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이…”
“같이가요 자매님!”
어딘가 위치한 성당. 한 무리의 수녀들 뒤에서 유독 나이가 어린 수녀 한 명이 달려왔다. 일행 사이에 합류한 수녀는 다른 수녀들을 따라 성당 바깥으로 나왔다.
아침 일찍부터 출발한 버스가 도착한 장소는 노인정. 버스 허리가 열리고 가득 싣고 온 기부품이 하나둘 차례로 꺼내졌다. 익숙한 장소인지 수녀원장이 노인정 직원들과 인사를 나눈다.
바쁘게 바닥을 쓸고 닦고, 창고를 정리하고, 싣고 온 기부 품목의 수량도 확인하고 하나둘 차곡차곡 창고 안에 쌓고…
몇 번의 쉬는 시간이 있었지만 그래도 저녁까지 하루 종일을 일한 끝에야 봉사활동은 끝났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 곯아떨어진 수녀들도 많았다.
“후우… 하…”
자신의 방으로 돌아간 어린 수녀는 침대에 쓰러지듯 누웠다. 그러고서 한참을 죽은 듯 가만히 있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으아, 아. 답답해 죽겠다!”
토도도독-!! 치마의 스냅단추를 한번에 왕창 뜯어내자 치마에 없던 옆트임이 생겼다. 발목, 종아리, 허벅지를 넘어서 골반까지 쫙 치마가 트였고 두건도 한번 뒤로 잡아당기니 앞머리와 옆머리가 파악 두건 바깥으로 터져 나왔다.
“아… 후우… 이러다 죽겠다. 일하다 죽겠다… 천사님… 이러다 천국으로 승천하겠어요…”
반짝거리던 눈빛도 어느새 생기가 사라진 죽은 눈이 됐다.
성 트르 수도회의 막내 수녀 ‘이이사’는 완전히 탈진해버려서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싶지 않았다.
이사는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냈다. 화면이 켜지자 비혜, 하문, 우리 삼환마 트리오와 함께 찍은 사진이 배경으로 떠올랐다. 연락도 와있었다.
“아… 깨톡왔네. 에라 몰라. 좀 있다 읽자.”
-“환복은?”
“좀 더 쉬다가요… 으… 틱택이랑 쇼츠 좀 봐야지…”
침대에 누운 채로 이사는 스마트폰을 들어올린 채 시간을 낭비하며 십여분을 뒹굴거렸다. 보다못한 루시펠이 이사의 손목을 툭 쳤다. 이사의 얼굴 위로 스마트폰이 추락했다.
“히히. 재밌- 아악!”
-“당장 환복하고 손발 씻고 세면도 해라.”
스마트폰이 얼굴에 떨어진 이사는 대충 스마트폰을 머리맡으로 치운 다음 어기적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이 흡사 건강한 청소년이라기보다 다 죽어가는 환자의 모습 같았다.
괴성 같은 신음소리를 내며 간신히 상반신만 일으킨 이사의 꼬라지를 보며 루시펠은 한 손으로 얼굴을 붙잡고 탄식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사는 급히 머리를 두건 안으로 욱여넣고 자기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똑똑.
“네! 이이사 안에 있어요!”
“이사 자매, 손님이 오셨어요. 내려와 주시겠어요?”
“금방 갈게요 자매님!”
다행이다. 이 모습을 봤다면 한 소리 들을 뻔했다. 이사는 조용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간단히 물건을 챙겼다.
아까 깨톡도 와 있었지. 그 셋이려나? 굳이 찾아오지 않아도 괜찮은데.
“…”
“…”
안타깝게도 찾아온 면회객은 그 아이들이 아니었다.
면회실 안의 공기는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안 그래도 사람도 지금 이사와 면회객 단 둘뿐인데 둘 사이에 대화도 오가지 않으니 면회실 안은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이러다 심장 소리도 들리는 거 아닐까 싶을 정도로.
이사도 면회객도 다른 자매님이 주고간 음료수만 서로 말없이 홀짝일 뿐이었다.
너무나도 어색한 적막 속에서 안에서 루시펠이 먼저 헛기침을 했다.
이사의 맞은편에 앉은 상대는… 남해였다.
“잘도 찾아왔네.”
“그 뒤에도 본 적 있었거든.”
“작년 겨울이었나? 봉사활동 때? 너도 봤나 보네.”
남해는 구체적으로 대답하지 않고 시선을 피했다. 남해 본인이 직접 본 것은 아니었다. 어쩌다 이사를 발견한 가이저가 귀띔했던 것이 기억났을 뿐이다.
정말 앞날은 한 치도 알 수 없다.
그때 가이저는 분명 다시 이사가 사고를 벌일 것을 우려해 자신에게 말해줬는데 정작 지금 가이저에게 사고가 나 이사에게 이야기하러 왔다니.
“그래서?”
이사는 남해가 불편했고, 남해는 자신이 겪었던 일을 이야기할 준비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다.
너무나도 어색한 적막에 제일 먼저 화두를 꺼낸 것은 용연이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소생의 이름은 용연이라 하외다. 우리 주군께서 그쪽의 낭자에게 볼 일이 있다하여 이렇게 찾아뵙게 되었습니다.”
루시펠은 대답 대신 고개를 숙여서 용연에게 인사했다. 용연의 이야기에 이사는 고개는 그대로 둔 채 눈만 옆으로 돌려 남해를 쳐다봤다.
“볼 일?”
-“이걸 봐주시겠습니까.”
용연이 손을 뻗어 주먹쥔 손을 펴보았다. 그러자 손바닥 위에서 스으윽 보라색 덩어리가 올라왔다. 이사는 보자마자 그 정체를 파악했다.
가이저의 일부다. 그러고보니 늘 남해 곁에 붙어있던 가이저가 오늘은 보이지 않는다.
가이저가 없는데, 가이저의 일부는 있고, 그걸 굳이 들고 자신에게 온 이유는?
-“어둠의 듀얼이라도 했군.”
-“정확합니다.”
“그러곤 졌나보네?”
남해는 답이 없었다. 이 침묵은 긍정의 의미다. 이사라도 그 정도는 안다.
이사가 손을 뻗어 용연이 가진 덩어리를 손 끝으로 살짝 집었다. 그러곤 그 덩어리를 이리저리 돌려보기도 하고 얼굴 가까이 가져와 유심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어둠의 듀얼을 했고, 졌고, 가이저도 잃었다. 그거지?”
“응.”
-“뭐라도 알아내신 것이 있으신지요?”
“좀 더 자세하게 말해줘. 상대는 누구였고, 상대 덱은 뭐였고, 하여튼 기억나는 상황 같은 건 모두 말해봐.”
그 말을 들은 남해는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미아와 약속 장소에서 있던 일, 미아의 덱, 그리고 거기서 본 것들, 가이저의 마지막… 기억나는 것은 사소한 것 하나까지 전부 털어놓았다. 이야기를 집중해 듣던 이사가 덩어리의 한쪽 면을 엄지로 문질렀다.
“최소한 떼어낼 때까진 살아있었네. 아니, 아직도 살아있어.”
“뭐?”
“아직 서로 끌어당기고 있네. 영혼의 조각들은 원래 원래대로 돌아가기 위해 서로를 끌어당기거든. 지금 가이저는 살아있어.”
“진짜로?”
이번에는 루시펠도 고갤 끄덕였다. 남해가 최근에 들은 소식 중 가장 희망적인 소식이었다. 용연도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조금 환해졌다 다시 원래 표정으로 돌아갔다.
희소식이긴 하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용연이 바로 다음 질문을 던졌다.
-“허면, 위치는 알 수 있겠습니까?”
“아니.”
-“그 정도 능력이 있는 정령이라면 그림자를 웜홀 삼아 이리저리 도망칠 수도 있을 거다. 잠시 머무른 곳을 찾는 건 몰라도 지금 너희 추적은 불가능하다.”
“이사 너는 어떻게 안 돼?”
“무리야 무리~ 너한테 진 이후 딱창력 갖고서 사람 된 건 좋았는데, 반 정령일 때 쓰던 능력은 거의 다 잃어버렸걸랑.”
