : ...
리나 : 부끄럽다고오...
아이 : 어이, 거기. 너희들! 뭘 그리 빤히 쳐다 보고 있는 거야!
니지가사키 모브코 A/B/C : 꺄아아아아~ 죄송해요~~~
아이 : ...다른 데로 가는 게 낫겠네
리나 : 으응...
도망치듯 도착한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동시에 의자에 털썩 앉은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러다 먼저 대화를 시도한 쪽은 리나였다.
"일단... 미안해, 아이 씨"
"으응? 아냐, 리나리가 사과할 일은 아니지!"
"그렇지만... 내가 피해서 마음 많이 상했을텐데"
리나 쨩 보드로 여전히 얼굴을 가린 채 말을 잇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또다시 이어진 침묵 속에서 그녀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옆에 있던 아이는 분위기를 유쾌하게 바꿔 볼 시도조차 하지 않고서, 그저 그런 그녀의 모습을 묵묵히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아이 씨, 기억나? 내가 아이 씨를 불러냈던 날"
"응"
당연히 기억하고 있다. 떨리는 목소리로 아이가 자신을 불러내던 그날. 들었던 보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서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평소와 달리 마구 떨리는 목소리에 몸이라도 안 좋은 건지 걱정했던 것도. 쉽사리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가, 결국 "미안. 아무것도 아니야" 로 끝났던 것도. 미야시타 아이는 전부 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을"
툭. 보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보고 싶었던 얼굴이 선명히 보였다. 힘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그녀는 어쩐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았다.
"제대로 전했다면, 아이 씨는 뭐라고 대답해줬을까"
"리나리...?"
"거절 당할까봐 무서웠어. '좋은 친구로 지내자' 라고 말할 것 같아서 무서웠어"
"그게 대체..."
"그럴 바에는 이 마음을 죽여 버리자고 생각했어. 시간이 지나면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끝내 참지 못한 눈물이 뺨을 타고 크게 한 방울 뚝 떨어졌다. 결국 울어 버리고 만 자기가 부끄럽고 한심했는지 리나는 아랫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걸 바라보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던 아이가 순간 떠올린 것은 과거의 한 목소리였다.
아이 씨는, '좋아해'와 '사랑해'의 차이를 알고 있어?
그때 뭐라고 대답했었더라. 솔직하게 나도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었던가. 그렇게 말하자 리나가 보였던 반응은 어땠었지. 그리 오래된 일은 아닌데, 정말 오래된 과거를 떠올리는 마냥 흐릿하고 군데군데 깨진 채로 기억이 떠올랐다. 꽤 긴 회상에 빠져있던 아이를 퍼뜩 깨운 것은 자신을 바라보는 젖은 두 눈이었다. 눈과 눈을 마주치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고, 머리에 가득 찬 것은 눈 앞에 있는 텐노지 리나. 단 한 사람에 관한 것들 뿐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얘기를 나누며 함께 마주보고 웃던 순간. 하루에도 몇 번씩 꼭 달라 붙어 있던 순간. 입밖으로 굳이 꺼내지는 않았지만, 서로가 함께 했기에 느낄 수 있었던 행복함. 그것들을 손 안에 가득 쥐어서 뭉쳐 봤을 때 나오는 건 '좋아해' 인가, '사랑해' 인가. 너와 나는 지금 흐릿해진 경계선 위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구나.
자각은 사고와도 같은 것이었다. 언제 발생할지도 모르고, 어떤 식으로 진행될지도 모르는.
"리나"
아이가 드디어 몸을 천천히 움직여 리나를 향해 다가갔다. 눈과 눈은 여전히 마주보고 있는 상태로. 상대방의 숨소리가 크게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아이는 한 손을 올려 그녀의 눈가로 가져갔다.
손가락을 조심스레 움직여 리나의 젖은 눈가를 매만지던 미야시타 아이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좋아해'와 '사랑해'의 차이를 알고 싶어?"
경계선을 넘어 새로운 세계로 향하려는 둘을 축복이라도 하는지 따사로운 햇빛이 창으로 넘어와 교실 가득 넘쳐흘렀다.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