완전히 새로운 몸에 정착한 이사는 더는 소멸할 걱정도 하지 않게 됐고 이상한 것에 쫓길 일도 없었다. 그 대신 잃은 것도 많다. 너무 많은 듀얼 에너지를 써버려서 과거 반쯤 정령이던 시절에 쓰던 그림자로 들어가는 능력을 비롯해 대부분의 능력이 사라졌다.
남은 능력으로도 이 정도의 능력은 발휘할 수 있었지만 진짜 정령… 그것도 그 정도 능력이 있고 한때나마 토착신의 자리에 있던 카드들에 비하면 갓난애와 어른 이상의 차이가 있다.
“뭐, 당장 알 수 있는 건 이 정도야. 궁금한 거 또 있어?”
…
-본선 진출 축하해! 꼭 우승하고 와야 해!
->ㅁ<
남해는 경기장에 들어가기 전 건물 앞에서 한 번 얼마 전에 온 문자를 다시 읽었다. 와일드카드전이 끝나고 정말 마지막으로 본선 진출이 확정된 날에 미자가 보낸 문자였다.
비단 미자만이 아니다. 윤수, 원형, 준오 등등 남해의 다른 친구들도 축하의 연락 하나씩은 보냈다.
아직 지민의 교대표 본선이 끝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남해가 다른 아이들에게 잊힌 것도 아니다. 자신은 자신의 길을 최선을 다해서 등반하면 된다.
“짜샤. 안 들어가고 뭐 해!”
누군가 뒤에서 갑작스레 남해의 목에 팔을 걸었다. 남해가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봤다. 언제 달려왔는지 원형이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남해의 옆에 나타나 있었다.
그리고 약간 뒤에는 준오까지 있었다. 확실히 둘 다 올 수도 있었을 시간이긴 하다. 그래도 남해는 생각도 못 하고 있던 친구들의 등장에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내가 불렀어.”
남해의 옆 약간 떨어진 자리였다. 그곳에 낙랑과 같이 앉아있던 금선이 친구들과 대화방 화면이 띄워진 핸드폰을 들고 흔들며 말했다.
“어?”
“응. 금선이가 불렀어.”
“너희 차 막힌다더니 진짜 오지게 막혔나보다. 우린 대중교통 타고 왔는데 너희랑 거의 비슷하게 도착했잖아.”
“오늘 운이 졸라 좋았지 걍. 지하철 다 딱딱 때맞춰 오는 거 봤냐?”
“오… 오늘…”
“은 지민이 경기도 없잖냐. 어차피 가게 일 바쁠 날이라 지민이는 안 불렀어. 그래서 나랑 얘만 왔을걸.”
남해는 금선, 낙랑과 함께 목사님 차에 타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중간에 차가 꽤 막히는 구간이 있긴 했지만… 그렇다고 진짜로 친구들이 자신과 비슷한 시간에 도착했다는 것도 믿기 어려웠다.
게다가 그런 날에 마침 교대표 경기는 없고 반대로 둘은 곧바로 하교해서 여기 올 수 있었다니. 진짜 하늘이 도왔다는 말 외엔 설명하기 어려웠다.
“조지명식 쫄지 말고! 나가면 이기고!”
“금선이 너도 힘내라! 우리는 매점부터 들렀다 간다!”
준오와 원형이 한마디씩 좋은 말을 던지고는 먼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남해는 둘이 가버린 자리에서 시선을 멈춘 채 발걸음을 선뜻 떼지 못했다.
남해보다 먼저 금선이 움직였다.
“좀 진정되면 천천히 들어와.”
금선도 남해에게 그 말을 남기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그럼에도 남해가 머뭇거리고 있으니 어느새 낙랑까지 남해의 옆으로 총총총 와있었다.
“너무 굳었다 너.”
“친구들까지 왔다고 하니까 더 긴장돼서 그래.”
남해는 세 번의 커다란 기회를 연달아 놓쳤다. 그 끝에 간신히 잡아낸 마지막 동아줄이다.
미아를 붙잡고 무언가 물어보고 흙바닥에 떨어진 명예를 다시 닦고 빛낼, 그리고 박살난 자존심을 다시 붙일 수 있는 마지막 동아줄.
이것마저 놓친다면 어쩌지? 그것도 교회 가족들이, 친구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이 세상에서 지낸 근 2년간 격전에 격전을 헤쳐왔다. 어둠의 듀얼도 해봤다. 수많은 이들이 보는 앞에서 결승전도 치뤘다. 강당에서 수많은 학생들의 앞에서 교장 선생님이랑 태그 듀얼도 해봤다. 더는 듀얼로 크게 긴장하는 일은 더 없다고 생각했다.
오산이었고 자만이었다. 지금도 경기장을 향해 도저히 더는 발걸음을 옮길 수가 없었다.
그때 낙랑이 남해의 뒤에서 슬며시 양 어깨를 밀었다. 남해는 자신도 모르게 앞으로 걸어나갔다.
“어, 아?”
“뭘 겁내고 있어. 국본-왕자님-이잖아? 용이나 마녀도 겁나지 않는 왕자님.”
“그… 그 별명 부르지 말아줄래…?”
깜짝 놀라 남해가 뒤를 돌아보자 낙랑의 얼굴에도 장난스런 미소가 지어졌다.
“봐. 방금 앞으로 갔잖아. 걱정만 해서 뭐가 바뀐대? 어서 갔다와. 이기고 오면 되잖아.”
남해는 다시 앞의 경기장을 봤다. 그리고 말없이 심호흡을 하고 가슴팍에 성호를 빠르게 그었다. 그리곤 경기장을 향해 걸어갔다.
“조금 있다 안에서 보자!”
…
대기실까지 이동한 후 남해는 덱을 점검했다.
상검 덱에는 [순백의 성녀 에클레시아]를 비롯해 목사님께 받은 카드들이 잔뜩 투입됐고 사이버스에서 쓸 수 있는 카드도 최대로 끌어왔다. 해황 덱에는 딱 한 번이라면 무조건 이길 수 있는 비장의 수도 준비했다.
이길 수 있다. 반드시 이긴다. 그렇게 생각하며 남해는 덱을 하나씩 허리춤의 덱 케이스에 집어넣었다.
이윽고 조지명식을 알리는 방송이 각 선수들의 대기실에 울렸다. 남해는 옷매무새를 손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가 되었습니다. 가시지요. 주군.”
남해는 눈을 감고 한 번 심호흡했다. 그리고 조지명식이 진행될 홀으로 향했다.
홀 안에는 후원사들의 상표도 곳곳에 보였다. 아직 입장이 시작되지 않아 관중석은 휑했지만 그럼에도 선수들의 지인이나 가족 같은 사람들이 곳곳에 앉아있어 완전히 빈 것은 또 아니었다. 남해의 뒤에서도 누군가 본선 진출자가 한 명 나타났고 좌우의 출입구로 본선 진출자들이 속속들이 들어왔다.
남해도 그들을 따라 본선 진출자들을 위한 좌석 중 본인의 이름이 써진 자리에 앉았다.
문득 주변에 앉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을 슥 살펴보니… 아는 얼굴이 더 있었다.
“아! 오랫만이와요!”
-“저 말투는 두 번 들어도 익숙해지지 않는구려.”
남해와 잠깐 눈이 마주친 누군가가 명랑한 목소리로 팔을 높이 들고 흔들어 남해를 불렀다.
저 말투, 저 머리스타일, 그리고 저 낭랑한 목소리에 그… 압도적인 [체급].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얼굴인 영애다. 한쪽 끝자리에서 한 칸 옆에는 금선이 앉았다.
그리고 자길 탈락시킨 그 상대, 성균도 있었다. 성균도 남해랑 시선이 마주치자 웃는 얼굴을 보였다.
남해도 웃는 표정으로 손을 살짝 흔들었다. 대답했다.
둘 다 그냥 웃는 표정이 아니었다. 맹수끼리 이빨을 드러내고 상대를 쳐다보고 있는 표정이었다.
그렇게 자리가 하나하나씩 차가는 와중에도 한 자리만은 끝까지 남아있었다.
주변의 다른 사람들을 확인한 남해도 금선도 마지막 자리의 주인이 미아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슬슬 조지명식이 시작할 시간인데도 미아는 코빼기도 비추지 않았다. 이러다 부전패하는 것 아닌가? 남은 시간은 채 3분도 되지 않았다.
멀찍이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미아가 뒤늦게 뛰쳐들어왔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미아에게 다가가 안내사항을 설명했다.
스태프들에게 둘러싸여 한참 설명을 듣던 미아를 본 남해. 그때 문득 남해의 눈에 미아의 복장이 들어왔다.
앞치마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가게 상표가 큼직하게 박힌 앞치마. 그렇다면… 방금 전까지도 아르바이트를 하다 온 걸까?
“이제 자리로…”
“네, 네!”
“그리고… 조지명식에… 하면…”
미아가 정신없이 안내받은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자리로 가 앉았다.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조명이 하나 둘 꺼지고 PD를 비롯해 촬영팀 곳곳에서 사인이 떨어졌다.
이윽고 조명이 완전히 꺼지면서 긴장감 넘치는 배경음악이 스피커에서 흘러나왔다.
“네! 오늘 LT유스 조지명식에 와주신 분들 감사합니다! 게임 캐스터 임청춘이라고 합니다!
Lord of the Tales, LT유스 어텀! LT유스 추계 조지명식을 여러분께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조지명식, 저와 함께 이승윤씨 박철진씨 함께하시겠습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해설가 박철진입니다!”
“네! 올해도 벌써 가을이 되고 겨울이 문 앞까지 다가왔는데요, 올해의 마지막인 이번 LT유스 최고의 관전거리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로는 역시 이번 LT유스 멤버진 아니겠습니까? 백제의 조카 권성균 선수부터 시작해서 스프링 시즌이나 써머 시즌이랑 비교해도 평균 네임밸류가 훨씬 높거든요.”
남해는 캐스터와 해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이제는 긴장도 적당히 풀리고 마음도 놓이고 있었다.
한 명씩 순서에 따라 캐스터가 선수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긴장한 모습이 역력한 참가자도 있었고, 제 자리에 온 듯이 여유로운 참가자도 있었다.
“뭐가 됐든 남해보단 늦게 떨어지면 좋겠네요.”
“정말 남매보다 남매 같네요.”
“그러고보니 사촌 백장미 선수도 얼마 전에 하나 입상했는데 박영애 선수의 각오는 어떻습니까?”
“무조건 목표는 우승이와요!”
“권성균 선수, 이번 대회에서 가장 마주치고 싶지 않은 상대를 하나 꼽는다면?”
“가장 마주쳐도 괜찮을 것 같은 상대는 있는데, 다른 사람도 누구든 다 자신 있어요.”
대회 일정표 공개까지 마치고 조 편성이 시작됐다. 한 명씩 조가 정해질 때마다 커다란 전광판에 찰칵거리는 효과음과 함께 해당 선수의 프로필이 간략하게 떠올랐다.
그때마다 LT유스 특유의 배경음악이 분위기를 달궜다. 아직 입장이 시작되기 전, 경기장 안의 식당에서 방송을 보던 원형은 자신도 모르게 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리를 떨었다.
본선 진출자들이 진출이 확정된 순서대로 한 명씩 자리에서 호명됐다. 호명된 선수들이 조 숫자가 적힌 공을 하나씩 불투명한 상자 안에서 꺼냈다.
“야 저러면…”
“그렇네. 남해는 뽑을 필요도 없겠구나.”
마지막 공은 8이라 적힌 빨간 공. 남해의 조는 8조 홍코너로 결정됐다.
-“아 8조! 오늘 첫 경기가 바로 A팀 8조인데요! 강남해 선수, 맨 처음 조로 지명됐는데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아… 올라오는 건 제가 제일 마지막이었는데 승부는 제일 먼저 하게 됐네요. 이왕 이렇게 된 거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하지 않습니까?”
“오~ 남해 그럼 경기 일찍하겠네~”
준오도 그 이야기에 고갤 끄덕였다. 부가적인 목적이야 몇 가지 있어도 둘이 여기까지 온 목적은 결국 남해의 경기를 직관하는 거였으니.
그리고 준오가 한창 TV에 정신이 팔린 사이 원형은 준오의 감자튀김 세 개를 더 먹었다.
“그러면… 돌아가는 차는 걱정 안해도 되겠다.”
그 동안에도 준오의 감자튀김을 계속 집어먹던 원형은 그만 자길 돌아본 준오와 눈이 마주쳐버렸다. 아주 잠깐 굳어있던 원형은 눈치를 살피다가 되려 더 속도를 붙여버렸다.
“옴뇸뇸뇸뇸뇸뇸뇸뇸뇸-”
“작작 먹어 새끼야!!”
…
조지명식까지 끝나고 당일 일정 소개가 방송으로 나가는 사이 순식간에 무대 정리가 끝났다.
남해는 필드 한쪽 끝의 홍코너에 서서 가볍게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반대편의 청코너에는…
“흡! 하! 후우, 하!”
남해의 16강 상대 김융찬이 서 있었다. 남해보다 훨씬 동작도 크고 힘도 많이 들어간 스트레칭이었다.
키는 남해랑 거의 비슷하다. 피부가 좀 까무잡잡하고 머리는 이리저리 뻗쳐있다. 조지명식에서 했던 인터뷰 내용도 그렇고 기운이 넘치는 애다.
비단 저쪽만 시끄러운 게 아니었다. 해설자와 캐스터들도 이미 자리에 앉아 방송을 준비하고 있었고 관객 입장도 시작해 객석의 빈자리가 서서히 줄고 있다. 남해는 비록 둘을 발견하지 못했지만, 준오와 원형도 자리를 찾아 티켓을 들고 객석을 지나고 있었다.
“앗사 딱 오자마자 입장 시작하네”
무대의 솔리드 비전 장비들도 서서히 구동음을 높여갔다. D-패드와도 블루투스 연동이 끝났다. 이 웅웅거리는 소리에 맞춰 심장도 속도를 높이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무대에 벌써 양손이 모자랄 정도로 올라와 봤다. 그럼에도 올라올 때마다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목사님이 말하기를 은퇴하는 날까지도 이걸 극복하지 못한 선수도 적지 않다고 하던가.
문득 조명이 바뀌었다. 그와 함께 리허설에서 몇 번이나 들었던 이번 대회의 주제곡이 흘러나왔다.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방심하지마라, 처음의 한 장이 모두를 침몰시킬 수 있다. 포기하지마라, 최후의 한 장이 모든 것을 뒤집을 수 있다!
LT유스 추계리그 16강! 오늘의 첫 번째 경기는 A조 강남해 선수 대 김융찬 선수, 김융찬 선수 대 강남해 선수!”
“일단 강남해 선수! G조 예선 결승에서 탈락했지만! 본선 진출자 중 엄승현 선수가 개인사정으로 기권하면서 와일드카드 전을 통해 진출했는데요, 간신히 붙잡은 동앗줄! 과연 이 동앗줄을 붙잡고 어디까지 오를 수 있을까요!”
“반면 김융찬 선수는 깔끔하게 올라왔고 이 기세도 좋습니다! 올해 하계부터 추계까지 방송경기 종합 8전 5승 3패! 최근 전적 나쁘지 않거든요!”
“그렇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이 아무리 낮더라도 여기 LT유스에서는 마지막 한 장이 뒤집히기 전까지는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마지막 동앗줄을 타고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할 것인가, 루키가 그 동앗줄을 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인가!!”
목청껏 분위기를 띄우는 캐스터의 말에 원형이 팔꿈치로 준오를 툭툭 건드렸다. 준오가 원형을 돌아보자 원형이 스윽 귓속말을 건넸다.
“남해가 환룡족 유저라서 이무기라는 거야?”
“그렇겠지?”
원형은 그걸 듣고 뭔가를 생각했다. 그리고 뭐가 떠오른 듯 실실 웃기 시작했다.
“그럼 너는 암석족 주로 쓰니까 돌대가리구나.”
준오는 끔찍한 개그를 들은 눈빛으로 원형을 째려봤다. 그러다 준오는 무언가 떠오른 듯 반박했다.
“새끼가 못 하는 말이 없네. 그럼 넌 R-Ace 쓰니까 레이시스트냐?”
그리고 원형은 즉시 반격해서 준오에게 헤드락을 걸었다. 준오는 죽을 힘을 다해 원형의 팔에 탭해댔지만 원형은 오히려 더 힘을 주어 준오를 졸랐다.
“크아아아아아아악”
준오의 괴로운 목소리와 함께 모니터 화면이 바뀌었다. 남해와 융찬의 덱 리스트가 떠오르며 밴픽이 시작된 것이다.
“아! 말씀드리는 순간 밴픽 시작합니다. 먼저 강남해 선수의 자가 밴부터 보시겠는데요, 현 메타가 작년에 비해 선공 플레이어가 유리한 점이 많이 늘었기 때문에, 그런 부분에서 불리한 해황 아니겠습니까 역시?”
- <해황>
“그렇죠. 역시 해황이네요!”
“예, 일단 예선전에서 계속 쓴 덱이라 읽히기 쉬운 것도 있겠습니다만 강남해 선수 해황 덱을 후공돌파 위주로 쓰는 모습을 많이 보였는데 김융찬 선수 또한 후공 돌파 자신 없는 선수가 아니라 후공 받는 것도 겁낼 이유도 없거든요.”
- <사이버스>
“그리고 김융찬 선수 밴은… [사이버스]! 입니다. 강남해 선수가 와일드카드 결승전에서 딱 한 번 쓴 것 외에 데이터가 전혀 없어서 가장 대처가 명확하지 않은 덱이다보니 밴한 것 같습니다. 의식, 링크, 싱크로 등 다양한 소환법이 순서와 중요도를 바꿔서 나올 수 있어서 이 부분 틀어막으면 무조건 이긴다 할 파트도 생각만큼 많지 않고 말이죠.”
캐스터의 말에 따라 모니터에 남해의 덱 리스트 중 <해황>이라 적힌 패널이 몇 번 점멸했다. 이윽고 해황이라 적힌 패널은 어두워졌고, <사이버스>라 적힌 패널은 붉은 빛으로 점멸하다 완전히 붉어졌다.
“이렇게 되면 자연히 강남해 선수의 픽은 [상검]이 되겠고요. 융찬 선수의 셀프 밴은… 아, 의외로 [버제스토마]가 나왔네요.”
“김융찬 선수가 단단히 준비해오기에는 슬슬 인플레에 뒤쳐저가는 덱인 것도 맞고요. 최근에 이렇다할 연구 성과도 나오지 않고 있는 덱이니까요. 결국에는 좀 더 빠른 덱을 뽑겠다, 그런 생각입니다.”
“이제 강남해 선수의 밴은… 야아 [화석]!”
“말이 화석이지 사실상 암석족 굿스터프에 가까운 덱 구축인 만큼 육각형 밸런스가 뛰어난 덱이죠. 이렇게 되면 김융찬 선수의 픽 또한 남아있는 [공룡]으로 확정인데, 이렇게 되면 공룡 대 상검, 상검 대 공룡. 두 선수 올해 공식전에 가장 많이 나온 덱끼리 붙습니다!!”
패널에 표시된 융찬의 덱 리스트 또한 남해가 그랬듯 <버제스토마> 패널이 암전된 다음 <화석> 패널은 붉은빛으로 변했다.
융찬은 처음이 아닌지 능숙하게 덱 케이스에서 덱을 하나 뽑아 D-패드에 찰칵! 하고 끼워넣었다. 남해는 한 번 숨을 고르고 가슴팍에 성호를 그렸다. 그러고는 남해 역시 덱 케이스에서 덱을 꺼내 D-패드에 끼웠다.
둘의 D-패드가 덱을 인식하고 읽기 시작했다. 인식이 완료된 D-패드의 화면에 [Duel Stand-by]라는 글씨가 떠올랐고, 철컥이는 소리를 내며 D-패드가 전개됐다.
둘 사이에 있는 듀얼 필드 정중앙에 천천히 거대한 동전이 올라왔다. 이윽고 동전은 묵직한 소리와 함께 맹렬하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동전이 일으킨 풍압에 남해의 머리와 옷자락이 살랑거렸다.
서서히 속도를 줄여가던 동전에 그려진 우자트의 눈이 남해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마저 반바퀴를 더 돌아, 남해가 아닌 정 반대편의 융찬과 눈을 마주치곤 그 자리에 멈춰섰다.
““듀얼!!””
융찬의 D-패드가 카드 다섯 장을 뽑아냈다. 패를 확인한 융찬의 눈빛이 자신감으로 불타올랐다.
최고의 패는 아니지만 충분히 좋은 패다.
-“게임 시작했습니다! 청 코너 김융찬 선수 선제 공격, 홍 코너 강남해 선수 후공!”
“좋았어, 가자!! 패에서 [영혼을 먹는 오비랍토르], 등장!!”
[영혼을 먹는 오비랍토르/Lv4/1800/500]
푸른 안광을 빛내며 영혼인지 알인지 모를 뭔가를 든 수각류 공룡이 필드에 소환됐다. 기분 나쁜 무늬가 머리부터 꼬리 끝까지 덮여있는 섬뜩하게 생긴 모습과 달리 남해는 굉장히 반가운 몬스터였다.
이곳에 왔을 때 들고 온 카드 중에는 [공룡 덱]도 있었다. 1학년 2학기 때는 원래 세계에서의 경험을 되살려 공룡성 덱도 쓴 적 있었지.
그리고 달리 말하자면 그만큼 저 몬스터의 중요성도 잘 알고 있다.
“오비랍토르의 효과 발동이다! 덱에서-”
“패에서 [하루 우라라]의 효과 발동!”
필드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장난기 가득한 웃음소리. 산뜻한 봄바람과 함께 흩날려온 벚꽃잎이 오비랍토르를 감쌌다.
오비랍토르가 완전히 벚꽃잎에 뒤덮이려는 찰나, 빠찍-!! 하는 소리와 함께 전기가 방전되며 벚꽃잎도 한순간에 모조리 불타버렸다. 오비랍토르 머리 위에서 빙글빙글 돌던 하루 우라라도 고장난 장난감처럼 움직임을 멈추고 추락했다.
“아니! 이런 패가 잡혔는데 두고볼 순 없지, [무덤의 지명자] 나가신다! 우라라는 무효다!”
남해는 나머지 패를 살폈다. 이렇게 되면 남은 건 지켜보는 것 밖에 남지 않는다.
융남의 덱에서 카드 한 장이 뽑혀나왔다.
“덱의 [베이비 케라사우루스]를 패에 넣은 다음 패에서 [그라운드 제노]를 발동한다고! 덱에서 공룡족 튜너! [제노 메테오로스] 서치! 그 후에 패에서 케라사우루스를-”
쾅-!! 폭발음과 함께 융남의 패에서 카드 하나가 사라졌다. 폭발의 화염 속에서 마치 들끓는 화산을 연상시키는 피부의 공룡이 모습을 나타냈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화석을 억지로 짜맞춘 듯 기괴하게 비틀린 공룡도 바닥의 틈새에서 기어나왔다.
[제노 메테오로스/Lv6/2000/200]
[환창의 미세라사우루스/Lv4/1800/1000]
“파괴해서 미세라사우루스를 불러오고, 몬스터가 파괴되었으니 제노 메테오로스도 필드로 등장이라고! 아자!!”
대부분 아는 카드들이지만, [제노 메테오로스]와 [그라운드 제노]는 남해에겐 초면이었다.
어정쩡한 저 능력치로 에이스 몬스터는 아닐테고. 튜너 몬스터라는 점을 보면 싱크로 소재인가? 레벨이 6씩이나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이, 오비랍토르가 미세라사우루스의 혼을 들고 있던 알으로 흡수해버렸다. 무너져버린 미세라사우루스의 잔해 안에서 아까의 케라사우루스가 고개를 내밀었다. 갸우뚱 고개를 기울인 케라사우루스를 아까 같은 폭발이 다시 덮쳤다.
폭발이 걷히며 그 안에서 묵직한 발소리와 함께 각룡류 공룡의 머리가 드러났다.
“저건 또 뭐였더라… [메가자우러]였나…?”
이 카드는 남해도 존재 자체는 알고 있었다. DM 애니에서도 나온 적 있고 이름 자체는 들어본 적이 아주 없던 건 아닌 카드다. 그러나 그런 카드의 존재를 아는 것과, 그런 카드를 상대로 만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폭연이 걷히고 메가자우러의 그림자 옆에서 [자이언트 렉스] 또한 모습을 드러냈다. 케라사우루스 쪽의 리쿠르트 효과일테지.
“묘지의 그라운드 제노를 제외해, 메가자우러와 메테오로스를 소재로 융합한다!”
메테오로스가 불덩이로 변해 메가자우러 안으로 흡수됐다. 바닥에서부터 일어난 불꽃의 폭풍이 메가자우러를 집어삼켰다.
화염구를 태풍의 눈 삼아 필드에 강풍이 마구 몰아쳤다. 남해는 강렬한 바람과 눈부시게 밝은 불꽃에 한 팔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잦아들긴 기세가 전혀 보이지 않고 점점 더 기세를 더하던 불꽃의 폭풍이-
“진화해라, 초월해라! 진화를 초월한 진화! [초월룡 기간트자우러]를 융합 소환한다!!”
[초월룡 기간트자우러/Lv12/3800/2000]
-단 한순간에 걷어버리며, 그 안에서 공룡이라기보다 괴물의 모습에 더 가까운… 거대한 짐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남해는 스탯이나 외형만으로 몬스터의 가치를 판단하면 안된다는 것 정도는 잘 알고 있지만 일반 듀얼에서 이 정도의 압박감을 느끼는 건 정말 간만이었다.
-“훌륭하군요. 저 정도면 가히 진화를 초월한 진화라고 장담할만도 하외다.”
“기간트자우러의 몬스터 효과로 묘지의 [베이비 케라사우루스]를 패에 넣은 다음 오비랍토르와 자이언트 렉스를 오버레이해 랭크 4 [에볼카이저 돌카]를 엑시즈 소환하고, 내 차례는 여기까지다!”
-김융찬/LP 8000/패 3장
비주얼적으론 기간트자우러는 정말 강해 보이는 몬스터였고 공격력 또한 4000 가까이 되는 굉장한 몬스터다.
그렇지만 그게 포기할 이유는 되지 않는다. 와일드카드로 지옥 끝에서 간신히 구사일생한 남해에겐 더더욱 그랬다.
남해는 기간트자우러의 거체를 한 번 올려다보고 입꼬리를 아주 살짝 올렸다. 그래, 아무리 무서워도 그 듀얼만 하겠어?
“좋아, 내 차례다! 드로우!”
융찬의 차례에 던진 우라라를 빼고 패는 다섯 장. 그리고 이 대회를 위해 준비한 파츠도 잡혀있다.
땅-!! 카드를 필드에 내려치는 소리와 함께 검붉은 구름이 남해의 주위를 감쌌다. 이내 구름은 반투명한 천위룡의 모습으로 변했고 남해의 필드에 링크 게이트가 열렸다.
“[천위룡-비슈다]를 링크 마커에 세트! [천위의 권승]을 링크 소환!”
링크 게이트를 뛰쳐나온 권승이 두 주먹을 꽉 쥐고 기합을 넣자 기간트자우러의 발밑에서 검붉은 구름이 꿈틀거렸다. 융찬이 이상한 낌새를 눈치채자 돌카도 시선을 돌렸고…
“바로 거기다. 비슈다의 효과에 체인해 에볼카이저 돌카의 몬스터 효과 발동! 에볼 싱귤러리티!!”
콰아아아-!! 바닥에서 솟구치던 용오름을 향해 돌카가 불꽃을 토해냈다. 커다란 폭발과 함께 용오름은 한순간에 걷혀버렸고 돌카의 주위를 공전하던 오버레이 유닛도 하나가 사라졌다.
비슈다가 막혔지만 그래도 남해에겐 아직 패가 남아있다. 남해는 두 번째 카드를 패에서 뽑았다. [상검사-막야]가 남해의 필드에 소환됐다.
“이번에는 막야의 효과로 패의 [상검사-태아]를 공개하고 토큰을 소환한다!”
얼음박쥐 하나가 막야를 향해 포르르 날아왔다. 막야는 살짝 손을 뻗어 얼음박쥐를 손 위에 앉을 수 있게 했다. 그리고 얼음박쥐가 막야의 손끝에 내려앉기 무섭게 바닥에 일어난 화염 폭풍이 막야를 집어삼켰다.
남해는 이제는 놀라거나 안타까워하는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돌카의 남은 소재를 사용해서 그 발동도 무효로 돌렸다고! 어때!”
초동도 막았고, 우회로도 막았다.
이미 저 덱의 약점은 너무 잘 알려져 있었고 융찬 또한 그 점은 마찬가지. 남해에게 더는 남은 돌파수단이 없다. 있다해도 기껏해야 용연일 터. 자원력에서 결국 밀려날 수밖에 없다.
“흐으으음, 흠.”
…그런 생각 하고 있겠지만, 지금의 자신은 예선에서 탈락할 때의 자신이 아니다. 남해는 남은 패 하나를 더 뽑아 들었다.
“그럼 난 패의 [상검사-태아]를, 엑스트라 덱의 [빙검룡 미라제이드]를 상대에게 공개하는 것으로 패에서 [낙인의 기염]을 발동! 엑스트라 덱의 미라제이드를 묘지로 보낸다!”
남해의 엑스트라 덱에서 보라색 카드가 팟 하고 출력됐다.
남해는 그 카드와 패의 태아를 묘지로 보내고 덱에서 출력된 세 번째 카드를 패에 넣었다.
“여기에 태아까지 묘지로 보내는 것으로, [알버스의 낙윤]의 카드명이 기재된 [순백의 성녀 에클레시아]를 패에 추가.”
“뭐…?”
“돌카의 효과는 ‘발동을 무효로’하는 거였지?”
융찬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발동의 무효]는 [효과의 무효]와 다르다.
융찬도 모르는 건 아니긴 해도 그 상황을 마주하는 건 별개의 이야기.
남해의 필드에 섬광이 번쩍이며 은빛 워해머 대신 동물 해골로 만든 망치를 든 에클레시아가 나타났다. 에클레시아가 있는 힘껏 망치를 휘둘렀다. 망치 끝은 땅에 닿기 직전 생겨난 상검의 문양을 내리찍었고 상검의 문양이 번쩍였다.
에클레시아의 몸이 푸른 빛에 감싸여 사라졌고 문양이 팽창하며 안에서 막야가 다시 필드로 뛰어올랐다.
“막야의 몬스터 효과 발동! 패의 [상검군사-용연]을 공개하는 것으로 레벨 4 [상검 토큰]을 필드에 특수 소환한다!”
이번에는 막야의 손끝에 얼음박쥐가 무탈하게 살며시 내려앉았다. 막야는 얼음박쥐를 보고 한 번 고갤 끄덕였고 얼음박쥐가 막야의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레벨 4 [상검사-막야]를 레벨 4 [상검 토큰]에 튜닝! 영봉의 대사형, 레벨 8 [상검대사-적소]를 싱크로 소환!”
[상검대사-적소/Lv8/2800/1000]
금빛 불티를 휘날리며 필드에 나타난 적소가 크게 검을 휘둘러 칼끝으로 융찬을 가리켰다. 이어서 남해는 덱에서 두 장의 카드를 더 뽑았다.
“막야의 효과로 덱에서 한 장을 드로우하고, 적소의 효과로 덱의 [서상검구]를 패에 넣고 발동! 덱의 [천위룡-비슈다]를 패에 넣겠어!”
남해가 패에서 공개한 카드는 용연. 서치한 카드는 비슈다. 이야기는 이정도면 충분했다.
비슈다가 패에서 묘지로 보내지자, 필드에 우르릉 울리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뚫고 얼음기둥이 올라왔다. 얼음 속에서 금빛 섬광과 붉은 안광이 한 번 번쩍였다.
쨍강-!! 이윽고 얼음기둥이 산산조각났다. 안에서 불티와 함께 금빛 상검을 든 용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사방으로 흩날리는 얼음파편이 상검이 발하는 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났다.
용연은 자세를 바로 고치며 왼손으로 수염을 한 번 매만졌다. 그리고 남해를 돌아봤다. 남해도 용연과 눈이 마주쳤다.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주군?”
“당연하지. 검으로 말할 준비는 됐고?”
용연이 왼손을 가볍게 휘두르자, 이번에는 쪽빛 상검이 용연의 왼손에 쥐어졌다.
용연의 대답은 그것이었다. 남해도 더는 캐묻지 않고 D-패드를 이어서 터치했다.
“필드에 용연의 효과로 소환된 토큰이 있으므로 묘지의 비슈다의 효과로 기간트자우러를 패로 되돌린다!”
이번에야말로 바닥에서 솟아오른 용오름이 기간트자우러의 거체를 집어삼켰다.
용오름이 걷힌 후 남해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거대했던 기간트자우러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소재가 다 떨어진 돌카 단기.
“이제 레벨 6 용연을 레벨 4 상검 토큰에 튜닝! 그 힘은 산을 뽑아내고, 그 기개 세상을 뒤집는다! 만인지적의 대군사 여기에 강림! [상검대사-칠성용연]을 싱크로 소환!!”
금빛과 쪽빛이 이중나선을 그렸다. 그 이중나선을 단번에 붉은 검기가 가르고 안에서 칠성용연이 필드로 나왔다. 한 번 양 어깨를 움직이며 몸을 푼 용연은 제일 먼저 오른손을 스윽 들어올리곤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쾅-!! 그와 함께 융찬의 필드에서 불꽃의 소용돌이가 일었다.
“용연이 싱크로 소재가 되었을 때 상대에게 1200 포인트의 데미지를 준다! 이제 배틀!”
용연이 앞으로 세게 발을 내딛으며 몸을 회전시켰다. 채찍 같은 꼬리가 그대로 돌카를 깔끔하게 베어버렸고 비어버린 필드로 권승과 적소가 쏘아낸 파장이 융찬에게 연달아 날아왔다.
눈부신 섬광에 융찬은 그만 양 팔로 얼굴을 가리고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김융찬/LP 8000 → 2400
“카드 한 장을 세트하고 턴을 마친다. 그리고 융합 몬스터가 묘지로 보내진 턴이니 묘지의 에클레시아도 패로 되돌린다.”
-강남해/LP 8000/패 1장
잘 받아냈고, 잘 받아쳤다. 하지만 완전히 끝내진 못했다.
남해는 한 번 크게 숨을 내쉬며 숨을 고르고 융찬의 플레이를 기다렸다. 융찬은 머뭇거리는 기색조차 없이 덱에서 카드를 뽑았다.
“좋아, 내 턴이라고! 드로우! 대회 본선인데 시작부터 만만할 순 없지!!”
융찬은 전혀 주눅들지 않은 모습으로 막 드로우한 카드를 살폈다. 남해는 별 말 없이 융찬의 플레잉을 기다렸다.
그리고 이상한 낌새를 느낀 용연이 머리 위를 살폈다.
용연이 마지막으로 본 광경은 거대한 괴수의 발바닥이었다.
-“이런 ㅆ…”
“먼저 용연을 릴리스하고 패에서 [노염파괴수 도고란]을 특수 소환한다!”
[노염파괴수 도고란/Lv8/3000/1200]
“아…!!”
“그리고 묘지의 미세라의 몬스터 효과도 발동한다! 자길 포함한 묘지의 공룡족 몬스터를 넷 제외하고 덱의 오비랍토르를 특수 소환한다고!”
바닥에서 공룡 화석이 우르르 소리와 함께 올라왔다. 골격은 하나씩 재조립되며 오비랍토르의 모습으로 변했고 불꽃 속에서 골격은 오비랍토르의 모습으로 새로이 변했다.
“그럼 오비랍토르의 몬스터 효과 발동! 거기에 제외된 자이언트 렉스도 다시 필드로 돌아온다고!”
“묘지의 막야를 제외하고 적소의 몬스터 효과 발동!! 오비랍토르의 효과를 무효로 한다!!”
필드에 몬스터가 여럿 늘어서 있다면 공룡 덱이 선택할 방법은 당연히 하나. 남해가 그걸 직감하자 적소가 손에서 쏘아낸 파장이 오비랍토르를 덮쳤다.
“아이고 이런.”
“그리고 세트 카드 [상검암전] 발동! 오비랍토르와 자이언트 렉스, 그리고 권승을 파괴한다!”
두 공룡의 발 아래에서 푸른 폭발이 일어나며 저 멀리 날아갔다. 두마리는 땅에 떨어지는 대신 바닥에 열린 마름모꼴 홀 안으로 사라졌다.
이것으로 두 번째 에볼카이저의 소환도 막았다. 아직 공룡의 진짜 에이스는 나오지 않았지만 오비랍토르도 막았겠다, 패에 그 카드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저런 카드들이 나오는 판국에 그 카드를 덱에서 뽑아올 카드 정도는 당연히 있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니 무언가 떠오를 것 같았다.
아, 있다. 나도 그때 놀이공원에서 썼던 카드.
“설마 다 끝났다고 생각하진 않았지? 패의 [주옥수-아르고사우루스]를 일반 소환! 패의 케라사우루스를 파괴하고 덱에서 [궁극진화약]까지 패에 추가하겠어!”
[주옥수-아르고사우루스/Lv1/0/0]
융찬이 패에 넣은 [궁극진화약]을 D-패드에 내자 융찬의 등 뒤에 커다란 알약 하나가 생겨났다. 융찬의 묘지에 있던 자이언트 렉스와 돌카가 뽑혀나왔고 두 몬스터가 제외 존으로 이동하자 덱에서 융찬의 손으로 카드 한 장이 더 뽑혀나왔다.
“잘 봐두라고!”
콰아앙-!! 커다란 폭발과 함께 융찬의 뒤에서 괴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갑각이 뒤덮은 배, 발에서부터 다리, 배, 가슴, 목으로 번쩍이는 빛을 흘려보내는 보랏빛 선과 보주들, 하나하나가 칼날같이 날카로운 이빨과 그런 이빨 수십개가 돋아난 강인한 턱. 머리에 마치 왕관처럼 솟아오른 금빛의 뿔과 칠흑빛 갑주 아래에서도 선명하게 빛나는 호박색 눈동자.
올 것이 왔다. 남해도 알고 있는 그 카드다. 낮게 울리는 그 포효에 남해는 자신도 모르게 오금이 저렸다. 쿵,하는 발소리가 전조를 알리고…
-“----------------------!!!”
귀를 찢는 포효가 듀얼 필드를 가득 메웠다.
“진화의 정점, 궁극의 공룡, 완벽한 포식자! [궁극의 전도 티라노]등장이시다!!”
[궁극의 전도 티라노/Lv10/3500/3200]
“아, 그리고 주옥수로 터트린 케라사우루스로는 [벨즈 사라만도라]를 특수 소환하고 묘지의 공룡족 몬스터를 둘 제외시킨다. 공격력도 600 오른다고. 거기다가…”
벨즈 사라만도라의 등 뒤에서 거대한 양 날개가 펼쳐졌다.
하늘을 덮을 듯 넓게 펼쳐진 날개 아래에서 고막이 찢어질 듯한 고음의 울부짖음과 함께 핏빛 눈동자의 익룡도 모습을 드러냈다.
[벨즈 사라만도라/Lv4/1850 → 2450/950]
[오버텍스 고아틀루스/Lv7/2700/2100]
“제외된 공룡족 몬스터 다섯을 덱으로 되돌려서 [오버텍스 고아틀루스]까지 패에서 특수 소환.
그러면! 궁극의 전도 티라노의 몬스터 효과 발동! 주옥수를 파괴해서 상대 필드의 몬스터를 전부 뒷면 수비표시로 바꾼다!”
적소와 도고란의 모습이 사라지며 두 몬스터의 발판이던 뒤집힌 카드만이 남해의 필드에 남았다. [Battle Phase] 패널이 한 번 반짝였고 궁극의 전도 티라노가 발을 앞으로 한 발짝 내딛었다.
그러고는 몸을 반바퀴 돌려 그 거대한 꼬리를 휘둘렀다. 꼬리는 순식간에 가속을 붙여 휘둘렀다고 생각한 직후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남해의 필드를 휩쓸어버렸다. 말 그대로 일격에 남해의 몬스터들이 먼지로 변했다.
그리고 길이 열리자 다른 두 공룡이 남해를 향해 포효했다. 푸른 불꽃과 함께 귀를 찢는 음파가 남해를 덮쳤다.
-강남해/LP 8000 → 850
“자, 턴 종료야!”
-김융찬/LP 2400/패 없음
이 정도면 남해도 위기겠다. 준오와 원형은 그렇게 생각했다.
몬스터 효과를 무효로 하는 카드라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카드 한 장을 던져주고 한 장의 카드로 승부를 뒤집는 건 남해에겐 어렵지 않은 플레잉이니까.
하지만 표시형식을 바꾸는 효과와 함께, 고아틀루스의 퍼미션까지 조합되면서 이렇게도 저렇게도 뚫기 힘든 상황이 됐다.
이번에 드로우할 카드와 손에 쥔 에클레시아. 둘 만으로 이 상황을 뒤집을 수 있을까.
“후, 하.”
남해는 친구들의 걱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눈을 감았다. 그리고 천천히 심호흡하고 가슴팍에 성호를 그렸다.
다시 눈을 뜬 남해의 눈동자는 여전히 투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좋아, 턴 받았다! 드로우!!”
있는 힘껏 드로우한 카드를 확인하는 남해. 드로우한 카드는 생각한 카드는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카드는 절대 말림패가 아니다. 남해는 이 카드와 덱을 믿기로 했다.
“먼저 패의 [순백의 성녀 에클레시아]를 특수 소환! 그리고 에클레시아의 몬스터 효과 발동! 덱에서 [상검사-태아]를 특수 소환!”
아직이다. 티라노의 몬스터 효과는 발동하지 않았다.
“이제 태아의 효과로 묘지에서 상검 카드를 제외하고 상검 토큰을 특수 소환한다!”
“핫! 그렇게 둘 줄 알았냐고! 궁극의 전도 티라노의 몬스터 효과 발동! 태아는 이제 뒷면 수비 표시가 된다!”
티라노가 발을 크게 구르자 일어난 충격파가 태아를 휩쓸었다. 태아의 모습이 사라지며 방금 전의 적소와 도고란처럼 태아가 서 있던 카드만이 필드에 남았다. 그나마 얼음박쥐들만은 그 화를 피하고 남해의 필드에서 날갯짓하고 있었다.
얼음박쥐는 하나가 아니었다. 둘이었다.
“…두 마리?”
“응. 태아로 제외한 [상검암전]의 두 번째 효과. 게임에서 제외되면 필드에 상검 토큰을 하나 부를 수 있어. 이제 패에서 [크리보르]를… 일반 소환.”
-“크리크리!”
[크리보르/Lv1/300/200]
남해가 소환한 몬스터는 크리보르. 크리보르가 남해를 돌아보고 한 손을 파닥파닥 흔들었다. 남해도 눈을 마주치고 고갤 끄덕였다.
준오와 원형도 크리보르를 남해가 일반 소환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융찬 역시 남해의 의도가 도저히 짐작가지 않았다.
“4. 4. 1. …9.”
남해가 혼자 들릴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숫자를 중얼거렸다. 그러자 바닥에 푸른 불꽃의 고리가 치솟았다. 남해는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했다. 크리보르도 남해를 따라 두 눈을 감았다.
-“크리이이잇!!”
불꽃의 고리가 순식간에 거대해지며 맹렬하게 타올랐다. 불꽃이 지나간 자리에 그림이 그려졌다. 거대한 초승달 같은 문양이었다.
남해는 입 안이 바짝 마르고 피부가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크리보르를 코어 삼아 그 주변을 두 얼음박쥐가 나선을 그리며 빙글빙글 공전했다. 크리보르의 몸이 밝게 빛나며 서서히 가속도를 높이던 두 얼음박쥐가 흡수됐고-
“레벨 1 크리보르에 레벨 4 상검 토큰 두 장을 튜닝! 세 몬스터의 레벨 합계는 9!”
-그 거대한 광채를 수정 결정들이 감쌌다. 수정 결정이 완전히 광채를 뒤덮었고 수정 구체에 금이 가며 그 틈새로부터 황금빛 광채가 뿜어나왔다.
굉음과 함께 수정 결정이 무너지며 그 안에서 금빛 거신이 위용을 드러냈다.
“두 영혼이 거신의 육체에 닿아, 모든 적을 분쇄할 황금빛 수호자를 일깨운다! 싱크로 소환, [크리스트론-그리온간드]!!”
“간드다!!” “간드 떴다!”
쿠웅-!! 그리온간드가 필드에 착지하며 일으킨 충격파가 필드를 한 번 휩쓸고 지나갔다. 남해는 지금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피부가 화끈거리고 뛰는 가슴은 진정되지 않는다. 몸 곳곳이 저리고 허파에선 공기가 멋대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숨쉬기도 벅찼다.
그런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리온간드는 남해의 부름에 응했다.
아직 자신은 자격이 있었다. 아직… 할 일도 남았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하, 하하… 아하하… 하, 후. 그리고! 그리온간드의 싱크로 소재는 총 세 장! 따라서 상대의 몬스터를 세 장까지 제외할 수 있어!”
-“[리미터 해제. 크리스탈 코어 오버클럭 개시. 엔진 출력 100%… 105%… 140%…]”
위이이… 그리온간드가 양 주먹을 꽉 쥐고 몸을 숙였다. 격렬한 엔진 구동음과 함께 그리온간드의 몸이 점점 새하얗게 빛났다. 일순간 모습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그리온간드가 밝게 빛난 직후 그리온간드의 거체에서 냉동광선이 사방으로 방출됐다.
키이이잉-!! 이리저리 마구 뻗어나가던 냉동광선들은 이내 방향을 돌려 융찬의 필드를 덮쳤다.
“브리니클 풀버스트!”
빛이 걷힌 후, 궁극의 전도 티라노와 오버텍스 고아틀루스는 거대한 수정 결정 안에 갇혀있었고 우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두 몬스터는 그대로 땅속으로 가라앉았다.
이제 더는 융찬의 필드에 남은 카드가 없다. 그리온간드는 자세를 회복한 다음 오른팔을 융찬에게 뻗으며 손을 활짝 펼쳤다. 오른손이 회전하며 검지와 중지가, 약지와 소지가 합쳐졌고 손바닥에는 포문이 열렸다.
이윽고 오른팔 곳곳의 장갑판이 열리며 오른팔 하박 전체가 거대한 주포가 됐다.
“배틀!! 그리온간드로 상대 플레이어를 직접 공격한다! ”
-”[서보 모터 전개, 플라즈마 캐스터 가동. 연결 양호. 전류 공급량 107.7%.]“
치직, 치지지직- 파앙-!! 그리온간드의 오른손에서 발사된 거대한 광탄이 융찬을 덮쳤다.
폭발과 함께 일어난 흰 안개가 듀얼 필드를 뒤덮었다. 서서히 안개가 걷히며 융찬이 서있던 청코너의 상태가 드러났다.
광탄이 폭발한 융찬의 주변으로는 수정 결정들이 삐죽삐죽 솟아있었고, 가루눈인지 수정 분진인지 알 수 없는 가루들이 융찬의 주위로 내려앉으며 빛을 사방으로 분산시키고 있었다.
융찬은 양 팔을 내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이 승부, 내가 가져간다!”
-김융찬/LP 2400 → 0
빠아아아아앙-!!
승부 종료를 알리는 버저음에 융찬은 정신이 들었다.
첫 턴에 좀 더 무리해서라도 몰아칠 걸 그랬나? 아니면 다른 카드를 낼 걸 그랬나? 효과 발동 시기를 바꿔야 했나?
그런 고민과 후회를 하던 융찬은 승리한 남해의 얼굴을 봤다.
달아오른 피부를 식히려 거친 숨을 몰아쉬던 남해. 그러다 융찬과 눈이 마주친 남해는 한참이나 눈만 깜빡거리다가 이내 융찬에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융찬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그래! 너도 고생 많았다!!”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후회해서 무엇하랴? 상대보다 단호하지 못했고, 상대가 운이든 실력이든 기세가 더 좋았다.
그뿐이다. 시원스레 웃으며 융찬이 악수를 받아주니 남해 또한 미소로 화답했다.
“고생 많았어. 티라노 나올 때는 진짜 긴장했었어.”
“그래! 응! 좋은 듀얼이었다고! 네 간드도 진짜 멋있었어! 나 꺾고 올라간 거니까 광탈하지 말고 꼭 우승해라!”
“물론이지!”
무대를 내려오는 남해의 D-패드에 문자알림이 떠올랐다. 남해는 패드를 터치해 막 도착한 문자를 확인했다. 지민이었다.
-경기 진짜 최고였어 ㅇㅇㅇㅇ
-마지막에
-간드는 진짜
-ㅇㅇㅇㅇ
객석의 낙랑도 말없이 박수치며 남해의 승리를 축하하고 있었다.
“응, 너니까 이길 줄 알았어.”
…
남해와 융찬의 듀얼은 참 깔끔하게 마무리됐다. 용연은 방송용 장비의 그림자 뒤에서 무대를 내려가는 둘을 보며 수염을 매만졌다.
용연에겐 아직도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듀얼 에너지, 그리고 돈. 둘 다 이해할 만한 목표다. 미아는 틀림없이 이 둘을 원할 것이다.
그렇지만 둘 중 어느 것이 목적이라도 뭔가 석연찮다. 이 대회는 사람들의 시선도 많이 모이고 언제 탈락할지 모를 정도로 강자도 많다. 꽤 긴 대회 진행 기간도 빼놓을 수 없다. 차라리 좀 더 작은 대회 여럿을 도는 쪽이 훨씬 위험부담이 적다. 게다가 가이저를 살려두고 있을 이유도 짐작이 가지 않는다.
지금 미아를 뒤에서 조종하는 자는 ‘아빠’를 자청하는 그 괴물. 그렇다면 미아가 아니라 ‘그놈의 목적’은 무엇일까. 머릿속에 단서들은 모인 것 같은데 이것들이 잘 연결되지 않는다. 꼭 잔뜩 어질러진 평도拼图 조각들을 어떻게 채울지 고민하는 것만 같다.
용연을 가린 그늘이 걷혔다. 용연은 슬쩍 뒤로 물러나며 방향을 돌린 장비가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무대 위로 다음 선수가 막 올라오고 있었다.
무거불측無據不測한 생각은 잠시 멈추고 지금은 이곳에서 펼쳐질 승부를 구경하자.
-“자! 이제 오늘 두 번째 경기 시작하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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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가입니다. 글이 많이 늦어졌습니다.
일단… 3월달에 너무 할 일이 많았네요. 챙길 일도 많았고 병원도 다녀왔고 하스스톤 새 확장팩도 나왔고 하여튼 정말 바빴습니다.
여기에 드디어 대회편도 진입했겠다 삽화까지 그리겠다는 욕심이 더해져 더 늦어졌군요.
하지만 삽화는… 취소다…
원래는 계획에 있었는데, 너무 늦게 투고된데다가 제가 금토일월에 작업이 불가능할 예정이라 오늘 못 완성하면 또또또 미뤄진다는 생각에 그냥 컷해버렸습니다 부디 용서를
거기다가… 글을 두 번 날려먹었습니다.
진짭니다. 파일이 박살나서 용량은 그대로인데 아무 내용도 출력되지 않는 상태가 됐습니다. 결국 카톡이라던가 메모장이라던가 파편으로 남은 글들 긁어모아서 누더기 골렘으로 대충 살리고 다시 써왔습니다.
그러고서 기껏 완성했더니 또 뭔 문제인지 또 파일이 저장되있질 않아서 또 썼어요. 두 번째에는 진짜 정신이 멍해지더라구요.
전에도 말했죠? 1시즌 내용 일부는 2시즌 미리 가져와서 채웠다고. 그러면서 안 그래도 부실한 2시즌 서사가 커다랗게 구멍이 나버렸습니다. 1시즌 쓰고 2시즌 일상편 쓰면서도 이 서사를 계속 고치고 고치고 또 고치면서 엉망인 모양으로 어떻게든 잇고 있었어요.
1시즌에 비해 2시즌의 일상편이 기형적으로 길던 구조는 설정풀이와 빌드업, 쓰고 싶던 이야기들이 목적이었지만, 동시에 너무 비어버린 서사를 메꿀 시간이 필요했던 흔적입니다.
미아의 덱도 진짜 농담 아니라 열 번은 더 갈아치웠습니다. 나미아라는 이름도 초안 이후 캐릭터성을 올리면서 덱을 명세계로 정한 다음 라미아-납미아拉弥亚-나미아 과정을 거쳐 지은 이름이었어요. 2시즌 최종보스라는 설정은 최초부터 그대로 가고 있지만 캐릭터 서사를 계속 바꾸다보니 덱도 따라서 같이 계속 바뀌었구요.
명세계부터 시작해서 독이 든 꽃 모티브인 트릭스터, 무해한 소녀인 척하는 식인괴물 충혹마, 죽은 자의 이야기 메멘토 등등 쓸 덱도 후보로만 일곱 개는 띄웠다가 겨우겨우 지박키메라로 결정.
그럼에도 어떻게든 뿌린 떡밥과 서사, 지나간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는 뼈대를 완성했습니다. 나 자신 정말 칭찬해 아주칭찬해
근데 이제 시작임다. 1시즌 대회편은 남해랑 이사만 썼다면 2시즌 대회편에서는 남해-금선-미아-성균 넷의 듀얼을 다 쓸 플랜입니다. 사이드나 듀얼 없을 에피소드 생각하면 이번에도 빡세겠군요. 밴픽까지 있어서 쓸 덱도 많네요 으히히
밴픽 시스템은 끊임없이 고쳐나간 2시즌 대회 서사 중에서도 몇 없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쭉 생각해둔 내용입니다. 남해의 다른 덱들도 조명하고 싶었고, 정해진 덱으로 붙을 단판전에 변수도 만들어 보고 싶었고요.
코나미에게 많은 건 안 바라고 결승전 로그 쓰기 전에 룡성 지원이나 상검 12싱이나 나오면 좋겠습니다만 그럴 일은 역시 없을 거 같고…
아무튼, 늦게라도 올라온 글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이번 편 분량은 한글 25p 정도인데 저번이 8p였으니 3배는 늘었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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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펠과 이사는... 등장 종료다... 2시즌 동안은 좀 더 나온다고 해도 핵심적이고 긴 분량은 어려울겁니다. 미아 덱도 구상은 끝나있으요. 미아 차례 로그에서 덱 목록도 공개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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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아... 즉 아이도루 컨셉인 트릭스터를 쓰게 해도 괜찮은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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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드립은 차처하고 일단 천사님 관련으로도 차근차근 풀어나갈 것이 더 있겠지요 마침 계시는 루시펠님과 뭔 떡밥이 있을지 기대하는 재미가 있겠습니다 | 24.04.11 21:5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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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펠과 이사는... 등장 종료다... 2시즌 동안은 좀 더 나온다고 해도 핵심적이고 긴 분량은 어려울겁니다. 미아 덱도 구상은 끝나있으요. 미아 차례 로그에서 덱 목록도 공개될 겁니다 | 24.04.12 12: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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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위한 이야기입니다. 이제 16강 시작했으니 결승에 만난다 쳐도 8강 4강부터 뚫어야죠 | 24.04.12 1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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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튜브 틱톡 보며 히히덕대는 감정과 인간성을 지나치게 주입받아버린 모습입니다 | 24.04.12 12:2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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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강 파트도 아직 덜 끝났는걸요 앞으로도 기대에 부응하도록 노력해보겠습니다 | 24.04.12 12:3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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웜멤메 어쩐지 로그가 잘 흘러가더니만 수정룡성시절에나 저지르던 찐빠를 지적 감사합니다 26화 투고 이후 고쳐놓도록 하겠습니다 | 24.05.16 00:13 | |